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18
프린스턴 대학교의 철학교수였던 월터 카우프만은 1977년에 인문학의 미래라는 책을 출간했다. 여기서 저자는 인문학이 표류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대로는 인문학의 미래가 어두우며 인문학의 위기는 인류 그 자체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책의 제목은 마치 예언서인 것처럼 들리지만 그렇지는 않다. 이 책에서 그는 인문학의 미래를 예언하기보다는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인문학의 미래를 그리며 그것을 만들어 보기 위해 이 책을 저술했다고 말한다.
인문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인가? 카우프만은 다른 무엇보다 먼저 인문학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면 인문학은 점점 더 과학화, 전문화되어 왔는데 그 폐해가 너무 커졌기 때문에 이제는 인문학의 목적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문학의 선생들조차 잊을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지를 이해할 수 있다. 과학은 기본적으로 자연에 대한 관찰을 종합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우리는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을 때 무엇을 위해 중력의 법칙이 이래야만 하냐고 중력의 목적을 묻지 않는다. 다만 중력을 관찰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자연의 다른 측면도 자세히 관찰하고 그것을 단지 종합한다. 과학이 발견해낸 어떤 법칙에 대해서도 과학자는 그 목적을 묻지 않는다. 다만 실험과 관찰에 따르면 우리는 그저 자연이 그러함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이런 관찰은 계속된다. 정보가 축적됨에 따라 우리는 분야를 세분화 즉 전문화하고 그걸로 더 자세한 관찰정보를 축적한다.
따라서 인문학조차 이런 전문화와 과학화를 거치면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우리는 어느새 철학이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말하기 보다는 그냥 물리법칙처럼 이미 존재하는 진리를 인식한 결과라고 이해하고, 역사가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과거를 관찰하고 종합한 결과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마치 과학자가 그렇게 하듯이 점점 더 세부적인 분야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그런 정보의 누적이 결국에는 우리를 소중한 진리로 안내하리라고 낙관하게 된다.
그러나 카우프만은 이런 과학화와 전문화는 결국 인문학을 무의미하고 시시한 것에 집중하게 만들고 정말 소중한 정보를 쓰레기 정보와 섞어 버림으로서 오히려 인문학의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한다. 참고로 1970년대에 이 책을 쓴 카우프만은 세상에는 너무 많은 논문들이 나오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1970년대에 논문의 수가 너무 많았다면 2022년에는 어떨까? 카우프만이 말한 문제는 이 책이 나온 이후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극단적으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한때 현인으로 여겨졌던 인문학교수들은 그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스스로를 사라지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 이미 2008년에 나온 책 최후의 교수들에서 저자인 미국의 영문학교수 도나휴가 하고 있는 말이 이 말이다.
그렇다면 잊혀진 이 인문학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는 인문학에는 4가지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업적의 보존과 육성이다. 둘째는 인간존재의 가능한 목표 즉 가능한 삶의 유형들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세번째는 선견 즉 비전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번째는 비판적인 정신의 육성이다.
이런 목록은 그럴듯하면서도 뭔가 지루하고 복잡한데 이 목록을 흥미로우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개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만들어지는 인간이다. 즉 진짜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은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인간은 사실 진정한 인간이 아니다. 이는 사실상 인간으로 태어나면 인간의 권리를 가지게 되는 현실의 법률적 시각과는 조금 다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막연히 공감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간에게 교육은 의무이자 권리라고 하고 기본교육이 끝나지 않은 어린이는 그 법률적 권리를 제한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만들어지며 인간은 배워야 진정한 인간이 된다. 그렇다면 뭘 배운다는 것인가? 수학을 배우면 인간이 되나? 물리학을 배우면 인간이 되나? 배움에는 끝이 없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지만 인간이 인간다워 지기 위한 교육을 우리는 바로 인문학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상식과 교양이라고 불리는 기본적인 교육을 가지지 못했을 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제대로된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바로 이때문에 인문학의 위기는 인류 그 자체의 위기가 될 수 있다. 지구를 파괴할 폭탄을 만들 지식을 가진 존재도 인간다운 존재가 되지 못하면 그걸로 자멸할 수 있다. 전문화와 과학화 속에서 진정한 인문학이 표류해 버릴 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걸 가르치는 것이 인문학이라면 인문학은 인간의 변하지 않는 본질을 알고 있고 그걸 가르치는가? 어느 책에 '인간이란 그 본질이 이렇다.'라고 최종적 답이 써있나? 그렇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오직 역사적으로 답해야 한다. 즉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다만 역사는 그것을 단일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삶 그 자체가 각각 조금씩 서로 다른 삶의 대안이다. 그 중에서 가장 빛나고 가장 영향력이 컷던 삶들의 흔적을 발굴하고 정리하며 가르치는 일이 바로 카우프만이 말한 인문학의 첫번째 목적이다. 결국 인문학의 목적이란 인간만들기 인 것이다. 인간은 만들어진다. 태어나지 않는다.
인문학의 목적이 인간만들기라고 했을 때 전문화와 과학화는 인문학교육을 별 의미없는 정보들을 외우는 일로 만들어 그걸 실패하게 한다. 사실 전통적으로 대학은 훨씬 더 대면접촉을 강조하고 교양과 상식을 강조하는 교육을 하는 곳이었다. 그것은 인류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선배 세대의 지성인들로부터 인간다움을 배우는 곳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학이 직업학교가 되어버린 지금 그런 과거의 대학은 요즘의 눈으로 보면 부패하고 귀족적이며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찻잔을 잘 드는 법이나 귀족의 영어 액센트를 배우는 일에는 본질이 없는 것같다. 그런 비판은 물론 옳은 것이며 지금의 대학이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런 비판의 당연함에만 몰두하면 우리는 지금의 대학에서 사라진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어찌보면 그것이 대학의 본질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설사 물리학과라고 해도 우리는 물리학과가 물리학지식을 파는 곳인지, 물리학자를 키워내는 곳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대학이 인간인 물리학자를 키워내는 곳이라면 물리학과도 인문학이 필요하다.
인간만들기를 알파벳이나 구구단을 외우는 일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성장은 연속적이고 단조로운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하나 하나의 패러다임을 배우고 깨면서 불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알고 있는 것은 아이의 세계, 아이의 패러다임을 만든다. 그런데 아이가 진정으로 그 세계를 넘어 더 성장하려면 그 아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자신을 눈멀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는 뭔가를 힘들게 얻었지만 바로 그것을 부정해야 다음 단계로 갈 수가 있다.
이 점을 망각할 때 인문학교육이란 진정한 인간만들기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정신적인 감옥이 되버리고 만다. 그래서 카우프만은 인문학 교육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문화적 충격을 체험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인문학 교육은 삶의 대안을 제시한다. 그런데 하나의 삶은 자기 나름의 관점 즉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패러다임에서 세상을 보면 대안이 보이지 않게 된다. 모든 종교는 다 똑같은 것이고, 모든 철학자는 다 똑같고 모든 문명은 다 똑같다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는 새로운 비전을 가진 사람은 헛소리를 하는 것으로 들리게 된다. 문화적 충격이란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것 그래서 나에게 당연한 것이 어떤 타인에게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는 기회다.
인간은 이 세계에서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 카우프만은 1장에서 인간의 유형을 소개하고 그를 통해서 인문학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부각시킨다. 그는 인간의 기본유형을 선견자, 현학자, 소크라테스 그리고 언론인으로 제시한다.
선견자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기존의 패러다임과는 다른 비전을 가지기 때문에 혁신과 혁명을 시도하지만 메세지를 전달하기가 어렵다. 선견자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다. 선견자는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서 인류가 가진 정보를 획기적으로 늘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현학자는 세상에 대해 엄밀하지만 작은 정보를 끝없이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는 매우 전문화된 분야에서 아주 작은 세부사항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수정하는 일에 집중하는데 19세기에 독일의 대학이 전문화가 된 이래 학문의 세계는 날로 전문화되어 왔고 현학자는 크게 늘어났다. 대학은 본래 인간을 키워내는 기관 즉 전인교육을 목표로 했지만 이런 이상은 현대로 오면서 깨어졌다. 이제는 오직 지식과 기술을 좁은 분야에서 습득한 전문가만이 인정받고 직업의 세계에서 살아남는다. 필연적으로 현학자는 기존의 패러다임에 몰두하며 거기서 빠져 나올 힘을 상실하게 된다.
언론인은 자극적이고 얼마 안가 사라지는 세상의 정보를 수집하고 퍼뜨린다. 그들은 빠르고 아마도 양적으로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만 이 정보는 누적되기 어려워서 결국 사라지고 만다. 그들은 대개 엄밀하지 못한 언어로 표현되고 어떤 때는 완전히 틀려 있으며 시간을 견뎌낼만한 보편성을 달성할만큼 정돈되어 있지 못하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비판적으로 정보를 검증하면서 사는 깨어있는 사람을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선견자처럼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고 퍼뜨리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현학자나 언론인이 흔히 그렇게 하듯 무비판적으로 작은 세계에 갇히는 일을 피한다. 최선을 답을 알더라도 차선의 답이라는 대안을 알 때 그 최선의 답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이 4가지 인간의 유형은 다르게보면 결국 정보를 어떻게 발굴하고 보존하는가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다시말해 인간은 결국 정보이며, 그래서 인간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것은 결국 언어와 문자다. 카우프만이 2장에서 책읽기의 방법론을 논하고, 3장에서 책을 편집하고 번역하는 일에 대해 논하게 되는 것은 이런 문맥에서 자연스럽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을까하는 것이 인문학의 핵심이며 나아가 인간 만들기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형은 나름의 가치와 역할이 있지만 카우프만은 과학화와 전문화가 멸종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소크라테스라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인문학의 위기를 벗어나는 인문학 교육은 결국 주로 소크라테스 키우기를 실천하는 교육이 된다. 그리고 그 교육의 핵심은 바로 앞에서 말한 것처럼 비교와 문화적 충격의 체험이다. 그래서 종교를 공부하되 몇개의 종교를 한꺼번에 비교하면서 공부하는 강의가 인문학에서는 필수다. 그리고 어떤 좁은 분야의 사람들의 합의의 벽으로 작은 패러다임을 만든 학과의 벽을 넘어 학제간 연구와 공부를 고통이나 낙태, 안락사같은 구체적 주제를 가지고 해나가는 것이 인문학을 본래 목적에 부합하는 일이 될거라고 말하면서 이 책을 마치고 있다.
1969년은 미국의 달착륙선 아폴로호가 달에 착륙한 해이다. 그리고 이런 업적은 소련이 먼저 1957년에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올리면서 위기를 느낀 미국이 엄청난 투자를 한 끝에 이뤄낸 것이다. 저자가 인문학의 표류를 느끼며 이 책을 집필한 1970년대는 그 목적을 모른다는 과학의 목적은 분명해 보이는 시기였고, 반대로 그 목적을 알아야 마땅한 인문학은 목적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시기였다. 1940년대의 베이비붐 세대가 대학에 몰려들면서 다수의 교원이 필요했던 1960년대를 지나자 너무 많은 인문학 박사학위자가 배출되었다. 그들은 대학을 졸업한 후 아무 곳에도 쓸모가 없는 인문학 학위때문에 좌절하게 된다. 이제 사람들은 그저 더 많은 결과를 내고 출판을 해서 일자리를 얻는 것이 목표가 되었고 이는 인문학 분야를 현학자들의 분야로 만들게 된다.
그가 지적하는 미국의 1970년대 상황은 두 개의 다른 상황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나는 계몽주의적 흐름에 반대해서 낭만주의가 나타났던 유럽의 19세기다. 17세기의 과학자 뉴튼이래 과학은 급속히 발달했고 계몽주의적 흐름은 인간을 압도했다. 인간만들기라는 본래의 목표에서 인문학이 실패하고 있다는 카우프만의 관찰은 사실 계몽주의가 인간을 압도해 버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던 낭만주의자들의 관찰과 그 흐름이 유사하다. 그리고 카우프만이 가장 정통했던 분야는 바로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는 실존주의와 니체 철학이었다. 이런 흐름에서 보면 증가하는 과학지식속에서 인간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흐름은 이미 19세기부터 있었고 그때는 그것이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비전으로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지식이 더욱 더 증가하고 대학이 더욱 더 대중화하자 니체철학의 전문가는 이제 인문학 자체가 표류하고 있다는 책을 쓰게 되었다.
또하나의 상황은 바로 2022년의 현재다. 과학지식의 성장은 물론 19세기나 20세기보다 훨씬 더 커졌다. 그뿐만 아니라 대학의 대중화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 들어섰다. 1970년대에는 한국에도 대학이 백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중국이며 베트남, 태국등 세계 각국에 대학이 들어서 있고 그 대학들은 해마다 엄청난 수의 대학 졸업자들을 내놓고 있다. 박사학위자도 물론 내놓는다. 1970년대 이래 발달한 인터넷통신과 컴퓨터는 논문을 출판하고 배포하는 범위와 속력을 크게 바꿨다. 19세기 유럽의 낭만주의자는 물론 1970년대 미국의 교수 카우프만 교수가 느끼던 흐름은 이제 완전히 새로운 수준으로 펼쳐지고 있다. 2015년에 출간된 직업의 종말에서 테일러 피터슨은 이런 대학의 범세계적 대중화가 직업의 세계를 완전히 바꿔버렸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인문학의 위기는 인류의 위기라는 카우프만의 주장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인문학과의 위기가 인문학의 위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학이 망하는 것과 인류가 망하는 것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하지만 인문학이 인간만들기라면 21세기에는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가를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진다는 명제는 오늘날에도 옳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떤 인간들을 만들고 있는가?
이것은 당연히 몇줄로 쓸 수 없는 어려운 질문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는 물론 티비같은 미디어가 발달한 것이 새로운 인간을 만들게 했다고 우리는 주장할 수 있는데 이것만 해도 생각해 볼 것이 많지 않겠는가? 오늘날에는 책은 한권도 읽지 않지만 티비나 유튜브를 통해 수없이 많은 정보를 습득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그것이 올바른 방법인가에는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말이다. 그가 말하는 언론인이 만들어 내는 정보들도 과거에는 금방 잊혀졌지만 오늘날에는 인터넷 속에서 수정되고 합쳐지고 진화하여 결과물을 내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 유튜버와 블로거들의 글은 인간의 기억속에서는 살아남기 어렵지만 검색속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다. 카우프만은 아마도 인터넷에는 쓰레기만 가득하며 진짜 정보는 도서관의 책속에만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점점 더 세상은 도서관의 책이 아니라 거리에서 떠드는 사람들에 의해 바뀌어 가는 것같다. 이것은 인류의 위기일까 아니면 새로운 종류의 인간형이 나타난 것일까.
책이 나온지 백년이 되는 2075년에는 인문학 혹은 인간만들기는 카우프만의 시대와는 물론 지금과도 전혀 다를 것같다. 카우프만은 그런 미래는 상상해 보지 않았겠지만 2022년을 사는 사람은 카우프만의 책을 읽으면 미래의 인문학을 자연히 생각하게 된다. 미래는 이미 우리곁에 와 있다. 2075년을 살아갈 인간은 지금 만들어 지고 있다. 그들은 어떤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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