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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자기찾기

직업의 미래, 상생의 미래

by 격암(강국진) 2016. 3. 28.

2016.3.28

직업의 미래, 상생의 미래

 

최근에 알파고 인공지능 문제로 사람들이 어떤 직업이 미래에도 계속 있을 것인가하는 질문을 참 많이 합니다. 인공지능이 사람이 하는 일을 사람보다 더 잘하게 되는 때가 오면 그런 직업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사실 우리가 완벽한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동화, 지능화는 여러가지 직업들을 없애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는 부동산 정보를 스마트폰 앱을 통하여 얻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부동산공인중개사가 하는 일은 고객들을 연결해주고 법적인 일을 처리해 주는 것인데 인터넷 시대에는 한 곳에서 데이터베이스 관리를 하고 검색을 통해서 고객을 연결시켜주는 것이 가능하며 그런 서비스는 지방에서 더욱 유용합니다. 인구밀도나 자본에서 뒤지는 지방이 전국적으로 똑같은 서비스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일은 부동산 하나만이 아닙니다. 택시도 호텔도 요즘은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분란이 생기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소비자가 그걸 원하는데 언제까지 변화를 막을 수는 없겠지요. 부동산 공인중개사라는 직업은 얼마가지 않아 없어지거나 크게 그 본질이 바뀔 것입니다. 

 

직업이 사라지는 미래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고 광범위하게 닥쳐올 것입니다. 두 개의 패러다임이 싸울 때 일단 승부가 갈라지면 세상은 한 쪽으로 급하게 몰립니다. 그래서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소개한 쿤이 과학이론의 변화라고 안하고 혁명이라고 했던 것이죠. 총이 처음 나왔을 때에도 활을 잘 쏘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총든 사람은 그다지 더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단 총이 대세가 되면 활을 쏘는 사람들은 퇴출됩니다. 화살을 쏘는 사람들중의 다수가 아직도 총든 사람보다 더 우수해도 퇴출됩니다. 총기에 대한 투자는 늘지만 궁수에 대한 지원은 줄어들고 궁수의 질이 급격히 나빠집니다. 그것이 패러다임의 교체입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 평가한 인간의 직업적 성취도가 가까운 미래에 기계에게 밀리게 될거라고 사람들이 믿게 된다면 인간들은 엄청난 속력으로 직업에서 퇴출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요즘 불평하는 불경기도 이런 변화를 이미 우리가 겪고 있기 때문인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대개 경기가 나빠서 실업률이 높다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원인과 결과를 뒤집은 것일 수 있습니다. 즉 실업률이 높아서 경기가 나쁜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세계적으로도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수익률이 높은 기업들은 요즘 그다지 많은 사람을 고용하지 않습니다. 구글도 그렇고 애플도 그렇고 삼성전자도 그렇습니다. 국민들은 점점 빚이 늘어나는데 대기업은 쌓아놓은 돈만 늘어납니다. 이미 뽑아 놓은 사원들도 해고하지만 여러기업들이 신입사원을 안 뽑습니다. 대기업은 과가 없는 과장들이 득실댑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이미 자동화 지능화된 시스템 때문에 많은 일자리가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돈을 많이 버는 기업이 사람을 고용할 필요가 없고 결국 실업률이 높아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시대에는 설사 사람들이 겨우 직업을 구한다고 해도 노동 조건이 나쁘기 쉬울 것입니다. 실업률이 높거나 노동조건이 나쁘면 사람들이 지출을 할 수가 없고 경기가 나빠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물론 경제적 양극화만 심화 될 것입니다. 

 

그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 것인가. 리오 휴버먼이 쓴 자본주의 역사바로알기라는 책을 읽다 보면 과거에 농부나 장인들에게 있었던 일이 지금의 직장인들에게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거에 농부와 장인들은 땅이나 개인 사업장이라는 생산수단을 점차로 잃었습니다. 그리고 회사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되었죠. 그리고 이제 그 노동자로서의 직장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보다 현대가 더 살기 좋다고 통상 믿지만 설사 그 믿음이 옳다고 해도 적어도 변화의 과도기에는 큰 아픔이 있게 됩니다. 지금은 노동운동의 결과로 노동자의 노동조건이 전보다는 훨씬 좋아졌지만 산업혁명이 일어나던 초기의 노동조건은 매우 나빴습니다. 농업의 시대에서 공장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생긴 아픔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태일이 분신자살을 통해서 노동자도 인간이라고 외친 사건이 1970년에 있었지요. 아직 어린 아이들이 약까지 먹어가며 노동하다가 죽거나 불구가 되면 대책없이 버려지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산수단을 잃어버리고 누군가가 그 생산수단을 독점하게 될 때 적어도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초기에는 사람들의 노동조건이 아주 나빠집니다. 이론적으로는 정치가 그것을 막아줄 수 있고 막아야 하지만 지금도 그렇듯이 과거에도 결국 권력은 힘있고 돈있는 사람들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그 방면으로의 변화는 아주 느립니다. 부자의 위험은 국가적 재난으로 호들갑을 떨면서 대처하지만 가난한 자들의 위험은 대개 엄청난 재난이 실제로 벌어져도 다음에도 또 이러리란 보장은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혹은 내 책임이 아니다는 식으로 무시되죠. 이런 현실이 단지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좋아졌던 것은 아닙니다. 결국은 노동운동이나 인권운동같은 사람들의 단합이 인간을 구원했던 것이죠. 

 

미래는 그냥 탄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재나 과거와의 투쟁을 통해서, 혹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의 경쟁속에서 탄생합니다. 그 결과 기존의 방식이 새로운 방식으로 재탄생되는데 실패했을 때 그것은 시대적 발전에 대한 장애로 인식되고 억눌러집니다. 오늘날 우리는 회사나 공장에 취직하고 월급을 받아 생활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넘쳐나서 취직이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우리가 언제나 취직을 원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은 스스로 생산해서 먹고 살 수 있었던 옛날에는 사람들은 남의 고용인이 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작은 땅이라도 자기 땅이 있어서 거기서 생산하고 자급자족하며 먹고 사는 것이 보통이었던 시대 혹은 작은 가내수공업일지라도 자기 집에서 물건을 직접 생산하고 그것을 팔아서 먹고 사는 것이 보통이었던 시대에는 공장이나 회사에서 사람을 구하려고 하면 사람이 구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취직을 좋아하지 않았던 시대도 있었던 겁니다. 

 

예를 들어 서구개척시대에 어떤 사람이 300명의 직원을 데리고 미국의 서부로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땅이 사방에 있어서 땅을 취득하기 쉬웠던 당시의 서부에서는 그 직원들이 모두 그를 혼자 두고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생산수단을 즉 자신의 땅을 가질 수 있다면 취직을 해서 새 시대에 합류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업이 발달하는 전제조건은 소규모 농업이나 가내수공업방식의 파괴였습니다. 사람들이 지금 상태대로 살 수 없어야 회사나 공장으로 가서 일하게 되기 때문이죠. 유럽의 경우에는 엔클로저라는 것이 유행하면서 작은 땅을 가지고 있었던 소농들은 빠르게 땅없는 사람 즉 무산계급이 되었습니다. 양을 키우는 것은 농사를 짓는 것보다 노동력이 덜 필요하고 더 큰 목초지가 필요하며 돈은 더 잘 벌었습니다. 그래서 귀족들은 자기 땅 주변에 말뚝을 박고 양을 키우기로 했는데 이게 엔클로저입니다. 그런데 그 땅들은 전에는 농민들이 공유지로 생각하면서 목초를 구하곤 하던 땅이었습니다. 새로운 산업이 발달한다고 해서 소농들도 작은 땅에서 양을 키워서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땅의 배타적 소유권이 더 강조될 수록 점점 소농들은 고립되고 생활이 나빠집니다. 결국 소농들은 자기 땅을 팔게 됩니다. 

 

집에서 수공업으로 물건을 만드는 장인들도 대량주문과 대량소비의 시대에는 적합하지가 않았습니다. 대량소비의 시대니까 장인들이 만드는 물건은 더 잘 팔렸을거라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자본가들이 증기기관을 이용한 큰 공장을 만들자 경쟁에서 패배한 장인들은 결국 자기 작업장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공장의 저임금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공장의 경쟁력을 더욱 더 높였겠지요. 

 

비슷한 일은 20세기 한국에서도 있었습니다. 한국의 땅값은 20세기 후반에 크게 올랐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된 사람도 많지만 실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은 과거에 우리가 여의도나 강남의 땅을 사뒀더라면 큰 부자가 되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곳이든 개발을 할 때 그곳에서 가난하게 살던 사람들은 얼마안되는 보상비를 받고 자기 땅에서 내쫒긴 이후에 더 가난해지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기가 얼마나 지역 공동체에 의존하는 가에 대해 이해하지 못 합니다만 가난한 이들은 그 땅에 존재하는 공동체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얼마간의 돈을 들고 다른 곳으로 옮겼을 때 그 돈이 금방 사라져버리기 쉽습니다. 결국 지역공동체의 존속과 도시 개발은 공존하지 못하고 하나가 하나를 없앰으로써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뭉쳐서 하나의 공동체로 개발이익을 분배하겠다고 나섰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고 사람들이 개인으로 개발세력과 협상하는 경우는 개발의 이익이 그 땅의 원래 주인들에게 충분히 돌아갈 리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직장인들은 공유지의 목초를 이용해서 가축을 키우던 소농들이나 가내수공업을 통해 물건을 만들던 장인들과 비슷한 입장에 있습니다. 오늘날 직장인들은 대개 대학시절과 같은 젊은 시절에 익힌 지식을 이용해서 그것으로 돈을 법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고 많은 학비를 들여서 공부를 합니다. 여기저기서 노하우를 익힙니다. 그렇게 배운 지식이 사람들이 가지는 생산수단입니다.

 

그런데 지능적 네트웍이라던가 인공지능같은 프로그램들은 마치 대규모 공장이 등장한 것과 비슷합니다. 엔크로저는 땅의 독점적 지배를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점차로 지적소유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적 소유권은 내가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지식을 이용하고 싶으면 그것에 대해 돈을 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유지의 목초가 엔클로저로 사라졌던 것처럼 이제 돈되는 정보들은 점차로 귀해지며 설사 안다고 해도 공짜로 쓸 수가 없어집니다. 미래에는 죽은 지식, 다시 말해 새로운 생각, 창의적인 생각이 되지 못하고 그저 남이 하는 것, 관습적으로 해온 것을 따라한 것뿐인 지식들은 생산수단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자동화가 그런 사람들의 직업을 사라지게 할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공지능이 그 사람들을 대체하겠죠. 

 

결국 미래는 네트웍을 만들고 소유하는 사람과 창의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기계화 되기 어려운 노동을 하거나 아니면 공장을 소유하듯 네트웍이나 인공지능을 소유해야 돈을 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아직 독점되지 않은 새로운 정보를 생산하는 것이죠. 검색시장을 장악한 구글이나 페이스북같은 SNS회사가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다른 예도 있습니다. 아이디어를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그것을 팔아 돈을 버는 사람의 한가지 예는 요즘 인기가 좋은 프랜차이즈 사업입니다. 햄버거를 그저 열심히 굽는 것으로는 점점 더 돈을 벌기 힘듭니다. 뭘 어떻게 구울 것인가를 개발하고 그것의 독점적 소유를 주장해야 돈을 버는 시대가 된 것이죠. 그러니까 예전에는 적당히 남의 햄버거 굽는 법을 배워서 자기가 노동해서 돈을 버는 시대였다면 요즘은 나만의 햄버거를 만들어야 그걸로 돈을 벌 수 있는 시대가 된 겁니다. 노동이상으로 지적재산권이 돈을 벌어주는 것이죠. 

 

지적재산권이 강조되는 시대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가끔 어떤 직원이 만든 기술로 회사는 조단위의 돈을 벌었는데 그 직원에게는 그저 소액의 보너스정도만 지급되었다는 이야기가 돌아다닐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부당하게 들립니다. 특히 창의적인 사람들에게는 말이죠. 창의성을 강조하는 미래의 세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많은 발전을 가져 올 가능성이 큽니다. 누구나 구글이나 페이스북 사장이 될 수는 없지만 생활의 곳곳에서 작은 창작품들이 보상받는 사회가 미래가 될 것입니다. 캐릭터를 팔고, 목소리를 팔고, 새로운 리모델링 노하우를 파는 겁니다. 반면에 생각없이 기계처럼 그저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수입은 줄어들겠죠. 

 

그러나 설사 미래에 창의성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보상받는 시대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 시대가 마법같은 성취를 이뤄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시대에 창의성보다 공동체 정신이 훨씬 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산업화의 시기에 인권운동이나 노동운동이 필요했듯이 사람들이 뭉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패배자로서 아주 비참한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공장시대 초기처럼 창의성도 착취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장기화되면 사람들의 창의성도 결국은 꽃피지 못할 것입니다. 한 명의 아인쉬타인이나 스티브 잡스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아주 많은 수의 실패자를 용인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 정신은 과거의 노동자의 단결과는 다릅니다.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권리나 처우를 개선하는 것인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미 최고의 기업은 고용하는 사람의 숫자 자체가 작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작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통적 의미의 노동운동은 오히려 직업을 더욱 빨리 사라지게 만들 것입니다. 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할 동기를 오히려 더 강화해 줄테니까요.  

 

게다가 이미 취직한 사람들의 권익위주로 생각하는 노동운동이 아름다운 모습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노조는 회사에 일종의 음서제도 비슷한 것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즉 노조 직원의 자녀가 그 회사에 취업하려고 하면 특혜를 받을 수 있도록 요구했었다는 것입니다. 또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처우문제에 정규직으로 구성된 노조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오는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사실 이미 직장에 취업하고 있는 사람들은 새로 취업하는 사람들이 자기보다 가혹한 조건으로 일하게 되도 그걸 용인하곤 합니다. 기성세대도 신세대에게 이공계의 지식과 인문학적 소양에 화려한 스펙도 요구하고 세계 최고들과 경쟁할 수 있는 능력도 요구하며 안정된 직장을 주기보다는 더 자주 검증받을 것을 요구하지요. 내 일이 아니니까요. 결국 이건 그저 새로운 기득권의 이야기가 됩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공동체 정신은 회사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며 굳이 비교하자면 노동운동보다는 소비자 단체운동과 더 비슷합니다. 즉 회사원이라고 해도 회사 내부에서의 평등과 정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 바깥의 사람들과 혹은 사회와의 공존과 상생을 생각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회사는 점점 더 적은 수의 노동자만 필요로 하게 되었지만 회사는 미래에도  소비자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소비자는 수동적 소비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회사와 더불어 생산도 하고 소비도 하는 일종의 생태계를 이루는 존재가 되어 갑니다. 회사의 입장에서도 이런 변화가 보다 안정적인 판매를 유지할 수 있게 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는 창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 회사는 단순히 제조하고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문제가 된 것입니다. 구글이나 웹튠회사를 향해 창작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생태계를 요구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회사의 사장이 마치 정치가처럼 미래 사회를 위한 비전을 설명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인공지능이 발달한다고 해도 소유와 중요한 판단의 주체는 인간이 될 것입니다. 미래에도 회사가 공장에서 소비자를 제조해 낼 수는 없습니다. 구글의 번역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인간들이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을 했던 데이터를 기반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데이터를 생산해 내는 인간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회사던 인공지능이던 그들 혼자서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포함하는 순환의 고리, 상생의 관계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쉬울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연대를 만들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고민해야 합니다. 공동체 의식이 발달해야 창의력이 지배하는 다음시대로 확실히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한국에는 지금도 세상 문제의 해결은 더 가열찬 경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그 중에는 권력을 가진 사람도 많지요. 그러나 이 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장면이 보여주듯이 단순히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열심히 하자라는 말은 자동차보다 더 빨리 뛰라고 하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과거를 위한 메세지와 미래를 위한 메세지는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합니다. 과거에 전태일은 노동자도 사람이다라고 외쳤습니다. 나만 사람이다라고 외치지 않았죠. 자기도 힘들면서 남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거기서 우리는 산업화 시대에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았습니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새로이 찾아야합니다. 그러나 그런 논의에서는 개인만 보는 경우가 많은 것같습니다. 집단과 단합이 망각되기 쉽습니다. 즉 더 창의적이 되라거나 미래에 성공할 사업은 이거라던가 하는 식이죠. 우리가 기계보다 더 잘 할수 있는 것이 뭔가를 찾을 때 우리가 서로를 아껴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창의성이전에 공동체 정신이 훨씬 더 필요합니다. 인간은 자기도 힘든데도 남을 걱정해 주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뿔뿔히 흩어져서 외로운 개인으로 미래와 만나서는 안됩니다. 시대적 비극이 깊어져서 누군가가 비극적 행동을 통해 창작자도 인간이다라고 외치게 되는 일이 미래에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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