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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자본주의와 노동 그리고 자기찾기

데이터 자본주의와 새로운 신

by 격암(강국진) 2021. 9. 30.

우리는 과거의 유물을 보면서 그걸 당시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그래야 우리 눈에 현대의 관점이라는 것도 보이게 된다. 예를 들어 거대한 피라미드나 불상같은 것을 생각해 보자. 그걸 보면서 '대단하다. 하지만 참으로 어리석고 불합리하군. 노동의 낭비야. 당대의 권력자들이 힘없는 백성들을 많이도 쥐어짰구나.'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물론 그런 면도 있겠지만 그건 신이 과거만큼 중요하지 않은 현시대의 관점이다. 당시의 관점으로 보자면 신은 생생한 실체였고 세상의 중심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신의 은총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인구나 기술수준을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되는 투자를 해서 신전을 짓고 기념비를 만드는 것이다. 사실 모든 것이 애초에 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지배자계급이건 노동자 계급이건 이런 점에서는 기본적으로 생각이 같았다고 봐야 한다. 모든 사람은 충실한 신의 자녀로 살았다.

 

마찬가지의 것은 왕이 살던 거대한 궁전에서도 들어난다. 당시에는 신성한 왕은 실체였으며 나라의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왕의 것이었다. 그 왕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이 사는 것이다. 거대한 궁궐을 짓는 것을 권력자의 과시욕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현대의 관점이며 당대의 관점으로 보면 그건 당연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왕의 나라에 사는 충실한 백성이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과거는 당대의 종교와 맹신의 결과를 유물로 남겼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흐릿한 유령같은 것을 실체로 느끼던 과거의 사람들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게 살면서 뭔가에 몰두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미래의 후손들은 현대인을 보면서 모든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까? 우리는 무엇에 몰두하고 있는가? 과거에는 신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혹은 왕이 모든 것이 주인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존재가 없는가? 무엇이 우리에게는 당연한 실체인가? 

 

지금도 우리를 지배하는 종교와 신은 있다. 그것의 이름은 자본주의내지 시장주의이다. 이 종교의 교리에 따르면 생생한 실체인 시장이라는 존재가 보이지 않는 손을 가지고 엄청난 힘을 행사하며 그 시장의 은총은 돈으로 나타난다. 시장주의자들은 신의 시대가 가고, 왕의 시대가 가고난 다음에 시장주의의 시대가 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역사를 재해석하여 사실 시장이라는 것은 왕의 시대에도 신의 시대에도 이미 있었다고 말한다. 그 오래전에 쓰였던 조개껍데기 같은 것을 지적하면서 인간의 역사는 사실 처음부터 시장의 발달사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시장이 만들어 낸 명백한 결과는 다양성의 증가다. 이제 사람들은 각자 양을 키우거나 농사를 지어서 자급자족하면서 다 비슷하게 살지 않는다. 시장은 돈을 통해서 여러가지 상품이 유통되게 만들고 그 상품의 다양성만큼이나 사람들의 삶을 다양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양젓을 짜거나 모자를 만든다면 시장은 말한다. 아니다. 그래서는 돈이 되지 않는다. 너는 치즈를 만들고, 너는 신발을 만들고, 너는 술을 만들어라. 너는 완전히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라. 이렇게 위대한 시장은 인간들에게 할 일을 주었다. 일찌기 미디어의 이해를 쓴 마셜 맥루한은 시장과 돈이 노동이라는 개념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즉 돈과 관련된 행위가 노동이다. 우리는 어느새 대부분 직장에 출근하고 월급을 받으며 노동을 하는 직업인이 되었다. 

 

과거의 신자들이 각자의 신전에 피와 땀을 쏟았듯이 시장주의자들은 통장이라는 신전을 각자 만들고 그 안에 최대한의 돈을 담으려고 평생 노력한다. 거대한 신전이나 궁궐이 그러했듯이 돈은 물론 그 자체가 사회적인 쓸모를 따로 가지고 있지만 어느 정도 이상의 돈을 가진 사람에게는 돈은 그냥 그 자체가 목적이고 의미다. 돈을 많이 가졌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의 축복을 받은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소유함으로써 사회적 존경과 영향력을 가지려고 한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믿음을 얻기위해서 더 많은 돈을, 도저히 다 쓸 수도 없는 돈을 통장에 쌓아올린다. 그것은 마치 피라미드나 만리장성이나 미얀마 불상과 같은 거대한 과거의 유적이 된다. 미래인들은 그 거대한 돈더미의 기록을 보면서 우리가 과거의 유적을 볼 때 느꼈던 감정을 느낄 것이다. '대단하다. 하지만 참으로 어리석고 불합리하군. 엄청난 낭비야.' 바로 이 감정 말이다. 시장주의자들은 스스로가 굶어죽어 가는 때라도 세상에 있는 다 쓸 수도 없이 쌓여 올려진 돈의 탑을 보면서 세상은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가치의 기원은 시장이기 때문이다. 시장의 룰, 시장의 평가를 제외하고 세상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것인가라고 그들은 묻는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대를 지배하는 신, 시장은 모든 것의 주인이다. 돈이면 안되는게 없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미 시장주의라는 종교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데이터 자본주의의 시대다. 문명의 새로운 단계가 그러하듯이 데이터 자본주의는 시장주의와 봉건시대와 종교시대 모두를 일관된 하나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사실 과거의 그 모든 것들은 다 데이터와 정보에 대한 것이었다. 역사의 시작부터 존재했던 것은 언제나 데이터였다. 

 

데이터 없이는 인간은 침팬지나 돼지같은 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 기록이 있고 기억이 있기에 우리는 단순한 동물 이상이 될 수 있었다. 역사를 기록할 수 있어서 우리는 자신이 오랜 세월전에 살았던 사람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적 행동도 그렇다. 작년에 빌려준 양을 돌려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억이 1년 이상 지속되어야 한다. 즉 그런 기억, 그런 데이터가 만들어지고 보존될 수 있어야 했다.  데이터는 유기체로서 우리가 계속 생존하게 해준다. 이 세상에는 가뭄, 홍수, 맹수, 전염병, 산불등 아주 많은 종류의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 불확실성을 이겨나갈 수 있게, 즉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 데이터다.

 

다만 역사의 초기에는 누적된 데이터의 양이 워낙 작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이나 왕처럼 중앙에서 데이터를 모으고 보존할 존재가 필요했다. 그때는 그들이 질서의 기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산업혁명과 시장주의의 시대가 오자. 우리는 돈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사회적 신호를 더 원활하게 주고 받을 수 있게되었다. 정보는 돈을 흐르게했고 흐르는 돈은 더욱 더 정보가 많이 흐르는 복잡한 세상을 만들었다. 시장주의의 시대에 질서의 궁극적 기원은 시장이었다. 

 

하지만 모든 이론과 모든 가치판단의 궁극적이며 진정한 기원은 연결된 데이터들의 집합이다. 우리는 이것을 서로 연결된 데이터 집합이라는 의미에서 망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데이터 자본주의의 시대는 망의 시대이기도 하고 망은 모든 것의 기원이기도 하다. 시장은 돈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전체 사회가 세계가 가진 불확실성을 이겨날수 있도록, 데이터를 흐르고 수집할 수 있게 해주는 시대에 존재했다. 그러나 돈이 곧 데이터는 아니다. 이 말은 데이터 시대의 눈으로 보면 불합리하게 돈이 누적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시장시대의 사람이 보기에 피라미드같은 유적이 불합리하게 누적된 노동의 결과이듯이 말이다. 

 

문명이 발전할 수록 변화의 진폭은 더욱 커졌다. 우리가 정보를 누적시켜서 더 복잡한 문명을 만들수록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 혹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 더 많은 정보를 누적할 필요가 생겼다. 특히 20세기이래 통신이 발달하고 컴퓨터가 발달하면서 변화의 속력은 말도 안되게 빨라졌다. 데이터는 이제 순식간에 지구반대편에 이른다. 그리고 돈도 이미 매우 추상적인 것이 되었다. 금본위제가 무너진 이래 돈은 그냥 심리적인 것 즉 그냥 인간의 신용이 되어 버렸다. 시장주의자들은 여전히 돈을 믿지만 그 돈은 이미 매우 유령같다. 

 

시장의 방식과 망의 방식은 같지 않다. 누군가는 휴지가 넘치는데 누군가는 휴지가 없어서 비참하게 살고 있다고 하자. 시장시대의 논리는 시장이 돈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물론 시장가격이 평형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여러번의 거래가 있어야 하기에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자유롭고 공평한 거래가 우리를 합리적인 대처로 이끈다. 이것이 시장시대의 합리성이다. 시장의 시대에 그 시장을 구성하는 궁극적 기본 요소는 개인이었다. 각각의 개인이 자유롭게 판단을 하면 그것이 집단적으로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장의 시대는 인본주의의 시대이기도 했다. 옳음과 합리성의 근원은 개인의 마음속에 있었다. 시장의 시대에 인간은 교육을 받고 취직을 하고 돈을 벌어서 그걸로 살았다. 그것이 상식적이고 자연스런 삶이었고 해야할 일을 하는 삶이었다. 시장의 시대에 사람들은 서로에게 대개 가장 먼저 직업을 묻는다. 그것이 돈과 관련되어 있고 노동과 관련되어 있으며 결국 어떤 가치의 일을 하는 사람인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망의 방식, 데이터의 방식은 그와 다르다. 데이터 자본주의 시대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망의 눈은 이미 사방에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그 행동을 즉각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한다. 행동은 새로운 데이터를 만들고 그 새로운 데이터는 우리의 행동을 교정할 것이다. 이것을 빅브라더의 악몽으로만 볼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집단지성으로 불리는 것에 가깝다.  망은 문제를 인지하고 휴지가 넘치는 사람과 휴지가 없는 사람을 바로 이어준다. 그리고 문제가 더 있으면 행동을 교정한다. 마치 자율운전 프로그램이 운전을 배우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문제의 해결자는 시장이 아니라 정보다. 

 

좋은 예는 공유경제사업과 암호화폐다. 우버는 차를 소유하지 않으면서 택시사업을 하고, 에어비앤비는 집을 소유하지 않으면서 호텔사업을 한다. 암호화폐 사업자는 허공에서 돈을 만들고 있는 것같다. 그 상품의 핵심에는 정보가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너무 빨리 진화한다. 완전한 비지니스 모델을 가지고 시작해서 시장의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버티는 것이 아니다. 불완전한 아이디어로 시작하면서 데이터를 모으고 그 데이터로 자꾸 진화한다. 이런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제 사업은 기업가가 고객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회운동가가 대중을 설득하는 행위처럼 보인다. 공동의 목적을 위해 모두가 같이 필요한 부분을 만들어 보자는 식이다. 

 

시간이 지날 수록 사람들은 시장이 객관적 실체로 존재하고 그 시장안에서 사물의 가치에 대응하는 가격이 거래들을 통해 평형점에 도달한다는 과거의 경제학적 시각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 보기에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장은 이제 더이상 생생한 실체가 아니며 과거에 존재했던 신성한 왕이나 신이 현대에 그렇게 변했듯이 유령처럼 흐릿한 존재라고 느낄 때 시장주의의 시대, 자본주의의 시대는 끝날 것이다. 시장주의의 합리성도 파탄나고 우리는 새로운 합리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망은 이 시대의 새로운 신이며 새로운 합리성이다. 이제 옳다는 것은 데이터를 의미한다. 물론 데이터에 근거한 대응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 최선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심리학자 다니엘 카네만같은 사람들이 모은 데이터는 이미 말해주고 있다.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고 일관성도 없다. 계산을 근거로 해서 즉 데이터를 근거로 해서 행동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행동할 때는 특히 확률적인 문제를 제대로 대처해 해내지 못한다. 인본주의의 약화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만 데이터는 인간의 불합리성이 비극을 만들고도 있다고 말한다. 사회적 차별이 인간의 본성적 불합리성때문이라면 우리는 인본주의에 근거한다면서 그걸 긍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인공지능같은 것이 아니더라도 이미 데이터는 법을 바꾸고 시스템을 바꿔서 우리의 그런 행동을 억누르고 있다.

 

시장 시대의 교육은 인간을 하나의 완전한 시민내지 개인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렇게 학교시절을 끝내면 이제 각 개인은 신성한 존재로 시장을 구성하는 하나의 조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두가지 문제를 만들었다. 우선 세상이 복잡해지자 교육과정이 점점 늘어났다. 이제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사람이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평범한 삶을 사는 게 어려워졌다. 둘째로 그렇게 길어진 교육과정도 충분치 않았다. 아무리 교육과정을 늘려도 그 개인은 사회속에 던져졌을 때 금새 세상을 따라가기가 어려워졌다. 교육받고 취업하고 노동한다는 식의 삶은 이미 끝났다.

 

망의 시대에는 교육이란 것이 없기도 하고 끝나지 않기도 한다.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기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이터를 모으는 존재로 봐야 한다. 즉 우리의 목적은 처음부터 자아실현이다. 이 시대에 처음부터 사람들은 사회에 접촉하고 교육은 끝나지 않으며 영원히 배우고 데이터를 축적하는 단계가 계속된다. 초등학생이라고 사회에서 분리될 필요가 없고 대학교나 대학원을 졸업했다고 그 사람이 모든 문제에 있어서 답을 아는 사람처럼 취급될 필요도 없다. 초등생 유튜버가 대학교수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시대에서는 말이다. 

 

하나의 지식, 하나의 데이터의 가치는 그 자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결합하여 하나의 문맥을 만들어 내는 다른 데이터들에 달려 있다. 무한대의 가능성이 열리는 시대에는 어떤 지식이 어떤 문맥에서 사용될지 모르고 그냥 배우는 것은 의미가 작다. 그것은 마치 러시아 사람은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데 러시아를 배우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은 글을 쓸 수 있게 된 이래 이성에 근거하여 짐승에서 벗어났다. 우리는 그걸 우리가 진정한 인간이 된 것이라고 부른다. 이제 인간은 다시 한번 더욱 더 진정한 인간이 될 때가 되었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의 데이터를 모으고 보존할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망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상식적이고 자연스럽고 해야할 일을 하는 삶을 살 것이다. 다만 그것이 더이상 돈과 직장을 중심으로 하는 시장시대의 것과 다를 뿐이다. 그것들은 과거의 수단이었다. 이제 우리는 보다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데이터는 무엇인가? 

 

여행을 가고 싶거나 집을 짓고 싶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미래에도 그건 어느 정도까지는 그럴 것이다. 하지만 에어비앤비를 보라. 정보는 돈을 대체한다. 정보가 없으면 천만원짜리를 10억에 살 수도 있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게 되면 우리는 애초에 여행과 새 집은 필요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보다 더 멋진 경험을 하게 해주는 다른 일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뭔지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호텔에 들어가 하룻밤 자보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그 호텔을 사고 싶은 것인가? 이 착각에 따라 들어가는 돈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부질없이 거대한 종교유적을 만드느라 평생을 쓴 과거의 사람들을 보면 당신의 인생은 좀 더 가치있는 일에 쓰일 수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더 자유롭게 행복한 것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종종 비싼 아파트 한채를 구하느라 평생을 날리고 만다. 현대의 신전은 과거의 신전과 다른가? 우리가 연결되어 협동할 때 과거와는 전혀 다른, 더이상 자본주의라고 불릴 수도 없는 어떤 것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결국 그것이 돈과 직장의 노예로 살고 있는 우리를 자유롭고 부유하게 만들지 않을까? 이것이 데이터 자본주의가 약속하는 새로운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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