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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고전 읽기

주석달린 어린 왕자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23. 2. 14.

23.2.14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다시 읽었다. 이 책은 너무나 유명하고 너무나 많이 인용되기에 어린 시절에 한번 안 읽어 본 사람이 없고 설혹 안 읽어 보았다고 해도 얼마전에 읽어 본 것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주변에 굴러 다니는 책을 보아도 그저 슬쩍 보고 말기 쉽다. 내가 이 책을 다시 읽게 된 것은 어린 왕자에 주석을 달아 놓았다는 제목때문이었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역자인 김진하가 주석을 달아 놓은 책이다. 나는 독서를 저자와의 대화라고 말하고는 했는데 덕분에 이 책은 양자대화가 아니라 3자 대화가 되었고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어 보기로 했다. 

 

 

역자인 김진하는 이 책을 너무 빨리 읽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주석을 읽기 위해 중간 중간에 멈춰서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이 옳다. 나도 덕분에 이 책의 저자가 35살의 나이에 실제로 사막에 비행기 추락 사고를 겪었으며 그 6년 후에 이 책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에 나오는 대로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이를 확인하다 보니 그건 생택쥐페리가 41살때의 일이었으며 그가 죽기 불과 3년전의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는 2차대전에 참전했는데 정찰임무를 하러 나간 후 실종되었다. 그 밖에도 생택쥐페리가 이 책을 헌정한 레옹 베르트가 어떤 사람이라던가 같은 사실을  기억하면서 책을 읽는 것은 분명 다른 느낌을 준다. 

 

나이가 들어 이 책을 읽어보니 이 책은 어린이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정작 어린이이거나 청년일 때 읽어서는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같다. 그냥 재미있는 동화쯤으로 읽힌달까? 이 책에 나오는 왕이며 허영쟁이 그리고 술꾼이나 사업가가 현실에 존재하는 많은 어른들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라는 점은 아마 좀 똑똑한 아이들이라면 다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그런 짧은 묘사를 생생하게 느낄만한 인생의 경험이 없다. 예를 들어 작디 작은 별에서 자신이 모든 걸 통치하는 절대군주라며 왕의 행세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나이가 좀 든 사람은 아주 쉽게, 그것도 여러명 머리속에 떠올릴 수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다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한 때 그랬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일찌가 장자는 달팽이 머리 위에서 전쟁을 한다는 표현으로 그것을 말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나이가 좀 들어서 돌아보면 어느새 내가 그 절대군주고 술주정뱅이고 허영쟁이였었던 때가 기억나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은 어린이의 성장소설이며 동시에 어른이 인생의 본질을 어린이에게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본질은 무엇일까? 짧은 상징적 소설이 그러하듯 그 해석은 수없이 많이 있을 수 있을 것이며 그 중에는 아마 생택쥐페리 본인이 살아 있더라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며 나도 하나의 개인적인 해석을 하게 되었다. 

 

그 개인적인 해석에 따르면 어린 왕자가 말한 인생의 본질은 관계에 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것과, 우리와 인연이 닿는 것과 관계를 맺고 그것에 길들여지고, 그것을 길들인다. 그렇게 만들어 지는 관계가 삶과 세상의 의미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애초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태어난 유한한 존재이므로 우리의 관계란 유한하고 우연한 것이며 사람마다 다르다. 그 관계가 나다. 

 

어린이들은 그걸 잘 보여준다. 그들은 아직 많은 것을 경험하지 않았으므로 작은 만남이 얼마나 우리를 바꿔놓는가하는 인생의 본질을 잘 보여주면서 좋은 것 나쁜 것을 표현하고 느끼면서 살 수 있다. 그들은 아직 세상의 틀에 빠져서 장님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어린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수없이 많은 경험을 하고 만남을 가지게 되고 무엇보다 세상으로 부터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관념과 단어들을 배운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인간으로 사이보그화된다. 

 

언어는 보편적인 것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친구란 단어는 모두에게 의미를 가지며 우리가 소통을 하려면 이런 단어를 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친구를 말하려면 친구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모두가 서로 다른 사람이듯 모든 관계는 서로 다르다. 그것이 모두 '친구'라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단어로 표현될 때 우리는 어떤 핵심적인 것을 잃어 버린다. 

 

어린 왕자는 말한다. 본질적인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삶의 진실, 이 세상의 진정한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은 언어 너머에 있다. 그것은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교육받은 인간은 흔히 개념화되고 언어화된 것만을 볼 수 있다. 많은 경험과 많은 소통과 많은 교육 끝에 인간은 그 보편적이지 않을 것을 느끼고 보는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그래서 어머니의 물한잔이나 대형슈퍼에서 파는 물한잔이나 과학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관계를 통해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지만 그 관계를 객관화, 보편화하는 과정을 통해 다 지워버렸을 때 우리가 삶의 본질, 나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사회적으로 주입받은 어떤 객관적 관념 예를 들어 돈이나 지위가 삶을 살아가는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너무나 바쁘게 살아서 삶을 살 시간이 없고 삶이 뭔지를 잊어버렸다. 어른들의 그런 모습은 조금 멀리서 보면 무의미하고 마치 로봇같아 보인다.

 

관계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존재하지만 인간과 물건 사이에도 존재하고 인간과 생각 사이에도 존재한다. 작은 별에서 바오밥나무 씨를 걸러내고 소중한 꽃씨를 골라서 키우는 어린 왕자는 자신의 작은 정신 세계에서 이런 저런 생각과 감정을 키워내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 작은 세계는 나의 사적인 공간이며 나의 정신 세계이다. 그 작은 세계에 내려 앉은 어떤 씨앗을 내버려 두면 그것은 때로 바오밥나무처럼 거대하게 자라나서 그 세계를 파괴하고 만다. 반면에 어떤 때는 그 씨앗은 유달리 아름다운 장미같은 꽃으로 피어나게도 되고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별에서 스스로 키워낸 그 생각에 빠져들고 상처입게도 된다. 그 꽃은 또한 내 친구일 수도 내 연인일 수도 내 가족일 수도 내가 사랑하는 물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세계를 떠나 다른 이들과 만나지만 그들이 기묘하다는 것을 배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어린이가 자라면서 겪게 되는 일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런 과정속에서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자신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나서 어린 왕자가 만났던 여러 어른들처럼 변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잊어버리고 객관적 관념에 빠져든다. 다시 말해 직장일이며 돈이며 허영이며 부끄러움이며 권력에 빠져서 언제나 바뻐진다. 진짜 삶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만나도 자신은 너무 바쁘고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달랐다. 그는 중요한 것을 끈질기게 질문한다. 그리고 이 소설의 끝에서 어린 왕자는 장미가 있는 자기의 세계로 돌아간다. 양이라는 선물을 들고서 말이다. 어린 왕자는 그걸 위해 기꺼이 자신을 죽이기 까지 한다. 그는 자신과의 관계로 인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일 거라고 말하고 자신도 자기 별의 꽃과의 관계를 소중히 할거라고 말한다. 그 장미는 이제 5천송이 다른 장미와 같은 장미가 아니라 자기만의 장미이기 때문이다. 

 

관계와 인연의 의미를 강조하는 생텍쥐페리지만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로 모든 인간은 고독하며 결국 자기의 별에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군중속에 빠져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언어속에서 길을 잃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것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 우리는 삶의 진실이 관계라는 것을 알아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을 지킬 때의 일이다.

 

모두와 똑같아져 버리고 정서적인 안정감을 얻는 것을 우리는 때로 관계를 소중히 하는 사람으로 착각할 수 있다. 매일 매일을 친구나 동료들과 뭉쳐다니고 반복적으로 뻔한 이야기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에 많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관계의 소중함을 안다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린 왕자가 말하는 관계가 아니다.  어린 왕자는 여우를 만나고 비행기 조종사를 만나서 길들이고 길들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기의 별로 돌아갔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그걸 잊으면 삶의 본질이 잊혀지는 것이다. 관계는 소중하지만 나도 상대도 지켜져야 한다. 작은 왕자가 여우를 길들이는 과정이 그토록 조심스러웠던 것도 이때문이다.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면서도 서로를 파괴하지 않는 관계가 올바른 관계이다. 그걸 위해서는 사려깊음이 필요하다. 용기도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남이가라고 외치며 술먹고 쓰러진다고 진짜 관계를 가지게 되는게 아니다. 맹목적으로 서로에게 들러붙는 것은 어린 왕자가 말하는 소중한 관계가 아니라 억압이다. 

 

말했듯이 나이가 들어서 읽는 어린 왕자는 각별한 데가 있었다. 그리고 그걸 읽고 내 손끝에서 어떤 소감이 나오는가를 바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뭔가를 이미 안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틈틈히 다시 옛 책으로 돌아가 이제 나이가 든 내가 그걸 다시 어떻게 느끼는지 음미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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