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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집에 대한 생각

존경받지 못하는 부모를 위해서

by 격암(강국진) 2014. 11. 21.

14.11.12

자식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것은 모든 부모가 가지는 기본적인 소망이다. 욕심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 아빠도 힘쎄라고 외치는 아이앞에서 무리하다가 사고 치는 아빠나 자식에게 무시당한다는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는 엄마의 이야기는 그리 드물지 않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존경받고 싶다는 부모의 소망은 대개는 달성할 수 있는 상식적인 일이라기 보다는 어쩌다 복권에 맞는 것처럼 운이 좋으면 생기는 일에 가깝다. 특히 개인주의가 세상의 기본적 상식이 된 오늘날은 더욱 그렇다.

 

그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부모와 자식의 거리가 너무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까이 있는 것은 존경하면서 살지 못한다. 그렇게 사는 것은 무엇보다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다. 만약 당신이 존경하는 사람 혹은 존중하는 사람과 같은 방에 함께 있다면 짧은 시간동안은 그것이 기쁘고 영광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그것은 고통스럽거나 불편한 시간이 되기 쉽다. 적어도 무뚝뚝한 장인과 한 방에 오래 있어본 사람은 이 말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나같은 보통 서민은 그저 방 두세개가 있는 집이나 아파트에 사는 것이 보통이다. 나의 경우로 말할 것같으면 더 젊어서는 방이 하나밖에 없는 스튜디오식 원룸 아파트에서 아이둘과 아내와 함께 살기도 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가능한 것이었지만 그런 주거에 무슨 개인공간이 있고 부모자식간에 거리감이 있겠는가.

 

그러고보면 나에게는 조선이 동방예의지국이 된 것에 대한 이론이 하나 있다. 내가 알기로 전세계에서 온돌이 보편적으로 쓰인 나라는 우리나라 하나 뿐이다. 온돌은 여러개의 작은 방들이 마루등의 공간을 가지고 떨어져서 서로 이어져 있는 조선의 전통 가옥형태를 가능하게 했다. 다시 말해 집안 식구들이 다 각방쓰면서 사는 것이 조금만 노력하면 가능한 일이었으며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같은 방안에 있는 침실에서 자야 하거나 다 큰 아들과 엄마가 같은 방에서 자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서로 분별을 할 수 있으니까 예의가 생긴다. 다시 말해 공간적 거리가 있으니까 예의가 생긴다는 것이다. 온돌이 보편적으로 쓰이지 못하고 집안에서 중앙난방을 하는 지역은 예절이 보통 서민에까지 퍼지는 것이 어렵다. 그러니까 조선이 온돌을 가진 나라라는 것은 조선에서 예절이 발달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지금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거리에서는 남녀의 노출을 따지면서도 해변가에서는 거의 벌거벗고 같이 놀 수 있는 이유는 그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럴 수 밖에 없으니 그런 공간에서는 예의를 어긴다는 개념이 깨진다.

 

그러니까 다시 작은 아파트 공간으로 들어가 살게 된 한국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예의가 없어진다. 부모 자식간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 진다. 팬티바람으로 돌아다니는 모습이나 화장실에서 부시시한 모습으로 나오는 부모를 늘상 보는 아이들에게 부모에 대한 존경은 아무래도 희석된다.

 

게다가 나도 그런게 좋지만 핵가족시대에는 부모가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라고 권해지고 그래야만 한다. 핵가족이니까. 나는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는 편이다. 아이들과 게임을 하거나 외식을 하거나 잡담을 하거나 같이 뭔가를 보는 시간이 싫지 않다. 밖으로 떠돌기 보다는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쪽이 나는 좋다.

 

하지만 그런게 설사 싫더라도 부모는 아이와 시간을 많이 써줘야 하는 시대다. 대가족제도가 붕괴하고 동네의 아이들이 모여서 노는 시대가 아닌 요즘에 부모가 아이들과 시간을 써주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오락기하고만 놀게 될 것이다.

 

예전에 아이들이 동네 골목에서 자기들끼리만 놀던 시절에는 부모는 아이와 거리를 가질 수 있었다. 요즘은 바쁜 부모들이 아이들을 이런 저런 기계 앞이 아니면 강의실의 의자로만 돌린다. 그게 싫으면 아이들과 직접 놀아줘야 한다. 부모와 아이가 시간을 함께 쓴다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이 시대에는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것이며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버릇이 없어지고 어른들에게 존경심이 줄어든다.

 

그런데 존경이란 반드시 어른들에게만 좋은 것은 아니다. 존경받고 싶다는 것은 부모의 유치한 욕심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나는 아이들과 그저 평등한 친구로만 남아도 좋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아이가 가장 많은 것을 배우고 가장 많은 것을 배워야 하는 상대는 부모다. 그런데 선생에게 뭔가를 배운다고 할때 우리는 항상 일정정도의 권위와 존경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어른과 아이간에 지나치게 거리가 없는 것은 뭔가를 배워야 할 아이에게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저 자신도 부모와 동등한 인간이라는 생각에만 빠지게 하는 것이다. 

 

부모가 아이와 멀리하면 아이가 둔해질 판이고 지나치게 가까이 하면 부모에 대한 존경이 약해지기 쉽다. 확실히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작은 핵가족 보다는 큰 공동체 사회가 필요하다. 바로 요즘 붕괴되고 사라진 공동체가 말이다. 집성촌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은 자신의 기억을 뒤져보라. 옛날 아이키우기가 얼마나 지금과 달랐는지. 

 

아이가 부모를 존경하기 어려운 이유는 아이가 세상 넓은 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적응의 문제다. 아무리 대단한 것도 그걸 자꾸 보면 별거 아닌 것으로 보인다. 부모가 설사 어떤 존경할 만한 점을 가졌다고 해도 그걸 계속 보고 겪는 아이로서는 그게 그리 대단해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재수가 좋은 경우 아이가 성장하여 부모를 이해하게 되면 변화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이 영영 생기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아뭏튼 부모가 어떤 난장판을 뚫고 살아왔는지 잘 알정도로 부모의 삶에 큰 관심을 가지는 기특한 아이 자체가 별로 없다. 정말 그럴까 싶다면 스스로 생각해 보라. 당신은 당신 부모의삶에 대해 얼마나 자세히 아는 가. 대개는 아주 피상적인 것밖에 모를 것이다. 기특한 아이는 드물다. 

 

아이가 부모를 존경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에는 물론 개인주의가 있다. 오늘날은 가족이나 가문이라는 공동체안에서의 각자의 역할을 가진 존재로서 가족의 구성원을 보는 관점이 점점 낯선 것이 되어가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마치 아이는 부모가 키우는 애완동물처럼 변했다.

 

이런 표현이 귀에 거슬릴지 모르지만 아이를 친구처럼 키우고 18세 성인이 되면 자기 삶은 자기가 꾸려가도록 한다는 식의 서구식 관념은 현실속에서 이렇게 되기 쉽다. 아이가 태어나면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줄 의무가 있고 그 다음에는 자기 맘대로 살 권리가 있다는 아이와 부모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늘 나오는 것이다. 전체 사회를 독립된 개인의 합으로 보는 서구에서 작은 가족공동체의 의미는 본질적으로 허약하다. 그래서 이런 저런 핑게를 대보지만 결국 대개 부모는 아이를 태어나게 만들었으므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칙 정도만 남을 뿐이다. 아이가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같은 개념은 가족공동체가 약하므로 약하다. 그러다보면 부모는 자기 노년을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가 성인이 되면 이젠 네 힘으로 살라고 말한다. 결국 이런 관계는 솔직히 말하면 애완동물이라는 극단적으로 표현으로 말한 관계와 아주 크게 다르지는 않다. 

 

내가 보기에 이런 서구식 관점이 결정적으로 붕괴하지 않는것은 반대로 사회공동체, 국가공동체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 사회안에서 태어난 아이에 대해서 사회가 더 큰 책임감을 느끼는 사회니까 이런 것이 가능하다. 집밖으로 나가면 약육강식의 밀림이라면 이런 개념으로 가족을 구성한다는 것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전통적 가족공동체는 약화되고 사회복지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사회공동체는 충분히 강하지 않다. 난장판이 되기 쉬운 것이다. 

 

가족 공동체 개념이 사라지면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것의 의미가 사적인 것이 된다. 즉 가문의 재산을 내가 관리해 왔지만 이제 부터는 네가 관리해라는 식이 아니다. 내것을 네게 준다는 것이 된다. 소유가 사적으로 변하면 부모가 주는 것을 아이는 고마워 할까? 그렇지도 않다.  자기 아들을 사장아들로 태어나게 만든 사장은 아들을 사장처럼 살게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되기 쉽다. 이러니 부모가 제아무리 많은 것을 해줘도 존경심따위 생기기 어렵다.

 

한국의 낮은 출산률의 한가지 이유는 서구식의 개인주의와 전통의 가족중심주의가 잡탕이 되고 만 것이다. 문화가 뒤죽박죽이 되면서 의무와 권리 개념이 엉망이 되었다. 그러다가 보니 부모와 자식간에 신뢰가 안생긴다. 우기면 뭐든지 옳다고 주장할 수 있으니까. 부모도 자식도 공포에 떨고 부모도 자식도 무책임해질 수 있는 시대다.

 

종합해 보면 이렇다. 오늘날 부모가 존경받기 정말 힘들다. 그러니 부모들은 미리 마음의 각오를 좀 해둬야 한다. 오늘날은 자식에게 존중받지 못해 씁쓸한 마음을 가지게 되기가 너무 쉽다. 이것은 부모에게 뿐만 아니라 자식에게도 좋지 않고 사회전체로도 좋지 않다.

 

이것을 고치는 한가지 방법은 주거문화를 바꾸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공동의 공간을 공유하는 공동주택에서 여러 가구가 보다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경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아이들과 아이들이 서로 놀고 어른과 아이가 각자의 공간을 가지면 문제는 조금이라도 완화될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가능하다면 집의 구조가 부부의 공간과 아이의 공간으로 좀 구분되는 쪽이 좋다고 생각한다. 집의 중간에 문이 있는 경우나 이층집구조를 가진 집은 이런 것이 가능할 것이다.

 

공동체의 중요성이 망각되는 것이 큰 이유니까 그 방면에 힘을 쓰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지나치게 공동체를 강조하는 것은 이미 많이 지적되듯이 일종의 억압과 착취의 구조다. 그러나 공동체를 아예 무시하는 것은 국가적 사회적 가족적 공동체를 죽어가게 만든다. 극악의 출산률이 보여주고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궁극의 방법이란 결국 그 부모가 뭘로 보건 존경할만한 인간이 되는 것 말고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사람이 부모가 되는 것은 사는데 있어서 좋은 자극이 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자기가 키우는 고양이에게 존경받으려고 긴장하게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이는 다르다. 아이는 나와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이뤄갈 존재이며 어른에게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만드는 존재다. 그러니까 부모가 되는 것은 가치가 있는 일이다.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랬다. 미혼의 남녀는 미혼의 남녀의 눈으로만 결혼생활을 봐서는 안된다. 결국 결론적으로 말하면 별로 위안은 안되겠지만 세상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조금 더 힘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식을 위해서 그리고 본인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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