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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자기찾기

파리바케트와 노동

by 격암(강국진) 2017. 9. 29.

최근 공정거래 위원회는 파리바케트에게 가맹점의 제빵사들을 본사가 직접 고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제빵사들은 공식적으로는 도급회사의 직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파리바케트의 직원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불공정한 고용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파리바케트는 단순히 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청소같은 문제에 있어서 까지 제빵사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린다고 합니다. 즉 뭘 시키던 현재의 상황에서는 제빵사가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파리바케트는 제빵사들이 자기 직원은 아니라고 하는 상황이고 말입니다. 


이런 공정거래 위원회의 명령에 대해 파리바게트와 도급회사는 극렬하게 저항하면서 그 명령에 따를 경우 회사가 망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도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냐면 제빵사들이 파리바케트의 빵을 만드는 상황에서 도급회사라는 중간단계를 끼워넣으면 더 많은 돈이 지출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가맹점이 3백만원 이상의 돈을 파리바게트에 지불하면 그 돈에서 중간 수수료가 잘라지고 2백만원정도로 변해서 제빵사들에게 지불되게 됩니다.이런 상황에 대해 김용민 브리핑에 출연한 이원배 기자는 실제로 현재의 봉급수준을 생각하면 모든 제빵사들을 파라바게트가 직접 고용해도 파리바게트나 가맹점이 더 많은 돈을 지불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은 왜 생기는가? 그 이유는 경쟁때문입니다. 노동의 가치가 경쟁에 의해서 생기도록 만들면 만들 수록 노동의 사용자측인 회사는 이득을 보게 됩니다. 회사가 직원을 직접 고용하면 직원들은 회사의 일부가 되며 직원들이 서로 경쟁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이유가 바로 노조같은 것을 만들어서 직원들 모두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원배 기자에 따르면 도급회사의 직원들인 제빵사들이 노조를 결성하려고 하면 파리바게트같은 본사는 단순히 도급회사와의 도급계약을 해지해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것만으로 그것을 와해 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도급회사는 마치 고용된 깡패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들은 파리바게트와 공식적으로는 분리된 회사지만 실질적으로는 오로지 파리바게트의 노동자들을 억압하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댓가로 그들은 관리비를 받는 것입니다. 


결국 3백만원의 월급을 지불할 수 있는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2백만원의 월급을 지불하면서 나머지 백만원은 엉뚱한 사람들에게 줍니다.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직접 3백만원을 주면 그들이 4백이나 5백을 달라고 하거나 부당한 명령에 대해 항의 할 것이라고 회사가 믿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가 3백만원 어치의 일을 하면 그걸 누가 했건 3백만원을 댓가로 지불하는 것이 상식인 것같지만 여기에는 많은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의 가치입니다. 제빵사는 빵을 만듭니다. 하지만 회사는 빵을 기획하고 선전하며 가맹점을 관리하지요. 최종적으로 소비자가 빵을 사면서 만원의 돈을 냈다고 할 때 이 중의 몇퍼센트가 과연 제빵사의 몫인지 그리고 몇퍼센트가 회사의 몫인지는 불확실합니다. 


이에 답하는 방법중의 하나가 그것은 시장 혹은 경쟁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제빵사는 제빵사의 몫을 주장하고 회사는 회사의 몫을 주장하면 그 주장들이 부딪히고 경쟁하면서 결국 합리적인 균형점에 도달하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을 말그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제빵사와 회사의 경쟁은 전혀 자유경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사는 되도록 괸리조직을 크고 강하게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노동자들의 조직은 와해시키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회사와 노동자가 경쟁을 할 때 노동자가 무력해지기를 원하며 그 결과 경쟁의 균형점이 매우 회사에 유리한 곳에 생기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도급회사를 운영하는 것은 그렇게 하기 위한 수단중의 하나인 셈입니다. 


이렇게 되면 봉급은 노동에 대한 댓가라기보다는 한없이 경쟁에 이긴 것에 대한 보상에 가까워 집니다. 이것은 전체적으로 보면 노동자에게 나쁠 뿐만 아니라 회사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결국 전체 시스템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소비자가 내는 돈의 상당부분은 회사에게도 노동자에게도 가지 않습니다. 노동자를 억압하기 위한 시스템에 투자됩니다. 그 반대방향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자들의 노동이 사측과 투쟁하기 위해 많이 쓰이게 됩니다. 만약 내가 빵을 만원을 주고 사는데 그 만원중 5천원이 빵을 만드는 것과는 상관없이 누가 누굴 억압하기 위해서 혹은 그저 투쟁하기 위해서 쓰인다면 소비자로서는 돈이 아까울 것입니다. 


모든 조직은 자신의 존재이유를 강조하기 마련입니다. 경찰은 범죄자가 없다면 필요가 없습니다. 때문에 경찰은 사람들에게 범죄자들이 세상에 있으며 그들은 아주 위험하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일단 노동자를 억압하기 위한 시스템이 자리를 잡으면 그 시스템은 그저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와 노동자 모두에게 노동자들은 억압하지 않으면 엉망으로 행동해서 회사를 망하게 할 것이므로 반드시 자신들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게 되기 쉽습니다. 


결국 회사도 노동자도 전체 생산성을 증가시켜서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보다는 투쟁과 경쟁에 몰입해서 다른 쪽의 이익을 뺏어오는 것이 수익을 올리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믿게 됩니다. 제과점체인이 빵이라는 제품에 집중하기 보다는 노동자 탄압에 집중하고 노동자들도 빵을 만드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는 자신의 권리를 확대시키는 투쟁에만 관심이 집중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한발뒤로 물러나서 보면 사람들은 결국 문제의 원인은 불신과 독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간에 존재하는 불신이 필요없는 비용을 만들어 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저는 경쟁이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주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경쟁에 이기는 것이 더 중요해 질수록 내가 더 잘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해 지기 때문입니다. 


경쟁 혹은 투쟁은 곧잘 시스템 전체의 효율성을 떨어뜨립니다. 그러니까 만약 시장이 독점상태가 아니라면 다른 회사 혹은 다른 체재와의 경쟁이라는 더 큰 경쟁에서 패배하게 만들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업문화가 다른 외국 기업이 그런 비효율성이 없어도 기업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면 누군가를 억압하는데 많은 비용을 쓰고 있는 기업은 경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짐승은 짐승들의 세계에서는 잘 살지만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잘 살지 못합니다. 어떤 사회가 생명과 인권을 존중하고 다양성이 존재하며 삶의 목적에 대해 깊은 고민이 있다는 사실들은 한가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준엄한 노동의 현실과 거리가 먼 것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짐승처럼 인간을 대하면 인간은 짐승이 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짐승처럼 투쟁해도 짐승이 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낡은 계급투쟁식의 경쟁논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태일은 분신자살로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에 항의하기 전에 그런 억압없이도 기업은 운영될 수 있다면서 실제로 그런 기업을 운영하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젋고 가진 것없는 전태일로서는 그리고 당시의 현실에서는 어려운 일이었고 그는 결국 분신자살하고 맙니다. 


우리는 코앞의 일도 봐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다운 사람들의 네트웍을 만들어 내지 못할 때 결국 모든 투쟁은 실패할 것입니다. 결국 노동 운동이 지향해야 할 곳은 더 많은 봉급이나 이윤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이며 따라서 우리는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뭔지에 대해 계속 고민하게 됩니다. 이명박 박근혜같은 정권이 끝났으니 만큼 보다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 걸맞는 노동이 정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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