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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사소한 일상과 우리의 착각

by 격암(강국진) 2015. 12. 2.

15.12.2

우리는 그냥 세상을 보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훈련시키고 세상에 의해 훈련받는다. 그리고 그 훈련때문에 우리는 뭔가에는 민감해지고 뭔가에 대해서는 장님이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여러 분야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가장 흔하고 중요한 예는 우리의 삶 자체일 것이다. 

 

우리는 때로 단지 이사를 한 것 뿐인데 큰 삶의 차이가 생기는 것을 목격한다. 우리는 때로 죽자고 싸우고 불행한 부부를 보는가 하면 굉장히 다복하게 살아가는 것같은 부부도 본다. 이럴 때 우리는 그 이유를 어떤 큰 문제에서 찾거나 때로는 그저 순전히 운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큰 이유가 그런 차이를 만들어 냈다거나 운이 인생을 요동치게 만든다고 하는 것은 분명 답의 일부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너무 많은 것을 그저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며 그런 일들이 큰 결과를 가져올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렇게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모든 것은 서로 관련되어져 있다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삶을 보지 않는다. 우리는 삶을 레고처럼 조각 조각으로 자르고 그 각 조각이 각자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한다. 그래서 엔진출력을 올리면 속도는 빨라진다, 사이드 미러 하나 깨져도 자동차 성능에 크게 차이는 없다는 식으로 삶을 간단하게 이해하려고 한다. 그리고 아주 큰 아픔을 겪는 것이다. 

 

이런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 우선 사회적 차이와 개인적 차이에 대해 같이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일본과 한국을 비교한다고 해보자. 우리는 사회적 차이를 논할 때는 개인적인 일을 논할 때보다는 훨씬 더 전체적으로 생각하곤 한다.  각 나라에 있어서의 삶의 만족도는 문화 경제 역사 정치적 차이에서 발생하며 각 나라의 여러가지 특성은 서로 얽혀 있다는 말에 대해 우리는 훨씬 더 깊게 그리고 훨씬 더 쉽게 수긍한다. 사회들을 비교할 때에도 아주 단순하게 일본은 이런 제도가 있으니 한국도 이런 제도만 바꾸면 일본처럼 될 것이다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적어도 세상 경험이 좀 있는 사람은 그런 말에 간단히 넘어가지 않는다. 사회적 변화라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지 그들은 경험해 왔기 때문이다.

 

작은 것은 때로 전체와 같다. 지금와 돌아보니 여성에게 참정권을 준다던가 노예제도를 폐지한다던가 하는 일이 어려워도 할 수 있는 일로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그건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될 수 있는 일처럼 보이는 일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부동산 세금 조금 바꾸거나 선거방식 조금 바꾸는 일만해도 이미 그렇다. 아파트 주민회에 가서 싸움 좀 해보고 파벌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생 좀 해 봐도 그렇다. 주말에 몇 집이 어울려서 펜션에 놀러가거나 제사를 지내는 시간을 몇시간 당긴다던가 하는 일 정도를 하는 것도 때로는 산을 옮기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이런 저런 스위치를 누르면 한국이 일본이 되거나 일본이 한국이 된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런 일이 하기 쉽지도 않고 설사 어찌 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세상이 다 바뀌지 않는다. 사회가 변화하지 않은 채 일어난 그 개혁은 실질적으로는 무력화된다. 사회의 여러관습과 제도 그리고 인간들이 그 변화에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저항하고 그것을 무력화 시키기 때문이다. 사회와 공동체는 의식없는 부품으로 이뤄진 기계와 다르다. 

 

문제는 우리가 개인적 삶을 볼 때는 이런 측면을 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나라던가 너라는 존재를 하나의 단일한 돌멩이 처럼 생각하거나 우리를 의식없는 부품으로 만들어진 로봇으로 생각하는 것같다. 우리의 삶도 무수히 많은 측면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사회적 역사적 태생적 조건뿐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습관들과 선입견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다. 우리의 자아도 분열되어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다는 것을 망각한다. 삶의 조각들이 서로 얽혀 있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날 때 저항하고 무력화시키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망각한다. 그래서는 안된다. 하나의 인간도 이미 하나의 생명이고 공동체이고 사회다. 새끼 손가락하나쯤은 전체 몸의 작은 부분이다. 그러나 새끼 손가락 손톱이 아프면 삶 전체가 흔들리고 때로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될 수도 있다. 생명은 그렇게 간단히 부분으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다. 헤아릴수 없이 많은 것을 가진 사람도 어떻게 보면 사소해 보이는 하나의 상실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 부분이 전체고 전체가 부분이다. 

 

자전거를 타는 방법만 해도 전체적인 것을 무시할 수 없다. 몸통이나 발의 움직임이 옳다고 해도 한가지 부분에서만 틀려도 자전거는 넘어진다. 이런 문제때문에 어떻게 하면 부부가 화목하게 살 수 있는가라던가 어떻게 하면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를 가깝게 할 수 있는가 하는데에 있어서 조언을 구하는 것은 매우 제한적인 효과밖에 없다. 특히 그게 어떤 문제인가에 대해 착각을 하는 경우에 그렇다. 자전거를 타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설명도 들어야 하지만 결국 자기의 균형감각을 동원해서 연습을 해야 한다. 남의 설명을 완전히 외운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움직임을 100% 따라한다고 해도 자전거는 넘어진다. 상황이 아주 미묘하게만 틀려도 자전거는 넘어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자전거 타는 것을 보고 아 팔을 저렇게 움직이니까 안 넘어지는거로군요라던가 아 엉덩이 위치가 저래야 되는거군요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어쩌면 영원히 자전거를 탈 수 없을지 모른다. 자전거 타기가 팔이라던가 엉덩이에만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말이다. 자전거를 타는 법이라는 책을 읽는 것은 의미는 있겠지만 결국 자전거타기의 대부분은 실제로 그것을 하고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부부문제는 책을 읽으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설사 그것이 틀린 말이 아니라고 해도 책의 문구에 집착하면 오히려 부부라는 자전거는 더 빨리 넘어지지 않을까?

 

우리가 이사를 가면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집앞에 있던 공원 하나 아니 나무 한그루가 내 삶에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건강이 나빠지고 가족간에 다툼이 생기는 이유를 고민하지만 알고보면 그것은 그저 살고 있는 동네에 마음에 드는 카페가 전에는 있었다거나 약간 다른 이웃이 있다거나 그 동네가 약간 더 공기가 맑았다거나 전에 쓰던 주전자를 잃어버려서 지금은 전만큼 차마시는 시간이 즐겁지 않다는 사소한 것이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듣고 문제가 카페라거나 이웃이라거나 공기라거나 주전자라고만 생각하면 또 틀린다.

 

노인들을 볼 때도 때로 안타깝게 생각되는 일이 반복된다. 세상이 바뀌거나 본인의 노화때문에 그리고 전처럼 계속 살 수 있는 환경이 충분히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에 노인들은 대개 삶의 방식에 변화를 요구받는다. 그런데 그 방식이란게 뭔가 하나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때로 부족한 것이 그렇게 엄청난 것이 아니다. 부분이 전체고 전체가 부분이다. 

 

이론적으로는 밥을 먹을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따뜻한 집이 없는 것도 아니며 비슷한 상황에서도 잘 사는 사람들의 예도 있으니 잘 사실수 있는 노인들이 세상에는 많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노인들의 삶의 자전거가 자꾸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다. 그 분들과 한동안 함께 지내면서 관찰을 해보면 부족한 것은 대개 그렇게 엄청난 일이 아니고 엄청난 문제도 실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티비를 얼마나 보시는가, 어떤 취미가 있는가, 누가 뭔가를 부탁하면 어느 정도에서 거절하는가, 외식을 혼자 하는 것을 즐길 수 있는가, 아침 산책은 하시는가, 이야기하면서 밥을 먹을 사람은 있는가 하는 것들에 있어서 사소한 차이가 점점 문제를 키운다. 

 

그런데 사람들은 문제가 심각하면 원인이 사소한 것일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계속 큰 것에서 원인을 찾고 그렇게 하면 될거라고만 생각한다. 그리고 물론 이런 문제들은 노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확 바꿀 뭔가 거대한 답을 찾으려고 한다. 자신의 삶을 단순하게 생각하고 삶을 더 복잡하게만 만든다. 내적인 일관성 따위는 관심도 없다. 어제의 내가 원한 것과 오늘의 내가 원하는 것이 완전히 다른데도 뒤죽박죽으로 판단을 내린다. 

 

우리가 실제로 택해야 하는 길은 반대다. 우리는 되도록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하고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을 붙잡으면서 일관성을 가진 존재로 자신을 돌보면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저 단일한 하나가 아니고 그 자체가 거대한 사회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자전거 타는 요령은 아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사는 방식도 아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지식이 나쁜 것도 아니고 소중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뭐뭐가 중요하다라는 단순한 생각이 우리의 느끼는 능력을 줄게하면 자전거 타기도 새로운 삶의 방식도 영원히 배울 수가 없다. 

 

글을 마치며 앞에 쓴 것을 읽어보니 변화란 불가능하다라고 느껴지게 쓴 부분도 있는 것같다. 삶의 변화란 대개 우리 기대보다 어렵기 마련이지만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삶의 변화의 키워드는 느낌과 공동체다. 느낌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전체론적으로 다른 사람과 자기를 본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공동체란 나와 타인이라는 개인도 하나의 사회이고 공동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크고 작은 공동체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험하고 전도하는 방법이 될 수 있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통상 공동체로 인식하지 않는 것도 그렇게 인식하면서 살아야 한다. 남의 집에 놀러간다면 친구와 만난다면 우리는 그것을 외국여행가듯이 문화체험가듯이 해야한다. 그럴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행복한 부부가 되려면 남편이 와인사오고 파스타 만들면 된다는 말이지 하고 묻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와인이나 파스타는 좋은 생각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와인도 파스타도 아니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사소한 예의, 사소한 눈길, 사소한 배려, 사소한 계획이다. 객관적인 조건 몇개 늘어놓고 남들도 이정도면 잘 사니 못사니 논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수영복입고 앉아서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사람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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