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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고전 읽기

오르한 파묵의 내이름은 빨강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16. 8. 7.

16.8.7

내 이름은 빨강은 1591년, 이제는 터키가 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삼으며 전체적으로는 엘레강스라는 궁정화원소속 금박세공사를 죽인 범인은 누구인가를 밝히는 추리소설의 형태를 가진다.  하지만 오르한 파묵은 대부분의 힘을 종교의 시대와 과학의 시대가 만나는 교차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묘사하는데 쓰고 있다. 

 

아직도 종교의 시대를 살고 있던 이스탄불의 화가들은 대개 지식과 진리를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것은 마치 성경을 필사하는 것과 같은 작업으로 그들에게 있어서 그림의 주된 목표란 신의 영감을 통해서 들어난 신의 의지를 다시 재현하는 것이다. 만약 성서를 필사하는 것이 글 쓰는 사람의 유일한 과업이라면 그가 해야 하는 것은 글자 하나 하나를 원본 그대로 옮기는 일일 것이며 결코 자기의 생각을 쓴다던가 성서의 이야기를 각색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종교의 시대에 전통을 지키면서 신의 뜻만을 그리는 것을 과업으로 하는 세밀화가들의 과업이 바로 그랬다.

 

그들은 뭔가를 창조하기 위해 그리지 않는다. 따라서 자기 자신이라는 특정 인물의 개성이 그림에서 들어나서는 안되며 그림은 어디까지나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시간을 멈춘 세상을 묘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그림에서 나오는 말이나 개나 인간은 이 세상에서 태어나고 죽는 어떤 특정한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화가들은 눈으로 본 세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기억하는 세상을 그린다. 중요한 것은 그 그림을 그리는 특정화가가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 화가는 신속에서 완전히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기를 열망한다. 

 

 

그러나 외교관으로서 외국을 특히 베네치아를 드나들던 에니시테는 전혀 다른 형태의 예술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을 자세히 묘사하는 초상화로 그려지는 대상의 개인적인 특징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 그림들은 원근법같은 방식을 통해서 세상을 눈으로 보이는 대로 그리고 있었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개성을 강조되어 들어나 있었다. 따라서 그 그림들은 화가의 서명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베네치아 사람들의 그림은 오스만 투르크의 그림과 극단적으로 달랐다. 베네치아 화가들은 항상 개성과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 이미 한번 그려진 그림을 그대로 복사해 내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비록 좀 덜 아름답더라도 그림은 새로워야 한다. 그림은 몰개성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대한 개성적이어서 세상을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일뿐만 아니라 그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예술을 통해 화가는 스스로가 불멸의 존재가 되려고 한다고도 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러한 태도는 직접 관찰하고 데이터를 모으고 모험을 떠나던 서구의 근대와 관련이 있다. 그림을 하나 그리는 것은 일종의 하나의 모험이고 관찰데이터를 수집하는 것과 같다. 누군가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고 말했다면 두번째로 그것을 말하고 발견한 사람은 이론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가치있는 관찰이란 항상 새로운 데이터를 모으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예술에서 사람들은 변화하고 발전하며 더 많은 것을 누적시키려고 한다. 이는 진리의 가장 완벽한 모사를 예술적 목표로 하는 오스만 투르크의 화가들과는 180도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에니시테는 이런 새로운 예술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모국으로 돌아와서 술탄에게 새로운 책을 만들 것을 제안하고 그 임무를 수여받는다. 그 책은 바로 신이 아닌 술탄의 세상을 그리는 그림들을 가지게 될 터였다. 그는 궁정화가들을 모아서 그들에게 이런 저런 그림을 그리라고 감독하지만 그 화공들은 하나의 그림을 혼자서 전부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부분적으로만 각각의 그림들에 참여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도 자신들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림이 완성되어지는 무렵에 이 책의 본질을 눈치챈 엘레강스는 이를 신에 대한 모독으로 비난하기 시작하고 그러다가 충동적으로 화원의 화가중의 하나에게 살해당하게 되는 것이다. 

 

살인범은 최후에 이르러 종교의 시대가 끝나는 것을 예언하지만 동시에 오스만 투르크의 화가들이 베네치아의 화가들을 흉내내서 새로운 그림을 그리게 되지도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 있다. 베네치아의 화가들은 이제 신의 뜻이 아니라 자기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지만 그러한 행위도 완전히 무형식속에서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베네치아 사람들도 시간을 들여서 원근법같은 그들의 화풍, 그들의 형식을 만들어 냈다. 만약 보이는 대로 그린다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행위라면 그렇게 하기로 결심한 순간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서구의 화풍은 아주 간단히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설사 흉내낸다고 해도 그것은 그야말로 어설픈 흉내가 되고 만다. 따라서 오랜동안 최고의 화가로 평가되었던 화공들이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보이는대로 그리는 것에는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뭐든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린다는 것도 실은 언제나 어떤 형식과 가정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과학의 객관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얼핏보기에 과학은 완전히 객관적인 것이므로 자연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어쩌면 단순한 행위로 이해된다. 과학은 서양문화라는 어떤 특정한 바탕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누가 만들어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가정과 문화적 특성없이 만들어 지지 않는다. 과학도 문화고 예술도 문화다. 보는 대로 사실 대로 그린다라고 하는 객관성은 궁극적으로는 허구이며 따라서 후발주자는 선발주자가 만든 패러다임에 그렇게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과학문명을 받아들인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그와 동시에 서구화되고 마는 것이다. 

 

이 소설이 가진 가장 흥미로운 면은 그 형식일 것이다. 종교적 세계는 3인칭 소설을 떠올리게 만드는 면이 있다. 3인칭 소설에서 작가는 등장인물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면서 그 세계를 묘사해 간다. 작가는 그 소설속 세계에 대한 신적인 조물주적인 입장에 있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자신이 방관자적 존재로 등장인물들의 체험을 한발자국 떨어져서 본다는 느낌일 수 밖에 없다.

 

반면에 1인칭 소설에서는 소설의 화자는 '나'인 1인칭이므로 그런 소설은 소설속 주인공에 대해 훨씬 더 개인적이고 친밀한 체험을 제공한다. 반면에 주인공인 나는 그가 속한 세계에 대해 그가 알고 볼 수 있는 것에는 제약이 따르게 된다. 비록 소설은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지만 1인칭으로 말하고 있는 이상 작가는 스스로가 만든 규칙에 의해서 소설의 화자가 알수 있는것에 제약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틀에 갇혀 있는 답답함을 느끼게 되기 쉽다.

 

그런데 내이름은 빨강이라는 소설은 각각의 작은 글조각들이 모두 다른 화자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1인칭도 아니고 3인칭도 아닌 구조를 가진다. 하나의 작은 글조각속에서는 1인칭 소설이 되지만 다른 글조각에서는 다른 사람이 화자가 되므로 3인칭 소설같은 구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번 다른 존재로 변하면서 같은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체험을 하게 된다. 사랑에 빠진 두 남녀의 이야기인데 이런 식으로 소설을 쓰면 한번은 남자의 입장에서 한번은 여자의 입장에서 두 남녀의 체험을 묘사하는 식이 된다.

 

3인칭 소설은 작가의 관점을 절대적이고 당연한 법칙으로 고정시키고 세상과 사건을 묘사한다. 영등포에 사는 불쌍한 아이가 있다고 하면 그 아이는 절대적이고 당연하게 불쌍한 아이로 존재한다. 1인칭 소설은 자기만의 관점에서 보는 세계에 대해 어떻게 해서든 일관적인 설명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시도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그 자신의 관점에서 그 억울을 풀어야 내적인 긴장이 해소되고 따라서 1인칭 소설은 결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묘사에서는 절대적이고 당연한 정의는 없다. 그런 것에 도달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저 여러사람의 관점들을 나열할 뿐이다. 그 안에서도 작가는 무의식중에 어느 정도 자기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식과 정의를 실현시키겠지만 원칙적으로는 꼭 그래야 하지 않는다. 작가가 이런 형식을 썼다는 것은 책의 주제와 어우러져 비서구적인 문명권이 어떻게 서구적인 관점에서 탈피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찾아낸 것이 아닌가 싶은 면이 있다.

 

내이름은 빨강은 이런 형식적인 면과 주제가 흥미로운 작품이다. 그래서 청소년 권장도서로 권장되기도 하는 모양인데 사실 그다지 주제와 긴밀한 관련없이 성적인 표현이 많이 나와서 당혹스러운 면도 있고 청소년이 과연 이 주제를 혼자서 잘 소화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도 든다. 적절한 지도가 없는 가운데서는 이 소설은 그저 괴상한 동화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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