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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고전 읽기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7. 9. 21.

17.9.21

무지한 스승은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가 1987년에 발표한 것이다. 1940년에 태어난 그는 68운동을 거친 후 1970년대 초반부터 노동자의 글들을 살피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 책은 그런 과정을 거친 끝에 50살이 다 된 노회한 사상가가 된 랑시에르가 쓴 것이다.

 

19세기 초반 네덜란드에는 망명한 프랑스인인 조제프 자코토라는 사람이 있었다. 망명한 프랑스인이었던 그는 네덜란드어를 모르면서 프랑스어를 모르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수업을 해야하는 입장에 처했다. 그 때 자코토는 네덜란드 프랑스어 대역 책 한권을 정한후 첫장의 절반정도까지는 학생들이 그걸 외우도록 했다. 그리고 책의 나머지는 대충 말할 수 있을 정도까지만 읽은 후 프랑스어로 작문한 것을 제출하도록 했다. 프랑스어 문법도 책의 내용도 선생이 가르치지 않고 학생들이 스스로 원문과 번역된 문장의 상호대조를 통해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그걸로 작문을 하도록 한 것이다. 이 불가능해 보이는 실험은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다는 결과를 낳았다. 학생들은 스스로 선생이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을 배우고 작문을 제출했다. 

 

무지한 스승은 이 자코토가 시작했던 보편적 가르침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었나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진정한 교육과 사회적 진보란 어떤 것이어야만 하는 가를 말하고 있다. 그 내용은 놀라울 정도로 짧게 요약될 수 있는데 작가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한마디로 그것은 ‘해방’이며 약간 더 길게 인용하면 ‘불평등한 세상에서 평등한 인간들이 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당혹스럽다고 해도 곤란할 것은 없다. 책은 이 내용을 길고 자세하게 그리고 조제프 자코토라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함께 설명하지만 사실은 작가는 스스로 이 책에서 설명이란 어디까지나 제한적 의미밖에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의 해설은 그 자체가 따로 또 해석이 필요한 예술작품같은 것이며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작가가 말하는 내용을 한 단어만으로 알겠다고 느낄 수도 있고 모르는 사람은 책을 여러번 읽어도 알 수 없을 수도 있다. 이해에 도달하는 것은 설명만으로 되지 않는다. 엄격히 말하면 그것은 언제나 비약과 개종을 요구한다. 물론 랑시에르가 길게 책을 쓰고 있는 이유는 그 비약을 조금은 짧은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설명이 길어진다고 그 비약이 점점 더 짧아지지만은 않는다. 시보다 소설이 길다고 반드시 모든 소설이 모든 시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랑시에르가 요구하고 있는 비약과 개종은 주로 인간 이성의 평등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을 말하자면 이성의 차원에서 평등한 존재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주의하게 듣는다면 민주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인간평등의 메세지를 워낙 많이 들어서 이제 이런 메세지는 진부하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요구하는 시각으로의 개종은 적어도 아직은 21세기의 한국에서 현실화되지 못한 것이며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책의 제목이 무지한 스승인 이유는 인간의 이성이 평등하다는 관점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개념이 거의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학생은 이미 스스로 이성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스승이 사과의 모습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는 사람이라면 무지한 스승은 그저 눈을 뜨고 사과를 직접 보라고 말할 뿐이다. 학생의 눈을 지적하면서 너도 눈이 있으니 그걸 써서 직접 보라고 말할 뿐이다. 결국 랑시에르가 말하는 해방이란 한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가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게 만드는 것 혹은 이성적 긍지를 가지게 하는 것이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에서 왠지 선불교의 이야기와 비슷한 것을 느꼈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뭏튼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궁극의 평등을 말하며 그것을 깨달으라고 하는 것이 불교가 아니던가? 

 

긍지란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역사적으로 여성문제나 흑인노예문제를 통해서 이것을 경험 했다. 어딘가가 모자란 여성이나 흑인을 돕는 능력있고 자상한 남성이나 주인은 그들을 돕는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긍지를 빼앗아서 그들이 계속 노예로 살도록 한다. 진정한 도움은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그것은 당신은 나와 다르지 않다 즉 우리는 평등하다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의 이성은 작동하고 결과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그것이 해방이다. 

 

또다른 예도 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한 인간이 가지는 재산이나 직업적 지위는 그 인간의 근본적 가치와는 다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실제로 돈을 벌었다고 해도 그 돈은 인간개념의 핵심바깥에 존재한다. 누군가가 1억짜리 옷을 입었다는 것이 그 인간의 근원적 가치를 올려주지는 않으며 그래서 그런 옷을 입었다고 해서 사회적 존경을 받거나 투표할 때 2표를 행사할 수 있거나 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정상인들사이에서는 말이다. 인간으로서의 본질적 긍지에서 그런 것은 완전히가 아니면 대부분 빠져 있다. 재물은 소유의 주체에게 소유되는 것이지 인간의 본질의 일부가 아니다. 

 

그런데 이에 비하면 우리는 종종 지식의 소유를 이성과 혼동한다. 예를 들어 과학과 과학하기 혹은 철학과 철학하기는 서로 다르다. 과학하기나 철학하기는 삶의 태도나 방식이며 근원적인 능력이다. 따라서 우리가 과학하는 사람을 과학자라고 부르고 철학하는 사람을 철학자라고 부른다고 할 때 과학책이나 철학입문서에 나오는 내용을 단 한줄도 몰라도 우리는 스스로를 과학자나 철학자로 자부할 수 있다. 반대로 과학이나 철학적 지식이 넘치지만 사실은 과학자나 철학자가 아닌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을 철학오타쿠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산더미처럼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 자체가 인간의 이성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오래전에 기계보다 열등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컴퓨터가 이미 인간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랑시에르가 인간 존재의 핵심을 스스로 생각하기나 의지로 파악한 것은 이런 면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이 이야기들은 물론 그럴 듯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쉽게 자코토나 랑시에르가 말하는 태도로 개종하지 못한다. 사실 세상은 대개 거꾸로 말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의 질서는 무너지지 않겠는가? 세상의 질서는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아는 것이 있는 사람에게 배움으로써 지켜지고 있지 않은가? 이런 태도가 무너질 때 세상은 엉망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언론은 역시 소수의 검증된 지식인들의 말만을 전달해야 하지 않겠는가? 무수히 많은 보통 네티즌의 말은 상대적으로 가치없는 것이 아닌가?

 

랑시에르는 기성사회의 안정성에 대해 말할 때 현실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과는 반대라고 말한다. 즉 해방이 기성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해방된 사람들없이는 기성질서가 유지되질 않는다. 인간의 평등을 믿는 해방된 사람들은 모든 고정된 사회적 가치와 조직을 그저 임시방편적인 것으로 여기지만 완전한 무질서보다는 그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킨다.  즉 그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불평등이나 차이를 필요악으로 여긴다. 해방된 사람들은 기성질서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것을 존중하고 이용한다. 랑시에르는 해방된 사람은 소크라테스처럼 죽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사회가 변론술을 요구한다면 해방된 인간은 그것을 익히고 살아남아 고고한 순교자처럼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해방된 사람들이 기성질서에 맹종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소통속에서 이성을 발휘하여 더 좋은 질서를 찾아낼 것이다. 오히려 사회적 질서를 불안하게 만드는 쪽은 해방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성질서의 원리를 맹신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를 지키지 못한다. 순혈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극한충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좋은 예일 것이다. 세상의 질서는 사실 해방된 사람들이 조용히 그것을 지키기 때문에 유지되고 있다. 민주화가 이뤄진 후 가장 반민주적이었던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열매를 과도하게 탐식하는 것을 봐도 이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자부심과는 달리 세상이 굴러가는 것은 겸손하게 세상을 지켜주는 해방된 사람들, 이성적인 인간들이 희생을 감수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에게 해방과 이성은 이음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해방이 없는 이성이란 있을 수 없다. 이성이 없이는 기성질서도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해방되지 못한 사람들이란 반드시 낡은 보수주의자들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에 빠지는 사람은 모두 해방되지 못한 사람들이며 그것이 매우 진보적인 이데올로기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낡은 계몽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중의 누군가는 소중한 지식, 정보, 진리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 진리를 그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퍼뜨려야 한다. 예를 들어 많은 진보적인 시민들에게 우매한 민중들에게 정의가 뭔지, 민주주의가 뭔지를 가르치는 작업이야 말로 세상을 개혁하는 일의 핵심적 과제로 종종 생각되어 진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육이나 설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의 전제로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존재를 가정한다. 즉 가르침이 시작되기도 전에 평등의 인식은 깨어지며 이런 시작은 교육을 이미 학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스승을 능가할 수 없는 모자란 인간으로 만드는 작업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소크라테스를 거듭 비판한다. 소크라테스는 노예에게 질문을 던져서 노예가 어떤 진리를 깨닫게 했지만 그것은 마치 말을 모는 기수같은 태도였다. 이 과정에서 노예는 말처럼 조종당했을 뿐이기 때문에 해방되지 못한다. 즉 자신에게 진정한 긍지를 느끼게 되지 않는다.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꿈꾸는 한 우리는 사람들을 깨어나지 못하게 막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해방이 무엇인지는 참으로 이해하기 간단하면서도 무한히 어렵다. 자코토의 교육적 방법은 19세기 초반에 상당한 효과를 보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새롭고 진보적인 것으로 여겨진 것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코토의 방법에 열광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의 본질을 보는데 실패했다. 해방시키기는 시스템으로 만들어 질 수 없으며 오직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만 일어난다. 그것은 공교육의 일부가 되거나 어떤 메뉴얼에 포함된 것이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누군가를 진짜로 무시하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긍지를 가지게 만들 수 있는 존재는 개인으로서의 인간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나 어떤 메뉴얼대로 행동하는 개인이 부모의 사랑을 줄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커피메이커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 

 

어떤 스승이 어떤 학생에게 넌 괜찮아라고 말해 주는 순간 그 학생은 스스로를 스승과 동등한 존재로 느끼고 학습의 성과를 내는 일이 있을 수는 있다. 어떤 학생은 어떤 여행을 혼자서 하고 나서 자기 자신을 새롭게 보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걸 메뉴얼로 만들어서 기계가 학생들에게 넌 괜찮아라고 말하게 하거나 모든 학생은 의무적으로 어떤 여행을 하도록 만든다면 그것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진짜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진실로 평등하다는 믿음말이다. 그것을 줄 수 있는 것은 해방된 인간뿐이다. 

 

마지막으로 오늘날의 현실에 대해 몇마디만 하자. 해방하는 교육은 입시시험에 찌든 한국의 현실과는 물론 매우 다르다. 교과서가 정답을 말해주는 공교육은 매일 매일, 매순간 매순간 학생들에게 너는 틀렸다라고 말하고 사회가 말하는 정답의 모양을 갖출 것을 학생들에게 요구한다. 학교만 그런가? 한국 사회는 학교바깥에도 권위주의적 차별이 넘쳐난다. 그 극적인 예는 소위 갑질이라고 부르는 횡포들이겠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도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이름들로 서로를 부르면서 차별한다. 미국인들은 같은 대학 졸업생들이 서로 친한데도 선배 선배부르는 것이나 부장님, 회장님하고 부르는 모습을 기괴하게 생각한다. 이것이 해방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이런 사회에 대해 랑시에르는 이 책을 통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성을 억압하는 사회. 우리는 사실 다 똑똑하다. 뭐가 옳은지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을 차별한다. 차별받은 인간은 종종 짐승이 되고 그 인간평등에 대한 체념이 결국 우리의 이성을 망하게 한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것은 완전히 새롭지 않다. 앞에서는 선불교나 철학과 철학하기의 차이에 대해서 말했지만 양명학연론을 쓴 정인보가 주자학때문에 조선이 망했다고 말하는 메세지와도 랑시에르의 메세지는 깊은 연관이 있다. 양명학에서 말하는 지행일치와 모든 인간은 양지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랑시에르의 메세지와 거의 같다. 정인보가 말하는 주자학의 문제는 해방되지 못한 진보주의자들의 문제와 거의 같다. 요즘 우리 사회에도 진보적 이데올로기가 넘쳐나고 좋은 책들과 메세지들도 많다. 하지만 우리가 꼭 필요한 것이 여전히 없다. 그게 없어서 조선이 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지가 한참인데도 없다. 주자학자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주자학자와 같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에게 없는 것, 그것이 해방이다. 우리는 사회는 이성적이 되기에 그것이 너무 부족하다. 

 

무지한 스승은 인공지능의 시대에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진다. 인간만이 하던 일을 기계가 대체하는 시대는 우리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절박하게 던진다. 육체노동이 인간존재의 의미라면 트랙터나 자동방적기같은 것이 나올 때 많은 인간은 존재의미가 없어졌을 것이다.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는 것이 택시 운전사의 존재의미의 전부라면 자동운전이 보편화되면 그런 인간들의 생사는 외면당할 것이다. 기계가 지능적이 되는 시대는 인간의 해방을 요구한다. 이성의 본질이 뭔지, 인간의 본질이 뭔지 묻는다. 거꾸로 말하면 해방이 없을 때 아주 많은 사람들은 쓰레기처럼 버려질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이 질문과 답을 거듭 반복하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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