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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에 영혼을 빨린 사람

by 격암(강국진) 2016. 8. 20.

우리는 여러가지 것들을 말에서 혹은 말을 통해서 배운다. 말이란 하나의 도구로 아무 개념없이 세상을 보면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세상을 훨씬 더 명확하게 만들어 준다. 


대한민국에서 여자의 삶과 남자의 삶 어느 쪽이 더 힘들까. 학생과 선생님은 어느 쪽이 더 힘들까. 남편과 아내는 어느 쪽이 더 힘들까. 한국인과 일본인 중 누가 더 행복한가. 노동자와 사업하는 사람은 누가 더 행복할까. 서울사람과 지방사람은 누가 더 행복할까. 많은 사람들은 이런 질문들이 가치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실제로 어떤 측면에서는 이런 질문이 가치가 있다. 그래서 나도 이런 식으로 종종 질문들을 던진다. 그런 질문들은 특히 우리가 뭔가를 전혀 보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서 도움이 된다. 


어린이라는 개념자체가 없을 때에는 노동자라는 개념이 없을 때에는 누군가가 학대를 당하고 있어도 그저 막연히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는 식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그런 개념들을 가지고 이 사람들을 보라. 이 사람도 인간이 아닌가. 그런데 왜 우리는 그들의 아픔에 무관심한가라고 지적하면 세상은 좀 더 명확하게 보이는 것이다. 


개념없이 우리는 장님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우리가 모든 것을 보고 있다는 착각을 해서는 안된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한개의 개념이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 모른다. 또한 우리가 세상을 세상 그대로 보고있다는 착각을 해서도 안된다. 한국이라는 이름 하나 만으로 우리는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세상에는 한국이 뭐하나 해준 것없고 착취만 당한 것같은 사람들이 한국을 위해 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저 피만 빨아 자기 욕심만 챙기면서 입만 열면 한국이 어쩌고 하는 경우도 있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개념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는 것에도 그늘이 있고 문제들이 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에서 여자가 힘든가 남자가 힘든가라는 질문을 생각해 보자. 첫째로 삶이 힘들고 나쁘고 하는 것에는 반드시 주관적인 면이 들어간다. 그래서 정당한 대우가 뭔지에 대한 고정된 답은 없다.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르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말은 가장 위대한 헛소리다. 위대하다는 것은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평등함을 인정하겠다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위대하다는 말이다. 그것이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기초적 합의가 될 것을 믿기에 그것을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대해도 헛소리는 헛소리다. 인간은 단 한명도 서로 같지 않다. 더구나 요즘은 세상이 더 커지고 복잡해 져서 인간과 인간이 다른 정도가 너무 크다. 그러니까 평등같은 개념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어리석은 집단이 욕심대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밖에 안된다. 무슨 사이비 종교집단이 정권을 잡는 것처럼 되는 것이다. 


상어는 강력한 동물이지만 그것은 상어가 물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상어를 사막에 가져다 놓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고양이 먹이감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을 평가해서 그 사람의 제대로 된 가치를 찾아 준다는 것은 그 사람을 둘러 싼 환경에 대한 평가와 가정도 포함할 수 밖에 없고 이것은 현재의 환경뿐만 아니라 미래의 환경까지 포함하는 것이므로 불확실한 예측까지 집어넣을 수 밖에 없다. 남자가 받아야 할 정당한 대우는 뭘까. 여자가 받아야 할 정당한 대우는 뭘까. 여전히 말도 안되는 차별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에 저항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런 저항에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어느 이상이 되면 정당성 논의가 각자의 희망사항 비교하기가 되고 만다. 그런게 합의가 될리가 없다. 


주관적인 측면을 더 나쁘게 만드는 개념의 문제는 하물며 우리는 남자의 평균, 여자의 평균이란 걸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객관화의 노력은 왜곡을 만든다. 예를 들어 삶이 좋고 나쁜 것, 힘들고 안 힘든 것, 행복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힘드니까 우리는 수입이 얼마냐던가 유명인이 얼마나 되는가라던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측정을 시도해 볼 수 있다. 그런 기준이 나름의 장점이 있겠지만 그런 기준이 만들어 내는 구멍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기준을 남용하면 할 수록 그 구멍이 만들어 내는 소외받는 사람들의 문제는 커진다. 우리는 애초에 어떤 개념을 통해 세상을 더 또렷히 보려고 질문을 시작했는데 그 과정을 통해 더 바보가 되고, 더 장님이 된다면 문제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개념화를 거부하는 주관성이 문제를 만드니까 우리는 이제 반대로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 그것은 오직 객관적인 것만이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객관화가 쉬운 질문만 던지고 그것이 우리가 신경써야 하는 모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은 주관성을 어느 단계에서 슬쩍 집어 넣지만 자신은 객관성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한국국민의 평균몸무게는 얼마인가는 질문은 객관화가 쉽다. 그러나 객관성만 있다면 그 결과가 40킬로가 나오건 백킬로가 나오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애초에 왜 그걸 물었는가? 우리는 은근슬쩍 우리의상식 우리의 특수한 입장을 당연한 것이라면서 집어 넣는다. 그리고 나서 나는 무슨 주관적인 주장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가 당신을 만날때 마다 당신의 튀어나온 똥배를 지적하면서 나는 아무 주관적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의 똥배는 튀어나왔군요라는 말을 반복한다면 당신은 정말 그 사람이 어떤 의도도 가지지 않은 객관적인 입장에 있다고 할 것인가. 


따라서 나는 복잡한 개념의 건축물은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한다면 적어도 이 문제들를 기억하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 복잡한 법체계를 만들면 그 구멍을 찾아서 그것을 왜곡하고 그걸로 밥먹고 사는 사람이 나오듯이 복잡한 개념은 착취의 도구가 되기 너무 쉬워서 결국 그렇게 된다. 개념은 단순하고 임시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문학이나 조각처럼 예술작품처럼 한번 그려지고 다시 시도할 때마다 다시 시작되는 것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대해 한껏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걸 기반으로 자꾸 생각을 쌓아올려서 거대한 지적인 구조물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나름의 장점을 만들지만 나름의 문제가 있다. 특히 그 구조물을 만드는 언어가 수학같은 엄밀성을 가진 언어가 아니고 일상어면 더욱 그렇다. 


안서니 티 크론먼은 교육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이것을 학술연구적 이상이라고 불렀다. 학술연구적 이상속에서 각각의 연구자들은 서로가 만들어 낸 혹은 이전 세대의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결과를 토대로 더 깊고 더 거대한 진술을 이끌어 내려고 노력한다. 철학에서, 사회과학에서, 예술론에서, 언어학에서, 역사학에서 그렇게 한다. 그들은 더 많은 자료를 모아서 그걸 분석한 2차 자료를 양산하고 그 자료를 다시 분석한 3차자료를 양산하는 식으로 결국은 권위의 탑을 쌓아 올린다. 당신이 소설에 대해 한마디하고 싶다면 돈키호테는 읽고 와야 한다는 식의 태도에 있는 그런 권위다. 실은 그 권위의 벽은 소설 한권 읽기보다 훨씬 두껍다. 


현실적으로 말했을 때 우리가 아무런 규칙도 없이 살 수는 없고 따라서 우리는 어느 정도 체계를 가진 시스템이 필요하다. 학술연구적 이상을 추구하는 것도 지나치지 않는다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사람을 삼킬 정도가 되면 그런 언어나 개념은 백해 무익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르켜 미친 사람이라고 부른다. 시스템에 영혼을 빨려 버렸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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