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들/두남자 가게를 열다

두 남자 가게를 열다 (2)

by 격암(강국진) 2015. 1. 11.

가게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가 뭔가에 대해 실질적으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을 때 극단적인 태도를 취한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거나 반대로 우리는 그것을 다른 어떤 것보다도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대해 뭔가 말하기에는 그것은 너무 자명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마음을 가졌다거나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마음이란게 뭔지 살아있다는 것이 뭔지에 대해 뭔가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더욱 작다. 절대적 무지가 절대적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 바로 무지의 벽이 세워지는 순간이다. 우리는 스스로 그 벽을 세우고 그 벽들 안에 갇힌다.  

 

두 남자는 몇일 뒤 다시 만났다. 그리고 깨진 거울의 일도 잊지 않았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뭐든지 하자는 것이 술취하지 않은 정신으로 만난 다음에도 두 남자가 가진 결론이었다. 알고보니 나이가 좀 더 든 남자의 이름은 철진이었고 좀 더 젊은 남자의 이름은 철주였다.

 

철진은 말했다.

 

“난 그만두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우선 그 가게가 뭘하는 가게인지를 이야기 해야지. 그저 가게를 한다고 하는 것으론 아무 것도 안되니까. 가게를 한다고 하면 보통 돈을 어떻게 벌까 하는 생각을 하지. 한국에 있는 가게는 전부가 아니면 대부분 이런 가게일꺼야. 물론 뭘 하든 돈을 손해 본다면 그 가게는 얼마가지 않아 망해버릴테니까 돈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는 해.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단순하게 말하면 재미있는 가게거든. 우리 실력으로 그럴 리는 없지만 재미가 없는데 돈만 벌리는 그런 거라면 별로야. 사실 돈을 벌어봐야 나같은 사람이 하는 가게가 얼마나 벌겠어. 돈을 버는 최악의 수단이 가게를 하는 거지. 그러니까 재미라는 부분이 더 중요하다는 거지.”

 

이 말은 철주의 맘에도 들었다.

 

“재미있는 가게를 하고 싶다라는 것은 좋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는 나의 고독을 치유해 주는 가게를 하고 싶다거나 나는 나를 세상에서 숨겨줄 가게를 하고 싶다라고 한다면 그 말은 그 사람은 사는데 있어서 고독을 탈출하거나 세상에서 숨어사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죠.

 

요즘 세상에서 사람들은 가게는 당연히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거라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거기서 끝이죠. 그건 뒤집어 말하면 사람들이 사는데 있어서 돈이면 된다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인기있는 국수집을 하면서도 내가 먹고 살자고 이 장사를 하는 것이지 돈만 있으면 이렇게 안 산다거나 내 자식은 이렇게 살지 않게 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이거든요. 실은 가게를 하는 것보다는 뭔가 다른 것을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하죠. 재미있는 가게를 하고 싶다는 것은 재미있는 것이 하고 싶기 때문에 돈을 버는 것이란 것이죠. 돈을 벌기 위해선 재미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게 아니라 말입니다. 저도 어떤 가게를 하건 재미있는 가게를 하고 싶습니다. 그저 돈을 버는 가게가 아니라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재미있는 가게가 세상사람들에게 다 재미있는 가게는 아닐 거라는 거지. 그래도 나는 우리에게 재미있는 가게를 했으면 해. 가게는 망할 가능성이 크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만 재미있고 돈이 벌리는 가게를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니까 말이야. 우리가 재미있어 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가를 보는 것도 또한 큰 재미겠지.”

 

“철진형에게 재미있는 가게란 건 어떤 건데요?”

 

“글쎄.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질문이구만. 갑자기 그렇게 물으니까 말문이 막히는 걸.”

 

“그냥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말씀해 보세요.”

 

“나는 사실 북까페 같은 게 좋아. 그런데 밝고 현대식의 그런게 아니라 말하자면 옛날의 만화방같은 그런 분위기가 좋지. 책냄새가 가득하고 군것질 할 것도 있고 그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거든.”

 

북까페라. 철주는 처음이니까 당연하지만 지독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흔하디 흔한 가게니까 말이다. 흔해서 무조건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 이미 너무 많은 것이 카페였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너무 질문을 서둘러 하는지 몰라요.”

 

“무슨 뜻이지?”

 

“가게를 해보기로 했으니까 저도 이런 저런 생각을 했죠. 그리고 저는 스스로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가게란 무엇일까하는 것이죠.”

 

“가게란 무엇인가?”

 

“그렇죠. 좋은 가게건 재미있는 가게건 가게가 뭔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가게는 물론 뭔가를 파는 곳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떤 가게를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 생각이 모자라 보이더군요.”

 

“그래? 그럼. 말해봐. 가게란게 뭐지?”

 

철주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듯이 말했다.

 

“그 대답은 당연히 하나가 아니겠지만 제 마음에 든 대답은 이거였습니다. 가게는 사상을 파는 장소다.”

 

“가게는 사상을 파는 장소다? 야. 거창한데.”

 

“거창하죠. 거창하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인건비와 가게임대료를 생각하면 가게가 그저 물건을 파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나라 같은 곳에서는요. 요즘은 그저 단순히 뭔가를 만들어 파는 것만으로는 인건비와 임대료를 낼 수가 없어요. 맥도널드 같은 데에서 해피밀같은 세트를 사면 주는 아이들 장난감을 본 적이 있습니까? 중국에서 만든 바구니나 책상 같은 것을 보면서 그런 걸 만드는 데 어느 정도의 수고가 들어가는 지를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그게 햄버거를 만드는 것보다 힘이 덜들까요?

 

우리가 단순히 허리와 손이 아프도록 일해서 뭔가를 만들기만 하면 그 노동의 댓가로 우리가 가게세를 내고 운영비를 벌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요즘처럼 국제무역이 활발한 시대에 적어도 우리 나라처럼 이미 물가와 부동산가격이 올라버린 나라에서는 사물의 가격에서 단순 노동이 기여하는 부분은 날로 작아지고 있습니다. 이미 너무 작아져서 그것만으로는 가게세를 낼 수가 없습니다.”

 

“마르크스가 들으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군. 사물의 가치는 노동에서 나온다고 그 양반이 주장하지 않았나.”

 

“요즘 세상에 노동이란 한없이 추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정신노동의 양을 뭘로 측정하겠습니까. 단순노동뿐이라면 그런 일감은 전부 급여가 싼 나라로 가버립니다. 저는 수요와 공급이 사물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말도 믿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이미 너무 복잡해요. 너무 빨리 변한다구요.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잡고 어쩌고 할 시간도 없단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의 사진이나 스티커 따위에 큰 돈을 냅니다. 스타를 어디 공장에서 만듭니까? 한명의 스타를 다른 스타를 공급해서 해결할 수 있습니까? 어떤 한국영화가 인기가 좋으면 또 다른 한국영화는 반드시 수요-공급의 경쟁구도로 돈을 못벌게 되나요? 오히려 상호작용을 해서 더 많은 관객을 영화관으로 끌어오고 외국에서 지명도를 높여서 돈을 더 벌지 않나요? 수요-공급 이야기를 하려면 순대집이 한 골목에 다 모이면 바보짓이죠. 하지만 순대를 엄청나게 공급하는데 장사는 더 잘 되니까 모이는 거 아닙니까.  

 

어떤 상품도 광고가 안되면 그 진가는 묻혀질 겁니다. 반대로 거품이 일면, 이게 요즘 유행이라더라라고 생각하거나 이게 앞으로는 더 비싸질거라더라라고 생각하면 다들 미친듯이 사지요. 비싸도 말입니다. 그렇게 계속 유행이 지나갑니다. 거품이 거품을 덮어버리는 겁니다. 정보가 정보를 덮는 겁니다. 이런 시대에는 상품의 본질이 뭔지 그 자체가 애매합니다. 결국 가치는 사상에서 나옵니다. 가치는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겁니다. 사람이 유행이나 투기바람에 약한 것은 자기 안이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다수파의 사상이나 대중매체의 선전에 쉽게 물드는 거죠.

 

사람들이 가게에 가서 음식을 먹건 물건을 사건 그들이 그 물건의 재료비나 노동의 시간에 대한 가격을 낸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물론 그런 소비도 있지만 그건 비싼 소비는 아닙니다. 많은 가게가 파는 것에서 원재료비는 얼마 안되죠. 나머지는 상당히 추상적인 것입니다. 물론 손님이 만족감을 느껴야 한다라는 점에서는 매우 현실적인 것이지만 말이죠.”

 

“추상적인 가치라.”

 

“사상이죠. 가게는 사상을 파는 겁니다. 사상이 풍부하지 않으면 팔게 없는 거죠.”

 

“그러니까 자네말은 가게는 환상을 판다는거지. 왕이 아닌데 왕처럼 대접받으면서 왕처럼 느끼게 하고 귀족이 아닌데 귀족처럼 느끼게 하고. 그렇게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진짜 재료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느끼게 하고 그렇게 행동하게 한다는 거지. 왕처럼 대접받으면서 왕처럼 돈을 낸다. 뉴욕사람처럼 먹고 뉴욕사람처럼 행동하게 한다.”

 

“그렇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상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환상이란 실체가 없다고 생각하는거니까. 1970년대 풍으로 가게를 꾸미면 그 가게는 1970년대가 좋았던 곳이라는 사상을 파는 것이죠. 1970년대 사람들이 생각하고 먹고 행동하는 방식이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19세기 유럽풍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은 19세기 유럽사람들의 생활양식이 가치있는거라고 생각하는 주장인 겁니다. 사찰의 분위기를 내는 인테리어를 하고 풍경소리를 들려주고 사찰 음식을 파는 가게는 불교적 사상이 올바른 삶의 태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한복을 일상복으로 입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조선시대의 삶의 양식이 가치있다고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주장이 매력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무라이나 카우보이는 흉내내고 싶지만 선비는 흉내내고 싶지 않다는 것이죠.”

 

“음.”

 

“그러니까. 재미란 것도 사상의 기반 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그저 단순히 재미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뭔가가 재미있는 이유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우리가 뭘 믿는가 하는 것이 결정하는 것이죠. 만약에 우리가 가족의 단란함이야 말로 행복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면 마치 가정집과 같은 분위기를 주는 가게가 좋은 가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욕쟁이 할머니 같은 사람이 욕을 해대는 가게를 오히려 더 좋은 가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고향을 그리워 하는 사람에게는 고향의 정취가 좋고 하와이나 파리같은 외국의 어딘가를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걸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이죠.”

 

“네 말은 재미있는 가게를 만들고 싶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는 거로군. 그래야 그게 재미있는 가게가 되는 거고.”

 

“그렇죠.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구요. 우리는 재미있는 가게를 찾아냄으로해서 사람은 응당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재미있는 가게를 순례하는 것은 말하자면 사상의 도서관을 둘러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가 말하는 것을 들으니 새삼 사상도 환경에 따라 경쟁력이 있게 된다는 생각이 다시 드는 군. 가게가 사상을 파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겠지만 네 말대로라면 인건비나 가게세가 비싼 나라는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가게만 있을테니까 말이야. 결국 사회적 제약이 사상의 생존범위를 제약한달까.”

 

“그렇죠. 집에서 먹을 때는 계란 후라이나 호떡이나 지지미는 그저 계란 후라이나 호떡이나 지지미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깥에 나가서 가게를 한다고 하면 손님들은 그런 것에 대해 비싼 가격을 내지 않거든요. 우리는 비싼 가게비를 내기위해 거기에 어떤 호화판 이미지를 붙여야 합니다. 스위스 치즈가 들어간 특별한 오믈렛이라던가 전통 방식으로 만든 설탕을 넣은 건강호떡이라던가 왕가의 방식으로 만든 조선왕조 지지미라던가 하는 식으로 어떤 희소성이 있는 이미지를 더해서 물건을 팔지 않으면 가게세를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진정한 삶의 방식은 평범함과 단순함에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리고 단순하게 평범하게 물건을 만들어 판다면 그 사람은 가게를 계속 하기 힘든 것이죠. 기본 유지비가 너무 많이 나가니까요. 그리고 그런 사상은 도태되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노동시장에서 자기를 팔면서 계속 특별한 사람인척 차별성을 팔아야 하는 거구요. 평범한 것은 싫다. 튀는 것이 행복이다. 뭐 그렇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사실 그런 말이 항상 틀리지는 않지만 그게 더 소비적이고 더 위험하고 더 피곤하게 사는 거라는 것도 사실인데 말입니다. ” 

 

“맞아. 자본주의와 시장은 우리 머릿속을 완전히 개조해 버렸어. 집값, 교육비, 세금등 모든 물가가 비싼 나라에서는 자연스레 사는 것은 경제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 단순하게 생각하면 돈이 많아져서 부자가 되면 더이상 돈말고 다른 걸 생각할 것같은데 실은 부자나라란 온갖 물가가 비싼 나라거든. 그런 나라에서 그저 왠만큼 체면차리고 살려고만 해도 많은 돈이 드니까 자연스레 돈이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같은 생각은 도태되는 것이지. 그리고 모두들 미친듯이 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는 주장에 공감하면서 매우 피곤하게 살게 되는 것이지. 돈버는 법을 누가 가르쳐 준다고 하면 사력을 다해 그걸 배우려고 하고 말이야. 오히려 가난한 사회의 사람들이 더 많이 소유하는 것에 대해 덜 집착하는 것같아.”

 

“결국 가게 바깥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가게가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는 거니까요. 모두 이 정도가 상식적이고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소비수준이 사실은 허풍이라면 다들 허풍때문에 바쁘게 살게 되기 쉬운 것이죠.”

 

“가게는 당연히 가게 바깥의 영향도 크게 받지. 어떻게 말하면 가게 바깥의 사상이 충만할 때 가게 안쪽까지 그 사상이 밀려든달까. 일본의 교토에 가면 사람들은 교토의 전통음식이라던가 교토 전통의 어떤 기념품을 사고 싶어하지. 결국 교토라는 곳에 관광을 간 사람들은 교토식으로 사는 것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 것이고 그 매력의 기반위에 그런 가게들은 존재하는 거니까. 그러나 결국 교토사람 스스로가 교토식으로 사는 것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면 설득력이 있을리가 없지. 그러니까 교토에 대한 지역민의 사랑이라는 사상이 넘쳐 흘러서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고 할 수 있겠군.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지방에서 장사가 안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 일단 수도권 사람들에게 지방에서 사는 것도 좋다라는 것을 설득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사는 사람들도 기회만 되면 수도권으로 이사가고 싶다고만 생각하는 판이라면 거기에는 매력이 없겠지. 그러니까 지방시대라는 것은 지방에 사는 것이 행복하다라는 사상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표현 할 수 있겠지. 그런 사상이 없이 단순히 물건을 팔려고 한다면 그 물건들은 잘 팔리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구닥다리로 싸구려로 취급되어 별로 값도 받지 못할 거고 말이야. 서울의 싸구려 초콜릿케익은 비싼 값에도 팔리지만 지방의 표고버섯은 아주 싸지는 거지. 네 표현대로라면 팔아야 하는 것은 사상인데 팔아야 할 사상이 별로 없으니까 그런 거지.”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렀고 두 남자는 첫번째 가게모임을 그 정도에서 끝내기로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하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가게를 하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을 많이 발견했다는 점에서 둘은 모두 만족했다. 좀 더 생각을 정리해서 다시 만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난 사실 무조건 엉뚱한 것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내가 절대로 되지 않을 것같은 것말이지. 심지어 성인 잡지나 성인용품 같은 것을 파는 가게를 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했다니까. 난 좀 얌전하게 살아서 그런 장사를 해 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자네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까 그게 그리 재미있을 것같지가 않군. 사실 포르노나 야한 사진 만큼 쉽게 물리는 것도 없으니까. 상상력이 쉽게 고갈되는 거지. 야한 사진은 나도 좋아하지만 그것만으로 인생이 재미있어지기는 아주 아주 부족하지. 가끔 오는 손님들은 재미있어할지 몰라도 그 장사를 하는 사람은 아마 무척 재미없어 할거야. 재미있는 대화였어. 가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께. 그럼 또 봐.”

 

두 사람은 한국에서 성공하는 가게에 어떤 공식이 있는 건지, 그들 자신이 뭔가를 재미있어 한다고 할 때 그것에 어떤 이유가 있는건지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하고 가게에 대한 첫번째 만남을 마쳤다.

 

죽음과 삶에 관하여

 

깊고 깊은 물속에서 물방울들이 떠오르고 있다. 물은 고요하고 깊으며 모두가 비슷하게 올라가고 있기 때문에 물방울들은 그들이 같은 장소에 정지해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이윽고 위가 밝아진다. 뭔가가 위에서 다가온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이 뭔지 물방울들은 금새 알게 된다. 그것은 죽음이다. 물방울의 죽음.

 

인간은 물방울과 다른 것일까? 우리도 계속해서 죽음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그저 제자리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어느 날 나는 죽음을 선고 받았다. 적어도 죽음을 아주 가깝게 느끼게 되었다. 감기가 멈추질 않는다고 찾아간 병원은 갑자기 감기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기엔 지나치다 싶은 검사를 계속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사의 끝에서 나는 말기의 폐암을 선고 받았다. 폐암은 암중에서도 사망률이 아주 높은 암이며 상태가 아주 나빠지기전에는 증상도 잘 안나타나기때문에 대개의 경우 나처럼 상당히 암이 진전된 이후에나 발견된다.

 

나는 가까스로 정지를 외쳤다. 마치 대형마트의 계산대에 설치된 컨베이어벨트가 물건을 실어나르듯이 나라는 존재를 이런 저런 검사와 수술과정으로 밀어넣으려는 병원의 압력에서 뒤로 물러났다. 가까스로, 가까스로. 그리고 생각할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발견된 당시 너무 늦은 것이 이 폐암이지만 또한 모르면 이대로 몇달도 그냥 살았을 것이 이 폐암이다. 아무 생각도 없이 현재의 생활을 포기하고 암환자로 변신하는 것은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일단 화학치료건 수술이건 방사선치료건 치료가 시작되면 나는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오히려 급격히 약해질 것이며 그리고 높은 확률로 고통끝에 죽게 될 것이었다. 즉 치료한다는 것이 오히려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는 나라는 존재의 실질적 죽음을 앞당기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침상에 누워 1-2년을 더 살면서 집안의 재산을 소진시키고 엄청난 고통을 겪는 삶을 얻기 위해서 나는 가족과 친구와 무엇보다 이 세상과 그저 일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는 한두달 혹은 그것보다 더 긴 시간을 포기하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암환자로 변하는 상황은 나 자신과 가족들에게 한계적 상황이 될 것이었다. 사랑의 한계와 인간의 한계 속에서 육체적으로 괴로운 것 이상으로 정신적으로 괴로워지게 될 것이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암투병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은 이따금 이제 그만 가주셨으면 하는 생각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에 대해 놀라고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이별을 슬퍼하면서 괴로워 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보잘것없음과 시시함을 발견하고 괴로워 할 것이다. 그 전투속에서 죽어가는 것은 육체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자체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해맨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가졌던 낭만적이고 긍정적인 그림은 위기에 처한다. 죽음의 싸움에서 이기던 지던 그 전투를 겪고 난 후 우리가 전과 똑같아지기는 아주 어렵다. 어떤 경우던 남은 것은 폐허밖에 없다. 어쩌면 그 폐허에 다시 꽃이 피어날 것이다. 우리는 다시 세상과 자기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곰곰히 다시 생각하기 싫은 비밀을 넣어버린 상자를 가지게 된다. 그 상자안의 기억은 엄청난 무게로 우리를 짓누를 것이다.

 

아무튼 현대는 남을 돌보기에는 각각의 개인을 너무나 정교한 부속품처럼 만들어 버린다. 자기의 생활에 지나치게 적응해 버린 사람들은 그것이 비록 배우자나 부모라고 할지라도 도움을 주는데 한계를 가진다. 다들 자기 일상이라는 것에 매여있는 노예니까 말이다. 조선시대처럼 대가족을 이루며 살 때는 환자가 발생하면 돌아가면서 보살펴주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집이 일종의 사설요양병원인 셈이다. 그러나 현대의 환자들은 소수의 복많은 사람을 제외한다면 가족속에 있건 요양병원같은 곳에 가건 고통을 겪는다. 가족들은 여러가지 일에 매여있다. 환자는 물론 가족과 함께 있고 싶다. 사랑하고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다. 그러다가 죽고 싶다. 가족도 떨어지는 것이 고통스럽고 환자를 낯선 곳으로 보내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 든다. 그러나 핵가족시대에 집에서 환자를 돌보는 일은 매우 힘들다. 의사도 가족도 도울 수 있는 한계가 분명하다. 시대는 개인은 원래 외로운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시대가 우리를 외롭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시대를 만든 것은 우리 인간들이다. 그러니 우리를 외롭게 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들이다.

 

나는 생각해 봤다.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죽음이란 하나의 이야기의 끝이다. 적어도 끝이라고 생각되어지기 쉬운 것이다. 사물의 의미는 그것을 보는 맥락에 따라 결정된다. 중요한 것은 맥락, 문맥, 이야기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살아가는지 의식하지 않지만 의식의 세계에서건 무의식의 세계에서건 우리는 이야기를 살아간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둘러싼 사물은 의미도 가치도 가질 수가 없다.

 

사람들은 삶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그 중에는 개인적이라기보다는 대중적이나 문명적이라고 부를만한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영혼이란 개념을 만들어 내서 육체는 죽지만 영혼은 영원불멸하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또한 역사와 공동체를 만들어 개인은 죽지만 그들은 역사와 공동체속에서 영원불멸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죽음이 우리에게 당황스런 일이 되는 한가지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평소에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어떤 이야기, 종종 남에게서 배운 이야기를 살았기 때문이다. 의식과 강력한 소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죽음도 당황스러운 일이 되지 않는다. 내가 만일 죽을 것이 뻔한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사람이라면 혹은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내 생명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런 결심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나는 나의 죽음에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기뻐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의 삶이라는 이야기는 내가 쓴다라는 생각을 하며 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백설공주인지 돈키호테인지 알고 있다. 즉 나는 나의 이야기를 알고 있으며 그 이야기의 결말을 향해 망설임없이 전진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2-30대의 청년은 물론 이거니와 8-90대의 노인들조차 자기의 삶을 이야기로보고 죽음을 극적인 전환점으로 생각하는 관점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냥 하루 하루를 살 뿐이다. 그러다가 죽음이 눈에 보이게 되면 당황하는 것이다. 본인도 당황하고 주변 사람들도 당황한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무한히 살 것처럼 산다. 그러므로 삶은 끝나가려고 하는데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야 하는지 모른다. 서둘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이야기의 진도가 어처구니 없이 너무 적게 나간 느낌을 받는다. 백설공주는 아직 왕자를 만나지도 못했고 신데렐라는 아직 유리구두를 신어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끝나버리려고 한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허둥대는 것이다. 겨우 이걸로 끝나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혹은 이야기가 어느 정도라도 말이 되려면 해야할 일이 아직 많다고 하면서. 우리는 집착하고 아쉬워하고 후회한다.  

 

이야기가 없는 삶이란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마치 대본을 받지 않은 연극배우가 무대위에 올려진 꼴이 된다. 우리는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모른다. 이야기가 곧 삶이다. 죽음은 그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야기가 없는 삶은 불가능하다. 죽음의 선고는 그래서 우리에게 강력하게 질문한다. 너의 이야기는 도대체 뭐였냐고. 너는 누구냐고.

 

죽음의 선고를 받는 때란 우리가 가장 외로운 순간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이야기에대해 생각해 보면서 나는 죽음이란 외로운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죽음이란 우리의 안과 바깥을 뒤집는 순간이다. 죽음의 예고를 알리는 의사앞에서 나는 왠지 수면으로 떠오르는 공기방울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깊고 깊은 물속에 공기방울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새 너무 많이 떠올라서 물의 표면에 다가가기 시작하고 위에서는 빛이 보인다. 물안에서 보면 공기방울은 실체로 보인다. 오히려 사방을 가득 채운 물은 그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기방울이라고 불리는 뭔가는 저기 어딘가 공간적으로 제약된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같다. 그러나 그 공기방울이 수면에 다가가다가 물의 표면에 도달하는 순간 안과 바깥은 뒤집어 진다. 공기방울이 수면과 접촉하는 순간 공기방울은 공기와 물을 나누는 물의 표면과 이어진다. 공기방울이 깨어지면서 생겨나는 일은 안과 바깥이 뒤집어 지는 것이다. 우리가 안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바깥처럼 느껴지고 바깥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안처럼 느껴진다. 그리고나면 이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은 공기방울을 둘러싼 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실체로 보였던 공기방울 속의 공간은 실은 물표면이라는 실체의 바깥쪽에 있는 거의 빈공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죽음에 다가가는 인간도 이런 것이 아닐까. 생생히 돌아다닐 때는 나라는 존재가 생생한 실체같다. 그러나 사람이 죽으면 시체가 남는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은 물론 주변사람들도 그 사실에 당황한다. 방금까지 생명을 가지고 영혼을 가지고 의미를 가지고 존재하던 인간이 있었는데 생명이 끝나는 순간 우리 앞에는 그저 한덩어리의 물질만이 남는다. 차차 식어가다가 끝내는 부패해버리거나 불속에서 태워져 사라질 저 물질이 그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하기 어렵다. 저게 그 사람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영혼이니 혼이니 하는 개념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그러고 나면 사실 그런 말들이 뭘 의미하는지 모른다. 그런 생각과 과학이 양립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괴로워 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생명이란 물질이 아니라 물위에 생긴 파도처럼 하나의 사건이며 과정이다. 생명은 끝임없이 주변환경과 물질을 교환하면서 성장하고 변해가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공기방울이 물속에서 움직이거나 파도가 움직여 가는 것과 같다. 공기방울이 움직일때 그 공기방울의 주변의 물은 같은 물이 아니다. 파도가 움직여 갈 때 그 파도를 이루고 있는 것은 같은 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것은 환경과 동적인 평형을 이루면서 변해가는 것이다. 음식을 먹고 성장하면서 우리 안의 물질들은 바뀌어 간다. 여기 지금 있는 나는 몇년전에 나라고 불리던 존재를 이루던 그 물질이 아니다. 피도 뼈도 모두 교체되어 졌다. 이 내 몸은 우주에 생긴 하나의 공기방울이 그 우주를 가로지르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이란 공기방울이 터지는 것과 같다. 하나의 과정이 끝이 난 것이다. 그러나 물은 그대로 있다. 어쩌면 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이란 공간적으로 제한된 어딘가에 존재하는 뭔가를 말하는 것같지만 그것은 동시에 인간을 둘러싼 세상에 만들어진 하나의 거의 빈공간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것은 세상이었다 세상의 어떤 부분이 나라고 불리는 공기방울을 만들어 것이다우리는 세계와 떨어질 없는 관계를 가진다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인간은 고독히 진공을 달려가는 이상기체원자가 아니다같은 물속에 생긴 여러개의 공기방울이다같은 것의 다른 얼굴들이다공기방울보다 물이 실체라고 생각한다면 진짜로 생생히 존재하는 것은 인간과 인간이 아니고 인간들의 관계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우리는 떨어져 있지 않고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삶이 공기방울이라면 죽음이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우리가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어떤 의미로 죽은 사람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야기는 계속 된다무엇보다 남은 사람들의 애정과 고통이 증거다 사람은 세상과 다시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소설들 > 두남자 가게를 열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남자 가게를 열다 (6)  (0) 2015.01.11
두 남자 가게를 열다 (5)  (0) 2015.01.11
두 남자 가게를 열다 (4)  (0) 2015.01.11
두 남자 가게를 열다 (3)  (0) 2015.01.11
두 남자 가게를 열다 (1)  (0) 2015.01.1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