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1
영국의 사상가 이사야 벌린은 1965년에 워싱턴 D.C.의 국립미술관에서 낭만주의에 대한 맬론 강연을 했다. 이 강연은 여섯차례에 걸쳐 원고없이 이뤄진 것이었는데 후일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호주와 영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녹음된 이 강연이 다시 방송되기도 할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살아생전에 이 강연의 녹취를 책으로 내는 것을 거부하고 새로 책을 쓰려고 했지만 그 책은 결코 완성되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가 사망한 1997년 이후에 이 녹취록이 책으로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소개는 이쯤하고 곧바로 핵심으로 들어가 보자. 그래서 낭만주의란 무엇이고 우리는 왜 낭만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읽어야 하는가? 특히 이 강연이 이뤄진지 이미 50년이 넘게 지난 2021년에 말이다. 이사야 벌린은 그의 책의 마지막 장에서 1965년의 청중들이 바로 낭만주의의 아이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신이 철학이나 역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낭만주의란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른다고 해도 낭만주의는 이미 우리의 생활속에 깊숙히 파고 들어가 있으며 그때문에 대단한 일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 대단한 일들중의 하나가 바로 히틀러의 파시즘이라는 것만 봐도 이쯤되면 낭만주의에 대한 공부가 우리와는 상관없는 어떤 먼 과거의 사건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런데 먼저 말해두지만 낭만주의라던가 계몽주의라는 무슨 무슨 사상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은 사실 이 책을 읽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의 내부에는 실은 깊게 모순되고 서로 싸우고 있는 두 개의 믿음이 심어져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벌린이 우리가 낭만주의의 자식이라고 할 때 그 말은 서구인이나 50년전의 사람에게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일이 된다.
그 모순되는 두개의 믿음의 첫번째는 이렇다. 이것을 믿음 1이라고 하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믿는다.
모든 진정한 질문들에는 답이 있으며 이 답들은 배울 수 있고 알려진 방법을 통해 발견할 수 있으며 그 답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덕은 바로 이 답들을 즉 진짜 지식을 아는 것이다. 왜냐면 진리가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걸 왜 믿음이라고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건 그냥 당연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면 두번째 믿음인 믿음 2로 가보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믿는다.
인간의 본질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이상과 꿈을 이루기 위해 창조적 노력을 해나가는 것에 있다. 남이 가르쳐 준 도덕을 실천하고 그저 정해진 것을 반복하는 것은 삶이 아니다. 설사 온 세상이 그걸 이해해 주지 않을 지라도 나의 이상을 실천해 나가는 삶은 아름답고 존경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이런 메세지에도 익숙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믿음 2도 마찬가지로 자명하다고 생각하며 이게 왜 꼭 믿음 1과 모순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 모순 내지 대립은 집단과 개인의 대립이고 객관과 주관의 대립이다. 그 대립은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중요성도 가지고 있지만 무엇보다 이들은 당신의 내부에도 심어져서 당신을 이리저리 흔들고 있는 강력한 힘들이다. 때문에 우리의 삶은 종종 극단으로 달려간다. 어떤 때는 직장도 버리고 집도 버리고 세계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식의 충동에 빠져 있다가 다시 우리는 도시의 직장과 수험생생활로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속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과 비슷하다. 어떤 때는 너무 경직되어 있고 어떤 때는 너무 무모하며 한달 내내 콩나물값을 아끼다가 어느 날에는 몇천만원짜리 자동차를 충동구매하는 사람과 비슷하게 산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일들을 후회를 하면서 그 일들의 댓가를 치루느라 평생을 소모하기도 한다. 우리를 이 양극단으로 몰아가는 내부의 목소리들은 바로 내가 위에서 믿음 1과 믿음 2라고 쓴 것들 즉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적 믿음의 변형들이다. 좋은 소식은 그게 여러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칸트같은 대철학자도 이 내부적 대립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이사야 벌린은 고대 그리스 시대 이래로 낭만주의가 나타나기전까지 서구를 지배했던 것은 바로 믿음 1이라고 말한다. 즉 이 세계에 대한 진정한 지식은 아직 발견되지 못했을지 몰라도 그것은 존재하고 발견가능하며 그것을 알면 우리의 삶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낭만주의 이전의 서구에서는 남들이 이해해주지 않아도 자신의 소신을 추구하는 인간은 칭찬받지 못했다. 오늘날 그런 인간의 태도를 칭찬하고 존중하는 풍토는 바로 낭만주의가 만든 것이다.
객관적 지식의 믿음을 결정적으로 강화한 사건은 바로 뉴튼 물리학이었다. 17세기의 영국 물리학자 아이작 뉴튼은 이 세계에 대한 최종적이고 일관성있으며 간결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극명하게 증명한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18세기의 계몽주의는 이것이 물리학이나 수학같은 분야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서 가능할거라는 믿음속에서 강화되었다. 이것은 예술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따라서 낭만주의 이전의 예술은 완벽하고 보편적이며 영원한 가치를 기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게 되었다. 여기서 뉴튼 물리학에서처럼 관찰자 즉 작가나 예술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다.
하지만 계몽주의에 대한 확신이 깊어질 수록 계몽주의가 틀렸다는 믿음도 깊어졌고 우리가 지금 낭만주의라고 부르는 흐름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 계기가 되었던 중요한 사건에는 프랑스혁명이 있다.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을 겪은 유럽인들 특히 독일인들은 계몽주의에 대해 분명히 잘못된 것으로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 낭만주의는 쉽게 정의하기 어렵다. 이사야 벌린은 낭만주의에는 정의가 없다는 말로 강연을 시작한다. 이는 첫째로 낭만주의자로 말해지는 사람들이 공통된 특징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보적일 수도있고 과거로 돌아가자는 반동주의일 수도 있었다. 낭만주의의 아버지가 낭만주의가 틀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둘째로 낭만주의는 언어와 논리를 초월해서 주로 상징을 통해 설파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낭만주의 운동은 주로 예술운동이었고 낭만주의 역사나 경제학은 있어도 낭만주의 과학같은 것은 없다. 즉 낭만주의가 뭔지 언어로 정리하기 어렵고 때문에 알아듣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도움을 받을 수가 있어 보인다. 패러다임이라는 관점은 낭만주의를 이해하기 쉽게 만든다. 1962년에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논리를 발표한 이래 널리 알려진 이 관점에 따르면 하나의 패러다임은 이 세계 그 자체가 아니다. 그건 그 세계를 재구성한 시스템이고 이 세계를 근사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믿게 되면 우리는 그 패러다임과 진짜 세계를 구분하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세상속에서 그 패러다임이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장님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패러다임안에서 그건 존재하지 않고 표현할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유라는 단어가 한국말에 없다면 우리가 자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낭만주의의 시작은 거꾸로 인간 지식이 크게 발달하여 그것이 인간과 세계를 훨씬 더 잘 묘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더 강력해진 계몽주의는 객관적 지식으로 세계를 가득 채우려고 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지식을 현실과 구분하지 못했고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라고 단언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이런 저런 존재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훨씬 더 발달했다고 해도, 비록 그런 논리의 오류가 뭔지 말로 콕집어 표현할 수 없기에 논쟁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해도 인간에 대한 지식이 말하는 인간과 세계에는 분명히 뭔가가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 세계의 이단아들, 비주류들, 아웃사이더들은 폭발하고 만다. 낭만주의는 비주류의 감성이었고 소외된 자들의 감성이었다. 예를 들어 통일정부를 가지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었던 18세기의 독일사람들이 그랬고 칸트의 친구였으며 헤르더와 괴테에게 칭송받았지만 지금은 별로 이름이 남지 않은 요한 게오르크 하만 같은 사람이 그랬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당대의 패러다임안에는 그 패러다임을 반박할 단어가 없다. 반발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반발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왜냐면 이 아웃사이더들이 느끼기에 소위 주류적 시각이란 이 세계의 어떤 중요한 부분, 예를 들어 인간의 존엄성이나 가치를 파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낭만주의적 영웅의 그림이 나타나게 된다. 이 영웅은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존재이며 끊임없이 창조하고 딱히 무어라 기술될 수 없는 존재이다. 즉 따분하고 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외로운 영웅, 아웃사이더에 대한 사랑은 바로 낭만주의의 유산이다.
여담이지만 낭만주의는 노장사상과 비슷한 면도 가지고 있다. 이 책의 226페이지에 나오는 낭만주의의 한가지 기술을 생각해 보자.
어떤 것도 그 깊이를 측량하지 못한다. 그것만이 홀로 무한하며 홀로 자유롭다. 그것의 제일 법칙은 창조자의 의지, 법칙을 모르는 창조자의 의지인 것이다.
이 구절은 마치 도덕경이나 장자에 나오는 도를 연상하게 만든다. 물론 낭만주의가 노자사상과 같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유사성은 노장사상에 익숙한 동양사람에게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는 낭만주의와 노장사상이 모두 패러다임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말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즉 언어를 초월한 더 넓은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가 언어를 초월한 곳에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이쪽의 패러다임의 언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는 자유의지와 자치를 강조한다. 즉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만든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를 창조하고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 자유의지때문에 칸트는 스스로 낭만주의를 싫어하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낭만주의의 중요한 아버지중의 하나가 된다.
칸트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자유의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의지는 이 세계가 어떤 객관적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견해와 충돌하는 것이다. 즉 세상의 조건에 따라 세상이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면 우리는 아무런 도덕적 윤리적 책임을 논할 것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는 충돌로 우리가 어떤 경제적 법칙에 따라 빈곤층의 비극을 설명할 때 우리 스스로의 책임을 면제시키고 있는 사실이 지적될 수 있다. 낭만주의적 태도는 이렇다. 세상의 비극은 어떤 법률이나 어떤 경제적 법칙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방관하도록 선택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는 지금의 패러다임에서, 지금의 주류적 사고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몸부림이다. 말하자면 모두가 영어를 쓰는 곳에서 당신이 한국어 비슷한 것을 스스로 만들어 주절거리는 것이다. 의미는 잘 통하지 않고 대개 혼자서 어떤 새로운 대안적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당신은 자신의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데 바로 그 언어안에 당신의 핵심적 가치가 있으며 그걸 포기하는 순간 주류적 사고가 당신을 노예로 만들고 무가치한 존재로 만들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는 실존주의와 윤리적 파탄을 만든 파시즘의 선조다. 따라서 우리는 계몽주의의 문제점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19-20세기의 서구 철학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낭만주의에 대해 아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성의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낭만주의는 인간 정신을 집단적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을 때 파시즘으로 변했다. 독일민족과 같은 하나의 집단을 하나의 유기체로 파악하고 외로운 길을 주체적이고 영웅적으로 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바로 히틀러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선택의 자유가 인간을 만든다는 개인적 자유에의 의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서 실존주의를 만든다. 이는 자유를 강조하던 사르트르를 떠올리게 만드는 구절이다. 이렇게 이 책은 서구 정신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을 소개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낭만주의가 옳은가 계몽주의가 옳은가? 아니면 우리는 이걸 그저 그때 그때 적당히 규칙없이 섞어서 사는 수 밖에 없는가? 이것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면서 이 책의 소개를 마치도록 하자. 우리는 이것을 과학과 과학하기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자는 과학을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과학적 지식을 단순히 외우는 것은 과학하기의 본질이 아니다. 그랬다면 뉴튼 물리학은 절대로 양자역학으로 대체되지 못했을 것이다. 과학을 하는 것은 과학을 의심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낭만주의와 거리가 멀 것같은 과학자도 어느 정도 낭만주의적 사고를 한다고 할 수 있다. 완성된 과학은 계몽주의의 상징이지만 그 과학을 만들어 가는 과학자는 낭만주의자일 수 있다. 혁명적 과학자는 기존 과학의 패러다임도 의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혁명에 대해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양자역학을 만든 하이젠베르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먼저 기존의 시스템을 믿고 가능한 것을 다 고려한 후에 모든 것을 다 바꾸는 것이 아니라 꼭 바꿀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 제한해서 혁명적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그럴 때 진짜 혁명이 가능하다. 즉 문제를 명확히 만들려는 노력과 그 명확해진 문제에 집중된 에너지가 성공적 혁명을 만든다는 것이다.
기성 시스템에 대해 무분별하고 절제없이 반항하는 것이 낭만주의가 되었을 때 그것은 어떤 생산적인 결론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기존의 음악이나 회화가 가진 형식에 대해 불만이 있다고 해도 그 형식을 단순히 파괴하는 것으로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기존의 형식이 가진 잠재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한계선상에서 뭐가 문제인지를 명확히 한 후에 기존의 것을 초극하는 용기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너무 쉬운 혁명도 너무 용기없는 안주도 모두 문제를 만든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물론 단순히 기성 사회의 질서를 무시할 수도 없고 그것에 완전히 복종할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성실한 자기성찰이다. 자기 삶을 세세히 돌아보고 무엇이 가장 큰 문제를 만들어 내는지를 확인하는 태도다. 우리는 내 삶에 일관성이라는 게 얼마나 있는지 얼마나 앞뒤가 맞게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뭘 취하고 뭘 버릴 것인가를 명확히 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고 나면 새로운 것으로 비약하는 용기도 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삶은 새로운 질서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그것없이 그때 그때의 기분에 따라 반항하고 그래서 힘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사회에 절대복종하는 주기를 반복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삶을 낭비해 버릴 뿐일 것이다.
이것은 평범한 메세지지만 실천하기가 간단한 것은 아니다. 계몽주의는 과거와 현재에 존재하는 인간에 대한 엄밀한 묘사를 제공한다. 낭만주의는 미래를 향해 나가는 실천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한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목소리는 모두 설득력이 있다. 이때문에 우리의 삶은 균형없이 요동치기가 쉽다. 때문에 이런 보기 드물게 좋은 책을 읽으면서 서구 철학의 역사에 대한 지식을 쌓고 자신의 삶을 반성해 보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일 것이다.
'독서와 글쓰기 > 고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석달린 어린 왕자를 읽고 (2) | 2023.02.14 |
---|---|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를 읽고 (3) | 2022.08.18 |
로얼드 호프만의 같기도하고 아니같기도 하고를 읽고 (0) | 2021.02.17 |
화이트 헤드의 과학과 근대세계를 다시 읽고 (0) | 2019.11.05 |
마셜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를 읽고 (0) | 2018.03.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