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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자기찾기

노동의 종말

by 격암(강국진) 2018. 3. 1.

노동이 무엇인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사전을 찾아보니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라고 나와있다. 이런 의미라면 노동이 끝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미래에도 우리는 우리의 무한한 욕망을 위해 뭔가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노동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읽었다. 그것은 마셜 맥루언이 지은 미디어의 이해에 나오는 것으로 노동은 돈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주장이다. 맥루언에 따르면 돈이 널리 쓰이기 이전에는 노동과 노동이 아닌 것은 잘 구분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돈이 널리 쓰이게 되면서 노동이라는 말은 분명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즉 돈을 쓰는 일이 보편화되면서 우리는 노동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고 그걸 좀 더 일반화해서 아주 옛날의 일에 대해서도 그런 관점으로 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동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중요하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원시인들을 하루 종일 노동을 하는 인간으로 생각한다. 그들도 생존을 위해 물자가 필요했었고 원시시대에는 놀이동산이나 텔레비전이 있는 거실은 없었기 때문이다. 좀 억지 같지만 야생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동물들도 이런 의미에서 말하면 모두 다 엄청난 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카페에 앉아서 친구와 잡담을 하는 인간은 하루종일 분주히 움직이는 개미를 보고 나는 노동을 하고 있지 않은데 개미는 하루 종일 일밖에 안한다면서 개미를 불쌍하게 여기는가 하면 짝을 찾기 위해 소리를 내는 베짱이를 보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놀고 있다고 멋대로 말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은 정말 옳은 것일까? 해수욕장에서 헤엄치고 있는 인간은 노동을 안하고 있으니까 정말 바닷속 거북이보다 한가한 존재인가? 돈따위 모르는 개미보다 월급받아서 카페에서 커피마시는 사람이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깊이 고민해 봐야 할 문제가 있다. 맥루언이 이미 반세기전에 주장했고 제레미 리프킨이 20여년전에 책으로 썼으며 요즘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더 설득력있게 말해지는 이야기가 바로 노동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루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인간이 일을 안해도 기계가 대신 일을 해줄 거라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노동이라는 관념이 사라지는 새로운 세상이 올거라는 결것에 가깝다. 결국 노동이란 사회가 거대한 시스템으로 통합되고 전문화되고 표준화될 때 만들어지고 유지되어 온 개념이라는 것이다. 경제시스템의 통합과 보편화의 핵심이 바로 화폐 즉 돈이다. 그런데 맥루언은 그 전문화와 보편화의 과정이 전기에 의해 뒤집어 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노동과 노동이 아닌 것의 경계가 다시 점차로 불명확해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과정이 계속된다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다시 한번 노동이 없는 시대를 살게 된다. 이것은 인간이 일하지 않는 시대가 아니라 노동이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시대다. 인간은 고양이나 거북이처럼 그냥 살게 되는 것이다. 노동을 하고 그 다음에 쉬거나 즐기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랄까. 

 

FTA체결이라던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돌아다니는 우리 시대에 이것은 현실과는 영 동떨어진 이야기같기도 하지만 노동의 종말이라던가 보편 시스템의 붕괴같은 말들이 허무 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는 우선 그 이유를 작은 경제를 주장하는 사람들, 공유경제를 선전하는 사람들에게서 본다. 그들의 주장이 옳고 그른 것을 떠나 우리는 아주 큰 규모에서 인간 문명이 변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주장들 속에 있는 중요한 핵심은 오늘날에는 기술의 발달때문에 우리가 모든 것을 거대한 통합경제에 의존할 필요가 더이상 없어졌다는 것이다. 거대한 통합경제는 매우 사치스럽고 비효율적이다. 요즘 인기있는 말로 하자면 반4차산업혁명적이며 물건이 쓸데 없이 많이 돌아다닌다.  

 

생각해 보면 우리 나라에도 있는 것을 지구 반대편에서 수입하는 이유는 상당 부분이 정보와 신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떤 물건을 원하는 순간, 그 물건이 내 손에 들어 오려면 나는 그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하고, 그 물건을 구하려고 하면 실제로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마트에 가는 이유는 거기에 가면 우리가 필요한 물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물건들을 사재기하지 않는 이유는 그 보급이 안정적이라는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소규모 생산이나 배급을 하는 사람들은 경쟁력이 약하고 그래서 시스템은 점점 더 거대화되어지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레몬이든 오렌지든 어떤 작물을 키울 수 있다고 해도 그 규모가 훨씬 더 큰 쪽이 경쟁력이 좋다. 안정적으로 거대한 물량을 생산할 수 있는 곳에서 전세계 시장을 독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거대한 경제시스템은 세계의 지역들을 전문화 시킨다. 각 지역들은 특정한 분야에 집중하고 자급자족을 포기하게 된다. 같은 과정은 지역의 차원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일어나서 개인들도 특정한 직업으로 전문화 되어왔다. 이런 시대가 오래되다보니 우리는 어느새 전문화를 당연히 좋은 것으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전문화, 거대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낭비와 폐해도 심해졌다. 요즘에는 도시농업이라고 해서 자기 집에서 채소를 키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것은 대량생산과 소비가 적어도 두가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유통과 경쟁에 워낙 많은 돈이 들어가다 보니까 물건이 비싸진다. 산지의 농민들이 납품하는 가격은 엄청나게 싼데 도시민들이 그걸 사는 가격은 매우 비싸다. 유통업자가 사기를 친다기 보다는 그들도 유통에 돈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생산하는 것이 경쟁력을 가지게 된다. 또 하나는 도대체 이 물건들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에 대해 안심이 안된다. 중국에서 온 채소를 먹는 것은 앞집의 철수아빠가 키운 무를 먹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식품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돈을 더 내야하는 경우가 많다. 집에서 자기가 직접 소규모로 채소를 생산하는 것은 그렇게 비싸지도 않고 안심도 된다. 그래서 도시농업이 늘어나는 것이다. 게다가 도시농업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치유의 효과가 있다. 전문화된 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채소키우기를 하면서 마음의 회복을 추구한다. 사실 인간은 본래 전문화된 시스템의 부품으로 살도록 만들어 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은 정보와 신뢰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공유경제의 개념이 최근에 더 주목받는 이유도 기술의 발전으로 물건들이 어디에 있는가를 파악하고 그 물건들을 관리하고 배달하는 일이 점점 더 쉬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없었다면 우버택시나 에어비앤비같은 사업은 활성화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이런데 사람들은 물류혁명이 올거라고 말한다. 드론이나 자율주행 자동차가 온갖 물건들을 자동으로 배달하는 시대가 임박했다는 것이다. 내가 있는 지역내에 있는 온갖 물건과 서비스가 자동적으로 준비되고 검색되고 배달되는 시대는 먼 미래가 아니라 이미 시작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렇다면 보다 신뢰를 줄 수 있는 지역 생산 제품들이 비록 소규모일지라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지식과 신뢰와 물류의 문제따위가 고도로 발달되어 효율성을 증대시킨 사회에서는 많은 것들이 거대한 시스템 없이도 자급자족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  아니 단순히 자급자족이 가능해진 수준이 아니라 그쪽이 더 높은 수준의 생활을 달성하게 만들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생각해 보면 부자나라가 되면 사람들이 전부 날마다 외식을 하고 모든 일을 사람을 시켜서 할 것같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레시피를 알고 간단히 조리법을 구할 수 있으면 집에서 요리를 해먹는 것이 외식을 하는 것보다 더 좋을 수 있다. 가구를 직접 조립해서 쓰는 사람들은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아니다. 부자나라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자급자족을 시도할 때 생활이 훨씬 더 효율적이 된다는 것을 느끼는데 그 이유는 비싼 인건비도 있지만 자급자족이 가능할 정도로 사회적 환경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즉 개선된 생활환경이 자급자족을 오히려 더 선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만 보면 부자나라의 사람들이 자연속의 삶에 더 가깝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당장 모든 것이 자급자족이 되고 지역화되고 노동의 의미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는 그렇다. 그러나 변화의 폭은 우리의 상상을 넘어설 수 있다. 3D 프린팅 기술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런 기술이 보편화된다면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해서 소비자에게 물건을 배달할 필요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미래에 화성으로 갈 사람들은 이런 기계를 가지고 가서 3D 프린팅으로 집을 프린트해서 지을지도 모른다.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자급자족의 폭과 의미와 가치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다. 

 

노동이란 것의 본질이 통합된 경제시스템의 창조물이라면 즉 돈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면 노동이 무엇인지가 가장 확실하게 정의되는 시대란 전세계가 단일화폐속에서 통합된 시대다. 화폐가 없어지고 물물교환의 시대로 돌아가서 내가 당신을 위해 청소를 해줄 테니 당신은 우리 집 창틀을 고쳐주시요라는 식으로 변한다면 노동과 우정의 행위의 경계선은 한없이 약해진다. 즉 사람들은 자신이 경제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우정에 의해서 서로 돕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지금도 화폐경제로 돌아가지 않는 가족내부의 활동은 경제활동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고 배우자간에 서로 돕는 것은 그냥 사랑과 윤리의 행위이며 사람들은 서로를 그저 공동운명체로 여긴다. 하지만 가족의 내부를 볼 때 경제행위가 아니라 그 안의 인간적 관계가 사람들의 삶의 질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분명하다. 

 

미래가 된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다 서로를 가족으로 여기고 살게 될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노동이 종말된 시대가 온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우리는 여기서 고민해야 한다. 아래에도 쓰겠지만 어쩌면 노동은 이미 상당부분 종말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그 의미를 착각해서 그것을아직 깨닫고 있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시대에 인간의 많은 활동은 노동이라기보다는 윤리적 행위로 파악될 것이다. 즉 사람들은 그냥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서, 좋은 친구로서 해야할 일을 하면서 살며 그 일의 혜택을 기반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 시대가 오는 것은 반드시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윤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술적 발달이 그런 삶을 더 경쟁력있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즉 윤리적으로 사는 것이 삶의 질을 유지하거나 향상시키는 것에 있어서 보다 확고한 가치를 가지는 시대인 것이다.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그것은 무섭고 이상한 세계일 수 있지만 자본주의적 시각이 영원한 진리라는 생각 자체가 착시 일 수 있다. 

 

기술의 발전만 너무 강조하고 있으면 우리는 노동의 종말을 오히려 너무 먼 미래로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주변을 둘러 보자.  나는 요즘 노인들을 보면서 돈의 가치의 허무함을 느낄 때가 많다. 외로운 노인들은 절대적으로 타인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 인터넷이나 정수기 계약을 하고, 화장실의 휴지걸이를 설치하고, 새로 의자하나를 산다고 해도 노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의 가격이 아니라 정보와 신뢰다. 즉 누군가가 그런 걸 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줄 필요가 있다. 그걸 순수히 돈으로 사려고 하면 엄청난 지출이 나갈 수 있다. 믿을 수 있는 자식이 핸드폰 계약을 해주면 그냥 쓰면 되는데 모르는 사람에게 그걸 부탁하려고 하면 그게 싼건지 아닌건지도 모르는데다가 자칫하면 중요한 개인정보가 나갈 수 있어서 부담스럽다. 하지만 외로운 노인들로서는 종종 어쩔 수가 없다. 실제로 노인들 중에는 젊은 사람들이 보면 정말 아슬아슬하게 사는 분들이 많다. 통장비밀번호를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알려준다던가 현금지급기 앞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현금카드를 주면서 돈을 찾아달라고 하시는 분도 있기 때문이다. 소위 피싱사기가 넘쳐나는 것도 상당부분 이런 노인들을 노리고 하는 짓이다. 노인들의 돈을 노리는 사람들은 세상에 아주 많다. 엉터리 제품들을 비싼 가격에 노인들에게 파는 걸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같다. 노인들을 여행시켜준다고 하면서 계속 물건파는데로 끌고 다니는 것이다. 

 

나는 이 노인들의 이야기를 단순히 노인문제를 지적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것은 노인복지의 차원에서도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현대사회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점차로 위에서 내가 말한 노인들처럼 변하고 있으며 이미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노인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은 정도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이미 그렇기 때문이다. 이제는 젊은 사람들도 세상의 복잡함을 따라갈 수가 없다. 직구를 한다던가, 비트코인거래를 한다던가, 핸드폰을 바꾼다던가, 그 숫자를 헤아릴수도 없는 온갖 할인혜택이며 포인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아무 생각없이 상거래를 하는 사람은 완전히 바보가 되는 것같다. 

 

사회는 개인의 총합이라는 것이 자유주의적 인간의 의미다. 그러나 이런 그림은 이미 현대에는 매우 비현실적이다. 그건 위대한 대리석 조각품을 대리석 가루의 총합이라고 파악하는 것보다 더 심하다. 순수하게 고립된 개인은 현대사회에서 매우 위험하고 비효율적이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힘써 노동을 해서 돈을 벌어도 그 돈이 아주 위험하고 실질적 가치가 낮아진다.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간의 망이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된 현대에 현대인은 이미 돈으로 사는게 아니라 윤리와 따뜻한 정과 공동체의 보호로 살고 있다. 만약 순수히 개인주의적으로 살고, 시장 경쟁 논리적으로만 세상이 돌아간다면 이미 한국 사회는 지옥일 것이며 민란이 일어나서 붕괴했을 것이다. 

 

얼마전 한국에서는 촛불집회끝에 정권이 바뀌는 일이 있었다. 촛불집회에 나가서 노래부르고 촛불을 드는 행위는 경제적으로 의미가 없어보이고 이기적 개인주의자들에게는 쓸모 없는 행위로 보일 것이다. 그것은 공동체 정신의 표현이다. 거리로 나온 사람들이 모두 어떤 사회적 불의의 직접적 피해자들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만 거리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 중에는 단기적으로 말해서 자기 생각만 하자면 그냥 세상 외면하고 살아도 잘 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러나 그들은 기꺼이 시간쓰고 교통비 들여 나와서 쓰레기를 줍는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나서 뒤를 돌아보자. 터져나오는 비리들의 내막과 함께 세상을 보면 촛불집회에 참석하는 것만큼 중요한 경제적 행위가 없다. 우리 사회에서 정과 윤리와 공동체 정신을 빼고 경제논리만 따지면서 열심히 직장생활해서 월급만 받자고 하는 사람만큼 바보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면 거대한 정보의 흐름 앞에서 개인의 노동의 가치란 거의 무의미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재용이 노동으로 부자가 되었는가? 그렇다고 재산을 합법적으로 물려받았는가? 내부정보를 바탕으로 주식을 사면 평생 먹고 살고도 남을 돈을 버는 시대다. 이명박의 아들이나 전두환의 손자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있는가? 이런 시대에 열심히 손발놀려 노동을 하면 그 댓가인 돈을 받는다는 개념에만 모두가 매몰되어 있으면 그런 세상은 지옥이 된다. 바로 처음 본 사람에게 통장 비밀번호 알려주는 노인처럼 위험하게 사는 것이 된다. 실제로 박근혜, 이명박 정권에서 국가의 돈이 새어나간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열심히 일하고 세금내는 시민들은 허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걸 생각하면서 우리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보자. 우리는 정말 지금 노동의 시대를 살고 있을까? 물론 우리는 노동도 한다. 노동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 세상이 지금 노동만으로 돌아가고 있는가? 드론이나 3D프린팅, 인공지능따위를 이야기하면서 노동의 종말을 이야기하고, 돈보다 윤리나 정으로 살아가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는 말을 하면 그것은 황당하고 먼 이야기같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이미 노동이 상당부분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가 노동의 종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에 그걸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노동의 종말이란 단순히 기계가 인간대신 일하는 시대가 아니라 노동행위 이외의 것이 상당부분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시대다. 그 노동행위 이외의 것이란 시장논리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윤리적 행동, 정치적 행동, 비영리단체활동처럼 보이게 된다. 노동의 종말이란 세상이 점점 더 비영리적인 행동들에 의지해서 돌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오늘날에는 윤리적인 시민들이 있는 나라가 부자나라다. 단순히 나만 부자되겠다는 생각속에서 부지런히 일해서 통장에 돈을 모르는 사람들만 있는 나라는 가난한 나라가 된다. 한국인들이 지금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이유는 열심히 노동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한국인들이 정과 윤리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걸로 독재자와 정경유착의 수혜자들과 싸워왔기 때문에 그나마 지금정도라도 사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열악한 노동환경에 항의하다가 분신자살한 전태일과 다를 바가 없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기술은 지금 이순간에도 발전하고 있고 퍼져나가고 있다. 그러면 그럴 수록 노동의 종말은 가속화된다. 우리는 크고 작은 공동체가 필요하고 그 공동체가 요구하는 윤리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타인의 문제를 느낄 수 있는 공감능력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져서 시민의 연대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사회가 있다면 그런 사회는 노동이 종말된 시대에 생존할 수 없다. 그 사람들은 어리석고 외로운 노인들과 같다.  노동의 시대가 끝나고 망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노동만으로 기계와 경쟁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망의 시대에서 한 없이 외로운 인간의 돈은 한없이 그 효용 가치가 낮아진다. 따라서 돈과 노동이라는 관점으로만 세상을 보면 그 세상은 크게 왜곡되어 보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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