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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두남자 가게를 열다

두 남자 가게를 열다 (1)

by 격암(강국진) 2015. 1. 11.

두 남자 가게를 열다.

존재의 이유

나는 계란후라이가 좋다. 노란 빛이 선명한 계란이 프라이팬 위에 툭 떨어지고 그러자마자 지글지글 소리를 내면서 익어가는 것이다. 나는 봄날의 창가가 좋다. 창밖으로 구불구불하게 숲으로 난 오솔길이 보이고 그 위로 아지랑이가 나른하게 솟아나는 것이다. 저멀리로는 길을 따라 걸어오는 소를 모는 농부가 있다. 아니 비록 그것이 경운기나 최신등산복을 입은 여행자라도 괜찮다. 나는 빗소리가 좋다. 비오는 날에 창가에 놓인 푹신한 소파에 앉으면 유리창에는 물방울이 주룩주룩 흐를 것이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나는 자리를 편안히하고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것이다.

나는 너에 대해서는 뭐든지 다 알고 있다. 이 말은 슬픈 말이다. 적어도 아내에게서는 가족에게서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이다. 왜냐면 사실 어떤 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 불확실성이기 때문이다. 불확실하기 때문에 어떤 것은 존재한다. 적어도 불확실하기 때문에 그것은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어떤 일말의 가치를 가진다. 불확실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가능성도 존재하고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나는 너에 대해서는 뭐든지 다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너는 지루하다던가 너는 쉽게 예측가능하다는 말이고 너는 신비라고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남용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랑은 오직 우리가 여전히 그 대상에 대해 무지한 것이 있을 때만 존재 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은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게 뭐가 있어? 그런게 있다면 말해봐.’ 같은 말을 너무 쉽게 한다. 어떤 때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친근감의 표현이며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애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너에게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너는 나에게 고마워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같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기 까지 한다. 그래서 그들은 누군가를 만나면 서둘러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잔뜩 모으기 시작하고 자신과 그 사람과의 물리적 심리적인 거리를 무한히 작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상대방이 개인적인 부분을 가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하며 상대방을 숨쉴 수 없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상대방에 대해 자신이 알만큼 알았다는 주관적인 한계에 이르르면 그들은 비로소 안심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있게 말한다. 나는 너에 대해서는 뭐든지 다 알고 있단말이야. 마치 무슨 좋은 일을 해낸 것같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일을 실제로 이뤄냈다면 그들이 한 것은 실은 하나의 인격살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슬픈 일이며 관계를 사치스럽게 소비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되도록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관계의 종말이나 이별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그들은 그것을 모른다. 강을 사랑한다면 그 강의 신비를 죽이지 말아야 한다. 

사실 스스로 뭔가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오만이다. 길가에 구르는 돌의 의미도 우리는 모른다. 누군가가 내일 그 돌을 밟고 넘어져서 세계대전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 돌멩이가 노벨상을 수상할 과학적 이론을 만들 수 있도록 어떤 과학자에게 영감을 줄지도 모른다. 그 돌멩이는 실은 아주 소중한 조각상의 일부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른다. 어찌 알겠는가. 우리는 근거없는 자만에 빠져서는 안된다.

더구나 설사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타인에 대해 우리가 가진 최소한의 무지에 예의를 갖춰야 한다. 그 무지로 인한 신비감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관계에 대한 예의다. 누구나 개인적 비밀의 상자를 가지고 있을 권리가 있다. 그 상자를 굳이 열어서 누군가에 대해서 완전히 알았다라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특히 그 상자가 비어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그런 일을 미안해하고 두려워 해야 하며 해야한다면 꼭 필요한 일이므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누군가의 미래는 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뻔한 것처럼 만들어서도 안된다. 실제로 모르는 일이니까. 또한 예의가 아니니까.

진정으로 누군가에 대해 한 점의 불확실성도 가지지 못하게 된다면, 누군가가 이런 저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저렇게 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이 든다면 그런 생각의 대상이 된 사람은 그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인식의 세계에서 살해당한 것이다. 그나 그녀는 적어도 더이상 선택하고 결정하는 주체로, 살아있는 존재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의자나 개똥처럼 수동적인 사물, 생명없는 사물로 변한 것이다. 누군가를 의자나 개똥으로 변하게 만들고 그렇게 취급하면서 나는 너에게 좋은 일을 해주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터무니 없는 것도 있을까? 심지어 이것은 사람에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산이나 강을 보면서 그것에 대해 우리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그 산과 강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실은 의자나 개똥조차도 일말의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보이고 느껴지는 것이다. 자식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스스로 자식에 대해서라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는 엄마는 실은 자식을 학대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조차도 불확실성과 무지의 결과다. 진정한 과학자는 세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인간이 가진 무한한 무지의 넓이와 깊이에 대해 놀라워 하는 사람이다.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과학적 발견을 위해 행해야 하는 그 어렵고 길고 지루한 일들은 결코 참아지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가 매우 단순하여 누군가에게 나는 너에 대해서라면 뭐든지 알고 있다라는 취급을 받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이기전에 안전의 문제다. 만약 어떤 제삼자가 당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당신의 행동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면 당신은 위험하다. 사실상 그런 경우 당신은 당신을 그렇게나 잘 아는 누군가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당신을 알고 있다면 세상이 당신을 지배할 것이다. 당신을 잘 아는 그 사람은 악의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또는 그저 자기 일이 바빠서 자신이 그저 편한대로 던진 말이나 행동이 당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오는지에 대해 부주의 할 수도 있다. 사람은 타인의 상처보다 자신의 문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상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 상대에 대해 가장 무관심해진다. 거기에는 더이상 아무 비밀도 흥미거리도 없으니까.

누군가에게 완전히 파악당하는게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면 신참자들을 보면 된다. 당신은 중학교나 고등학교나 대학교나 어떤 회사에서 상급생이나 선임자의 위치에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애정을 가지고 한편으로는 그들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고 그들을 쳐다본 적이 있을 것이다. 새로운 곳에 던져진 신입생들은 새로운 곳의 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아주 작은 정보들에 의존해서 행동하게 된다. 서있으라면 서있고 가라면 간다. 자기 판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측가능하게 움직이며 적어도 조금은 얼간이처럼 보이게 된다. 그런 기간이 아주 짧을 수는 있지만 다들 새로운 환경에서는 한동안 바보가 된다. 당신은 스스로가 얼간이같이 행동했던 시절이나 누군가가 그렇게 했던 것에 대해 즐거운 기억을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얼간이 시절이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영원히 얼간이로 남아서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웃고 즐길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공포스런 일이다.

이 세상이 당신에게 나는 너에 대해서 뭐든지 알고 있다, 너는 참 예측 가능하구나라고 말하고 있다면 당신은 얼간이로 살아야 한다. 당신은 노예가 되어 코에 쇠고리가 끼워진 소처럼 살아야 한다. 당신이 살아가는 방식이란 물에 처음 들어간 사람이 물에서 허우적 거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이 어떻게 그저 자존심의 문제이며 웃고 즐길 문제 일 수가 있겠는가. 사는게 원래 그렇지 라는 말이 습관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생존과 안전과 인간존엄의 문제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살해당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싱에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세상과 정보투쟁에 나선다. 더 많은 지식을 얻고 더 복잡해 지려고 한다. 단순하면 간파당하고 만다. 도시에 처음 온 순박한 촌뜨기처럼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힘든 노동과 공부의 시간을 보낸다. 우리는 종종 허풍과 겉치레에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때로는 그렇게 만들어 낸 복잡성이 우리의 수명을 짧게 만든다. 불필요한 복잡성이 우리의 삶을 꼬이게 하고 우리를 쓰러지게 한다. 여러가지 인간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성에게 신비하고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이려는 노력은 그 한 예에 불과하다. 불확실성을 둘러싼 싸움은 그것을 의식하던 의식하지 못하던 언제나 치열하다. 우리는 비록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라도 내가 당신에 대해 모르는게 없다라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다. 아니 사랑하니까 더 듣고 싶지 않다.  

“내가 당신에 대해서 모르는게 어디있어?” 그녀는 정확히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정확한 표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비슷한 말과 행동은 최근들어서 반복되고 있었다. 그녀는 여러번 내 말을 중단시킴으로써 내가 무슨 말을 할지는 이미 잘 알고 있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나는 종종 그녀가 이미 내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여러번 내가 뭔가를 부탁하기 전에 어떤 것을 선택하고 해버림으로써 내가 뭘 부탁하고 말하려고 하는지는 이미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그런 것들은 모두 크고 작은 상처가 되어 내 안에 남았다. 뻔한 거짓말일지라도 아내가 당신은 아무리 봐도 신비한데가 있어라고 말해주었다면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백번이나 천번째 듣는 이야기라도 마치 그런 이야기는 태어나서 처음듣는다는 듯이 들어주었다면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잠깐이라도 말이다. 중년의 남자가 된 그녀의 남편에게 그녀는 조금 더 상냥하고 자상할 수는 없었을까.

그러나 살다보면 상처란 생기기마련이고 또 아물기 마련이다. 그런 자잘한 일상의 상처는 그리 놀라운 문제도 큰 문제도 아니다. 결정적인 문제는 그녀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 스스로가 내가 사는 모습이 지나치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내 안에서 나를 할퀴고 상처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바로 나 자신에게서 나는 너에 대해서라면 모르는게 없어라는 말을 듣고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이 지루했다. 그런 생각이 나를 죽이고 있었다. 미래가 결정된 인간, 변화가 생길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인간이라는 생각이 나를 우울하게 했다. 나는 나의 상자가 비어있다는 것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모두에게 들킨 것처럼 느꼈다. 결국 나는 나 스스로를 사랑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말이다. 사는게 어제와 오늘이 똑같고 내일도 똑같을 것 같았다. 삶에는 신비와 감동이 없었다.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떨어지듯 뭔가가 내게서 빠르게 빠져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조금씩 활력이 떨어지는 것같더니 결국은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우울해 졌다. 

세상은 나를 확실한 것, 고정된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나는 계속 살아가기위해, 자유롭기 위해 아직 결정되어지지 않은 나의 미래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세상에 없었던 나의 어떤 면을 만들어 간다. 불확실성과의 싸움은 존재의 이유를 위한 싸움이다. 나를 찾고 나를 지키는 싸움이다. 그 싸움이 멈추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살아있다거나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깨진 거울

이 하늘 아래에서 패배감에 젖은 남자를 찾는 일은 상당히 쉬운 일처럼 여겨진다. 아마 그렇지 않은 남자를 찾는 쪽이 훨씬 쉬울 것이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해도 주변에 자기를 보는 사람이 없고 거기에 어느 정도 취기까지 올라와 있다면 그런 패배감은 남자들을 덮쳐온다. 산다는 것이 이런게 아니었는데 말이야라거나 그 시절 그때 조금만 다르게 일이 흘러갔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패배감이 아랫배쪽에서부터 스물스물 차 올라온다. 그것은 어느새 몸 전체를 흔들며 몸안에서 출렁거린다. 여자도 마찬가지라고? 그럼 모든 사람이 그런가 보다.

그러므로 두 남자가 그 날 따라 삶에 대한 깊은 패배감에 빠졌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혼자서 술을 마시기로 했을 때 그들 옆에 앉는 남자도 패배감에 괴로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주 기묘한 우연은 아니었다. 그들은 적어도 남들만큼은 규칙에 따라 살고 조심스럽게 사는 사람이었지만 분위기가 그래서 였는지 어쩌다 눈을 마주보게 되자 서로의 고독에 술을 한잔 한잔 따라주게 되었다. 술은 느리게 사라지고 술자리는 조금씩 길어졌다. 이 술을 비우고 나면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각자 자신의 패배의 벽으로 돌아가야 할 뿐이었다. 그러니 술자리는 끝나지 않는 쪽이 좋았다.

그 둘은 자신의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서로 묻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 둘은 서로가 조금 더 마음에 들었다. 혼자서 우거지 상을 하고 술을 마시는 남자의 이야기에 즐거울 일이 뭐가 있겠는가. 묻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것을 한 남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말이야. 자식이 사고로 죽었는데 부모에게 찾아가서는 지금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 기자를 보면 정말 한방 날려주고 싶어. 그게 무슨 개같은 소리야. 안 물어보면 모른다는 거야? 아무리 밥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거라지만 인간으로서 예의가 아니지 않아?”

어떻게 보든 풀이 죽어 보이는 서로가 서로에게 무슨 나쁜 일이라도 있냐고 묻는다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 그들을 다시 덮쳐올 것이었다. 두 남자는 모두 그것을 느꼈고 쉽사리 서로의 일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리고 둘 모두 오늘 저녁에 그런 사려 깊은 술친구를 만난 것을 기뻐했다. 분명 운이 좋은 날이었다.

그날 저녁 두사람의 정책은 비교적 분명했다. 그것은 안된다고 하는 것에 엿을 날리는 것이었다. 평상시에는 이러면 안된다고 하면 그게 맞아 그게 합리적이지 하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지만 합리적으로 살아왔는데 상식적으로 살아왔는데 인생이 벽에 부딪혔다고 생각되어지는 밤이었으므로 누가 뭘 안된다고 하면 꼭 그렇게 하고 싶었다. 적어도 오늘 하루 저녁쯤은 말이다.

많은 남자들은 이런 날 밤에 그런 변명을 대고 주로 사창가로 간다. 아 나는 매춘에는 절대 반대해 왔지만 오늘밤에는 에라 모르겠다하고 가보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절대 하지 않을 일이니까. 그러나 솔직히 그건 얇팍한 핑게일 뿐이다. 사실은 평상시에도 가보고 싶었는데 용기가 없었고 이제 핑게가 생긴 것뿐이다.

두 남자는 사창가로 가지는 않았다. 그대신 재미있는 가게를 찾아 돌아다녀 보지 않겠냐는 아이디어를 추구하기로 했다. 밤은 아직 많이 남았고 너무 빨리 취해 봐야 그저 오늘의 술자리만 빨리 끝날 뿐이었다. 그들은 모르는 사람과는 모험을 떠나지 않는다는 평상시의 규칙을 뒤로 하고 서로 아직 통성명도 안 한채 그저 막연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재미있는 가게를 찾아 비틀거리면서 돌아다녔다.

밤거리에는 참 불을 밝힌 가게가 많았다. 카페도 많고 술집도 많고 치킨집도 많고 고기집도 많고 국밥집도 국수집도 중국집도 많았다. 한 상가 빌딩 전체가 간판으로 도배되어 있는 것을 보다보니 이 많은 가게들이 어떻게 먹고 사는지는 정말 대단한 미스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남자는 한동안 거리를 헤매다가 가게에서 직접 만든 하우스 맥주를 판다는 간판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 맥주집에 들어가서 대화를 다시 시작했다.

“아니 참 무슨 가게가 이렇게 많나.”

“사람들이 취업이 안되서 혹은 빨리 퇴직하게 되서 가게를 한다고 하더군요. 사람들은 그저 열심히 닭을 튀기거나 다른 사람들의 말을 따라서 이런 저런 인테리어에 투자를 하면 가게가 유지 될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열심히 하기는 다른 사람도 열심히 하는데 말이죠. 물론 사람들이 겁없이 가게를 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적어도 일부분은 정부에서 일자리를 제대로 만들지 않는 탓입니다. 계산도 제대로 안하고 진행하는 쓸데 없는 거대 공사할 돈이 있으면 교육이나 복지분야의 일거리나 만들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세상이 불황이라서 가게가 많다. 말한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입맛이 썼다.

“하지만 가게가 너무 많아요. 그래서 금방 또 다른 가게가 생기고 경쟁때문에 수입이 줄어들고 그렇죠. 요즘 절대 하면 안되는게 가게라고 하더라구요.”

“그래 맞아. 가게 같은 건 절대로 하면 안되는 일이지. 요즘 가게같은걸 해서 정말 버티기 힘들거야. 가게란건 어쩌면 점점 더 시대에 뒤진 유물같은게 되어가는지도 몰라. 거대 쇼핑센터와 체인점만 남게 되면 일개 개인이 장사를 하는 가게라는 건 전설이 되어버릴지도 모르지. 옛날에는 LP판으로 음악을 들을 때도 있었다던데 하는 식으로 말이야. 모든게 어떤 개인이 꾸미고 생각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시스템이 하는 시대가 되었어. 만들기도 그렇고 선전도 그렇지. 그러니 요즘 세상에는 가게같은 건 절대로 하면 안돼.”

남자는 어쩌다보니 필요이상으로 절대로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말은 하지 않는게 좋았다. 절대로라는 말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술취한 두 남자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절대로 하면 안되는게 가게라고? 절대로 하면 안되는 거란 말이지. 우리들 개인들은 아무 힘이 없으니까 말이야. 시대에 졌다고 하고 꼬리를 말아야 한다는 말이지. 어금니에 힘이 들어간다. 왠지 오기가 생겼다.

“이것봐.” 드디어 한 남자가 말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절대로 하면 안되는거. 그거 꼭 해보고 싶지 않아?”

대답은 즉각적으로 나왔다.

“물론이죠. 절대로 하면 안되는거라면 꼭 해보고 싶군요.”

술기운에 흔들리고 있는 두 남자는 호기롭고 의미심장하게 서로를 보며서 하하하고 소리내 웃었다. 안된다고? 엿먹어라!

하지만 곧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술기운은 좀 있었지만 선량한 두 남자의 가슴에는 약간씩의 양심의 가책이 생기고 있었다. 이거 내 기분에 엉뚱한 사람 하나 피해주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설마 진지하게 듣는 것은 아니겠지?

조금 더 나이든 남자가 입을 열었다.

“사실 말이야. 말은 맞는 말이지. 가게 같은 건 요즘 절대로 하면 안돼. 한다고 하더라도 나같은 사람과 해서는 안돼지. 난 가게같은 건 어떻게 하는지 전혀 모르니까. 분명히 망할 거야. 게다가 난 좀 이유가 있어서 하다가 도망갈지도 몰라.”

다른 남자의 대답은 약간 의외였다.

“그럼 망해도 됩니까?”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건 나이든 남자가 예상한 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른 남자의 답은 우리는 해낼 수 있을거라는 긍정론이 아니라면 그건 사실 너무 위험한 짓이라고 한발 뒤로 빼는 것이 되어야 했다. 그 대답이 망해도 좋다는 식이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두 남자는 약간씩 상황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둘다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았다. 어쩌면 가게는 문도 열지 못할지 모른다. 게다가 그걸 하려고 하는 두 남자가 별로 성공을 원하고 있지도 않았다. 두 남자는 모두 그저 그게 뭐든지 이제까지처럼은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성공이든 실패든 뭔가 새로운게 필요한거 아닐까. 새 출발에는 항상 용기와 핑게가 필요했다. 거기에 동지도 있으면 더 좋았다.  

약간 더 젊은 남자는 결심했다.

“가게 이름을 한번 정해보죠.”

“이름을? 뭘 할지도 모르는데?”

“내일 술이깨고 나면 굉장히 높은 확률로 우리는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일같은 것은 안하기로 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단한 건 아니지만 이름을 만들면 너무 쉽게 포기하지는 못할 것같습니다. 적어도 우리 기억속에서라도 가게는 한동안 살아 남을 겁니다. 적어도 한동안 그걸 머릿속에서 만들어 볼 수는 있을 겁니다. ”

그럴 듯한 이야기다. 이름을 가진 것은 생명을 얻는다. 생명을 가진 것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기 마련이다. 만약 이름이 없다면 오늘 일은 그저 그 가게에 대한 추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있다면 다르다. 예를 들어 그 이름이 팬더치킨이라면 오늘 일은 팬더 치킨 프로젝트의 추억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다르다.

“그럼 뭘로 할까? 아이디어가 있나?”

“실은 있습니다. 가게 이야기를 하니까 당장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죠. 왜냐고 하면 별로 설명할 근거는 없지만.”

깨진 거울이 그거였다. 젊은 남자는 그게 로티라는 미국인이 쓴 철학책의 이름에서 따온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깨진 철학이로구만. 맘에 드네.” 깨진 철학, 깨진 논리, 깨진 인생. 남자는 깨진 거울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브로큰 미러. 뭐 뭘해도 가져다 붙이면 그럴듯할 것같았다.

“다른 아이디어는 없으세요?”

“음. 가게 이름치고는 좀 이상하지만 이런 건 어떨까. 두 남자 가게를 열다.”

“두 남자 가게를 열다? 가게 이름으로는 좀 특이하군요. 아무래도 좋습니다. 일단은 그런 아이디어들을 기억하면서 더 이야기 해보도록 하지요.”

그렇게 해서 깨진 거울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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