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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두남자 가게를 열다

두 남자 가게를 열다 (6)

by 격암(강국진) 2015. 1. 11.

실패한 혁명가

 

철주가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꽤 오래 걸렸다. 이윽고 철진은 고개를 들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면 저는 자기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 버릇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주제가 나오던 저는 어떤 이론이나 일반론으로 달아납니다. 나 자신이라고 하는 어떤 특별한 한 경우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해 지는 것이죠.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를 내가 뭘 좋아하는가의 문제로 말하기 보다는 어떤 절대적인 틀안에서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객관적인 문제로 자꾸 만드는 버릇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전에는 그런 생각을 별로 해본적이 없었는데 철진형이랑 이야기하면서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야기가 자꾸 미끄러진다는 느낌이랄까요.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 나 자신을 똑바로 소개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라고 해야할까 생각하다보니까 생각을 정리하는데 좀 시간이 걸리더군요. 지금 생각한 건데 저를 소개하자면 저는 세상을 바꾸고 싶어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같습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하는데 실패한 사람이랄까요. 뭔가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말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은 말이죠. 어렸을 때랑 지금이랑 좀 다릅니다. 어렸을 때는 뭘 좀 많이 알고 싶었습니다. 저는 스스로가 너무 바보같이 느껴졌고 세상에는 참 아는 거 많은 분들이 많으니까 그 분들에게 뭘 배우고 싶었죠. 책도 잔뜩 읽어서 뭐든지 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말하자면 저는 진리가 알고 싶었습니다. 뉴튼의 법칙처럼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가 알고 싶었죠.

 

그런데 제가 뭘 좀 알아가면 갈수록 저는 두가지를 알게 되었는데요. 하나는 어찌보면 당연한 건데, 세상에는 여러가지 지식이 있고 그것들은 아주 알기 어렵다는 것이죠. 시간도 많이 걸리고 안다고 해봐야 모르는 것은 바다처럼 많이 있고요. 두번째는 게다가 바보같아지는 것은 좀 더 많이 아는 것으로 반드시 해결 되는 문제가 아니더라는 겁니다.

 

세상은 책에서 배운 진리하고는 달라도 아주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뭔가 엄청나게 많이 아는 것같은 사람이 바보같이 행동하는 경우는 너무 많았고,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할아버지가 오히려 굉장히 옳은 것을 아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더군요. 저는 말하자면 진리라는게 어딘가 놓여져 있으니 그걸 머릿속에다가 쓸어넣으면 상식이 부족한 제가 좀 덜 바보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랬던 겁니다. 사는 건 이렇게 살아야 하는거구나 하고 알기를 바랬던 거죠. 그런데 배워도 그런게 아니더라구요. 단지 그런 척할 뿐이지.

 

대학생때 어린 신입생들 앞에 놓고 학문이란 이렇다는 둥, 종교란 이런거라는 둥하고 말할 때 최대한 겸손하게 말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가 도대체 뭘 알고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든 적이 있었죠. 나는 겸손하게 말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 순진한 신입생이 이 선배는 뭔가 알고 있구나 하고 생각할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요. 상대방이 오해할 것이 뻔한데 그렇게 말한다는 것은 겸손하게 말했어도 뭔가 아는 척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그리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내가 본 나의 선배나 교수님이나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 분들도 어떤 때는 뭘 아는 척하고 어떤 때는 아주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저는 어쨌든 저분들은 대단하다, 나도 뭘 좀 배워서 저분들처럼 되고 싶다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이런 생각들을 하니까 나는 스스로 아는 게 없다고 느끼는데 그럼 그 분들은 다를까 그런 생각이 들게 되는 거였죠.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원하는 것은 더 많은 지식에서 소통으로 행동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 통하는 사람들에 둘러쌓여서 그들과 더불어 살고 싶다. 그런 식으로 생각이 바뀐 거죠. 혼자는 재미 없으니까.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뭐 이런 겁니다 . 저는 대학을 마치고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독일을 보고 프랑스를 보고 일본을 보고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왔죠. 그리고는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어쩌다 인연이 닿은 선거판에서 일하게 되고 한 때는 국회의원 보좌관도 했습니다. 한때는 이제 이렇게 계속 살면 뭔가를 이룰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살던 어느날 이었습니다. 지역구의 한 노인들 모임에서 한 할머니가 말썽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다른 일을 보러 가야하는데 그 할머니가 자꾸 할 말이 있다면서 시간을 끌다가는 내가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더니 우리 의원님을 욕하기 시작하는 거였습니다.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언제나 보좌관의 첫번째 덕목이었죠. 저는 초조한 마음으로 그 할머니를 조용히 만들려고하다가 급기야는 협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은 그렇게 지나가는가 싶었지만 사라지지 않고 제 마음에 남았습니다. 나중에 할머니에게 사과하러 갈 생각도 있었고 실제로도 사과도 했습니다만 사과를 하는가 마는가 하는 것은 그 일의 본질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제가 변했더군요. 할머니를 협박하는 나쁜 놈으로. 저는 제가 대중을 사랑하고 한국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요. 어느 새 대중을 욕하고 한국을 욕하고 있더라구요. 어리석고 욕심만 많고, 정말 세상에는 희망이 없다, 그들은 망해도 싸고 고통받아도 싸다라고 말하고 있더군요. 이 빌어먹을 나라따위는 망해버려 뭐 이렇게 말이죠.

 

저는 언제나 소통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말하는 편이었는데 어느새 소통의 꿈따위는 없어졌습니다. 대중은 그냥 마치 요리사의 앞에 놓인 요리재료나 건설업자의 앞에 놓인 벽돌처럼 일종의 재료로 생각되어지더군요. 사람은 원래 이러니까 이렇게 저렇게 밀어부쳐서 이런 저런 세상만들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은 사람이 민주사회를 말한다는 것은 자기 모순적이라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인간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꾼다면서 스스로가 인간에 절망해 있다면 어떤 수단을 쓰건 결국 그것은 그래도 내가 독재를 하면 세상이 지금보다는 더 좋을거다라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니까요. 제가 원하는 것은 그런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술과 저주에 익숙해지고 거짓과 술수에 익숙해진 자신이 싫었습니다. 보다 어렸을 때는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하는 것은 가장 큰 죄악이라고 생각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한 때는 꿈이었던 것이 이제는 그저 잘먹고 잘살자고 하는 직업이 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정치도 관뒀습니다. 사무실에도 이젠 더 안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지식을 배우는 것도 관두고 정치도 관두니까 참 허탈하더군요. 철진형을 만날 무렵이 그런 때였죠. 꿈이 모두 좌절된 때였습니다. 이게 아니다 싶어서 하던 일을 그만 뒀는데 앞으로 뭘 해야 할지는 알지 못하던 때.

 

아마 제가 제 자신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살았기 때문일 겁니다. 늘상 무슨 수치가 어떻고 사람들의 심리는 이러고 무슨 정책은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쌓여서 살았으니까요. 대중을 상대하는 조직에서 일하면 가장 먼저 하게 되는 일이 대중을 한덩어리로 보고 단순화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차차 자기가 그러고 있다는 것도 잊게 되죠. 주변사람도 다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그러다보면 숫자 안에 삶의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복잡한 시스템에 압도됩니다. 어떤 숫자가 커지면 행복이 커진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자기도 그 일을 하는 의미를 설명할 수 없는 일로 하루가 가고 한달이 가고 일년이 갑니다. 

 

저는 제가 싫어졌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사는 사람들도 싫어졌죠. 그러고나니 언제나 사회정의를 말하는 그 사람들 사이에서도 저는 왠지 일체감을 느끼질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대중과 매우 다르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에게는 그건 참 큰 착각인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이 만드는 세상이 어떤 것이든 어쩌면 결국 그런 것때문에 지금과 별다를바가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작더라도 제가 의미를 아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든 소통의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혹은 문화적인 오아시스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게 있다면 사람들이 좀 더 쉽게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다툼과 오해는 적어지는 그런 게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사람들이 같은 세상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죠. 똑같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같이 어울려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는 같아 보이는 세상입니다.

 

주변에 온통 나라와 세상을 구한다라는 큰 소리만 하던 사람만 있었는데 갑자기 그저 하나의 가게를 만들자고 하는 철진형을 만나니 참 좋았습니다. 생각해보면 볼수록 한명의 아이를 잘 키우고 하나의 가게를 잘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에게 깨진 거울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된거냐고 물으셨죠? 깨진 거울이라는 것은 말씀드린 대로 철학책의 제목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저에게 있어서 깨진 거울이라는 이미지는 이런 겁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면 그게 그냥 현실로 보이죠. 그런데 그 세상을 자세히 보는 겁니다. 그럴 때 만약 우리가 우리가 보는 세상의 이미지에서 이상한 단층선을 보게 되었다고 하죠.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겁니다. 아 저기 보이는게 그냥 세상이 아니라 거울에 비춰진 세상이구나하고. 그걸 어떻게 아냐면 거울이 깨져 있으니까요. 거울이 깨져있으니까 그 깨진 선 주변에서 이미지가 불연속적으로 변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 저게 현실 그대로가 아니라 거울 같은데에 반사되어 보이는 거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이죠. 깨진 부분을 보게 되니까 저기에 거울이라는 게 있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보는 현실에서 바로 그 이상한 단층선을 느끼는 것, 즉 어떤 위화감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온 세상은 여기에서 저기까지가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천천히 보니까 우리가 보는 세상에 그 이상한 단층선이 있더라라고 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죠. 나는 이게 현실 그 자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이것이 어떤 것에 비춰진 그림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그저 무심하게 당연한것, 원래 그런 것하고 넘어갔는데 자세히 보니까 그게 좀 이상하더라라는 것을 느끼는 것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는 유한한 인간이고 이 세상은 우리에 비하면 무한대의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모든 것을 아는 때는 오지 않겠죠. 그렇기는 커녕 단조로운 일상에 빠져들다보면 우리가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던 어떤 것들에 대해서도 오히려 그 감수성을 잃어버리게 되기 쉽습니다. 사람은 워낙 적응을 잘하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그 위화감을 항상 찾아 헤매야 할 필요가 있는거 아닌가 싶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글을 쓰는 것이 그 위화감을 통해 느낀 단층선을 보는데 도움이 됬습니다. 그냥 느낄 때는 그런가보다 좀 이상하네 하고 넘어가지만 글을 쓰면 한 글자 한 글자 그 상황을 다시 되새김질 하게 되니까요. 아마 글 위라는 공간이 현실 공간과 달라서 그 위화감이 증폭되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이상한 공간의 체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에게도 글쓰기를 권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훌룡한 것이되 한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떤 이상한 공간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이상한 공간에 갔는데 처음에는 이상해 보이지 않았는데 거기서 어떤 단층선을 보게 되더라. 그러면 혹시 지금 내 주변에서 보는 것에도 단층선이 있지 않을까 뭐 이렇게 생각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죠.

 

제가 하고 싶은 가게에 대해 물으셨죠. 저도 처음엔 뭐라고 답할 지 알지 못했습니다만 이제는 조금 더 알게 된 것같습니다. 그건 문화적 오아시스죠. 적어도 위화감을 주는 이상한 공간입니다. 가게 바깥과는 다르기 때문에 그 가게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을 계속하는 동안 사람들이 자기를 발견하는 공간, 세상을 자기가 어떤 문맥속에서 보고 있는가를 느끼게 해주는 공간입니다. 그렇게 이상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가 외국에 가는거나 비슷한거죠. 한국사람이 독일이나 일본같은 외국에 가서 그 나라 사람과 어울려 좀 살다보면 그런 것을 느낍니다. 아 이런게 한국사람이구나 하고 말이죠. 일본인을 보니까 한국인이 이런거구나 하고 느끼는 겁니다. 비슷한 것이죠. 문화적 전환의 순간이 자기를 느끼고 발견하게 하는 기회를 주는 겁니다.

 

가게 자체는 이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안쪽의 시각에서는 말입니다. 다만 거길 들어가는 사람은 마치 공항을 거치고 입국심사를 거쳐서 외국에 들어가는 것처럼 느끼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곳은 다른 게임의 법칙이 통하는 공간이구나 하고 느끼게 말입니다. 깨진 거울은 하나의 독립된 공화국, 또하나의 외국인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고 나면 사람들의 역할이 문화가 조금씩 혹은 많이 달라지는 겁니다. 마치 교수에게 공손히 말하던 학생이 언어를 영어로 바꾸면 당당하게 유라고 외치듯이 말입니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예를 들어 손님에게 옷을 주고 약간의 훈련을 시킨다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게 하거나 웨이터로 일하게 하거나 요리를 하게 하거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동적으로 서비스만 받는게 아니라 참여하게 하는 것이죠.” 

 

“그런 역할 변신속에서 현실의 단층선을 보게 될 기회를 얻는다는 거로군.”

 

“그렇습니다. 진짜는 가게를 들어올 때와 나갈 때 생기는 겁니다. 그 안에서 익숙해졌다가 그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현실의 단층선을 보게 되는 가장 좋은 기회가 생기는 거지요. 물론 사실 연극이라던가 영화를 통해서도 우리는 비슷한 일을 겪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지극히 수동적인 상황입니다. 이것은 그렇지 않지요. 사람들은 능동적으로 역할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처음에 가게를 이야기한 이유중의 하나도 비슷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생활이 있는데 가게 주인의 역할을 가지게 되면 세상이 달라보일 거라는 생각을 한겁니다. 그런데 가게를 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요. 그러니까 좀 더 쉽게 역할극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죠.”

 

“음.”

 

이번에는 철진이 생각을 할 차례였다. 독립된 공화국이라. 화폐라도 발행하자는 걸까? 철진은 깍지낀 손을 머리위로 올렸다. 생각은 황당했지만 한가지는 철진의 주목을 끌었다. 바로 현실의 단층선이다. 이윽고 철주는 말문을 열었다.

 

“현실의 단층선을 보여주는 이상한 공간이란거. 그걸 나도 얼마전에 경험했어.”

 

철진은 약간 말을 멈췄다가 다시 시작했다.

 

“병원이지. 의사가 그러는데 폐암이라더군.”

 

철주는 놀랐다. 폐암환자는 술을 먹고 그래도 되는것일까?

 

“아주 건강해 보이셨는데요.”

 

“폐암이라는게 원래 그래. 폐암으로 인한 증상이 확실히 표면화 될 정도면 이미 굉장히 늦은 거지. 난 감기기운이 좀 있는 줄 알고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자꾸 이상한 질문을 하더라고. 그리고 엑스레이찍고 더 큰병원으로 가보라고하고, 진단받고 다른 병원가서 다시 진단받고 그런 거지. 그리고는 무슨 롤러코스터 탄거 같았지. 아내는 울고 무서워 하고 나는 위로받고 위로해주고. 정신없었어.”

 

“그래서 아주 안 좋으신 겁니까?”

 

“안좋기는 처음부터 안좋았지. 진짜 질문은 내가 그것에 대해서 뭘 할까 하는 것이지. 지금은 결정했어. 수술을 할거야. 요즘은 암이라고 무조건 죽지는 않아. 하지만 폐암은 암중에서도 무서운 암인 것은 사실이지. 수술해도 죽는 사람이 훨씬 많아. 하지만 살아 돌아오려고 해. 어려워도 꼭 살아돌아와서 너와 가게를 열고 새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

 

난 말이야. 최근에 우울했어. 암때문이 아니라 내가 마치 집안의 가구처럼 변해가는 것 같아서. 가구라는 것은 대개 항상 그 자리에 있지. 적어도 스스로 움직이지는 않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역할에 점점 익숙해지면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 같은 것은 잊게 되는 거야. 마치 가구처럼 거기에서 항상 그 역할을 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지. 오직 가구가 고장났을 때만 주목을 받지. 난 그렇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아둥바둥거려 왔다고 생각하는데도 어느 날 보니 그걸 충분히 잘 피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군. 나는 이제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게 싫었어.

 

그리고 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 그리고 내 인생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됬고 또 널 만났지. 가게 이야기를 하는게 나는 아주 재미있었어. 이런 저런 상상하는게 아주 좋았지. 시내 어디는 가게세가 얼마나 나오나 뭐 이런 걸 알아보거나 주류판매를 하려면 허락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카페를 하려면 커피는 어떤 걸 구비해 놓는게 좋은지 뭐 이런 걸 생각하는 것도 다 즐거웠어. 아주 즐거웠지.

 

새로운 인생을 상상한다는 것 그리고 네 이야기를 듣는게 좋았어. 우리 이야기는 아직도 가게를 열기에는 미흡한데가 많지만 그래도 정말 뭐든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에는 충분했어. 나는 이제 수술하고 건강해져서 가게를 열고 싶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삶의 단층선을 보여주고 하는 것도 다 좋지만 무엇보다 나와 가족이 그 가게의 일부가 되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해. 새로운 모험을 앞두니 삶에 대한 집착이 커지더군. 그래서 이젠 수술해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어. 실은 처음에는 모든게 부질없으니 남은 시간을 잘 쓰자는 쪽이었지만 말이야.”

 

철진은 철주에게 악수를 청했다.

 

“잘 부탁해. 동업자. 뭐 망해도 같이 망할 친구가 있어서 나는 기뻐. 라면집이든 노래방이든 카페든 체험방이든 뭐든 잘해보자고.”

 

철주는 그 손을 꽉 잡았다.  

 

두남자 가게를 열다.

 

창밖에는 봄이 오고 있다. 시골의 풍경이 펼쳐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층빌딩이 드문 동네라서 그런지 멀리까지 길이 펼쳐진 모습이 보였고 저 멀리에 산도 보였다. 이 집의 주변에는 여러가지 형식으로 지어진 다양한 집들이 보였다. 나는 획일적이지 않은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동네에는 여기저기에 푸른 빛이 보이고 있었다. 단열이 잘되는 실내에서 유리창바깥으로 보이는 바깥 세상은 실제보다도 훨씬 따뜻해 보였다. 봄이 왔다. 그런 느낌이다. 어린 아이 한명이 추위따위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라는 듯이 편안한 표정으로 길을 가로 지르고 있었다.

 

나는 이 집을 나름 정성을 다해 골랐다. 가구를 고르고 실내 인테리어를 가지고 고민했다. 철진형의 희망사항도 고려했다. 무엇보다도 재미있을 것 그리고 그 안에서라면 행복할 것같은 집을 골랐다. 나도 철진형도 터무니 없이 큰 공간에 이것저것이 방만하게 늘어진 것이 아니라 작은 공간안에서 많은 것을 고민해서 크게 사는 집이 되길 원했다. 그것이 재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지만 큰 집이다. 그가 말했던 타이니하우스도 집을 꾸미는데 참조했다.

 

그냥 막연히 큰 집은 돈이 많으면 누구나 쓸 수 있다. 짐도 한정없이 늘려서 아무데나 쌓아두면 된다. 그러나 작지만 큰 집을 추구할 때 비로소 구조에 대한 고민이 나오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나온다. 어떤 물건을 구해야 하고 유지해야 하는지 그리고 뭘 버려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나온다. 가장 중요한게 뭔지, 가장 필요없는게 뭔지를 생각하게 된다. 뭔가를 남과 공유해야만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삶에 대해서 행복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방만한 쇼핑은 사치일 뿐이지만 관점과 절제를 가진 쇼핑은 삶에 대한 사색이고 더욱 큰 기쁨이다. 따지고 보면 가게만 그런게 아니라 모든 물건들은 하나의 혹은 그 이상의 사상과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정원에 탁자와 의자를 두고 앉는 일이 없었다. 정자를 만들던 대청마루에 앉던 지붕을 위에 가진 공간에 앉는 것이 전통적 방식이다. 보기에 이쁘다고 해서 테라스 탁자와 의자를 정원에 놓으면 보기에는 이쁘지만 실상은 별로 쓸모가 없다. 많은 전원주택은 지붕이 없이 만들어진 데크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도 그렇다. 고추를 말리겠다면 모를까 별로 쓸모가 없다. 우리나라는 겨울에 추운 것은 둘째치고 여름에 너무 덥기 때문이다. 어설픈 파라솔정도로는 별로 도움도 안된다. 서양풍의 테라스탁자보다는 원두막이나 정자가 훨씬 좋다. 그래서 결국 많은 사람들은 집에 달린 베란다를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베란다 확장공사를 한다. 멋지게 꾸며봐도 지붕없이 바깥에 앉아보면 괴로우니까. 예쁜 구조를 가졌다고 해도 다른 나라의 집인 것을 그대로 베끼면 좋을 수가 없다. 

 

나는 우선 나부터 행복하게 살자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자기가 행복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어떤 것을 가져야 할까에 대해 생각했다.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창가에 앉아서 햇볕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면 그렇게 하자고 생각했다. 이층이 있는 공간을 가지고 싶다면 그렇게 하자고 생각했다.

 

나는 자신을 위한 커피를 직접 만들고 창가에 붙은 테이블 위에 놓았다. 철진형은 아직도 싸우고 있다. 생각해보면 처음에 그는 자신이 가게를 열기 전에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말했었다. 그는 자신이 회복될 가능성보다는 회복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아직도 싸우고 있다. 아직은 도망가지 않았다. 깨진 거울 혹은 두 남자 가게를 열다의 주인으로서 그는 자기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철진형은 가게안의 가게를 꿈꿨다. 행복을 위한 작은 공동체를 꿈꿨다. 그런 공동체를 꿈꾸고 이뤄가는 것이 삶의 새로운 기쁨이 될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런 꿈을 아직 이루지 못했으며 그럴 시간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꿈을 나와 이야기할 시간은 있었다. 비록 그가 싸움에 진다고 해도 내가 뒤에 남아 있으니 그의 이야기는 다 끝나지 않은 셈이다.

 

나는 그에게 말했었다. 가게는 사상을 파는 곳이라고. 다시 말해 가게는 행복을 위한 생각을 파는 곳이라고. 그는 가게안의 가게를 꿈꿨으나 나는 소통을 꿈꿨다. 내가 원하는 것은 가게 안의 가게이전에 가게 바깥의 가게였다. 말이야 어찌되건 결국 중요한 것은 행복을 위한 생각을 파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내가 구한 새로운 집에서. 이것은 소설도 아니고 논픽션도 아니다. 내가 꿈꾸던 이상한 공간이다. 아직은 우리 집에서 손님을 받고 뭔가 마실 것이나 먹을 것을 파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가끔 지인의 방문을 받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철진형과의 만남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 가게의 핵심은 사상이니까. 나는 가게에 대한 이야기들을 써보기로 했다. 우선 써야 할 것은 철진형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철진형과의 이야기는 도대체 뭐였을까?

이미 여러번 썼다 지운 글의 초안을 나는 다시 고쳐썼다.  이야기의 제목은 당연히 두 남자 가게를 열다였다. 나는 두개의 문장을 가장 먼저 썼더랬다. 

 

어떤 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 불확실성 때문이다.

사는데 중요한 것은 결국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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