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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자기찾기

노동의 종말과 주체적인 삶

by 격암(강국진) 2021. 3. 24.

최근의 경제난과 인공지능의 발전때문에 기본소득제에 대한 논의가 벌어지는 것이 종종 눈에 띈다. 그런데 노동없는 소득에 반대하는 것은 나름 설득력이 있지만 나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요즘 같은 시대에 뭐가 노동이고 뭐가 노동이 아닌지는 정말 명확하게 알면서 노동없는 소득에 반대하는가 하는 것이다. 

 

일찌기 미디어의 이해를 쓴 마샬 맥루한은 노동은 돈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미래에는 사라질 거라고 예언했다. 맥루한이 노동은 돈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말한 이유는 우리가 사실 노동에 대해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돈을 받는 행위를 노동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돈같은 거 안쓰는 새나 사자는 노동하면서 사는게 아니다. 그냥 산다. 살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을 하면서 산다. 그 중에 어느 것은 노동이고 어느 것은 여가활동내지 취미라고 구분할 수 없다. 사람이 그걸 구분하기 시작한 것이 어쩌면 돈이 만든 비극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다 필요해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다 돈이라는 개념을 집어넣은 다음에 우리는 돈을 받는 일은 중요한 일로 그렇지 않은 일은 사적이고 희생해도 되는 여가활동이나 취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었고 모든 동물중에서 유일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존재가 되었다. 시간을 낭비한 고양이나 거북이는 없는데 말이다. 

 

하루종일 은행잔고를 올리는 일을 하고 있으면 알찬 하루고 하루 종일 그저 기분좋게 멍하니 있으면 그건 하루를 낭비한 것이 된다. 먹고 살자면 다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은 절반만 옳다. 확실히 우리는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고 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는 노예가 되고 바보가 되며 우리의 처지는 점점 더 나빠진다. 우리는 돈에 눈이 멀어 진짜 중요한 것들을 소홀히 하다가 망하게 된다. 돈을 번다는 것은 타인이 나에게 돈을 준다는 뜻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식으로는 타인의 가치, 시스템의 가치에 너무 빠지게 된다. 돈을 받지 못하는 내 집 청소는 가치없는 것이지만 돈 주는 직장에서 하는 남의 집 청소는 가치있는 일이 되는 식이다. 직업윤리란 물론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노예의 윤리인 측면이 있다. 하기 싫은 것도 돈을 위해서라면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는 태도가 우리를 물들인다. 비굴하고 양심에 꺼려지는 일도 그저 직업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식이 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매몰되지 않기 위해 적어도 생각은 깨어있어야 한다.

 

게다가 지금 말하는 것은 그 문제의 사회환경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이란 이것이다라는 고정관념은 위험하다. 돈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고 말하면 당연하게 들릴 지 모르나 이것은 반대로도 말할 수 있다. 돈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물론 먼 과거에도 돈이 쓰였고 거래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사람들은 돈을 지극히 제한적으로 쓰면서 자급자족과 물물교환으로 살았다. 돈이 본격적으로 그리고 대중적으로 돌기 시작한 것은 조선에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서양에서도 18세기정도에 산업혁명으로 공장경제가 돌기 시작한 이후다. 그전에는 대개 자급자족과 물물교환으로 살았다. 사실 상품이 돌지 않는데 돈을 얼마나 많이 썼겠는가? 사람이 태어나면 교육받고 직장에 취직하여 돈을 버는 것이 당연한 시대는 고작해야 몇백년에 불과하다.

 

이건 다른 말로 하면 노동의 역사도 그리 길지 않다는 뜻이다. 블루 컬러 공장 노동자와 화이트 컬러 사무 노동자의 일이 노동의 대명사인 것도 당연히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고기나 빵이 아니라 종이돈이든 전자화폐든 그런 걸 받으면 기뻐하는 것도 최근의 일이다. 따라서 이 최근의 문화가 사라지거나 변한다고 해도 그것이 이상하지는 않다. 다시 말해 가치를 단순히 돈으로 평가하는 생각 그리고 노동이란 공장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거나 사무실 같은 데 나가서 뭔가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점점 더 옳지 않은 선입견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제와 노동없는 소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누군가가 주장한다고 하자. 소비도 노동이다. 그러니 노동에 대해 임금을 주장하는 것이 옳고 이건 기본소득제가 아니라 그냥 소비라는 노동에 대해 임금을 지불하는 것이다. 이건 기본소득제를 관철하려는 완전한 말장난일까? 나는 제안하고 싶다.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조금 더 천천히 생각해 보자. 소비는 정말 노동이 아닌가?

 

소비가 노동이 아니라면 우리는 왜 그렇게도 많은 공짜서비스에 둘러쌓여 있겠는가? 구글검색도 공짜고, 내가 글을 쓰는 이 블로그 서비스도 공짜다. 핸드폰 보급초기에는 공짜 핸드폰도 많았다. 술을 만드는 사람이 사무실에서 술을 맛보는 것은 노동인데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은 반드시 노동이 아닌가? 영화평론가나 학자가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것은 노동인데 내가 집에서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것은 노동이 아닌가? 천천히 생각해 보라. 당신은 지금 나의 블로그에 와서 글을 읽고 있다. 그리고 나는 단 한푼의 돈을 받지도 않고 요구하지도 않고 있다. 나는 보통 나의 글쓰기를 노동으로 부르지않지만 당신이 내 글에서 조금의 가치라도 느꼈다면 왜 이 글쓰기는 노동이 아닌가? 

 

이런건 노동이고 저런건 노동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자연히 어떤 행위는 권장하고 어떤 행위는 억누르게 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너무나 복잡하고 많은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득이나 돈같은 개념으로 접근해서 이건 노동이고 저건 아니고 하는 식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문제가 아주 커질 수 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라. 우리 몸에는 수많은 세포가 있다. 우리는 물론 산소와 에너지를 바깥에서 받아들여서 우리의 몸을 움직인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세포 하나 하나마다 묻는 것이다. 너는 산소나 에너지 생산에 얼마나 기여했냐고, 기여 못한 거 같으니 너는 산소와 에너지를 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 자기 몸을 한번 생각해 보라. 이런 식으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런지. 몸이 찌뿌드한가? 그럼 기지개를 한번 펴봐라. 개운한 감을 느끼기는 하겠지만 당신은 지금 아무 의미없이 산소와 에너지를 써버린 거 아닌가? 그러니 그런 일도 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돈을 들고 이 가게에 가는 대신 저 가게에 가고, 이런 노래를 소비해 주고, 저런 옷을 입어서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것은 그 자체가 가치있는 일이다. 물건이 돌고, 정보가 돌고, 돈이 돌아야 사회는 살아있고 성장하게 된다. 그런데 왜 소비하는 것이 노동이 아닐까? 카메라 앞에서 귀엽게 웃어서 유튜브 컨텐츠를 만드는데 기여하는 아기는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인데 소비는 왜 노동이 아닐까? 낡은 노동개념에 매달리면 매달릴 수록 복잡한 사회는 마치 자살하려고 꼼짝도 안하는 몸처럼 될 것이다. 에너지는 쓰지 말고 조용히 있다가 시키는 일이나 하라는 식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노동의 가치를 다시 평가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세상에는 노동에 관한 두가지 가치이론이 널리 알려져있다. 하나는 노동이 세상가치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시장의 교환가격이 노동의 가치를 결정해 준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주장은 모두 시대에 뒤져 있다. 노동이 가치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마르크스 시대의 주장은 노동이 뭐고 노동이 아닌 것이 뭔지가 확실한 육체노동시대에나 의미가 있다. 하루 종일 편의점에서 일하는 사람과 컴퓨터 화면보고 손가락 까닥해서 수천만원씩 하루에 버는 사람의 노동의 가치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시장의 교환가치라는 말도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요즘 세상은 워낙 복잡하고 워낙 빨리 변하기 때문에 같은 거래가 계속 반복되면서 진정한 가치에 가격이 수렴한다는 식의 주장은 분명히 틀려 보이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옛날의 관점은 시장이 균형점으로 수렴한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요즘 세상은 너무 자주 시장이 비평형인 상태다. 그런데 노동의 가치, 상품의 가치를 어떻게 수요와 공급의 균형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당신은 큰 돈을 벌었다는 신흥부자들의 뉴스를 보면서 허탈해 본 적이 없는가? 그런건 바람든 사람이나 신경쓴다고 하고 귀를 닫아버린다면 당신이야 말로 시대를 쫒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발달해서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면 임금 0의 로봇이 일을 하고 자본을 가진 사람들, 데이터를 가진 사람들이 세계정복을 할 정도로 돈을 벌텐데 그저 꾸준히 하던 일을 하면 안전할 듯 싶은가? 그런 사람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는 시대에 마차를 가지고 영업을 계속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당신의 노동의 가치를 왜 인정해주겠는가?

 

오늘날에 있어서 상품의 가치나 노동의 가치는 점점 더 주관적이 되어가고 있다. 즉 몇시간이나 몸을 움직였나라던가 혹은 남들은 그걸 얼마에 사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게 나에게 어느 정도나 필요하고 어느 정도나 만족감을 주는가 하는 것이다. 당신이 지금 세상에 없는 로켓을 만들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당신은 나사하나가 꼭 필요하다. 이 나사는 당신에게 큰 가치가 있으므로 당신은 그 나사를 아주 비싸게라도 살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당신의 로켓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신이 그 나사에 큰 돈을 들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생각, 당신의 계획, 당신의 만족감이다. 

 

어떤 면에서 현대인들은 과거의 왕이나 귀족처럼 살게 되고 있다. 천년전이나 이천년전쯤 전에 어떤 왕에게 누군가가 예쁜 보석을 가져왔다고 하자. 이 보석의 가치가 얼마일까? 시장따위는 그때 없었다. 그러니까 왕은 그냥 자기 생각을 들여다보고 지불할 수 있는 가치를 결정할 수 밖에 없다. 앞에서 말한대로 모든 것이 비평형상태에서 빨리 돌아가고 있는 세상에서는 우리는 사물의 가치를 이렇게 자꾸 내 내부를 들여다보고 결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동화시대에 그런 것들의 가치는 점차로 매우 낮아질 것이다. 당신이 그저 상품을 파는 장사치라면 요즘은 망하기 쉽다. 인터넷 검색은 전국 최저 가격을 말해주고 그걸 클릭한번만 하면 집에 배달까지 해준다. 그 상품은 때로 전국 최저가 아니라 전세계 최저일때도 있다. 즉 시장이 수요와 공급의 균형에 도달을 말할 정도로 흔한 상품은 전세계에서 다 생산하여 최저가로 공급하는 사람이 나온다. 상품만 그런게 아니라 서비스도 요즘은 해외에서 아웃소싱한다. 대학졸업장의 가치는 날로 떨어지고 있다. 인도나 중국에서 수없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는 가치는 점점 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비평형상태에 있는 것들이 되게 된다. 앞으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우리는 노동이 뭐고 뭐는 노동이 아닌지에 너무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복잡한 한국 사회는 계속 움직여야 한다. 그걸 잊으면 안된다. 소비도 노동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완전히 농담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복잡한 시대, 점차로 돈이 가치를 평가하는 것에서 이탈하는 시대를 살면서 주체적으로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세상에 너무 휘둘리면 당신은 사물의 가격을 알 수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는 정말 소중한 것을 헐값에 내주고 아주 쓸모없는 것을 평생에 걸쳐서 노동해서 얻으려고 하게 될 수 있다. 똥무더기 맨 위에 앉아서 내 똥무더기가 더 크니 나는 잘났고 남들보다 가치있는 삶을 살았다고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사물의 가치가 우리 안에 있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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