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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고전 읽기

듀이의 철학의 재구성을 다시 읽고

by 격암(강국진) 2023. 10. 23.

%2011년에 저는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두었습니다. 최근에 이 책을 다시 읽고 독후감을 다시 씁니다. 과거의 독후감도 틀린 것은 없지만 과거의 시각으로 썼으며 지금은 지금의 느낌으로 쓴 것입니다. 옛날 독후감은 여기에 있습니다. 

 

1859년에 태어나서 1952년에 사망한 듀이는 미국을 대표하고, 프래그머티즘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다. 그는 1919년 일본을 방문해서 행한 8차례의 강연 원고를 모아서 1920년에 책을 발간했는데 그것이 이 책 철학의 재구성이다. 그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철학은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의미있게 되기 위해서는 혁신되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혁신의 방향은 과학이 보여준 방향이지만 그것은 철학이 과학이 되는 길이라기 보다는 이제부터는 제대로 철학을 해서 그 길을 걸어가자고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제대로된 철학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철학의 근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서구에서는 고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소피스트와 충돌했던 시대를 철학의 근원으로 여기는데 이때의 일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듀이의 설명이 지당하기는 하지만 듀이보다 후대에 책을 쓴 월터 옹이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 지적한 것을 기억하는 것이 더 명확하다. 월터 옹에 따르면 철학의 시작에서 일어났던 것은 구술문화가 문자문화로 전환되는 사건이었다. 즉 문자로 정보를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세상에는 철학이라는 것이 생겨났고 말하는 법인 수사학을 가르치던 소피스트는 이때문에 철학의 시조인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충돌했다는 것이다. 

 

듀이는 선사시대의 신화를 들으면서 그것을 고대의 잘못된 과학적 세계관이라고 여겨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때는 과학이나 철학이 없었다. 구술문화시대였던 그때 사람들은 기억을 짜맞춰서 신화를 만들었고 신화는 결코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구술문화를 살 던 사람들에게 감정적으로 의미가있었기에 만들어진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곰이 우리의 조상신이라는 식의 믿음은 그런 과학적 탐구의 결과가 아니라 그런 말이 주는 감정적 효과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전승된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점은 분석적이고 더 일관성있는 지식을 다루는 철학이 등장했을 때  이미 과거로부터 주로 종교의 형태로 이런 믿음들이 존재했고 철학은 반드시 이 믿음을 부정하기 위해 출현한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철학은 그 믿음을 정당화, 합리화하는데 복무함으로써 발달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구술문화속의 애매한 믿음을 추상적 관념위에 쌓아올린 제대로된 신화와 종교로 만든 것이 철학이다. 

 

이는 17세기이후 발달한 근대 과학과는 다른 것이었다. 근대과학은 정밀한 측정에 근거하여 자신의 가설을 검증해서 과학적 지식을 만들었기 때문에 자기 합리화는 통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과학과 종교 혹은 과학과 정신은 충돌하게 되는데 오래된 믿음을 위협할 것같은 과학적 방법은 이 때 이원론에 의해서 영역적으로 제한된다. 이런 과정에서 검증된 가설인 과학적 이론은 오히려 그 근거가 미심쩍은 지식으로 취급을 받는다. 반면 신비한 인간의 마음이 포착한 종교적 윤리적 진리는 확고한 절대적 믿음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을 수행한 것은 다시 한번 철학이었으며 자연히 철학은 과학보다도 더 확실하고 근본적인 지식을 다루는 학문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다시 한번 철학은 자기 합리화를 하는 일에 복무했던 것이다. 

 

그러나 과학기술 문화가 점점 더 세를 불려가는 동안 이 이원론의 영역구분은 공격받게 된다. 과학적 사고는 단순히 공장이나 연구실안에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로 퍼져나갔기 때문에 낡은 권위는 위협받게 된 것이다. 기계를 사용하기 위해 그리고 기계를 대중화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리고 회사와 공장은 과학적 사고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문화적 변화를 가져왔다. 이에 대한 가장 흔한 반응은 과학이 윤리적 타락을 가져온다고 과학을 공격하는 일이었으며 핵폭탄같은 전쟁무기를 만드는 것만 봐도 이점은 분명하다는 주장이었다. 

 

듀이가 말하는 철학의 재구성이란 이런 상황에서 철학에 대한 낡은 생각을 버리고 유용한 철학을 하는 것을 말한다. 새로운 철학이 유용해 질 것이라는 것은 철학과 이성을 모두 문제해결의 도구로 봐야 한다는 주장때문이다. 이제까지 철학이 과거로부터 내려온 근거없는 믿음을 복잡한 관념과 추상화로 정당화하는 일을 주로했다면 이제 새로운 철학은 그 시대의 사회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이 반드시 모두 자기합리화에만 복무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16세기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진보에 대한 열망을 강하게 표출함으로서 과학 혁명이 가능해 지는데 기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과학적 방식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원론이라는 틀속에서 제한되었는데 그 결과 과학은 가치에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되었고, 철학같은 인문학은 가치에 대한 것이지만 동시에 일반대중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는 추상적인 말의 유희가 되고 말았다. 과학혁명은 그저 절반의 혁명으로 남게 되었으며 인간은 신에 이어서 숭고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인본주의라는 종교다. 

 

듀이가 강조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이성, 이론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우리는 우리 앞의 문제를 강조하게 되고 이것은 다시 무한한 보편성속에서 우리 개인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거나 독단적인 명령을 내리는 과학이나 종교에서 벗어날 것을 말하게 된다. 즉 문제를 해결하는 유용성이 없는 권위와 믿음을 포기하라. 인간적인 과학을 하고, 합리적인 철학을 하는 것이 가능하고 필요하다. 과학 기술 문명이 만들어 낸 윤리적 불안감은 시간이 갈 수록 크게 증가하고 있다. 인문학과 과학의 분열이나 이원론에 대한 비판은 실제로 20세기에 등장한 여러책에서 등장하는데 이는 이런 사회적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듀이는 관찰을 수동적인 행위로 여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우리의 가설이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행동의 결과를 살피는 일로 여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칸트이래 인식론은 서양철학의 중심적 자리를 차지했지만 거기서 인간은 그저 세계를 수동적으로 관찰하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런 존재가 아니라 환경과 부딪히고 문제를 만나고 그걸 해결하면서 스스로를 바꾸고 환경도 바꿔나가면서 생존하는 생명체이다. 따라서 우리는 수동적 인식론이 아니라 가설을 검증하거나 부정하는 과학적인 과정을 철학의 중심과제로 여겨야 한다. 그리고 이때 물론 이 가설이란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설을 말한다. 

 

그렇다면 100년전에 나온 이 책, 저자가 25년후 서문을 다시 쓴 1948년부터 따져도 75년은 된 이 책에서 말하는 철학의 재구성이란 이미 이뤄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 결과 철학은 이제 대중으로부터 더더욱 멀어졌고 과학기술의 윤리에 대한 불안감은 더 커지면 커졌지 작아지지는 않았다. 국가나 학계를 지배하는 개념은 매우 보편적인데 복잡해진 사회속의 개인들은 그에 비하면 형편없이 협소한 자신의 일상 세계속에서 그 간격을 느끼며 두려움에 떨면서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즉 보편성과 특수성간의 간격은 더 멀어졌으며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계곡속으로 숨어들어가서는 잊혀진 부족으로 살게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다가 코로나 시국같은 때를 만나면 몇몇 광신도같은 사람들이 사회 전체를 위협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 사회적 보편 상식으로부터 떨어진 사람들이, 따라서 그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윤리적 기준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사회 전체 시스템을 위협하는 일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면 전체 시스템이 붕괴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것은 문명의 위기라고도 할 수 있다. 경제가 마비되고, 사회적 인프라는 유지비용이 급증해서 유지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물가는 폭증하고 아이는 태어나지 않고 학교는 문을 닫으며 일자리는 없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상당부분 이것을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긴다. 마치 봉건주의에 물든 사람이 왕조의 착취로 인해 겪는 힘듬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기듯이 말이다. 우리는 여전히 듀이가 지적하고 있는 낡은 철학들에게 둘러 싸여 있다. 우리는 사물의 본질을 논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낡고 고정된 믿음을 테스트하거나 수정하는 일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본다.

 

과학 기술은 지금도 점점 더 빨리 발달하고 있다. 따라서 상황은 더 나빠지고 있다. 우리는 제트기를 침팬지가 운전하는 상황에 점점 더 가까워 진다. 우리가 쓰는 도구의 힘은 더 강력해져 가는데 우리의 윤리적 힘은 여전히 고대의 구술문화시대에 그 기원을 따질 수 있는 믿음에 기초한 일이 많기 때문이다. 새로운 철학은 무엇보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치관과 윤리관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낡은 감정의 정당화가 아니라 우리시대를 감당할 수 있는 올바른 시각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철학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듀이가 철학이나 이론을 도구로 여겼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즉 우리는 우리 시대의 문제들을 해결할 새로운 도구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도구와 새로운 철학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듀이가 찾던 새로운 철학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만들 수 없었던 새로운 철학을 AI의 철학이라고 믿는다. 옛날 사람이었던 그는 AI가 발달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고 따라서 과학혁명 이전과 이후를, 산업혁명 이전과 이후를 구분할 정도로 다른 변화를 이끌어낼 철학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끝내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런 가능성을 가진 기술이 있으며 이 기술은 듀이가 그렇게 강조했다던 진화론의 철학과 긴밀한 관련성이 있다. AI는 진화과정을 떠올리게 하는 최적화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AI의 철학은 과거의 믿음의 정당화도 아니지만 그저 심심풀이로 하는 관념의 유희도 아니다. 그것은 근대과학이나 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할 때처럼 인간이 굉장히 강력한 힘을 얻게 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이다. AI의 철학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때 우리는 다시 한번 프랜시스 베이컨의 철학처럼 철학이 새로운 생명력을 가지고 세계를 개혁하는 일을 보게 될 것이다.

 

AI의 철학은 반드시 인간을 재정의하게 된다. 오늘날의 인본주의에서 인간의 핵심은 이성이다. 그러므로 AI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필연적으로 인간이 무엇인가를 묻는 일과 이어지게 된다. 이때문에 끊임없이 인간처럼 사고하는 기계가 등장해서 윤리적으로 도전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영화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 her에서는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남자가 나오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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