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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두남자 가게를 열다

두 남자 가게를 열다 (5)

by 격암(강국진) 2015. 1. 11.

21세기의 가게들

 

“중요한 것은 일관성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자기 혼자만의 환상에 빠지게 되지 않을까?”

 

“만약 주변의 모든 것을 무시하고 혼자만의 공간에 처박힌다면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즉 자신의 무지와 세상의 불확실성을 인정한다면, 다르게 말해서 항상 재미있는 것을 추구하고 미지의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렇지 않을 겁니다. 끊임없는 세상의 혼란이 우리를 변하게 하고 다른 세계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겠죠. 오히려 걱정해야 하는 것은 그 반대입니다. 지나친 세상의 혼란이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지킬 수 없게 하기가 더 쉽습니다. 우리는 최소한의 일관성을 지키지도 못하는 내적인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일관성을 잃는 다는 것은 자기 존재 자체가 흔들린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일관성입니다.”

 

다시 1주일만 이었다. 철진은 오늘은 좀 피곤해 보였다. 두 남자는 이번에는 멀티방에 방을 빌렸다. 그들은 둘다 전에 멀티방에 가본 적이 없었지만 오히려 철진의 아내는 가본 적이 있다고 했다. 아이를 데리고 친구들끼리 만남을 가졌었다는 것이다. 멀티방은 공간을 빌려주는 곳이다. 방에는 커다란 티브이와 여러가지 게임기가 있었고 푹신한 소파가 놓여 있었다. 커피나 콜라 같은 음료가 무료였고 팝콘같은 약간의 과자같은 것이 맘대로 먹을 수 있도록 비치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어느 집의 거실 같은 오락공간을 꾸며놓고 맘대로 쓰라고 하는 셈이었다. 서로의 집에 방문하기에는 청소가 귀찮고 개인 공간의 공개가 껄끄럽다. 그러나 커피숍이면 아이들이 해결이 안되니 아내는 이런 곳에서 친구를 만난 것같다. 멀티방에 익숙하지 않은 두 남자는 요즘 세상에는 참 별 가게가 다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새삼 놀랐다.

 

오늘도 철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지난 번 내가 이야기한 가게안의 가게말인데. 나는 처음에는 내 생각이 참 새로운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같이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왠지 그런 가게가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리고 나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생각해 보니까. 아니나 다를까. 온라인 쇼핑몰이 그런거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온라인 쇼핑몰은 이미 이 세계에 엄청나게 퍼져있는거 아닌가. 그 생각을 하니까 좀 어처구니가 없더군.”

 

“맞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철진형이 생각한 것이 지금 세상에 있는 것과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유사한 것이 있지요. 그래서 하나의 예로서 생각할 여지도 좀 있었습니다. 온라인쇼핑몰은 말씀하신대로 가게를 하고 싶은 사람이 간단히 시작할 수 있게 만든 곳입니다. 창업을 하고 싶은 사람이 많으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곳이지요. 제가 이제까지 가게는 사상을 파는 곳이라고 했는데요. 온라인 쇼핑몰은 가게안의 가게를 파는 쇼핑몰이고 그 사상은 엄격한 평등주의라고 생각합니다.”

 

“평등주의?”

 

“현실 세계에서는 우리가 가게에 세를 내려고 하면 건물주를 만나야 하고 건물주와 세입자의 인간관계가 사업에 끼어들게 되지요. 그게 아니더라도 손님과 가게주인과의 관계는 물론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강력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온라인 쇼핑몰은 말하자면 사이버 아이디와 사이버 아이디의 만남에 관한 것이며 따라서 기존 사회에 있었던 여러가지 관습이 거의 사라지는 공간입니다. 주인이 잘생겼건 못생겼건 부자건 가난하건 남자건 여자건 늙었건 어리건 대부분 상관이 없으니까요.

 

이러한 특징은 단기간에 인터넷 상거래가 크게 증가하게 만드는 한가지 요인이었고 인터넷에서 가게를 하겠다고 사람들이 나서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런 사상에 크게 공감한 것이죠. 이런 인터넷 상거래는 앞으로도 더 커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강력한 사업모델의 하나로 앞으로도 오랜간 남아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는 이 상태가 영원히 갈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인터넷쇼핑몰은 어떤 의미에서 컨베이어벨트에서 물건을 대량생산하던 시대의 공장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습니다.”

 

“인터넷 쇼핑몰은 대량생산의 공장이다?”

 

“평등은 중요하지만 몰개성적이기도 하니까요. 당장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고 해도 기술이 발달됨에 따라 몰개성적 상거래의 마진률은 점점 더 떨어질 겁니다. 경쟁이 심해지기 때문이지요. 역시 가게는 사상을 파는 겁니다. 그러니까 몰개성적이 되면 팔 사상이 없는 거고 마진이 적은 장사가 되는 것이죠. 지금까지는 오프라인 거래에 비하면 물건을 온라인에서 판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온라인 거래가 확장일로를 걷다가 포화상태에 이르면 마진률은 점점 떨어질 겁니다. 예를 들어 가게는 쉽게 열지만 그것이 백만개의 가게중의 하나가 되는거라면 손님이 우리 가게에 올 확률은 지극히 떨어지게 되는 것이죠. 마진도 낮고 손님도 얼마 오지 않으면 가게를 계속하기 어렵죠. 진입장벽이 낮은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인터넷 쇼핑도 망하는 건가?”

 

“뭐 적어도 당장 그렇게 된다는 건 아닙니다. 대량생산하는 공장이 마진을 얼마 남기지 못하는 시대가 온지는 오래 되었지만 지금도 이 세계의 어딘가에서는 대량생산의 공장들은 돌아가고 있습니다. 또 인터넷가게들도 나름의 개성을 창출하겠죠. 인터넷 쇼핑은 분명 강력한 가게의 형태중 하나로 남을 겁니다. 다만 틈새가 있고 그 틈새는 점점 더 커질 것으로 생각되어진다는 겁니다. 그게 진짜 21세기 가게들이죠.”

 

“그 틈새라는게 어떤 건데?”

 

“저야 모르죠. 하지만 철진형이 이야기 한 것들에 답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내가 이야기한 것?”

 

“내가 행복했던 순간들에 대한 목록이 있지 않습니까? 그 안에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게 무슨 말일까. 철진은 어리둥절해 졌다.

 

“계속해봐. 그 안에 무슨 답이 있지?”

 

“일단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인터넷 쇼핑몰과는 또 다른 가게 안의 가게를 이야기 하는 게 좋을 것같습니다. 그러다보면 또 철진형이 저에게 답을 가르쳐 줄지 모르죠.”

 

“그런 가게가 또있어? 게다가 내가 가르쳐줬다고?”

 

철진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말일까.

 

“문제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가 문제죠. 철진형이 나에게 가르쳐 준건데 철진형이 모르겠다고 하시는 군요. 아. 전에 교토 이야기하셨잖습니까. 교토의 가게들은 교토에 사는 것은 좋다, 교토식의 삶이 좋다라는 사상이 크게 퍼져있는 가운데 그 안에서 영업을 하는거라고.”

 

그랬다. 가게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다가 가게는 사상을 파는 곳이라는 말끝에 철진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말하자면 가게안의 가게라는 겁니다. 교토시에서 시 전체를 관리하면 그 속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 나오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또 세금을 내니까 교토시가 수입을 올리기도 하는거구요. 그러니까 하나의 도시를 가게안에 가게를 가진 가게로 본다면 그 도시가 성장하는데 꼭 필요한 것은 그 도시를 하나로 모아줄 구심력있는 사상이라는 말이 되는 거지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사는 것은 아름답다라는 사상인 겁니다. 제주도도 오랜간 그저 신혼부부가 가는 섬 정도였는데 최근에는 치유열풍이 불었죠. 그리고 제주가 삶이 치유되는 장소라고 해서 인기가 엄청나게 올라갔습니다. 관광객도 많이 늘었고 사람들이 이사도 많이 간다고 하더라구요. 이게 사상의 힘입니다. 제주는 더이상 신혼때나 구경가는 섬이 아니게 된거죠. 치유의 섬이 된 겁니다. 사상이 풍부해야 돈도 버는 겁니다.  

 

하지만 사실 제가 더 관심을 가진 예는 따로 있습니다. 그건 보다 작은 마을 공동체들이나 상가공동체같은 곳이죠. 시같이 커다란 규모가 아니라 마을 단위나 어떤 상가골목이 공동체를 구성해서 그 곳을 관광지화 하는 겁니다.”

 

“그렇지. 그런 곳이 요즘은 굉장히 많지. 마을만들기도 하고, 재래시장 홍보도 하고.”

 

“그런데 관광지화한다는 게 뭘까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관광지화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사람들이 여러가지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멋지고 눈이 띄는 것들을 잔뜩 모으면 관광지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말하자면 여긴 부유하니 살기 좋다는 천박한 배금주의일 뿐입니다. 그런 것도 사상이지만 실상 별로 매력이 없는 사상이죠. 투자대비 효율이 좋지 못합니다. 엄청난 돈을 들여도 그다지 별로 매력적이 아닙니다. 무조건 케이블카 놓고 다리놓고 하면 그 도시가 발달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죠. 교토에 백층 유리 건물 올리면 교토의 사상은 죽습니다. 그러면 그 도시가 뭘로 먹고 살겠습니까.

 

천박한 사상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좀 다른 특성화를 노립니다. 예를 들어 1960년대나 1930년대 거리를 재현한 거리를 만드는 겁니다. 혹은 좀 더 역사적인 시대의 유물을 강조하거나 불교유적을 강조하거나 하는 식입니다. 아니면 이곳의 먹거리는 몸에 좋은 먹거리라고 해서 청정함을 강조하는 곳이 있고 양반이나 선비 문화같은 것을 강조하는 곳도 있습니다. 문학의 거리를 강조하는 곳도 있고, 화가의 거리를 강조하는 곳도 있지요. 전주에는 한옥마을이 있고 이제는 어디나 있지만 통영의 동피랑같은 곳은 벽화로 유명합니다. 이제 엘피판에 음악듣는 것은 시대에 뒤진 것이지만 그런 사람들만 잔뜩 모여서 거리를 채운다면 그런 거리는 낡은 오디오의 거리로 관광지가 될지도 모르죠.

 

일단 중요한 요점중의 하나는 자기 삶에 대한 주장이 있어야 하고 그 주장이 통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상을 파는 가게고 관광지화 된다는 의미라는 겁니다. 자기 삶에 대한 주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사색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죠. 자기들은 좋아하지도 않는 것들을 하면서 외지에서 온 손님이나 모아서 돈이나 벌려고 하는 식의 지역축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설득하려면 우선 자기가 믿어야 하지요. 이렇게 사는게 좋다. 이렇게 사는 재미있다. 그저 죽지못해서 살고 있는게 아니다. 외부에서 손님 안올거면 하고 싶지 않은 엉터리 축제를 하고 있으면 결국 매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철진은 자기가 흔히 보아왔던 많은 상가건물이나 상가거리를 생각했다. 그런 곳들은 무수한 가게들이 아무 규칙없이 난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좋게 말하면 그곳에는 뭐든지 있다는 식이 되지만 나쁘게 말하면 그것은 마치 서로가 서로를 밀치면서 서로 살겠다고 싸우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낭만적인 인테리어에 돈을 들인 커피숍이 있다고 해도 그 옆에 여자 접대부가 나오는 술집이 있거나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곱창집이 있다면 그 커피숍을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각자 자기 가게를 선전하려고 늘어놓은 간판이며 풍선같은 것들이 그저 잡다하게 보이고 때로 아이들에게 나빠보인다면 그런 곳에 패밀리레스토랑이 있어도 가기는 꺼림직 하다. 

 

게다가 그런 상가거리는 종종 지역적 특성이 없다. 횟집거리가 사막에 있건 바닷가에 있건 같은 비용이 들고 같은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지역적 특성을 발견하지 못한 채 여기가 두바이인지 뉴욕인지 부산인지 알수 없는 상가거리를 만들어 놓으면 엄청 비싸거나 아니면 뭔가가 부실하거나 그도 아니면 초기의 짧은 기간만 품질이 유지될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급격히 질이 떨어지는 상가가 될 수 밖에 없다. 서로 서로 출혈판매 할인경쟁으로 망해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상인도 소비자도 모두 좋을게 없다. 마찬가지 이유로 한국에 차이나타운을 만들거나 제 2의 파리나 제 2의 라스베가스를 만들어 1류관광지로 만들어 유지하는 것도 한계가 분명하다. 그 본질은 한국이 아니니까. 몸통이 있고서야 가지도 있는 것이고, 주인이 있고서야 손님도 있는 것이다.

 

“그렇네. 정말 그래.”

 

“그러니까 일단 우리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뭔가를 생각하고 그걸 하면서 살아야죠. 그것이 첫째고 둘째는 우리의 행복의 목록이 서로 공유되고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말해 행복의 이상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탄생되는 것이죠. 사람은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같은 게임을 하게 되는 것이고 같은 게임의 규칙을 존중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이며 그래야 가게 바깥의 가게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탄생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게 하나를 작은 사상이라고 부른다면 그 작은 사상의 바깥이 되는 더 큰 사상 즉 가게들의 공동체가 탄생되는 것이죠. 그래야 제대로 된 관광지가 되는 것입니다.’

 

“쉽지는 않아 보이는 군. 이미 가게들이 난립해 있는 곳을 정리하자면 그게 정리가 되기 어려울테지.”

 

“그렇죠. 아마 아예 기존에는 별로 인기없었던 지역을 새로 개발하는 쪽이 쉬울 것입니다. 이미 난개발로 엉망이 되고나면 이권이 서로 부딪혀서 그걸 풀어내는 것이 너무 어려우니까요. 이대로는 모두가 죽는 다는 것을 알아도 그걸 풀어낼 만큼의 강력한 신뢰는 만들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서로 못믿으니까 서로 발목을 잡다가 약해지는 것이죠. 약해질만큼 약해지면 거대 자본을 가진 기업같은 곳에 잡아먹히게 됩니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작은 규모라도 설득력을 가진 공동체나 문화적 핵심집단이 탄생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차차 거기에 동참하는것입니다. 즉 모두가 공감하고 나서 시작하는게 아니라 공감하는 작은 집단의 사람들끼리라도 먼저 행복하게 사는 것이죠. 행복은 언제나 설득력을 가지니까요. 사람들의 신뢰를 받는 지도자가 존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어야 적어도 초기에는 문화적 정체성이나 일관성을 지킬 수가 있으니까요. 서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접착제 역할도 하고 말이죠.”

 

“결국 희망이던 문제던 인간이 인간을 믿는 것이 핵심이로군.”

 

“그렇습니다. 그게 안되면 자본으로 신뢰의 담보를 제공하는 거대 기업들에게 모두 밀리는 것이죠. 어느 정도는 그게 당연하고요. 어떤 의미에서 거대 자본이 자본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들도 어떤 식으로 신용을 끌어 모아왔다는 것이니까요. 한쪽은 신용을 모아서 소비자에게 자기를 파는데 다른 쪽은 서로 못믿고 싸우기만 한다면 경쟁이 될 수 없는 것이죠. 거대자본에 의해서 모든 곳이 획일화되는 것은 아주 유감스런 일이고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만 결국 자기들끼리 신뢰의 공동체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책임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평상시에 지역민들끼리 뭐 하나 공유하는 것도 없이 살다가 대기업이 들어오니까 갑자기 지역상권을 살립시다라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한 것이죠. 갑자기 상인들이 나서서 지역주민들에게 우리는 운명공동체라고 말하면 주민들이 공감하기 어렵겠죠.”

 

“그렇겠지. 좀 전까지만 해도 거만한 태도로 비싸게 물건팔던 상인들이 갑자기 우리는 운명공동체라고 하면 누가 공감하겠나.”

 

“요즘엔 한국에 어린 아이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출산률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공동체가 붕괴하는 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란게 어른들을 묶어주는 힘이 굉장히 강하거든요. 부모들이 아이들때문에 새로운 일에 참여하고 다른 학부형들을 만나고 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란게 지역공동체를 묶어주는 역할도 굉장히 큽니다. 그냥 자기 집에 틀어박혀서 동네사람들 뭐하는 지 관심도 없을 어른도 아이를 키우다 보면 우리 동네가 어떤 동네이어야 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니까요. 그런데 아이가 없으니까 공동체가 없고 공동체가 없으니까 더더욱 살기 나쁜 곳으로 변해가는 겁니다. 아이가 없으면 어른의 미래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작은 생활공동체 같은 곳 이야기를 보다 보면 육아나 교육이 그 핵심이 되었던 경우를 많이 듣습니다. 성미산 공동체같은 곳은 가장 유명한 마을만들기 사례 중의 하나인데 거기도 아이들 교육때문에 뭉치게 된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하더군요. 아이가 없는 세상은 지옥이 되기 쉽습니다. 서로에게 무관심한 어른들이 사는 세상은 금방 지옥으로 변하니까요.

 

철진형은 상가건물의 축소판을 만들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결국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하신 것입니다. 행복에 대해서 비슷한 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그 행복의 사상을 파는 장소가 되는 것이죠. 철진형이 말하고 쓴 행복의 목록에 답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래서 입니다. 사람들이 철진형이 말하는 것에 어느 정도까지 공감하는가 그리고 서로의 느낌에 대해 얼마만큼의 신뢰를 가질 수 있는 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거의 대부분 믿음에 의해서 만들어 집니다. 맛있는 음식이라는게 결국 비싼 걸로 가면 끝도 없지만 싼 걸로 가면 밥에 김치에 계란 후라이정도라도 맛있자면 얼마든지 맛이 있거든요. 즐겁다는 것도 돈을 엄청들여서 세계 일주여행을 하고 유럽일주 여행을 해도 뭐 그냥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집에서 카드게임하고 노래를 같이 부르고 하는 정도로도 아주 즐거울 수 있고 말입니다.

 

문제는 어느 정도까지 거기에 몰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그린 버스나 가게에만 가도 크게 기뻐합니다. 어른들이 보면 별 차이가 없는 가게입니다. 그저 그림 몇개 붙인 것뿐인데 아이들에게는 전혀 반응이 다른 것이죠. 그들은 쉽게 그 세계로 몰입합니다. 그러나 사실 어른도 정도의 차이일 뿐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 몰입하는 것이죠. 애니메이션이나 동화의 세계는 환상이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이야기의 차이일뿐 직장이나 고향, 민족이나 국가라는 것도 그 본질에서는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사상적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죠. 결국 절제와 발산이 존재하는 게임이 되는 것입니다. 정성스럽게 만든 밥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행복한 세계가 됩니다. 극한의 정성을 들여서 명인이 만든 밥한공기를 먹겠다고 온갖 노력을 하고 그걸 먹으며 행복해 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 세계에 있는 사람은 그걸 밥한공기에 불과하다고는 말하지 않지요. 명품가구나 명품 옷을 좋아하는 여자들도 그렇고 작은 직장안에서 성공을 위한 싸움에 몰두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경계나 테두리가 없이 좋다는 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만들어 낸 테두리건 스스로가 그렇게 한 것이건 우리는 하나의 세계 혹은 하나의 게임을 만들고 거기에 몰두하는 것이죠. 게임의 규칙이 없다면 훌룡한 게임은 없는 것이고 하나의 게임을 게임 바깥쪽에서 바라보면 거기에는 온갖 제약과 불편함이 존재하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는 무슨 게임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죠.”

 

철진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자유나 게으름을 좋아하는 것같으면서도 또한 그 반대를 추구하는 존재다. 나는 자유가 좋아 산에 간다면서 산에 오르는 연습을 하기 위해 날마다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걸 휴식이라고 부르면서 여가시간에 텃밭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있다. 일단 하나의 세계에 빠져들면 그 세계안에서 보이는 세상은 그 세계밖에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노동이 즐거움이 되고 좁고 불편한 것은 낭만적인 것이 되고 위험한 것은 재미있는 것이 된다.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정도는 우리가 어떤 세계를 택하는가에 크게 달려 있다.


철진은 생각에 잠겨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좋은 말들이야. 하지만 이젠 내가 질문을 할 때가 된 것같아. 너는 너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더군. 너는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정작 나는 이렇게 사는 게 좋다, 나는 이런게 재미있다고 생각한다라는 말을 하는데에 있어서는 인색했거든. 주로 내가 말한 것을 이론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에 시간을 많이 썼지. 네 식으로 말하자면 네가 몰두하고 있는게 뭔가는 말하지 않았다고나 할까. 그게 아니라 이젠 내가 하고 싶은 것,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 그걸 말해보는게 좋을 것같은데. 그리고 그 깨진 거울이라는 이름말이지. 그 이름의 의미도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그걸 좀 들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는 철진은 오늘따라 안색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몸의 움직임에도 불편한 데가 있는 듯 움직임이 어색하기도 했다. 나의 행복이라는 말을 듣자 철주는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그게 나의 실패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는 너무 오랜동안 무엇이 옳은가라는 질문에만 빠져있었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라던가 자기 자신이 뭘 원하는가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가운데 사람들은 그저 숫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철주는 옳은 일을 하는 것에도 실패했고 그 일에도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철주는 이젠 과거의 길에 미련도 없었다. 문제는 미래가 지나치게 불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더 이상 지켜야 할 자신도 없었다. 그는 그저 떠다니고 있었다.

 

철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유리 벽

 

대학 시절의 일이다. 나는 은정이라는 동급생을 좋아했다. 은정은 유달리 매끈해 보이는 검은 머리와 그것 이상으로 강렬한 눈빛을 가진 여자였다. 나는 그녀의 하얀 피부가 좋았고 그녀의 오똑한 코가 좋았고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습이 좋았다. 그녀가 정직하고 사려깊은 여자로 보인다는 점이 나는 좋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장점을 보고 그것을 말해주는 재주가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가 말하기 곤란한 상황에 빠지면 그것을 재빨리 알아채고는 상황을 전환시켜주는 현명함과 상냥함도 있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좋아했다. 장점따위 없어도 타고난 미모가 있었던 그녀가 인기가 없을 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한 미녀가 아니었다. 사회문제건 역사문제건 어떤 주제에 있어서도 자기 나름의 지식과 의견을 가진 똑똑한 친구였다. 그녀는 여기저기에서 초대받는 인기인이었지만 매우 겸손하게 행동했기에 누구나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에 관해서 어떤 다른 점 보다 좋았던 것은 그녀가 나와 진호라는 친구를 더욱 각별한 관계로 대우해 주었던 것이다. 언젠가 부터 그녀는 그녀와 우리 둘을 합쳐서 삼총사라고 부르곤 했다. 다른 친구들이 그녀를 부를 때에도 그녀는 삼총사의 의리를 위해서라는 말을 남기며 우리와 시간을 보내러 오곤 했던 것이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고 어느 새 내 마음에는 그녀를 여자로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난 은정이가 좋다. 고백은 못했지만.”

 

언젠가 진호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그를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상담할 수 있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은정이에 대한 진호의 마음도 알고 싶었다. 내 말을 들은 진호의 반응은 그저 그랬다. 은정이가 꽤 괜찮은 아이이기는 하지만 뭘 또 그렇게 정색을 하고 빠지는가 하는 식이었다. 진호는 내게 잘해보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부터 상황은 오히려 내가 기대한 것의 정반대로 흘렀다. 어쩐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진호와 은정이만 둘이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둘은 남녀관계로 사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진호에게 그럴 수가 있냐고 따졌다. 내가 내 감정을 말 하던 때만해도 진호와 은정이의 관계는 나와 은정이의 관계보다 더 특별할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은 은정이와 친구관계 이상이 아니라면서 둘 사이가 남녀관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저 친구에 불과하다면 둘이 놀러가는 대신에 셋이 놀러가도 문제가 없을 터였고 진호가 어떤 다른 남자들과는 다른 특별한 대접을 받을 이유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리 뻔하게도 그들은 항상 기가막힌 우연의 일치를 계속 경험하는 것이었다. 항상 온갖 이유가 생겨서 어쩔 수 없이 둘만 동아리실에 남아 과제를 하거나 둘이서만 바닷가를 산책하거나, 은정이가 뭔가 먹을 것을 가져오면 그 친구가 제일 먼저 먹게되곤 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을 나는 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런 우연이 진짜로 우연일 리가 있냐고 지적하면 은정이는 정말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은정이는 진호는 나와는 다를 것이 없는 그저 친한 친구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그 둘이 연애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둘의 관계는 정말 은정이와 나와의 관계와 아무 차이도 없는 그저 친구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그 두명이 이런 저런 이유로 만나고 대화하고 어떤 일을 단둘이서만 하게 되는 것은 정말로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정말로 은정이에게 진호는 나와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마치 유령과 같았다. 그 둘이 결혼발표라도 하기전에는 어떤 증거도 그들이 연애를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 둘이 손을 잡고 다니는 것을 봤다는 사람이 있었는데도 진호는 은정이와 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단호히 부정했으니까. 그들은 쿨하고 진보적인 사람들이라서 손정도 잡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잠깐 기분좀 냈을 뿐 둘이서 정말 사귀는 것은 아니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들은 사귀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사귀는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사귀는 사람처럼 서로를 보고, 사귀는 사람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둘이서 사귄다는 결정적 증거는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귄다는 개념은 나와 미묘하게 혹은 크게 다르다. 어쩌면 그들은 정말로 자신들이 연애를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담백하고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구속하지 않고 언제든 지루해지면 다른 짝을 따라 떠날 친구, 그런 건 연애같이 끈적이고 책임감이 실린 그런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 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현실에 대한 설명에는 보다 쉽고 간단한 쪽도 있었다. 그것은 사실 그들은 연애를 하는데 그저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나를 기만하기 위해 말이다. 나는 이미 그들과는 달라졌다. 우리는 더 이상 삼총사가 아니다. 나는 단지 그걸 믿고 싶지 않은 것일뿐인지도 모른다.

 

다른 이야기도 가능했다. 그들은 사실 내가 진호에게 은정이에 대한 감정을 이야기하기 훨씬 전부터 남자와 여자로서의 끌림을 느끼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은정이가 진호를 일방적으로 좋아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삼총사로서의 우정을 깨기 싫어서 진호와 은정은 뻔한 거짓말을 하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답을 알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요즘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은정이는 아직도 독신이지만 진호는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결국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진실에 대한 어떤 정보를 주는 것은 아니다. 설사 그들이 결국 결혼했다고 해도 그럴 것이다. 그 시절과 지금은 시간적 간격이 있으니까 그들은 진짜 연애는 나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나는 안다. 아마도 찌질한 한 남자의 질투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맞다. 나는 질투했고 찌질한 남자였으니까. 아니 지금도 찌질한 남자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도 다 지난 일이며 내가 은정이에게 가졌던 감정도 이제는 사라진지 오래다. 나는 굳이 내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옛 이야기를 꺼내서 내가 찌질한 남자라는 것을 고백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것이 이 이야기의 목적은 아니다. 이제와서는 모든 일들이 그저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고 나는 그 사건의 진실에도 큰 관심이 없다.

 

다만 나는 이 이야기를 내가 느끼는 감정을 잘 설명해 줄수 있는 도구로써 사용하고 싶었다. 그 감정이란 바로 그 두 명의 남녀앞에 서있는 내가 느꼈던 어떤 벽에 대한 느낌이다. 나는 보고 듣고 느끼지만 그 투명한 유리벽을 결코 넘어설 수가 없었다. 진지하게 나는 너의 친구이며 나는 네가 좋아하는 여자와 사귄 적이 없다고 말하는 진호 그리고 그와 동조해서 말하는 은정이와 나 사이에는 분명히 어떤 벽이 존재했다.

 

나는 답답해서는 크게 소리를 치고 그 벽을 두들겨도 보지만 항상 나의 말은 그 벽을 통과하면 미묘하게 비틀어지다가 결국 힘을 잃고 만다. 나는 내 눈에 보이는 그들의 호의에 찬 얼굴과 아름다운 미소가 정말 호의인건지 아니면 나를 바보취급하면서 속이려는 거짓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항상 거기에는 누구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는 어떤 비밀이 있는 것같았다.

 

실은 진호와 은정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덜 심각한 편이었다. 그것은 그러한 현실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진호와 은정이라는 두 사람이 소수파이고 내가 다수파에 속하는 경우였기 때문이다. 시끄럽게 굴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본 적은 없지만 만약 그랬다면 다수의 사람들은 진호와 은정이가 나를 속인거라고 말할 것이다. 야 그럼 그거 사귀는거네, 그런 변명이 말이돼라고 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나는 현실에 대한 나의 해석이 유별날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내가 미친 사람처럼 느껴지도 않았다. 적어도 나는 소수파는 아니며 내가 느끼는 그 유리벽은 적어도 내가 숨쉬기에 충분할 만큼 큰 공간을 그 안에 가지고 있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학교를 떠나 세상에 나가서 발견하는 유리벽은 대개 그렇지가 못했다. 오히려 내가 소수파가 된다. 종종 서너사람이 모였는데 나는 내가 소수파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 서너명이 단 한 사람인 나를 바보나 얼간이 처럼 만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의 미소가 때로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나도 그들도 어떤 악의를 내비치지 않지만 말이다. 실제로도 나는 거기에 어떤 악의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아주 쉬웠고 찜찜했다. 평화와 호의는 아주 위태로운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사소한 일이 우리사이에 존재하는 위태로운 균형을 깨버리고 호의는 악의로 변할 것같았다. 적어도 세대차이라는 것을 느껴본 사람들은 이런 느낌을 잘 알것이다. 어린 학생이나 노인들 사이에 끼어 있다보면 갑자기 자기가 바보가 된 느낌을 받게 되지 않는가? 웃으면서 말하고 있어도 왠지 이야기가 길어지면 불쾌한 일이 벌어질 것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내가 본 세상은 이해하기 힘든 곳이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학대를 당해도 피학대자는 학대를 하는 사람을 선택하고 지지한다. 부자는 가난뱅이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데 가난뱅이가 부자들 재산을 걱정하고 있었다. 불쌍한 사람이 불쌍한 다른 사람을 더 불쌍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아부를 하면서 사는 것같았는데 스스로는 그것을 아부라고 느끼지 않는 것같았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은 그냥 관습이고 원래 그런 것이고 그저 예의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관습은 여러가지 이유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지는 않는 것이다. 나의 관점에서는 그것들은 대개 일관성이 없었다. 따라서 합리적일 수 없었다.

 

사람들의 태도는 진호와 은정의 경우가 그런 것처럼 위선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들에게는 아마 내가 위선적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질문 중의 하나는 이것이다. 그렇게 살면서 당신은 행복한가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많은 사람들은 행복하게 사는 것도 아니었고 고통받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겪는 고통과 문제의 대부분은 그들이 특별히 게으르다거나 비윤리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유리벽때문에 생겨나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들이 일관성과 섬세함을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생기는 것처럼 보였다. 내게는 그것이 지극히 이상한 삶의 방식이지만 그들 스스로에게는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나는 소통과 혁명을 꿈꿨다. 애정때문이다. 사랑하는 부모가 이상한 집착에 빠져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을 때는 아주 난처한 상황이 된다. 사랑하니까 등을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전혀 합리적이지 않아보이는 그것이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을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분들 앞에서 나는 다시 유리벽을 느낀다. 나는 마찬가지의 것을 이 세계를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느꼈다. 나는 그 유리벽을 깨고 싶었다. 내가 그 사람들에게서 등돌리고 그들의 일에 대해 잊어버릴 수 없다면 그들에게 내가 보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었다. 통상 의견의 차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와 내가 의사소통은 되는데 선택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살인을 하는 사람을 잡았는데 그 사람도 살인이 나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뭔가 다른 이유로 하기 싫지만 살인을 했다는 것이면 나는 유리벽을 느끼게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살인이라는 행위는 나쁜 것이다라는 것이 묘하게 재해석되어 그 살인범의 마음에 조금의 꺼리낌도 없고 오히려 스스로를 피해자로 생각하는 경우에 이르면 이건 유리벽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일단 살인이 나쁜 것이라는 것을 설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많은 사람은 닭을 죽였다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을 닭처럼 생각하는 인간을 만난다면 나같은 사람은 벽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기 저기에 무지의 벽을 세웠다. 그리고 그 너머는 원래 그런 것이고, 당연한 것이고, 그들은 그렇게 태어난 것이라는 말을 하는데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소통은 어려웠다사람들은 절대 바뀌지 않는 같았고 삶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삶에 중독되어 있는 것같았다개혁을 꿈꾸면서 개혁가를 죽이는 것이 개혁이라고 믿었다진리를 위해서는 언제나 거짓이 필요했다나는 조금씩 지쳐갔고 일을 그만둬야 했다나는 종종 산속의 토굴같은 곳에서 혼자 사는 것을 꿈꾸게 되었다소통은 불가능하고 유리벽은 언젠가 나를 때려죽일 무기로 변할 것같았다종종 불쌍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친근하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두렵게 느껴지기도 했다그들은 선의로 가득차 있지만 나를 유리벽 아래에서 질식하게 해버리지 않을까그들의 미소는 이렇게 말하는 같았다. ‘순진한 친구머리가 약간 돌았구만이리오게내가 머리를 고쳐 줄테니.’ 확실히 나는 미친 사람이었다그들의 관점에서는 말이다그리고 물론 관점에서 미친 것은 그들이었다방법은 없었다나는 원래라는 말에 지쳤다나는 세상을 떠나야 했다세상으로 부터 숨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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