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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자기찾기

노동에 관한 세가지 의문들

by 격암(강국진) 2017. 9. 25.

많은 사람들에게 노동은 삶의 수단이다. 또한 노동없이 생존할 수 있도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삶의미를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낯선 사람들이 만났을 때 사람들이 종종 서로에게 직업을 묻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노동이라는 말은 사실 그 뜻이 불분명하다. 이 것은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생존수단과 존재 의미가 매우 연약한 기초 위에 올려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속에서 더더욱 위태로워지고 있다. 노동에 관한 세가지 질문들을 점검해 보면 이러한 현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질문들이 왜 질문이 될 수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어떤 답을 선택하건 그 답을 찾아가는 가운데 우리는 노동이란게 뭔가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세가지 질문들중 첫번째 질문은 객관적 가치론이라 불리는 노동가치설과 관련이 있고 두번째 질문은 주관적 가치론이라 부르는 효용가치설과 관련이 있으며 마지막 질문은 가치론 일반에 관련된 것이다. 



1. 노동인 것과 노동이 아닌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일까?


2. 노동에 대한 보수는 노동에 대한 댓가 인가 아니면 경쟁에 이긴 것에 대한 보수인가?


3. 로봇은 노동을 할 수 있는가?



첫번째 질문부터 시작해 보자. 노동은 소중한데 도대체 노동이란게 뭔가? 우리가 하루 종일 프라모델을 만들거나 놀이동산에 가서 범퍼카를 타는 것은 노동이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움직인 결과로 돈을 벌기는 커녕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것은 노동이 아니다. 그것은 유희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렇게 만든 프라모델을 팔아서 돈을 번다거나 혹은 범퍼카의 테스트를 위해 범퍼카를 탔다면 꼭 같은 행위가 이제는 노동이 된다. 이렇게 어떤 것이 노동이 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그 행위 자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앞에서 든 예가 보여주듯이 노동이라는 행위가 존재했는가 아닌가를 결정할 때 우리는 흔히 우리가 그것에 대해 댓가를 받았는가 아닌가에 따른다.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만들어 내는 데 들어가는 노동량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 경제학에서 말하는 노동 가치설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실사회에서 이 노동가치설은 대부분 거꾸로 뒤집어져 있다. 즉 상품의 가치가 노동의 양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양이 우리가 받는 보수에 의해서 측정된다. 그러니까 한달내내 하루종일 일해도 백만원밖에 못받는 사람은 백만원어치의 노동을 한 것이지만 10분만 일했는데도 1억을 받는 사람은 1억원어치의 노동을 한 것이 된다. 이러한 계산의 하한선은 돈을 받지 않고 일한 것은 노동이 아니다 혹은 보수가 없는 곳에 노동은 없다라는 메세지를 우리에게 준다. 유희의 행위는 돈을 받지 않으므로 노동이 아니라는 결론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런 계산의 상한도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존재자체가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그래서 그냥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서 보상을 받는 경우도 상상가능하다. 예를 들어 지자체들은 유명한 문학가에게 보조금을 줘가면서 자기 지역에 그냥 살아만 달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런 경우는 전혀 아무 행동도 없어도 현재 노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 된다. 행동이 없는데 보상이 있으니까 어떤 의미로 노동효율이 무한대다. 


이러한 노동량에 대한 상한과 하한을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가치를 노동을 통해서 평가하곤 한다. 거꾸로된 노동가치설의 논리 때문에 월급을 받지 못하거나 월급을 백만원 받는 사람은 생존하는데 문제가 전혀 없어도 자존감이 매우 낮을 수 있다. 월급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데도 보수를 받고 있는 사람은 자신을 귀한 존재로 여기기 쉬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말하자면 인간이 소득을 받는다라는 사실은 단순히 의식주를 위한 것을 넘어서 정신건강을 위한 복지차원에서도 중요한 것일 수 있다. 월급으로 천만원을 벌어 천만원을 모두 기부해도 우리는 아무 것도 안가진 것이 아니다. 자존감이 남는다. 현대사회는 백년이나 이백년전보다 훨씬 더 많이 자존감에 대한 것이 되고 있다. 현대인들은 단순히 생존할 수 있는 의식주를 가지는 것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 우리는 노동이 뭔가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새로이 정의함으로써 현대인들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노동과 노동에 대한 보수라는 1차원적인 관계속에 빠져서 우리의 가치를 폄하하는 함정에 빠지곤 한다. 거대한 회사의 이사가 되어 일은 하나도 안해도 다달이 돈을 받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으로 종종 느낀다. 그런데 우리가 부모님의 자식이라던가 누군가의 아내라는 사실 자체에서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는 일은 드물다. 즉 직업적 관계에서만 가치를 느끼고 그 이외의 일에 대해서 자긍심을 느끼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가치관계에 대한 이론의 역전은 여기서도 일어난다. 따라서 가족관계나 지역공동체내부관계처럼 보수를 지불하지 않는 관계는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없으면 가족이 살 수없다는 것을 알아도 당신이 가족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으며 당신이 중요한 사람이라고는 느끼지 못하게 되기 쉬운 것이다. 많은 보수를 받고 일하는 것에서 자신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느끼게 되는 것은 거꾸로 돈을 주지 않는 일은 무가치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단계와 매우 가깝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런 의미에서 인간을 나쁜 쪽으로 교육시키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두번째 질문으로 넘어가 보자. 노동에 대한 댓가는 노동에 대한 댓가인가? 같은 말을 반복하니 얼핏 바보같은 질문처럼 보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 질문은 꼭 질문되어져야만 한다. 임금이 노동에 대한 댓가라는 말은 동일노동에 대해 동일임금이 지불되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꼭 같은 노동을 해도 정규직 직원인가 비정규직 직원인가에 따라서 월급이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직원이 많은 곳중의 하나가 학교다. 그런데 비정규직 선생님들이 정규직 선생님들이 하는 것을 안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학교가 그들보고 담임같은 것을 맡으라고 강제할 때도 있다. 수업을 잘 못하는가? 해고가 쉬우니까 그들이 수업준비를 더 열심히하면 하지 안할 리가 있는가. 그래서 학생들이 비정규직 선생님의 수업을 더 좋아하는 경우도 많다. 엉터리 수업을 해도 정규직 교사로 안전하게 자리를 지키는 교사는 얼마나 많은가? 대학 강사도 유명한 비정규직의 예다. 대학생들은 수업을 받으려고 등록금을 낸다. 그 등록금은 당연히 중고등학교보다 훨씬 더 많다. 그런데 정작 대학에서 그 수업을 해주는 대학강사의 처우는 중고등학교 선생님의 처우보다도 훨씬 더 못하다. 


그럼 비정규직 직원들은 왜 다른 월급을 받을까? 현실적으로 이에 대한 사회의 대답은 이렇다. 당신이 정규직 월급을 받고 싶다면 남들처럼 정규직이 되는 경쟁을 이겨서 정규직원이 되면 된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정규직에 머물고 있는 당신이 월급을 더 적게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 경쟁에 이긴 정규직 직원이 꼭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대학교수가 강사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이 말을 다르게 말하면 노동자들이 받는 월급은 노동에 대한 댓가가 아니라 경쟁에 이긴 댓가라는 뜻이다. 이러한 주장은 나름의 합리적 근거를 가질 때도 있겠지만 고용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고용주의 관점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노동자가 나란히 서서 같은 일을 해도 한쪽은 다른 쪽의 절반의 임금을 받는 것이 합리화될 수 있을까? 물론 세계적인 가수와 평범한 가수를 비교하면 둘 다 같은 노래를 불러도 다른 수익을 얻는다. 하지만 대개의 일자리는 이런 상황이 아니다. 두 명의 노동자가 똑같은 질의 강의를 하거나 똑같은 빵을 만드는 상황이다. 이것은 단순히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문제만이 아니다. 정규직 직원들이 어떤 댓가를 받는가 하는 것도 시장경쟁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관점은 세상에 만연하다. 따라서 정규직 직원들 사이의 임금차에도 같은 논리가 들어간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시장이란 이 세상에 있었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시장은 인위적인 규칙에 따라서 가격이 결정된다. 사자나 호랑이도 물속에 빠뜨리면 새우나 멸치보다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노동시장의 규칙을 맘대로 주무르면서 노동에 대한 댓가는 경쟁의 결과로 저절로 생겨난다고 하는 것은 사기다. 특히 한국에 만연한 재벌가문의 재산 상속과정을 보면 한국에서는 기업을 세우고 그룹이 일감을 몰아줘서 기업가치를 올리는 식의 행위가 빈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수조원의 돈을 회사나 주주나 대중으로부터 개인이 착취한다. 이런 관행이 넘쳐나는 나라에서 노동자는 노동에 대한 댓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 이긴 권리로 그 보상을 받는 거라고 말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시한번 물어보자. 임금이란 노동한 것에 대해 받는 댓가인가 어떤 경쟁에 이긴 것에 대해 받는 댓가인가? 그 답을 후자로 여긴다면 우리는 경기장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의 노예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적어도 경기의 규칙을 정하는 것에 있어서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 질문은 로봇은 노동을 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망치나 공장이 노동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과 형식상 같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시대에 로봇이 노동을 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은 훨씬 심각한 것이며 답하기 어렵다. 만약 그 답이 할 수 없다라면 로봇이 생산해 내는 물건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고 모든 사람의 것이 된다는 뜻이다. 그건 말도 안되는 답이기 때문에 당연히 로봇의 주인이 로봇이 생산한 것을 모두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가까운 시일내에 지옥을 보게 될 수 있다. 


인공지능의 등장은 말하자면 기계의 생산성이 아주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어떤 사람은 관리자가 없이 로봇이 혼자서 뭔가를 생산한다면 그때는 1인당 생산성이 무한대가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시대에 우리가 낡은 관행을 유지할 수 있을까? 만약 매우 매우 소수의 사람이 지구 전체의 사람들이 사용하고도 남을 물건을 로봇을 써서 생산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우리는 노동에 대해서 전혀 다른 시각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노동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마치 물이나 공기처럼 유한한 자원으로 여겨야 할지 모른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물을 모두 독점한다면 물없이 살 수 없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 사람의 노예가 될 것이다. 물값이 아무리 비싸도 사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기도 마찬가지고 땅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물이나 공기나 땅을 독점하는 것은 무한정 허락될 수 없다. 노동은 어떨까? 


미래를 말하는 많은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시대는 또다시 다른 일자리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분명 옳은 말일 것이다. 인공지능이 발달하면서 인간 사회는 변화하고 인간이 어떤 가치와 권리를 가지는가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바뀔 것이며 따라서 사회 전체가 바뀔 것이다.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와 이후의 시대가 다르듯이 말이다. 


하지만 미래가 오기전에는 과도기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 과도기를 아무도 살아서 지나갈 수 없다면 미래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공지능으로 인해서 엄청난 양의 일자리 혹은 노동이 기계로 대체된다면 그리고 인간이 노동한 것과 기계가 생산한 것을 모두 노동의 결과물로 판단하는 현실이 지속된다면 소수의 인간이 빠른 시간내에 엄청난 부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가치는 한없이 추락할 것이다. 그 문제점을 사회적으로 자각할 때가 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을 수 있다. 요즘 세상의 변화의 속도는 산업혁명의 초기시대와 비할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평범한 대학생이 불과 몇년만에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들중의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 요즘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들도 정확히는 앞으로 어떤 사회적 변화가 올지 모른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과도기의 위험성을 대개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산업화과정에서도 우리는 수없는 비인간적인 노동상황을 겪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투쟁하고 사회적인 규칙을 바꿔서 오늘날의 세계가 만들어 진 것이다. 우리앞에 있어야 할 투쟁은 얼마나 거대한 것일까? 예를 들어 전태일의 1970년의 분신후 지난 반세기동안 한국에서 있었던 투쟁만 생각해 보자. 그게 그냥 낙관론만 펼쳐도 될 정도로 간단한 것이었던가? 지금의 한국이 산업화로 인해 생긴 불평등이나마 완전히 극복했는가? 그런데 인공지능의 시대가 만들어 내는 장벽은 그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미래는 괜찮을거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단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최소한 세번째 질문에 답해야 한다. 로봇은 노동을 할 수 없다고 말이다. 예를 들어 로봇을 써서 농업이 거의 완전 자동화되어 수십명이나 수백명의 관리인이 전세계 모든 인구가 먹고 남을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하자. 실제로 사람없는 로봇농업은 이미 실험중이다. 그런 세계에서 시장의 논리 운운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것은 시장의 끝이다. 그런 기술은 공적인 것으로 처리되어 공유되고 그 결과물은 지구인 모두에게 공기나 물처럼 무료로 제공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소수의 사람들이 지구 전체 인구가 먹을 식량을 생산할 수 있다면 식량은 무료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일이 쉬울리가 없다. 시장논리가 걱정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런 미래를 만들 것이란 생각은 지나치게 안일한 것이다. 인공지능처럼 파괴력이 큰 기술은 잠시 잠깐의 과도기동안에 전세계의 모든 부를 한 곳에 집중시킬 수 있다. 우리는 알파고가 바둑 세계챔피언을 이기는 것을 봤다. 과연 투자의 세계에서 세계 챔피언을 인공지능이 확실히 압도한다면 인간 세상에 무슨일이 벌어질까? 시장이 붕괴할 것이다. 일단 그렇게 되고 난 후에는 기술의 공유개념이 등장해 봐야 때는 늦다. 인공지능으로 인해 1인당 생산성이 무한대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사실 적어도 과도기의 기간동안 인간의 노동생산성은 0가 된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기계가 무한대의 농산물을 쏟아낼 때 농부의 농산물은 가치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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