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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자기찾기

노동과 비수기 여행

by 격암(강국진) 2017. 10. 16.

나는 적어도 관광에 관한한 평생 소수자였다. 외국에서 살았고 박사학위후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한국에 왔으며 비교적 휴가 쓰기가 자유로웠기에 비수기 시절에 여행을 가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한적하고 여행비가 적게 드는 그런 여행을 좋아했지만 아내는 우리는 매번 사람없는 곳만 다닌다면서 불평을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안 그런 경우도 있지만 좀 한적한 곳에 비수기에 여행을 가려고 하면 안타까운 경우를 만난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해수욕장들이 좋은 예다. 삼면이 바다이며 해변이 아름다운 한국은 정말 엄청난 수의 해수욕장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해수욕장이 있는 지자체들이 철에 무관한 관광상품을 개발하지 못해서 그럴 것이요 한국인들의 생활이 너무 천편일률적이라서 그렇겠지만 우리나라 관광의 실태는 안타깝기 짝이 없다.


수도권과 부산같은 대도시에 몰려 사는 한국인들은 휴가철이면 어마어마하게 관광지로 몰려간다. 그리고 유명 해수욕장을 포함한 많은 유명관광지는 만원버스처럼 바글댄다. 휴가철의 바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마치 목욕탕같을 때가 많다. 사람들은 휴가를 간 것이지만 막히는 찻길과 넘치는 사람들 그리고 불량스런 상인들에게 짜증을 내게 될 때가 많다. 


그런데 이 관광객들은 휴가철이 끝나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해수욕장이 운영되는 시간을 한주만 지나도 그 해변에 가보면 종종 귀신 나올 것처럼 한적하다. 이것은 한국 사람들이 다 똑같이 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무엇보다 그 지자체가 자기 지역이 계절에 상관없이 매력적이도록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음식과 볼거리가 있고 스파라도 있다면 해변은 해수욕을 하지 못해도 매력적일 수도있다. 해변은 환상적인 산책코스일 수 있다. 하지만 많은 곳은 일년중의 한두달에 맞춰서 엄청난 수의 펜션과 음식점을 만든 후 그 기간이 지나면 유령마을 처럼 변한다. 


이것을 보면 수요와 공급의 원리라는 것이 허구라는 것이 느껴진다. 적어도 단순하게는 말이다. 성수기에는 방구하기가 너무 어렵지만 비수기에는 호텔이며 펜션이 다 비어있을 것이 뻔하다. 그런데도 펜션들은 가격을 그리 많이 내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비수기 평일같으면 건물이 통째로 비다시피 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방값으로 상당한 가격을 요구하며 어떤 펜션들은 비수기에 장사를 중지하는 경우도 있는 것같다.  이걸 노동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원리로 말하자면 노동자가 봉급이 어느 이상이 안되면 아무리 시간이 썩어나도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니 수요와 공급의 원리가 깨진 것이 아닌가?


그런데 펜션은 단 한명의 손님만 있어도 누군가가 관리일을 해야 하고 추운 계절에는 난방비를 써야한다. 그러니까 기본 관리비가 나오지 않는다면 펜션은 영업을 하지 않을 이유가 있다. 나는 내가 이렇게 그 이유를 설명한다면 그렇기도 하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펜션의 방값이 어느 이상으로 싸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납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노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시간당 오천원을 받건 이천원을 받건 그 월급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게 해주지 않는다면 노동을 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황은 나빠질 것이다. 그래서 최저임금이란 제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노동에 대해서는 이런 점을 납득하지 않으며 단순한 수요공급원리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 것같다. 다시 말해서 경쟁이 매우 높으니 노동조건이 매우 나빠도 일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하는 것이다. 임금은 그냥 수요 공급원리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가 한국인으로서 인간적인 삶이며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이 어느정도인가는 고민이 없다. 그냥 굶어죽지 않고 생존하는 것이 최소한 처럼 느껴진다. 


이런 주장은 예를 들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렵고 힘든 일을 안하기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가 꼭 필요하다는 말의 바탕에 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배가 불러서 그런 노동을 안하는게 아니다. 일단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일을 시작하면 그것이 우리의 생활수준을 지켜주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점점 더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런 노동을 안하는 것이다. 이건 말하자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죽을 것인가 아니면 빨리 죽을 수도 있지만 낮을 확률로 나마 지속가능하게 살아남을까의 문제다. 


다시 펜션으로 돌아가보자. 비수기에 펜션방값이 여전히 비싼 것의 바탕에는 경쟁하는 지역민만 있을 뿐 지역공동체가 없다는 문제가 깔려 있다. 만약 어떤 펜션이 미친 척하고 비수기에 방을 공짜로 준다고 해보자. 그럼 물론 이 펜션은 운영을 하면 할 수록 적자일 것이다. 하지만 관광객 한명이 그 지역에 오면 방만 쓰는게 아니다. 음식점도 가고 커피숍도 가고 박물관에도 간다. 그 지역에서 어떤 관광상품을 개발하건 기본적으로 손님이 있어야 그걸 팔 것이 아닌가. 다시말해서 펜션주인은 손해겠지만 그 지역경제가 멈춰서는게 아니라 돌아가게 만들려면 공짜 펜션이 있는게 그 지역 전체에는 이득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사고의 결론은 명백하다. 그 지역의 주민들이 서로 경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정신을 발휘해서 한 사람이 손해 보고 다른 사람은 이득만 보는게 아닌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관광객이 오면 득을 보는 다른 사람들이 손해를 동시에 분담해야 한다. 그러면 관광객들은 기쁘게 그 지역을 찾을 것이고 그 지역도 발전하게 될 것이다. 


노동으로 가보자. 노동에 있어서의 공동체 정신을 생각하면 우리는 먼저 노조를 떠올릴 것이며 그것도 공동체가 맞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상의 공동체 정신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회사와 노동자 나아가 대한 민국 사람 모두의 공동체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민을, 노동자를 살리는게 결국은 모두를 살리는 길이라서 그렇다. 


가혹한 경쟁논리를 동원해서 기본임금이란 그저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을 구할 정도이며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그정도만 월급을 주면 되고 그걸 원하는 사람이 없으면 외국인 노동자를 데려오면 된다는 발상이 정말 모두를 위해서 좋은 생각일까? 일단 외국인 노동자도 인간이란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영원히 저임금으로만 일하다가 죽어 없어져 주는 존재가 아니다. 당연히 인간의 권리를 가진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일원이 될 것이고 결국 우리 사회는 그들때문에 댓가를 치뤄야 한다. 예를 들어 문화적인 차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사회적 비용을 치뤄야 하며 정치적인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설사 딸이나 아들이 게으름 피우거나 다른 이유로 일을 못한다고 해도 그때마다 계속 더 우리 집안에 다른 아이를 입양 하자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외국인 노동자가 해결책이라는 주장은 이와 비슷하다.  외국인 노동자는 결코 공짜 노동자가 아니며 설혹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래서는 안된다. 그들도 인간이니까 그렇다. 


노동자가 노동을 해서 공부도 못하고 결혼도 못하고 아이를 낳거나 교육을 시킬 돈이 안된다면 그건 인간으로서 살아갈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에 대한 동정이나 윤리적 입장은 제쳐두고 생각해 보자. 국가적으로 이말은 어떤 사람들은 천천히 그렇게 하고 있을 뿐 결국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도 없고 저축해둔 돈도 없고 자기를 교육시킬 여유도 없었으며 연금도 없는 국민들이 증가하게 되면 그 사람들은 비용을 발생시키지 않는가? 


약간 경우가 다르기는 하겠지만 한 네티즌은 이런 인상적인 지적을 했다. 미혼모가 아이를 키우면 한달에 오만원의 지원금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이가 고아원에 가면 고아원은 정부로 부터 한달에 105만원을 받는단다. 이렇다면 애초에 미혼모가 그 돈을 받으면 엄마와 아이가 헤어지는 경우가 줄어들지 않을까? 가족의 붕괴와 노인 돌보기 문제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지켜주는 문제는 명백한 이유를 가진다. 우리는 지금 어떤 선을 긋고 누군가가 그 선에 미달하면 배바깥으로 밀어서 죽여버리는 게임을 하고 있는게 아니다. 그들이 순순히 죽어주지도 않을 뿐더러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그럼 한국이란 배가 유령선이 될 것이다. 애초에 그래서 사회적 안전망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한국처럼 작은 나라가 공동체 정신을 발휘하지 않고 수요 공급의 원리만 이야기하면서 이기지 못하면 죽어라라고 한다면 그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손해가 된다. 결국 한국처럼 작은 나라는 높은 수준의 복지가 필요하다. 


미국에서는 은퇴후 국내에서 생활비가 싼 곳을 찾아 이주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나라가 크니까 그런 계산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나라가 크면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기회가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중국처럼 그렇게 하려고 해도 어디 지방으로 가서 나름대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의 싸움이나 경쟁은 생사가 오고가는 문제가 되기 쉽다. 한번 밀리면 어디 갈데가 없다. 실제로 세계를 둘러보면 우리나라 같은 반도나 섬나라는 정권의 수명이 아주 길다. 싸움이 심각하기 때문에 자꾸 담합으로 싸움을 피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다. 예를 들어 중국의 나라들은 백년을 못가기도 했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했지만 그 아들대가 되자 바로 망했다. 한반도의 나라들은 5백년 정권이 흔했고 일본은 아예 천황가가 바뀐 적이 없다. 


나는 지역민들이 나름대로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을 것으로 안다. 나는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를 바란다. 그래서 전국 여러 지역이 문화적으로 풍성해 져서 계절에 상관없이 방문할 가치가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고 방문객으로서는 더 저렴하고 좋은 여행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오죽하면 한국 사람들이 국내여행 안하고 일본으로 가려고 하는지 깊게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일본은 우리가 아직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했으며  때문에 사람들이 일본에 가면 계절에 상관없는 여행, 바가지가 없는 여행이 가능하다고 느낀다는 뜻이다. 한국은 아직 그렇지가 않은데 말이다. 


나는 노동에 있어서도 특히 최저임금에 대해서도 막연히 작년에 얼마였다던가 옆의 나라가 얼마라는 식으로 접근하는게 아니라 한국 사회의 현실을 보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생활은 임금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교육비와 주거비가 적게 들면 임금이 적어도 아이를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의 문화시설이 좋으면 임금이 적어도 즐기고 자기를 개발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주변 시설이 전혀 다른 나라와 비교를 하면서 임금의 목적도 정확히 이해하지 않고 최저임금을 단순비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서유럽의 몇몇나라처럼 복지수준이 엄청높은 나라의 최저임금과 우리나라의 최저임금이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을까? 대학교육이 공짜인 나라도 있는데?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이건 단순히 수요공급의 문제가 아니라고 소비자에게 말할 때는 국민들은 그것은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노동에 대해서는 수요공급의 원리를 굳게 믿는다. 국민대다수가 소비자이며 노동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것은 모순적이다. 어쩌면 이 모순은 언론이 만들어 낸 착시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나누고 함께 고민하며 함께 살자고 하는 것은 나라를 망하게 할 빨갱이 소리가 아니라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지역에서 펜션주인만 손해보라고 하면서 편의점 주인이나 음식점 주인이 몰라라 하면 손님이 없어서 모두가 망할 것이다. 우리는 경쟁을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하지만 경쟁은 실은 우리를 모두 가난뱅이로 만든다. 우리가 서로를 믿을 때 길은 열린다. 이런 걸 지적하고 공동의 이익을 생각해 보자고 하는 것을 빨갱이 소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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