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세상보기

서양인과 동양인

by 격암(강국진) 2014. 9. 15.

서양인과 동양인

 

세상에는 여러종류의 사람이 있고 그것을 서양인과 동양인으로 구분하는 것은 종종 어리석은 일이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미국인도 이탈리아 사람도 여러가지 사람들이 있다. 또한 동양인이라는 말은 잘못된 점이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동양인이란 한중일의 사람들을 말하는데 물론 여기에도 호칭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을 전제하고 말할 때 우리가 통상 서양인으로 말하는 미국인들과 서유럽인들의 태도와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의 태도 사이에는 한가지 주목할만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서양인들의 경우 한국인으로서 나는 그들이 자신감에 차있고 매우 행복해 보이려고 애쓴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들이 거짓을 말하려고 한다거나 반드시 그것이 틀려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하와유라고 물으면 바로 습관적으로 파인 땡큐라고 대답이 나오는 류의 태도의 차이이며, 입만 열면 사랑한다고 말하고 부부가 서로를 허니라고 부르는 식의 차이다.

 

거기에는 말하자면 수없이 많이 매뉴얼화된 삶의 방식이 있다. 그것은 마치 음식의 레시피처럼 행복의 레시피라고 할 만한 것인데 이리저리 하면 행복하다라는 것으로 파티를 열거나 서로와 대화를 나누고 그것을 즐기면서도 동시에 어떤 역할극속에 빠져드는 것과 같은 면도 있다.

 

말하자면 마치 예쁜 옷을 입고 댄스 파티에 가서 춤을 추고 음악을 듣고 웃는 얼굴을 하면 즉 어떤 행복하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형식을 따라하면 행복해 진다라는 식이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효과가 있다. 사실 억지로 웃는 얼굴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우는 얼굴을 하면 기분이 나빠진다라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즉 기분에 따라서 우리의 표정이 바뀌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의 표정에 따라서 기분이 거꾸로 바뀌는 면도 있는것이다. 껍데기가 알맹이를 바꾸기도 한다. 그러나 물론 역할극으로 행복에 도달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우리가 그저 억지 웃음을 짓는 것만으로 행복해 질 수 있을 리는 없다.

 

나는 내가 뉴욕에서 같은 방을 나눠쓰던 이탈리아 교수를 기억한다. 그는 무엇이나 참 능숙했다. 공부는 물론이거니와 요리에서 연애에 이르기까지 그는 거침이 없었다. 말하자면 일년중의 어떤 명절 이야기가 나오면 그 유래를 줄줄이 외고 그건 원래 이렇게 즐겨야 한다라는 식으로 모든 것에 대해 척척이었던 것이다. 나는 통상의 한국사람과도 비교해 그렇지만 그 이탈리아 친구앞에 서면 참으로 그저 어리숙한 인간일 뿐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끝없이 모르겠다를 말하는 식이고 그는 끝없이 알겠다라는 말하는 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는 결코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아내 말고 다른 여자에게 정신이 팔려있고 아내와의 관계때문에 가족이 깨어질 것을 괴로워하는 중이었다. 내게 있어 그는 모든 일에 대한 성공의 공식은 알고 있는데 문제는 그 공식이 맞아 들어가지 않아서, 자신의 폭주하는 감성을 어쩔 수가 없어서 고민중이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만 화려하고 행복할뿐 안으로는 그다지 평화롭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상대적으로 많은 일상에 대해 그저 무덤덤하게 살뿐인 나에게 오히려 궁금증을 느끼는 것 같았다. 지금의 나라면 그에게 그의 문제와 한국의 문화에 대해 좀더 이론적으로 한두마디 해줄 수 있을 것인데 그 당시의 나로서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던 것이 아쉽다.

 

서양인들에 비하면 한중일의 사람들은 좀더 비어있는 생활을 한다는 느낌이다. 우리도 물론 온갖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 형식이 시대에 뒤진 것이 되어 괴로워 하는 일이 많지만 여백의 아름다움 같은 것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화면을 촘촘히 채운 유화나 수채화와 수묵화의 차이다. 단순한 형식을 가지고 여백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숨쉴 공간을 느끼게 되는데 서양인들은 그걸 온통 채워버리고 만다는 느낌인 것이다.

 

수묵화에도 물론 형식이 있다. 그러나 그 형식은 비어있음을 가진 형식이라 그 형식의 극한을 추구한다고 해도 모든 것이 채워져 있지는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동양인이라고 해서 세상이 흑백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거나 대나무가 검은 색이라고만 생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제한된 형식의 아름다움에 우리는 매료된다. 즉 우리는 적극적으로 우리의 무지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는 형식을 유지하는데 서양인들은 그런 것이 없는 느낌인 것이다.

 

물론 개인간의 차이가 더 크지만 이같은 특징은 유럽인이 더 심하다고 느끼는 데 그것은 아마도 진리에 대한 문화적 태도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유럽인들도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해서 아무리 읽어도 뜻도 알기 어려운 복잡한 말들을 만들어 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유럽인들은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정답, 진리를 찾을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전통에 익숙하다. 그리고 그들은 물론 그들의 전통을 지키면서 그것을 소중히 하고 살아간다. 그들은 너무나 채워져 있고 따라서 뒤로 물러설 틈도 없다. 유럽땅에서의 세계 대전은 이런 상황에서 벌어졌다.

 

그에 비하면 미국인들은 넓은 땅을 개척하면서 생긴 개척자정신때문인지 아니면 그땅에 살던 인디언의 문화의 영향을 받은 때문인지 비교적 상대주의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그들을 유럽 이상의 문화적 패권국가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실용주의적 태도는 본래 한중일에서 더 강하다고 나는 믿는다. 미국의 경우는 비교적 근래에야 그런 철학을 발전시킨 것이지만 한중일의 경우 본래가 그런 태도를 취한다. 실용주의 철학의 핵심은 무지의 자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이 세상에는 언제나 우리가 보지 못했고 알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각만으로 어떤 문제의 정답이 찾아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런 방법을 써보고 그것이 실제로 어떤 효과를 내는지 살피되 그것이 성공적이라도 그것을 잠정적인 답으로만 생각해야 한다. 왜냐면 내일도 그것이 옳을지는 모르기 떄문이다.

 

유불도의 철학은 일찌기 오래전부터 이런 태도를 유지했다. 지금 코앞의 문제도 보지 않고 끝없이 추상화되어 가는 질문만 던지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내 생활도 보지 못하면서 귀신이나 내세를 따지는 것은 옳지가 않다. 노자와 장자는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도의 무한함을 강조함으로써 우리의 무지를 강조하고 있다.

 

물론 유럽인은 이런 나의 지적에 대해 반박할수 있다. 애초에 이런 것은 주관적 느낌이므로 객관적 증명의 문제는 아니다. 그들은 특히 만약 이런 지적들이 옳다면 유럽인들은 분열해야 하고 한중일은 화합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할텐데 현실은 반대가 아니냐고 말할 수 있으며, 남한과 북한의 분열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수 있다. 그렇게 한다면 나는 좀 입장이 옹색해 지지 않을까 한다.

 

나의 답은 서구인의 화합은 유형의 형식이 만들어 내는 물질에 기반한 것이란 것이다. 즉 부유함이 줄어들면 유지될 수가 없다. 결국 전세계에 적용되기가 불가능하다. 지난 수백년간의 역사는 큰 성공이자 큰 실패다. 서구가 일으킨 문명은 지구를 파괴하는 문명이다. 그것은 단숨에 엄청난 소비를 불러 일으키는 문명이었는데 그 문제의 기원도 결국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알 수 있다라는 오만에 있다. 데카르트의 출발은 출발점부터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강을 파괴하는데 거침이 없는 것은 강이 뭔지 내가 알고 있다라는 오만에서 출발한다. 뭔지 알고 있으니까 파괴되어도 결국 수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도 이런 사람이 많지만 이런 태도는 기본적으로 서구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서구문명 혹은 자본주의는 좋을때는 좋았으나 이제 전세계를 뒤덮게 되자 인구증가와 자원문제, 환경파괴문제등으로 한계를 보이고 있다. 좀 잘 산다는 나라는 전부 지나친 소비로 빚더미에 올라있다. 

 

그러므로 비움과 무지에 대한 자각을 가진 문화가 설득력을 더 많이 가지게 되고 있다. 나는 한국인이다. 그래서 그럴 것이다. 인정한다. 나는 그래서 한국을 믿고 한국을 포함하는 한중일의 문화적 저력을 믿는다. 미국 다음에 세계인에게 설득력을 보일 수 있는 문화적 중심은 한중일이 될거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세계에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답을 주는 지역이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절대는 아니다. 그것은 과거를 발전적으로 계승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서양을 알면서도 우리 문화에 대한 고민도 멈추지 않을 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주제별 글모음 > 세상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한거 너무 티내지 마라.  (0) 2014.10.29
현대의료와 DIY  (0) 2014.09.19
명절의 의미  (0) 2014.09.08
한국인의 실종  (0) 2014.09.05
한심한 지방개발  (0) 2014.09.0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