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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자기찾기

합리적 사회를 찾아서

by 격암(강국진) 2018. 4. 20.

합리적인 행동이 뭔가를 정의하기는 힘이 들지만 그것은 마치 '옳은 행동'처럼 우리가 해야만 하고 해야 마땅한 행동을 의미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합리성을 추구한다. 합리적인 개인이 되길 원하고 합리적인 사회를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연히도 합리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모든 사회는 최소한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멸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겨우 겨우 그 존재를 이어가거나 그저 천천히 쇠락하고 있는 것일 뿐 합리적으로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고 결정을 내리는 일을 하는 사회는 있기가 힘이 든다. 


핵심적 문제는 신뢰다. 인간은 오류를 범하고 욕망에 넘어가 죄를 저지른다. 그래서 질서는 파괴되고 불신은 증가한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만들어 진 사회에서 정보의 수집과 분석 그리고 판단은 항상 왜곡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신뢰의 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가장 비합리적인 행동이고 그것은 마치 고양이 앞에 생선을 가져다 놓고는 왜 자꾸 생선이 없어지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최근에 본 재미있는 영국 드라마로 다운튼 애비라는 드라마가 있다. 20세기 초반 영국 백작 가문의 생활을 보여주는 이 드라마는 귀족들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거기에서 자연스럽게 들어나는 것은 귀족의 삶이란 그 압도적인 부분이 사교라는 것이다. 이 사교행위에는 사냥이나 무도회같은 레크리에이션은 물론 결혼도 포함된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를 떠올리게 된다. 하나는 왜 귀족들은 그렇게 사교에 미친 사람처럼 인생을 사교에 허비할까 하는 질문이고 둘째는 그런 귀족의 모습이 한국의 관료나 회사의 중역들의 모습과 너무나 겹쳐 보이지 않는가 하는 기억이다. 그 이유는 물론 신뢰에 있다. 어떤 개인이 여러모로 재능과 능력이 있다는 것은 신뢰의 문제 다음의 일이다. 아무리 뛰어나도 그 사람이 내 적이나 경쟁자라면 소용이 없다. 그러니까 귀족들은 끝없이 만나서 우리는 한편이라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고 그래야 사회가 그 신뢰를 기반으로 뭉쳐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신뢰마저 무너지면 사회전체가 불합리의 극치를 이루게 되고 결국 전쟁으로 자살하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전에는 자주 볼수 있었던 그리고 지금도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은 개인적인 사교행위가 능력보다 종종 더 중요하게 보이는 광경이다. 예를 들어 광고회사나 자동차 부품회사라고 하자. 이 회사에서 광고 잘만들고 부품 잘만드는 것보다 술자리에서 재미있고, 윗사람의 경조사를 잘 챙기며, 심지어 족구나 축구를 잘하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처럼 보이는 상황을 우리는 보지 않는가? 우리는 이것을 흔히 아부라는 말로 무시하지만 사실 그렇게 단순하게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즉 우리가 그것을 아부로 부른다면 우리는 사교의 사회적 역할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으며 그 핵심에는 신뢰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사람은 내 적이 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다. 우리는 그게 필요하다. 


내가 아래에 쓸 것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아부를 옹호하는게 아니다. 하지만 귀족들의 사교생활이 가지는 사회적 역할을 곱씹고 나면 개인으로 고립되어 나는 그저 나 할일만 하면 될뿐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는 사람의 문제도 이해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아부에만 몰두하는 사람만큼이나 시야가 좁은 것이고 다만 그 반대의 극단에 있을 뿐이다. 그런 사람은 근대적 교육시스템이 만들어 낸 환상에 지나치게 깊게 빠져 있는 것이다. 누구도 홀로 원자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가 가졌던 이런 개인적 사교행위의 중요성은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을 제한되게 만든다. 남자들이 호부 호형하면서 계속 뭉치고 사교를 하는 사이에 여자가 끼면 어떻게 될까? 불륜, 성추행, 강간이 넘쳐나기 딱 좋은 상황이 된다. 그걸 막으려면 아주 복잡한 사교의 규칙들을 발달시켜야 하며 우리는 이로부터 왜 귀족들의 사교장에 그렇게 예절이 많았던가하는 질문의 답을 이해하게 된다. 현대사회는 이런 복잡한 예절을 싫어하고 결국 여자들이 인간적인 관계를 기반으로 돌아가는 전근대적 조직에서 힘을 쓰는데 있어서는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뢰라는 것을 해결할 방법이 결국은 결혼을 하고, 사교로 시간을 보내는 것 밖에는 없을까? 그게 전부였다면 우리는 아직도 봉건영주시대를 살면서 천년전처럼 살고 있었을 것이다. 신뢰를 만들어 내는 또 다른 강력한 방법은 시스템이다. 즉 법 시스템이 그렇고, 시장의 발달이 그렇다. 어떤 시스템이 발달해서 우리가 그것에 의존할 때 인간적인 믿음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다면 그 신뢰는 사회가 집단으로 합리적 판단을 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가 시장에 가서 사과를 살 때 그 가게의 주인을 잘 알면 좋은 사과를 싼 값으로 사게 되지만 낯선 곳에 가서 사과를 사면 항상 바가지를 쓰고 썩은 사과를 받는다고 해보자. 이런 저 신뢰사회에서는 당연히 사교와 대인접촉에 기반한 신뢰의 가치가 커진다. 그건 낯선 사람이 마을에 들어오면 마을 사람들이 여지없이 엄청난 텃세를 부려서 그 사람을 거지로 만들어 마을 바깥으로 쫒아내는 세상에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말은 이걸 뒤집으면 다시 말해서 누구나 같은 가격을 내면 같은 품질의 사과를 살 수 있는 시대에는 사교에 기반한 신뢰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 혹은 근대 사회의 본질이다. 현대 사회는 법과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 현대 사회는 본질적으로 홀로 존재가능한 개인의 합이다. 개인적으로 고립되어 있어도 나는 내 할일만 하면 된다는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은 현대의 산물이다. 근대사회는 개인의 독점적 소유를 강조하고 그만큼 서로로 부터 멀어진다. 


이러한 신뢰시스템에서는 여성도 위에서 말한 문제에서 벗어난다. 여담이지만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전근대적인 시스템이 근대적인 시스템으로 바뀌면서 남자와 여성이 반대의 문제를 겪고 있다. 남자는 사교에 기반한 신뢰의 힘으로 편하게 살았는데 그게 무너지니까 허둥지둥댄다. 여성은 그걸로 억압당해왔는데 그것이 사라지기 시작하니까 전보다 훨씬 더 힘이 강해졌다. 오늘날 미투 폭로가 나온다는 것은 지금 여성의 지위가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다는 증거다. 


이런 사회에서는 귀족이 살아남기 힘들다. 시장 시스템의 발달은 귀족을 몰락시킨다. 그러니까 뒤집어 말하면 귀족은 시장을 거부하고 전근대적인 시스템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한국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질적 귀족 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재벌가문의 사람들은 음으로 양으로 힘을 써서 한국의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막는다. 다시 말해 그들은 초법적인 위치에 머물려고 한다. 평민들에게 적용되는 법은 점점 더 악날하고 집요해 지는데 그들은 그런 법에 적용받지 않는 위치에 머물려고 한다. 삼성이 한국을 살리고 있는게 아니라 삼성같은 곳이 한국의 시장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시장이 무너지면 모두가 죽을 판인데 말이다. 


21세기의 한국에서도 여전히 사교는 매우 중요하다. 능력이 아니라 귀족에 해당하는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과 스킨쉽을 하면서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로 남고 있다. 이것은 물론 새로운 귀족자제들이라고 할 수 있는 재벌3세 4세들이 계속 잘먹고 잘 살아가는 세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조현민 조현아가 포함된 대한항공의 3남매가 이걸 보여주는 예중의 하나다. 그리고 이것은 대다수 여성들이 계속 세상에 나가고 싶으면 성추행 성폭행 당할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세상을 유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신뢰사회란 필연적으로 그런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의 과제는 사회적 융합을 만들어 내는 것인데 그것도 결국은 신뢰의 문제이며 전근대적 시스템에서 근대적 시스템으로의 이행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즉 제발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상식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법치국가를 만들자는 것이다. 사회적 융합이란게 별게 아니다. 우리는 그럴 때 우리 사회의 합리성을 한단계 진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근대 사회를 너무 잘 완성시켜도 곤란하다. 우리는 그와 동시에 변증법적으로 만들어진, 즉 전근대적인 것도 그 반대인 근대적인 것도 아닌 그 이상의 장점을 가진 사회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근대적인 사회라는 것도 이른바 모더니즘으로 20세기에 걸쳐서 내내 비판받은 것이다. 


근대 사회의 문제는 인간이 법과 시스템에 너무 의존하다보니까 그렇게 비대해진 시스템이 인간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경쟁하면 좋은 세상이 저절로 온다는 자유주의를 원론 그대로 믿는 사람은 요즘에는 미친 사람이다. 시장은 결코 완전히 자유인 적이 없었고 인간의 선택과 규제를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시장이 만들어 내는 세상은 지옥이 된다. 


그런데 너무나 커다란 시스템의 조각이 되어 나는 그저 내일이나 할 뿐 전체를 보지 않겠다고 하면 우리는 그런 지옥을 만드는 거대 시스템을 우리 스스로 만들게 된다. 거대한 법인은 누구도 통제하지 못하는 괴물처럼 그저 팽창과 돈만을 쫒는다. 그러면서 누가 약이 없거나 기아로 집단으로 죽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는 조직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또 다른 합리성의 붕괴다. 


21세기 사회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이제 컴퓨터와 통신이 전과는 비교할수 없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스템을 단순화하는 면이 있다. 그러니까 전에는 인간이 했던 일을 기계가 대신하고 전에는 백사람이 했던 일을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서 한 사람이 하게 된다. 이렇게 규모가 줄어들면 전체를 보기가 쉬워지는 면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판단이 끼어들기 쉽고, 빠른 대응이 가능해 진다는 말이다. 특히 이런 추세는 물론 요즘 빠르게 발전하는 인공지능때문에 빨라지고 있다. 


모든 것이 종이로 행해지던 시대에 관공서에서 서류가지고 싸워 본 사람은 그런 시스템을 가지고 거대 조직을 운영하면 문제가 생겨도 그 문제가 뭔지를 알아내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릴 거라는 것을 알 것이다. 다시 말해 조직이라는 괴물이 학살을 한다는 것을 알아도 그 사실이 제대로 인식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것이 알려질 무렵이면 이미 학살은 다 일어나고 난 뒤가 된다. 과거 식민지에서 일어났던 비극들은 전부다 는 아니더라도 결국 이런 식으로 일어났을 것이다. 권한을 가진 조직이 행동에 들어갈 때면 비록 그런 비극이 본의는 아니더라도 어차피 시간적으로 너무 늦는다.  페이스북이 개인정보를 유출했을 때 주커버그의 사과가 늦었다고 비난받았지만 사실 이 글의 문맥에서 말하자면 우리는 그렇게 빨리 사태가 파악되고 사과가 나올 수 있다는 점에 오히려 놀라야 한다. 그것이 바로 현대의 특징이자 능력이다. 


나는 궁극적으로는 높게 발달된 AI만이 이런 복잡한 세상에서 합리적 판단을 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줄거라고 생각한다.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는 일을 우리 개개인의 사정에 따라서 하는 일을 인간들이 서로에게 서비스해주기에는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빠르게 변한다. 그래서 우리는 합리적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런 기술에 투자해야 할 것이다. 인공지능을 포함하는 정보화기술이 핵폭탄보다 훨씬 더 국가의 국력에 중요해 지는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시스템이 없는 사회는 아주 바보같은 짓을 하면서 잡아 먹힐 테니까 말이다. 비트코인 투기같은 것을 생각해 보라. 현대 시스템에서는 거대한 경제적 파도를 불러 일으켜 나만 살고 나머지는 다 죽이는 미래도 상상가능하다. 물론 나만 살아남을 비결은 인공지능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장기적인 목표이고 우리는 과도기에 살고 있다. 그런 노력도 필요하지만 지금 당장은 과도기를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전근대성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장이 정말 시장의 규칙대로 움직이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보수를 자칭하는 사람들은 대개 스스로를 시장주의자라고 부르는데 이것처럼 엉터리인 말도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법과 규칙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대개 진보주의자로 불린다. 보수주의자들은 대개 특권을 좋아하고 시장의 규칙을 파괴하길 좋아한다. 그들이 말하는 시장의 규칙이란 결국 규칙이 뭐건 간에 지금의 기득권층이 잘먹고 잘사는 것이 규칙이라고 말하는 것 뿐이다.그건 시장의 규칙이 아니다. 우리는 진짜로 상식적인 세상, 법이 지켜지는 세상을 살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선거도 잘하고 지도자도 잘 뽑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인간적인 관리자가 필요하다. 지금 세상은 어차피 완벽히 법칙만으로 돌아가는 세상도 아니고 그런 세상으로 완성되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지금 세상에도 모순이 있다. 그런 모순을 해결할 정치적 권한을 가진 사람은 대통령같이 선출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인간적인 관리자가 될 필요가 있다. 이명박이나 박근혜같은 사람을 뽑아서는 안된다. 그들은 공익을 사유화하는 사기꾼이거나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는 전근대 시대의 공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합리성의 증가는 엄청난 경제적인 의미가 있다. 박근혜, 이명박 정부와 지금의 정부를 비교해 봐도 이걸 알 수 있다. 불행히 모든 사람들이 그걸 알지는 못할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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