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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자기찾기

상업경제와 지식경제

by 격암(강국진) 2019. 11. 6.

예나 지금이나 땅부자들이 부자인 것은 차이가 없지만 상업이 발전하기 이전의 부자들이란 정확히 말하면 농지를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그 농지에서 농산물을 생산했고 그것이 그들의 부와 권력의 기본이 되어 주었다. 농지에 의존했던 사람들은 자연히 지주에게 종속되어야 했다. 이런 사회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사농공상으로 사람의 가치를 따지던 시절이 있었던 것처럼 상인은 전혀 가치있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저 물건을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놓을 뿐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상업이 발전하면서 이야기가 전혀 달라지게 된다. 부와 경제의 중심은 이제 1차산업이 아니라 2차 3차산업으로 옮겨갔다. 오늘날 기업가는 스타같은 위치에 있다. 


누구나 아는 이 역사 이야기를 반복하는 이유는 이런 이야기가 오늘날의 현실과 비교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에는 지식과 기술의 분야에서 마치 농업중심의 세상이 상업중심으로 바뀌는 것같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시각을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유럽에 있어서 나아가 세계에 있어서도 중요한 한가지 일이 19세기에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전문화가 보편화 된 것이다. 이 것은 또 하나의 새로운 지식과 기술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얻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대학에 전문학과가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지식인이 그냥 학문을 하는게 아니라 학문은, 그리고 지식체계는 다양한 전문분야로 나눠져서 연구되어 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전문가와 아마추어를 구분해서 생각하고 사람들은 서로의 전문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전문화는 19세기에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독일의 대학이 학과로 나뉘어지자 그것들이 나중에 미국을 포함한 세계의 대학들이 수입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전문화라는 것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알게 되었다. 


이러한 전문화는 기술적 학문적 발전의 속력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르게 만들었다. 본래 인류의 학문적 기술적 발전은 19세기 이전만 해도 백년 천년단위로 바뀌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세상이 바뀐 것을 느끼는 것은 18세기까지만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10년단위가 예측하기 무섭다. 그 결과 부모와 자식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게 되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에게 뭐라고 조언을 주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예를 들어 나는 스마트폰은 물론 휴대폰도 없던 시절에 컷다. 그런데 스마트 기기가 넘쳐나는 시대에 성장하는 아이들을 정말 이해할 수 있을까? 전자오락과 유튜브는 시간낭비인가? 어떤 사람은 그걸로 직업을 삼기도 하는데? 


이 변화는 전문화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다. 전문화는 대학을 넘어 사회 구석구석으로 파급되었다. 그래서 회사며 정부같은 공적 사적 조직들은 전문적 분야들로 세분되어 있으며 오늘날의 직업이란 대개 그런 전문화된 조각중의 하나를 담당하여 일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농업과 상업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이 대단해 보이는 변화는 겨우 농업사회의 성숙기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상업이 발달하는 기본적 조건은 물건을 팔 수 있을 정도로 잉여 생산물이 있다는 것이다. 농업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몇가지 이유로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좋아지는 사건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철제농기구의 보편화라던가 기르는 작물을 바꾸는 윤작과 돌아가면서 땅을 쉬게해주는 삼포제같은 방식의 도입이 농업생산성을 아주 크게 바꿨던 것이다. 


일단 농업생산성이 좋아지자 세상은 이제 전혀 새로운 질적 변화를 가지게 된다. 다시 말해 더 많은 밀이나 더 큰 호박이 더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에는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도시가 발달했다. 도시는 물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것인데 오늘날의 선진국에서는 도시에 사는 사람이 농촌에 사는 사람보다도 더 많다. 이런 변화를 요약해 보자면 기본적 식량을 생산하는 경제는 이제 물건을 이동시키는 과정 즉 물류중심의 경제로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물건이 있으니까 파는 것이 아니다. 물류가 즉 시장이 물건의 생산을 결정하고 조절한다. 주도권은 완전히 시장으로 넘어와 있다.  


돌아보면 전문화란 지식이나 기술이라는 '곡물'을 생산하는 새로운 기술이었다. 말하자면 농업경제에서 철기의 사용이나 윤작과 삼포제에 해당하는 혁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전문화의 결과 지식과 기술은 세상에 넘쳐나게 되고 그래서 지식과 기술의 원천적 시장가치는 오히려 떨어져 가고 있다. 문제는 그 기술로 뭘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원천 기술들은 다시 한번 사람들의 요구에 맞게 가공되고 전달되어야 하지 않는가? 농업경제에서 상업경제로의 전환처럼 지식생산의 경제에서 지식 흐름의 경제로 세상은 지금 바뀌어 가고 있다. 


이미 오늘날 한때 세상의 중심같았던 대학의 위치는 위협받고 있다. 바로 세세하게 전문화된 그 구조가 변하는 속력이 세상이 변하는 속력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학은 지금 이순간에도 그 전문화된 구조를 통해 엄청난 논문을 그러니까 엄청난 양의 지식과 기술을 생산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일 때가 많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본래 자신의 전문분야에 갇혀서 그걸 활용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는 일이 많다. 


이와 관련되어 인상적인 예가 일본이다. 일본은 전문화에 충실한 나라로 지금도 해마다 노벨상 수상자를 내고 있지만 일본의 경제는 30년째 불황이다. 그리고 이제는 일본은 대학이나 그런 전문가가 만들어 내는 지식을 상업화, 상품화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보다 분명해 지고 있다. 지식의 세계에서 노벨상 수상자는 말하자면 가장 큰 호박이나 가장 무거운 황소를 생산하는 농부와 비슷하다. 농업이 세상의 중심이었을 때 사람들은 새끼를 백마리씩 낳는 암소나 무게가 몇백킬로는 되는 호박을 생산하는 것이 발전된 미래라고 상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흐르지 않았다. 천대받던 상인이 미래를 만들었다. 노벨상과 국가발전의 관계에 대해서도 우리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수 있다. 


잉여생산물이외에도 상거래가 발달하는 데 필요한 또 다른 조건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치적 안정, 배, 기차, 자동차같은 물류에 필요한 발명품들을 포함한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못하면 상거래를 할 수 가 없다. 지역 지역마다 존재하는 칸막이에서 댓가를 요구하면 물류비용이 너무 증가해서 비현실적이 되기 때문이다. 물건을 나르기 쉬운 발명품이 없어도 마찬가지다. 이쪽에 아무리 뭐가 풍부해도 그걸 판매하는 지역까지 나르기 위한 수단이 없으면 상업은 발전할 수 없다. 그리고 상업발전을 거부한 지역은 산업발전에서 뒤쳐져서 약해졌다. 사람들은 도로를 까는 것을 발전 그 자체와 동일시 하기 시작했다. 


지식세계에서도 20세기에는 이와 비슷한 변화가 있었다. 20세기는 어쩌면 전자통신의 시대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컴퓨터의 발달과 함께 라디오, 티비, 전화기, 인터넷등이 세상을 완전히 다른 곳으로 만드는 것을 목격했다. 이제 지식은 순식간에 지구반대편까지 퍼져나간다. 엄청난 양의 지식도 컴퓨터가 저장하고 검색해 준다. 언어의 장벽까지도 자동번역기술의 발달로 무너지기 직전인 것같다. 오늘날은 지식의 전파가 순간적이고 국가적 경계를 거의 무시하고 이뤄진다.  




테일러 피터슨이 그의 책 직업의 종말에서 말하는 직업의 종말이란 어떤 의미로 바로 전문화의 종말이다. 전문화는 물론 말그대로 없어지지는 않는다. 마치 지금도 농업이 존재하는 것처럼 앞으로도 여러가지 전문가들이 존재할 것이다. 다만 전체 경제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진 것처럼 전문가의 위상은 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의미에서는 전문화된 시스템의 한 조각에서 일하는 사람들, 즉 대부분의 직장인이 이 전문가들에 포함된다. 무성영화시대에 극장에서 일하던 변사는 스피커 대신 소리를 냈다. 그리고 시대가 바뀌자 물론 이런 직업은 없어졌다. 예전에는 이런 일이 수십년 단위로 일어났지만 이제는 훨씬 더 짧은 기간에 일어날 수 있기에 변사로 전문화되고 나면 10년뒤에는 미래가 없어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테일러 피터슨은 지금은 기업가 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기업가 정신이란 물론 바로 원재료에 해당하는 지식과 기술을 연결하여 소비자들이 원하는 상품을 만들어 내는 비전을 말하는 것이다. 전통적 의미의 직업시장은 전세계의 무수한 대학졸업자들이 다 뛰어들기 때문에 포화상태라는 것이다. 학문을 하고 가장 원천적인 지식을 생산하는 일은 그 일을 가장 잘하는 사람들만 해도 충분하다. 지금 소수의 농부들이 전세계 사람들을 먹여살릴 곡물을 생산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대다수의 다른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직업의 시대는 끝나고 만다. 


이 글의 맥락에서 보았을 때 새로운 시대의 변화는 단순히 기업가의 시대라는 말로는 불충분하다. 그보다 그것은 대중 공동체의 시대, 소통의 시대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발달된 미디어를 통해서 대중은 이제 하나의 집단으로 자신들의 상상력을 발전시키고 기업과 지식인 사회에 그들의 요구를 전달하는 주체로 활동한다는 것이다. 이 기업가의 시대란 이런 측면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공유경제 사업이나 클라우드 펀딩같은 것을 생각해 보자. 이제 사람들은 하나로 뭉쳐서 일종의 문화운동같은 것을 쉽게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전체 프로젝트에 필요한 지식은 저절로 분산되고 그에 걸맞는 전문가가 호출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세상에 없는 기술이나 지식이 개발되어질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클라우드 펀딩으로 누군가가 이러저러한 상품이 개발가능하다고 했을 때 그말은 그 기술이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애플이나 테슬라의 성공은 생태계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이제 기업은 단순히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파는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소비자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을 넘어서 기업이 해야할 일 을소비자에게 넘겨주고 모두가 같이 공생하는 생태계로 조직화되기를 추구한다. 예를 들어 테슬라는 전통적 의미의 광고를 하지 않고 있는데 소비자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나서서 테슬라 자동차를 광고해 준다. 이것은 엔론 머스크가 전기차의 비전을 광고하면서 이것이 단순히 누구가의 수익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모두의 미래를 위한 비전이라는 점을 설득하는 데 적어도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단순한 일방적 거래라기보다는 비전의 공유나 사회개혁운동같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기에 보수적으로 칸칸이 나뉘어진 전문가의 사회, 관료의 사회, 셀러리맨의 사회를 유지하려고 하는 나라는 마치 산업혁명의 시대에 농업생산을 장려하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앞에서 말한 일본의 노벨상이 이런 의미에서 빛이 바래는 것은 이때문이다. 일본이 전문화된 분야에서 제 아무리 뛰어나도 그것을 상품화할 능력은 있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직업의 사회, 전문가의 사회에 남아있으려고 하는 것같다. 그리고 그러다보면 결국 그 전문가 시스템도 망가질 것이다. 마치 상업없이는 농업도 살아남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은 대항해시대같은 시대다. 대항해시대는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유럽의 배들이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항로를 개척하고 탐험과 무역을 했던 시기를 말한다. 하지만 대항해 시대라는 게 본래 위험하다. 안전한 탐험은 없고 탐험없이 앉아있으면 점점 위기가 깊어질 뿐이다. 예전에도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간 사람들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또 농촌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성공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도시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도시의 성장과 함께 성장했다. 농촌에 남은 사람들의 다수는 도시로 떠나 정착한 사람들의 삶을 부러워했다. 최근에야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을 뿐이다. 


문제는 결국 사람이다. 오늘날은 발달된 쌍방형 미디어를 통해서 사람들이 부지런히 소통하고 스스로 조직되고 있다. 이 조직이 힘을 발휘하여 세상의 중심을 차지했을 때 그것은 마치 시장이 경제를 주도하는 것처럼 지식과 학문 세계의 중심적 힘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공유경제사업이나 클라우드 펀딩같은 사업이 아니더라도 조직된 힘으로 세상을 바꿔보려는 운동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 힘은 인공지능같은 신기술의 발전에 따라 더더욱 강력해 질 것이다. 직업의 시대는 더 빨리 끝나고 사람들의 소통은 더 효율적이 될 것이다. 오늘날 시장에서 동떨어져서 살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마찬가지로 이 집단의 흐름에서 벗어나서는 미래의 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도서관이나 서재에서만 시간을 쓰면서 인터넷 서핑을 하는 사람들을 비웃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이유들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은 모두 부당한 이유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삶의 근본인 농지를 버리고 도시로 가는 사람들을 비웃는 농부의 비웃음같은 것일 수도 있다. 미래의 삶의 터전이 될 곳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시였다. 그리고 이제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옮겨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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