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에 출판된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는 오랜간 보고 싶은 책이었다. 이 책은 미디어 연구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거론하는 고전이지만 책의 소개에 나오듯이 말은 많이 하는데 읽은 사람은 생각보다 적은 책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지 이제까지 읽을 기회가 없었는데 도서관 서가의 한쪽편에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읽게 되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미디어란 단순히 우리가 요즘 말하는 언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모든 종류의 기술과 수단을 말한다. 그래서 문자나 타자기나 자동차가 모두 미디어다. 미디어의 이해는 그 부제가 인간의 확장으로 이 책을 한줄로 요약하자면 미디어란 인간의 신체를 확장한 것이며 그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의 정신도 바꾸게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미디어란 모든 종류의 기술이기 때문에 이런 식이라면 우리는 미디어 비평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무한정 많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맥루한은 실제로 이 책의 2부에서 다양한 미디어들에 대해서 짧은 분석들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사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미디어는 두가지 종류다. 그 하나는 문자, 더 정확히 말하면 표음문자와 그와 관련된 인쇄술이다. 또 하나는 전기기술이다. 텔레비전이나 전화, 라디오같은 것이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맥루한이 미디어가 인간의 신체를 확장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우리가 단순히 어떤 객체로 미디어를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객관성을 강조하는 사고는 어떤 대상을 그것을 관찰하거나 소유하는 주체로부터 완전히 분리한다. 그런데 우리가 미디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미디어는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되고 그런 의미에서 미디어의 소유나 사용이란 우리 자신의 개조 또는 확장이 된다. 그리고 특히 이 개조가 정신적인 측면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가 어떤 미디어에 익숙해 지기 이전의 상태를 잊어버리고 현재의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우리에게 전기와 같은 새로운 미디어가 주어졌을 때 우리의 세상 인식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까에 대해 오해하게 된다는 말과도 같다.
돌아가신 법정스님이 미디어의 이해를 읽었는가는 알 수 없으나 그 분의 쓰신 글중에 나오는 이야기들에는 차주전자를 가지거나 난초화분을 가졌더니 자기에게 집착이 생기더라는 것들이 있다. 만약 소유의 주체와 소유당하는 물건이 완벽히 분리되어 있을 수 있다면 내가 산처럼 많은 물건들을 가진다고 해도 나는 그냥 나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유란 그런게 아니라는 것이다. 소유했더니 내 마음에 집착이 생겨서 내가 변했다. 법정스님은 꼭 필요하지 않은 소유로 자신이 바뀌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무소유로 결론을 내리고는 하셨다.
우리가 법정스님처럼 구도자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자동차같이 어떤 애착을 줄 물건을 가져본 사람은 우리가 어떤 물건을 단순히 소유하거나 사용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쉽게 납득할 것이다. 우리는 법적으로는 자동차를 소유하지만 자동차는 우리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바꾼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자동차와 우리는 서로를 동시에 소유한다. 결국 자동차의 소유란 인간의 확장인 것이다.
미디어의 소유나 사용이 이런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어떤 미디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마치 패러다임의 변화와 같은 성격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어떤 미디어를 사용하는 것이 어떤 패러다임에 따른 사고를 하고 그런 인식을 하게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특정한 미디어를 사용하면서 세상을 보면 세상은 특정한 방식으로 보인다. 우리가 어떤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을 목격하게 될 때 이 점을 기억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가 그 미디어의 단순한 사용자일 뿐이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맥루한은 미디어가 메세지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우리가 미디어로 뭘 하든 예를 들어 차를 사서 어디를 가든 누구를 태우든 더 중요한것은 우리가 차를 소유한다는 사실 그 자체다. 차의 소유가 가져온 패러다임이 차로 구체적으로 뭘 하는가하는 내용보다 더 많이 우리를 제약하며 그것 자체가 우리 자아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미디어가 우리의 정신을 지배한다는 점에 있어서 맥루한이 가장 강조하는 예는 인쇄술이 발달하고 문자의 사용이 대중화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후 서구 사람들은 구술문화속의 사람과는 굉장히 다른 인식체계를 가지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물들을 주체와 분리된 것으로 파악하게 된 것이고 논리적이고 직선적으로 파악하게 된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바로 책을 쓰고 읽듯이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맥루한은 서양사람으로서 이러한 사고방식은 비서구문화의 사람과는 다르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적어도 21세기 현재에서 말하자면 서구건 비서구건 현대의 사고방식은 분리를 전제로 한 객관적 사고방식이 널리 퍼져있다. 과학적 사고라는 것도 객관적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의 패러다임에 완전히 빠져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사고 방식이 어떤지를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어떤 미디어에 완벽하게 적응한 나머지 그 미디어를 쓰는 방법이 변화불가능하게 고정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그런 상태일 것이다. 예를 들어 글쓰기는 당연히 하나의 미디어다. 그런데 글이란 이렇게 쓰는 거라고 확고하게 굳어지면 누군가가 글을 쓰면서 줄을 틀린다거나, 맞춤법이 틀린다거나 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 그 글은 즉각 가치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심지어 비윤리적이거나 부끄러운 일이 된다.
반면에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면 그것의 사용법은 아직 고정되지 않아서 그것의 사용자들은 자유롭게 여러가지 방식을 시도해 볼 여지가 있게 된다. 기존의 미디어를 쓰는 사람은 이럴 때 새로운 미디어를 위험한 것, 천하고 틀린 것으로 비하하는 경향이 있다. 한문을 쓰는 사람이 한글을 쓰는 사람을 이렇게 여겼을 것이고, 인쇄술의 보편화로 책이 많이 출판되게 되자 과거의 책에 익숙한 사람들은 새롭게 쏟어져 나오는 책들을 위험하고 천한 것으로 말했을 것이다. 우리는 물론 현대의 기성언론 종사자들이 인터넷 블로거나 팟캐스트 방송을 하는 사람들에게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보기도 한다. 쫄지마 씨팔이라고 욕하는 방송에 당황하면서 말이다. 새로운 미디어에 적응하지 못하면 문화의 빈곤이 만들어 지게 된다. 맥루한은 구어적인 전통에 사로잡혀서 인쇄라는 새로운 시각적 도전에 대처하지 못한 스콜라 철학자들이 바로 이것때문에 문화의 빈곤을 초래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한계상황에 도달할 정도로 굳어진 과거의 미디어를 핫 미디어라고 부르고 아직 사용법이 굳어지지 않은 미디어를 쿨 미디어라고 부를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이란 핫 미디어를 쓰는 시대에 쿨 미디어가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패러다임이 어떤 것인가는 주로 쿨 미디어의 성격에 의해서 정해진다. 쿨 미디어는 사용자의 참여를 부르게 된다. 왜냐면 그것은 아직 많은 자유도를 가진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맥루한은 미디어가 너무 뜨거워지면 그것은 세뇌가 되고 너무 차가워지면 그것은 환각상태가 된다고 말한다.
전기 기술의 발전에 따라 서구의 사고방식은 변화를 겪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패러다임과 미래의 패러다임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과도기를 살게 되었다. 21세기의 현대인에게 그 변화가 어떤 것인가를 가장 실감나게 말해 줄 수 있는 예는 바로 스마트폰에 달린 사진기다.
사진이 없었을 때 우리가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산에 간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말을 하거나 그것에 대해서 글을 써야 한다. 즉 우리의 체험은 말이나 글이라는 미디어를 통해서 전달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새 현실 그 자체를 말이나 글과 동일시 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산에 갈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기행문을 쓰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것을 글로 옮겨서 그렇게 해석하고 기억한다. 언어 이외에는 정보의 저장과 처리가 불가능하다. 이렇다고 할 때 현실세계는 하나의 책으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묘하고 어렵지만 다음의 말은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진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현실을 다수의 사진들로 이해하고 연극를 좋아하는 사람은 현실을 한편의 연극으로 이해한다.
현대인들은 멋진 해변의 노을을 보면 그걸 사진찍어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글을 쓸 필요도 말을 할 필요도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여행을 가면 마치 사진책을 만들려고 간 사람처럼 군다. 그들은 모든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고 우선적으로 사진을 찍기 좋은 장소를 물색한다. 디지털 카메라의 대중화이래 현실은 사진에 한없이 가까워졌다. 우리는 사진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현실을 사진으로 이해하며 기억을 사진으로 저장하는 것이다.
오랜간 인류는 사진기가 없고 주로 글을 써서 세상을 묘사해 왔다. 그런 시대에 세상은 주로 글로 된 책이었는데 지금은 종종 사진책이 된 것이다. 글이 대중화되기 전 세계는 이야기꾼이 말해주는 신화로 파악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세계를 무엇으로 파악하는가는 그 세계에서 무엇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인가를 결정하게 된다. 세상을 전쟁터로 파악하는 사람은 누가 장군인가를 묻는다. 세상이 연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가 주인공인가를 묻는다. 세상을 시계나 공장으로 파악하는 사람은 부품이나 노무자의 문제가 전체 시스템에 미치는 영향을 걱정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파악할 때 우리는 그것들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일이라고 부른다. 결국 미디어의 사용을 통해서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바뀌면 우리의 합리성 자체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맥루한은 이것을 감각신호의 배합비율이라고 표현했다. 예를 들어서 인쇄술에 기반한 서구 사고는 지극히 시각적이라고 그는 말한다. 문자는 소리 내는 말을 종이 위에 고정시킨 것이며 말하자면 시각으로 소리를 듣게 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고에서는 추상적 개념이 한계를 모르고 사회를 지배한다. 그래서 부족적 집단은 해산되고 사회는 보편적으로 균일화되고 전문화된다.
그런데 보편적 미디어가 달라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대화를 전제로 하는 구술 문화에서는 주류 미디어는 보다 청각적인 것이 되고 사람들은 보다 상황에 참여할 것을 요구당한다. 전문성이나 보편성은 약화되고 부족화가 일어난다. 이런 변화는 빠른 피드백이 가능한 전기시대에 더욱 중요하다. 자동차가 우리의 발을 확장한 것이라면 전기시대는 우리의 중추신경 전체를 기계로 확장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세계가 어떤 곳인가는 미디어의 사용에 따라 극단적으로 달라진다. 결국 합리적 판단이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1부에서 일반론을 펼친 후 그는 2부에서 세부적으로 여러가지 미디어들의 예를 거론한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돈을 논한 부분이었다. 맥루한은 노동은 문자 문명과 돈의 보편화로 인해서 생겨난 개념이며 전기시대가 본격화하면서 노동의 개념이 소멸할 것으로 말하고 있다. 즉 노동인 것과 노동이 아닌 것의 구분이 갈수록 약화되고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돈이 지역적으로 소통되는 돈에 의해서 대체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노동의 종말 이라는 글로 따로 생각을 정리한 적이 있으므로 간단히 언급만 하고 말겠다. 이외에도 사진을 논한 부분을 위에서 언급했거니와 종이와 제국의 확장이 관련이 있다던가 지도의 발달과 함께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논하는 부분도 재미있었다.
맥루한의 미디어 비평은 흥미로운 것이지만 애매한 것도 있고 벌써 반세기 이전의 것이라 시대에 뒤져 보이는 것도 있다. 문자는 시각적인 미디어지만 숫자나 텔레비전은 촉각적인 미디어다는 식의 평가가 내게는 애매하게 느껴졌고 반세기 전에 곧 자동차가 무의미해 질거라고 말하고 있는 부분도 그랬다. 물론 자동차는 요즘도 세상에 가득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실 미래 예측이나 어떤 특정 미디어의 성격에 대한 그의 주장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에서 분명해 졌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미디어의 성격은 절대적으로 결정될 수 없고 그 미디어를 둘러 싼 환경에 의해서도 다르게 작동하며 따라서 다른 시대에서는 다른 성격을 가질 수 있다. 가장 차가운 미디어가 가장 뜨거운 미디어로 변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와 미디어의 관계를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가 뭘 생각해 봐야 하는 가 하는 것이다. 맥루한은 벌써 반세기 전에 서구적 시각의 문제를 느꼈으며 그것이 전기의 시대에 점점 더 심화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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