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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고전 읽기

솔제니친의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5. 11. 29.

15.11.29

솔제니친의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는 내가 어렸을 적에 가장 좋아하면서 읽었던 책중의 하나다. 도대체 어린 시절의 나는  이 책의 뭐가 좋았을까. 기억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이제와서 어렸던 내가 왜 이 책을 좋아했는가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다만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은 결과 지금도 나는 이 책을 좋아한다는 것만 발견했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이 책에 대해서 좋아하는 점을 약간 적어볼까 한다.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정치범들을 모아놓은 강제수용소의 이야기다. 이것은 물론 냉전시대에는 소련에 대한 정치적인 비판으로 인식되었고 그래야 마땅한 책이다. 솔제니친이 1970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것에는 이런 부분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아뭏튼 그는 그의 조국에서는 작가자격을 박탈당하고 추방당한 작가였고 소련붕괴이후에나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부분은 이제와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뿐이라면 이 소설의 가치는 21세기에는 한없이 낮을 것이다. 이제와 소련을 비판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이 보여주는 세계가 보통 사람들이 사는 세계와 얼마나 닮았는가 혹은 얼마나 틀린가 하는 점이다. 

 

이반데니소비치는 강제노동수용소에 있다. 그것도 극한의 추위와 굶주림과 고된 노동과 싸워야 하는 수용소이다. 영하20도면 따뜻한 수준이고 먹을 것도 없으니 사람들이 불평하는 요즘의 군대생활도 여기에 비하면 천국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운이 좋으면 10년 대부분은 25년식의 형을 받고 여기에 수감되어있다. 그러나 실은 그 형기가 끝나도 집에는 돌아갈 수 없다. 심지어 이제와서 집에 가도 그 삶이 꼭 행복하리라는 기대도 할 수없다. 그러므로 작은 희망을 제외한다면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무기수로서 수용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 소설이 가진 가장 극적인 장면들중 하나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열심히 벽돌을 쌓아올리는 광경이다. 솔제니친은 수용소안에서도 사람들이 보람을 가지고 일하고  인간적인 우정을 나누기도 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을 보여준다. 모두가 힘들어 하고 집에 살아서 돌아갈 희망은 한없이 작지만 고통이 전부는 아니다. 거기에는 인간적인 분노와 싸움이 있지만 매일 매일과 매순간이 절망과 분노로 채워져 있는 삶은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수용소의 삶을 낭만적으로 그린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의 삶은 평범하고 거의 행복한 수준이다. 그것은 많은 셀러리맨이나 자영업자, 입시생이나 연구소의 연구원들의 삶과 매우 다르면서도 또 어딘가 닮아 있다. 

 

물론 수용소에서는 바깥세상의 가치가 붕괴된다. 그래서 영국제독을 알고 지내던 사람이나 큰 배의 함장씩이나 하던 사람들이 권위를 가지기는 커녕 어리숙한 인간이 되기도 하고 달이 매일밤 다시 만들어진다고 알고 있는 무식한 농부가 노련한 삶의 선배로 살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바깥세상은 개인들이 자신들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보다 큰 자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곳이지만 수용소안에서는 자유가 거의 없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면 영창에 들어가게 되는 곳이며 그렇게 힘들게 일해도 그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은 그들의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사람들의 계획이란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들은 얼어붙은 땅을 곡괭이로 파라고 한다. 얼어죽는 것을 피하기 위해 건물의 창을 막을 재료도 주지 않고 일을 시킨다. 애초에 그들이 그 수용소에 들어오게 된 사정도 부조리하기 짝이 없다. 사실 소설속의 사람들이 들려주는 인생역전 이야기를 듣다보면 사람들의 삶은 운명앞에서 아주 힘없이 뒤집어지기 마련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불합리로 가득차 있으며 그것이 실질적으로 탈출할 수 없는 무기형이라는 점에 있어서 수용소의 삶은 많은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 닮아있다. 소설의 배경이 수용소라는 것을 알고 책을 읽지만 그래도 우리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드라마가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와 비슷한 일들이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도 불합리가 있고, 고통이 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우리의 삶에 갇혀 있다고 느낀다. 인간은 놀라운 적응력이 있다. 그래서 때로 극한의 환경차이도 때로 큰 차이가 아닌 것처럼 생각되게 된다. 사람사는 곳은 어디나 같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평범한 독자의 일상과 수용소의 삶에 있어서 주목해야할 큰 차이는 오히려 테두리의 인식에 있다. 수용소 안의 사람들은 수용소 바깥을 알고 있다.  즉 그들의 삶이 유일한 방식은 아니라고 알고 있다. 그들은 탈주가 무리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살아서 출소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수용소라는 공간에는 바깥테두리가 있고 그 바깥에서는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잔인한 간수의 행동에 대해 항의하기도 하고 그런 중령을 동정하고 보살피기도 한다. 그들은 수용소의 규칙에 최대한 적응하면서도 또한 완전히 의식없는 존재로 살아가지 않는다. 수용소의 간수에게 밀고를 하는 밀정은 죽어 마땅한 놈으로 생각된다. 수용소는 이중부정의 공간이고 이중긍정의 공간이다. 그 안에서는 바깥세상의 가치가 붕괴되지만 수용소의 규칙이 완전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동시에 바깥 세상에 대한 기억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면서도 수용소의 현실에 적응하는 문제는 살고 죽는 문제로 중요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양쪽을 다 기억하기 때문에 어떤 삶의 규칙이든 그것이 모두 임시적이며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수용소안의 것은 물론 수용소 바깥의 지위나 지식도 말이다.  상황이 바뀌면 그까짓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다.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이렇게 테두리를 경계로 갈라진 두개의 세계를 보여주고 그 양쪽을 다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따뜻한 집에서 배불리 밥을 먹는 사람들의 삶과는 물론 다르지만 어떤 의미에서 교도소의 삶이 가지는 진정한 차이는 배고픔이 아니다. 만약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자신의 삶에 완전히 갇혀서 그 바깥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오히려 이반데니소비치보다 더욱 더 곤란한 상황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솔제니친은 갇혀 있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이 소설이 시간에 따라 사라지지 않는 강한 설득력을 가진 것은 그것이 소련의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갇혀 있지 않는가라고 질문을 던지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수용소의 삶이 평범한 독자들의 삶과 얼마나 다른가가 아니라 얼마나 충격적으로 비슷한가를 보여줘서 그렇게 느끼게 만든다. 

 

이반데니소비치가 있는 수용소같은 환경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아직 아무도 길에 다니지 않는 이른 새벽에 바깥에 나와서 어딘가로 가야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입시때의 일일 수도 있고 대학원이나 신입사원때의 일일 수도 있으며 아이들을 위해 일찍 일어난 것일 수도 있고 장례식이 있어서 였을 수도 있다. 그런 날의 기억속에 있는 우리를 보면 그것은 놀라울정도로 강제노동수용소의 죄수들을 닮아 있다. 우리도 알 수없는 운명때문에 현재의 삶에 던져져서 갇혀있게 되었다고 느낄 때가 많다. 

 

이반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우리는 잠시나마 우리삶의 바깥쪽을 인식하게 된다. 비록 우리가 탈출하고 싶다고 해도 간단히 삶을 탈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무리해서 탈출하는 것만이 답도 아니다. 다른 삶도 어떤 의미로 또다른 감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안과 바깥을 모두 인식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핵심적이다. 그것은 또한 희망의 근원이기도 하다. 솔제니친을 읽는 것이 여전히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더해주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책을 읽고 내려놓으면서 나는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언젠가는 다시 또 읽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책은 그런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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