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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고전 읽기

화이트 헤드의 과학과 근대세계를 다시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9. 11. 5.

오랜만에 화이트헤드의 과학과 근대세계를 다시 읽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절반만 상대성 이론 부근까지만 읽었는데요. 왠지 이 책은 여기까지만 제 흥미를 유지시켜주는 면이 있는 것같습니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흥미있게 생각한 부분들에 대해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몇자 적어 볼까 합니다.





화이트 헤드는 버틀런트 러셀과 함께 연구를 했던 수학자였습니다. 그의 스승뻘이었죠. 이 책은 그가 60대의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의 철학과 교수가 된 후 행한 연설을 책으로 만든 것으로 책이 1925년에 나왔으니 이제 거의 100년이 된 책입니다. 당시는 특수 상대성이론이 나온지는 20년이 된 때였지만 양자역학은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가 행렬역학을 발표한 것이 1925년이었으니까 오늘날의 사람들이 듣는 양자역학의 이야기를 비전공자들이 제대로 들으려면 한참 시간이 지나야 했을 것이며 소립자 이론이나 우주론 그리고 통일장 이론같은 이야기는 아직 없었을 때입니다. 사실 1차세계대전이 1918년에야 끝났고 당시는 요즘처럼 통신이 발달이 안되었으니 여러가지 학문적 성과가 바로 바로 퍼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걸 생각하면서 이 책을 읽으면 사실 화이트헤드의 지적 능력에 대해 새삼 놀랍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본래 직업적 수학자였던 화이트헤드는 인류의 발전에서 수학의 역할을 햄릿의 햄릿은 안되도 오필리아쯤은 된다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상당히 겸손한 것같지만 그의 책을 읽어보면 사실 수학은 만물의 중심에 있다는 인상을 가지게 되니 역시 수학자는 수학자인 것같습니다. 


제가 이번에 흥미를 느꼈던 것은 그가 이 책에서 수학의 추상성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물고기 한마리나 양 한마리는 모두 1이라는 숫자로 표현되죠. 즉 사물에서 추상적인 어떤 부분을 추출한 것이 수학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추상성 때문에 수학은 다른 어떤 언어보다도 더 엄밀하고 시간에 흐름을 오래 견디는 성질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이런 추상성의 영원함을 전자나 수소원자의 영원함과 서로 똑같음과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 책이 전하는 중의 메시지 중의 하나는 과학의 물질주의가 잘못이해한 구체성의 오류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학의 추상성을 통해 세계를 바라 본 사람들이 바로 그 추상화된 것을 현실과 동일시 한다는 뜻입니다. 좋은 예는 바로 기하학이죠. 삼각형이나 원은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정의되고 분석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현실 세계의 삼각형과 같은 것으로 착각하고는 하지만 그건 엄밀히 말해 사실이 아닙니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당연한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다른 무엇보다도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등장하면서 잘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구체성에 대한 오해란 말했듯이 물질주의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어떤 물질이 시간과 공간의 한 점에 고립되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물질주의에 익숙해서 그게 오류라는 말이 어리둥절할 수도 있지만 그런 성질은 실은 본래는 수학적 추상성에서 기원한 것인데 그것을 사람들은 현실 그자체로 믿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현실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 물리 이론이 바로 양자론이었습니다.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생명문제의 연구같은 것이 물질주의적으로 접근했을 때 알 수 없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오류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그렇다면 동양인들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을 말하는 노자같은 사람에게 익숙합니다. 플리톤의 이데아론도 그렇고, 화이트헤드가 지적하는 물질주의의 오류도 그렇고 문제는 이름과 추상을 현실과 오해하는데서 나옵니다. 그런데 동양사람들은 일찌감치 도를 도라하면 도가 아니다라던가 새옹지마의 이야기같은 것을 듣고 자랍니다. 그러니 서구 사람들이 가지는 정신적 오류의 문제가 어느 정도 미리 면역되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화이트헤드 역시 수학자이자 서구사람이라서 인지 추상성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결국은 추상성을 사물의 핵심에 놓는 철학을 전개합니다. 이는 얼마전에 소개 동영상을 만든 적이 있었던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에서 계속 반복된 주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양자역학의 아버지였던 하이젠베르크는 만물의 중심에는 물질이 아니라 수학적 추상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에 대해 책 전체에 걸쳐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이트헤드의 책을 읽다보면 우리는 결국 진리를 수학을 써서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수학이 인간의 언어중 가장 엄밀하며 가장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추상적인 언어를 써야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이 추상이지 현실 그 자체는 아니라서 한계를 가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만 할 따름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일상에서 친숙한 물질주의 즉 사물은 물질로 되어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물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질량이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압니다. 원자탄이야기가 나오면 말해지는 E=MC^2의 공식은 가장 유명한 물리공식이죠. 그는 19세기에 이르러 물리의중심이 물질에서 에너지로 전환되면서 물질주의가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물리이론이란 결국 수학적 추상성을 바닥에 깔고 있는 이론이죠. 


물질주의 즉 사물은 변하지 않는 원소들로, 물질로 이뤄져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세상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이라고 말해줍니다. 그것은 우리의 망상처럼 허깨비로 없어지지 않는 객관적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 물질주의가 불충분한 추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넘어서면 이제 모든 것이 더욱 추상화되고 모든 것이 액체처럼 흐물흐물해 보일 것같습니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가 그의 책에서 집중하는 것은 어떻게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 영원한 것들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의 설명은 그것이 피드백에 의해서 만들어 지며 그 피드백이 이뤄지는 과정을 진화과정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타인들에 의해서 만들어 지고 타인들도 모든 다른 타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세계가 그가 묘사하는 새로운 형이상학적 세계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진화론을 단순히 적자생존으로 파악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진화론을 이해할 때 사람들은 어떤 환경이 주어지면 그 환경에서 가장 잘 살아남는 녀석이 후손을 남긴다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실은 환경과 나의 구분은 무의미합니다. 왜냐면 내가 환경에 적응하고 환경이 나를 만드는 것만큼 환경이 나에게 적응하고 내가 환경을 만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예가 인간입니다. 지금의 인간의 수와 능력을 보면 지구의 환경에 잘 적응해서 인간이 번성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지구환경을 인간에게 적합하도록 바꿔왔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구가 인간에게 적응하려고 고생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적자생존이나 가장 뛰어난 자가 생존한다는 개념은 불충분하다고 이미 백년전에 화이트헤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를 쓴 일리야 프리고진보다 반세기 이상전에 이 책을 썼지만 그의 책을 읽고 있으면 그는 이미 생명을 스스로를 조직하고 유지하는 현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그의 생각은 참으로 시대를 앞서서 심지어 지금도 우리는 그의 상상력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20세기 초에 이미 물리학의 발전과 특히 생물학의 발전으로 인류는 물질주의로 말해지는 과거의 형이상학을 버리고 완전히 다른 과학, 다른 사고를 하게 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윈 쉬뢰딩거가 그보다 뒤에 쓴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기본적으로 생명현상을 유전자라는 분자 즉 물질이 일으키는 현상으로 이해합니다. 지금의 뇌과학도 여러가지 뇌의 기능을 설명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찾으려고 한다는 면에서 역시 그가 말하는 새로운 과학의 수준에는 도달하고 있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20세기이래의 뛰어난 생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물리학에서의 고전역학 같은 생물학이 여전히 세상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지적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나온 이래 우리의 사고방식은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세상은 아직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 대단한 기술적 과학적 발전도 불충분했던 것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화이트헤드는 과학적 발전과 정신의 발달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거나 시대를 너무 앞서간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가 책을 낸지 백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물질주의는 굳건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2000년에 액체근대라는 책을 통해 현대의 삶을 묘사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과거의 물질주의가 흔들리기 시작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피드백의 강화로 인해서 새로운 시대가 출현하는 시대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바닥없이 출렁이는 것같은 느낌을 주고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환경위기로 인류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면 사람들의 생각은 또 달라질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인공지능같은 새로운 도구가 과거의 과학을 결정적으로 끝장내고 이제 새로운 과학과 학문을 꽃피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낙관론일 뿐이죠. 사실 철학자의 말이란 아무리 그럴듯해도 글 몇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가 비선형동역학같은 것이 연상되는 뭔가를 말했다는 사실이 그가 그 모든 것을 진짜로 예견했다는 뜻은 아니지요. 결국 더 많은 발전이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매우 유익하고 많은 영감을 주지만 동시에 분명한 한계도 느껴집니다. 결국 진짜 발전은 추상적 철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겁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 책에 대해 후기를 남깁니다. 떠오르는 책들이 몇권있어서 제가 늘 말하던 책들이기는 하지만 설명없이 말했습니다. 재미있게 읽는 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분과 전체, 생명이란 무엇인가,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액체근대같은 책은 이전에 제 블로그에서 소개한 적이 있으니 흥미있으시면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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