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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장자의 빈배와 우리들의 문제

by 격암(강국진) 2016. 1. 15.

16.1.15

장자 산목편에 보면 빈배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

 

배로 강을 건너는데 빈 배 하나가 떠내려 오다가 그 배에 부딪쳤습니다. 그런데 떠내려오던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당장 소리치며 비켜 가지 못하겠느냐고 합니다. 한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다시 소리치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결국 세번째 소리치는데 그 땐 반드시 욕설이 따르기 마련. 처음에는 화를 내지 않다가 지금 와서 화를 내는 것은 처음에는 배가 비어있고 지금은 배가 채워져 있기 때문.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능히 그를 해 하겠습니까? (오강남역, 장자, 388p)

 

이 이야기는 대개 욕심을 버리고 빈 배처럼 살아가라는 뜻으로 인용된다.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건 빈 배냐 사람이 탄 배냐에 따라 우리가 화를 내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이 같은 현상을 보고 앞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을 수도 아니면 조금은 다를 수도 있는 이야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의 문제의 핵심이 결국은 빈 배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가끔 아이에게 너도 이젠 나이가 더 들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 나는 그 아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는데 그것이 빈 배의 이야기와 많이 닮아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갓난 아기는 바닥에 물을 쏟거나 울거나 심지어 방바닥에 똥을 싸도 사람들이 그 아기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아기는 아기가 알고 있는 것이 있고 아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 큰 어른이 아기처럼 행동한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미친 게 아니라면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화를 크게 낼 것이다. 너는 다 큰 어른은 아니지만 이제 아주 어린 아기도 아니기 때문에 네 행동이 네가 성장한 만큼 바뀌지 않는다면 주변 사람들은 화를 내게 된다. 그러니까 작년이나 재작년에 했던 것을 그대로 계속하면 이제는 똑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너는 똑같이 대접받지 못한다. 

 

이 이야기는 욕심을 비우고 살아가라는 교훈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위의 빈 배의 이야기와 긴밀하게 연결된 데가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보고 화를 낼 때 우리는 그냥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암묵적으로 상대방이 이런 저런 사람이라는 것을 가정한다. 그리고 그 행동을 그런 가정에 근거해서 해석한다. 그리고 나서 화를 내는 것이다. 누군가가 지나다가 나와 부딪히면 나는 불쾌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장님이라는 것을 발견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화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화를 내려고 했던 것에 대해 사과하려고 까지 한다. 

 

부부나 연인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서로의 생활에 긴밀하게 관여하기 때문에 사소한 버릇이 서로에게 큰 부담이 되는 일이 되곤 한다. 이를 간다던가 밥을 단정치 않게 먹는다던가 하는 것도 그렇지만 약속시간을 잘 안지킨다던가 상대방의 말을 자꾸 끊는다던가 허영이 있다던가 허풍이 있다던가 하는 버릇도 그렇다. 그래도 그들은 그런 것을 참는다. 통상 그저 사랑하니까 좋아하니까 참는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닌 것같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상대방을 좋게 생각하니까 상대방의 단점에 대해서도 뭔가 이유가 있겠지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리가 없는 사람이 뒤뚱거리며 걷는다고 비웃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상대방이 가지는 단점들에 대해 이유가 있겠거니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때로는 오히려 측은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그래서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화를 잘 낸다. 그들이 어떤 사소한 잘못을 하거나 사소한 피해를 나에게 입혀도 그들의 입장에서 왜 그랬을까에 대해 두 번 생각하지 않는다. 대개 결론은 단순하게 내려진다. 저 사람은 원래 나쁜 사람이거나 미친 사람이거나 사악한 의도로 나를  해치려는 사람이다. 그렇게 결론 내리고 나면 그 사람에게 화가 난다. 화가 나고 나면 이젠 더더욱 자기가 그렇게 성급하게 내린 결론이 틀릴 리가 없다고 고집하게 된다. 내 배우자가 지나가는 노파에게 욕을 하는 경우에는 저 노파가 얼마나 나쁜 사람이면 우리 남편이나 아내가 저렇게 행동할까하고 생각하는데 생판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하면 할머니에게 저런 욕을 하는 것을 보니 저 사람은 대화를 나누지 말아야 할 나쁜 인간이라고 단정짓는 것이다. 

 

여기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우리는 말한다. 이 세상에 이유가 없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히틀러나 연쇄살인범같은 흉악한 사람들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논리전개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불편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그런 논리를 펴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에게 그 원인을 찾아주고 면죄부를 줄 수도 없고 주지도 않는다. 간디 영화를 보면 간디는 자기를 죽인 암살자조차도 용서하면서 죽는다. 우리가 모두 그런 사람이 될 것을 가정한다는 것은 무리다. 

 

현실속에는 아주 넓은 회색지대가 있다. 우리가 어떤 이유를 찾는가에 따라 우리의 태도는 달라진다.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끝없이 관대하게 처분받고 어떤 사람들은 끝없이 잔혹하게 취급받는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 단지 그것들은 원래 그렇다고 해버린다. 

 

민중을 사랑하다가 민중을 미워하게 된 혁명가가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그나 그녀가 민중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대중이 이러저러한 사람들이라고 가정한다. 사랑하니까 오히려 그들을 더 괜찮은 사람들로 생각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할 수록 대중의 행동과 선택을 용서할 수가 없게 된다. 결국 그는 민중을 미워하게 된다. 그들은 행복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런데 사실은 민중이건 배우자건 이웃사람이건 외국 사람이건 우리는 그들에 대해 잘 모른다. 우리는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많은데 남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 것인가. 사랑과 관심이 있으면 더 잘 알겠지만 그래도 아직 우리에게는 많은 무지가 남아있다. 그래서 나와 타인 사이에는, 나와 대중 사이에는 항상 불확실성의 간격이 있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무지가 존재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상대방을 이해한다고 믿는 것이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불확실성의 간격과 무지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이렇다, 너는 이렇다고 단정한다. 그리고 나서 많은 기대를 하고 실망을 한다. 분노를 한다. 이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고 아무 것도 안하면서 살 수는 없다. 누군가가 칼을 내 목에 들이대도 그것은 반드시 나를 위협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반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개 우리는 죽을 것이다. 인간은 세상을 가정없이 바라볼 수 없는 유한한 존재다. 저쪽 배에 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이러저러한 것이 타고 있다고 가정할 뿐이다. 그래서 잘못을 범하고 실수를 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이게 인간의 삶이다. 이게 우리들의 문제다. 사람을 만나는 것 아니 이 세상에서 사는 것 자체는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의 배를 계속 만나는 일이다. 우리는 뭔가를 가정하고 희노애락을 겪는다. 그걸 피할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기도할 수 있을 뿐이다. 다음번에는 우리가 조금은 더 현명할 수 있기를. 욕심이나 공포때문에 불필요한 것에 휩쓸려서 버둥거리고 살게 되지 않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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