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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by 격암(강국진) 2016. 9. 2.

역사가 단순히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 흔한 말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를 사실의 집합으로 보는 일이 아주 많다. 그것이 왜 그런 것인지 그리고 역사가 사실의 집합이 아니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역사란 도대체 뭘 위한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자. 


이해 관계의 민감함


우리가 역사를 단순히 사실의 집합으로 파악하는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역사를 둘러싸고 이해관계가 민감하게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는 국가의 차원에서 문화적 긍지를 가지고 그 영토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는 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개인의 차원에서도 누가 무슨 일을 했으며 그 가치는 어떠한가에 대한 평가의 기준되기도 하다. 그것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역사는 객관적 사실로서 다시 말해 절대적이고 변화 불가능한 것으로 선언되기가 쉽다. 그러나 물론 이런 선언은 타인의 이해관계와 자주 충돌한다. 


우리가 평지에서는 줄을 하나 긋고 그 위를 걷는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런데 높은 곳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면 조건이 똑같아도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 평지에서는 걷다가 넘어져도 그만이지만 높은 곳에서는 넘어지면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행동에 대해 심각한 결과가 따른 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 행동을 아주 조심해서 혹은 배타적으로 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을 왜곡하는 환상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강화하는 이유가 된다. 


이해관계에 기반한 압력은 상식을 상식이게 하지 않고 몰상식을 상식으로 만들기 쉽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공식적인 역사가 어느 정도는 허구라는 것을 알아도 그것을 지키려고 한다. 다른 나라 특히 힘없는 나라의 역사가 허구라는 것을 지적할 때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람들도 혹은 경솔하게 스스로가 합리적이고 공평하며 과학적일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들도 종종 자신이 관련된 단체의 역사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현실은 마치 아주 불공평한 법의 적용같을 수 있다. 즉 소매치기에게는 온갖 비난을 해대면서 중형을 선고하면서 엄청난 사기와 살인을 저지른 범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법제도같은 거 말이다. 확실히 사람들은 역사적 환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공평하게 말하자면 그 환상을 깨려면 우선 제일 힘있고 권력있는 자들의 역사적 환상과 대결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그 역사적 환상을 통해 가장 큰 이득을 보고 있거나 그럴려고 하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일본이 워낙 잘나가고 한국과 중국이 별볼일 없던 시절에는 문명이 일본에서 시작되어 한국을 거쳐 중국으로 전파된 것으로 아는 무식한 서양사람도 꽤 있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은근히 그걸 즐겼을 것이다. 그런 시대에 우리가 깨야할 역사적 환상이 문명전파에 대해 일본이 가지는 환상일까 아니면 한국인과 중국인이 가졌던 역사적 자부심들 속의 환상일까? 


물론 사람들은 대기업 회장님이 탈세하는 것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서민들 경범죄 단속하는 것에 몰두하는 경찰처럼 얄미운 존재가 되기 쉽다. 현실적으로는 힘있고 돈있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유리한 사실을 발굴하고 그들에게 유리한 역사 그리고 환상을 퍼뜨리는데 돈과 권력을 쓰기 때문이다. 일본의 국력이 형편없었다면 지금처럼 지나간 전쟁에 대해 기억하고 기술하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들이 책을 발간하고 방송을 만들고 자기에게 유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을 교수로 뽑는다. 그리고 역사는 어느새 자명하고 변화 불가능한 것으로, 사실의 당연한 기술로 인식된다. 


학술연구의 이상


역사가 사실의 집합으로 남게되는 두번째 이유는 오늘날의 학문풍토에 있다. 오늘날의 학문은 물리학과 수학처럼 엄밀 과학을 지향한다. 그것은 사실을 발굴하고 누적시킨 후 그 안에서 객관적 질서를 찾아내는 작업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작업은 음악을 작곡하거나 조각을 하는 예술작업 같은 것이라고 하면 혹은 소설을 쓰는 것과 같다고 하면 대부분의 경우 화를 내고 모독을 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학문은 감성적이고 영감에 의존하는 작업이 아니라 사실의 발굴을 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걸 위해서 역사를 포함하는 여러 학문들은 다시 세부 분야로 전문화되어 각각의 사람들이 열심히 세부적인 사실을 발굴하고 있다. 소수의 사람들이 대중을 위해서 글을 쓸 때를 제외하면 역사는 큰 스케일로 쓸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각각의 분야에 대해 훨씬 더 세부적인 사실들로 무장한 전공자들이 널려 있을 때 감히 인류의 역사운운하는 글을 쓰는 것은 학문 세계 내부에서는 그리 진지한 일로 평가되기가 쉽지 않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경우 학계 내부에서는 그런 일은 억눌러 지고 이력서에서 크게 다뤄지지 않거나 무시되어지며 학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그저 증명할 수 없는 재미있는 공상정도로 취급된다. 


역사분야의 중심에 있는 것은 대학교수들이나 연구소 사람들이다. 그들이 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는 것은 바로 사실들의 발굴에 그들의 인생을 바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 앞에서 누군가가 큰 붓을 들어 한국사나 세계사를 쓱 그리는 일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학계에서 암묵적으로 공인된 어떤 것과 다를 때 비난을 할만한 일로 보이기 쉽다. 심지어 분노를 일으킬 일로 보인다. 그들은 입으로 어떻게 말하던 역사는 전공자의 것이며 엄밀한 사실의 기록이라는 메세지를 대중에게 주고 있다. 그러나 역시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지만 그건 마치 자신이 소설을 쓰는 소설가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집단이 박사 못받은 사람은 소설을 쓸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 진리라고 선언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어느 정도 소설일 수 밖에 없다. 


역사는 사실의 집합인가?


역사가 사실의 집합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역사란 가치와 의미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무작위로 사실을 기록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예를 들어 여기 자동차 한대가 있다고 하자. 우리는 이 자동차에 대해 무슨 사실을 기록해야 할까?  우리는 이 자동차에 대해 원하는 만큼의 사실을 수집할 수 있다. 그것은 천년전의 어떤 나라처럼 우리와 시공간의 차이를 두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놓여있고 우리는 원하는 대로 정보를 수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로 부터 자동차라는 존재에 있어서 엔진과 타이어의 상대적 중요성을 객관적으로 논증할 수는 없다. 엔진이 없으면 자동차가 가지 않는 다는 말은 쓸모가 없다. 자동차의 부품중 대부분이 그렇기 때문이다. 구동축의 나사하나가 없어도 차는 가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는 나사하나의 가치와 엔진의 가치가 같다. 또한 차가 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당연한 것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자동차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외양이나 푹신한 씨트가 더 중요할수 있다. 자동차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가능한 경우에도 자동차에 대한 가치판단은 저절로 구성되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왜 우리가 사는 이 시공간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수집하기만 하면 이야기가 즉 역사가 저절로 구성되어 지는 것처럼 생각해야 하겠는가. 그것은 허구다. 


사실은 무한히 존재하며 대개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한하게 존재한다. 이것은 우리가 살면서 거듭 반복하여 만나게 되는 중요한 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무지를 알고 있다고 너무 쉽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이 무한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저 사실들을 많이 수집하면 역사가 저절로 거기에서 나오는 것으로 믿게 되는 것이다. 의미와 가치란 이런 의미에서 객관적 사실조사의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이것은 대개 누군가가 미리 짜놓은 세뇌적 구조를 비판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되고 만다. 


사실들의 가치와 의미란 사실들이 놓여진 문맥, 이야기, 세계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객관적이고 유일한 어떤 세계에 산다고 착각하는 일이 많다. 예를 들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그 세계는 땅이나 바다나 하늘을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가능한 곳이며 아이디어도 지적 소유권으로 배타적으로 가질 수 있고 심지어 생명에도 저작권을 붙일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은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누군가가 굶어 죽어가는 것을 모른 척해도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 경제적 법칙의 냉혹한 결과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다. 그 세계에서 인간의 생명은 동물의 생명보다 소중하며 개인들은 모두 존엄하여 사람이 사람을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물론 그 세계는 노동의 댓가를 돈으로 지불하면서 누군가는 노동의 댓가로 천억이나 1조를 벌 수 있고 누군가는 한달 내내 일해도 정말 푼돈에 불과한 돈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이 가능한 세계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한히 많은 것들을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중의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두개나 세개의 선택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 중의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아예 선택의 여지란 없으며 세계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 중의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믿음이 워낙 깊어서 자기가 뭘 믿는 다는 생각도 없다. 


이 상식의 점검없이는 제 아무리 조심스럽게 사실을 수집해도 그 사실들이란 별로 의미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사실들의 가치와 의미란 사실들이 놓여진 문맥, 이야기, 세계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이 재벌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사실때문에 자신이 회사의 새로운 사장이 되지 못하는 것은 부당하고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서는 그런 생각은 망상에 가깝다. 페이스북이나 애플 사장의 자식이 미래에 그곳의 사장이 될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억울할 일도 없다. 즉 자식이라는 사실의 가치와 의미가 다르다. 화성인이 지구인의 역사를 읽는다면 이해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기록된 사실들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의 수집이란 언제나 가능한 것인가?


하지만 우리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가 사는 시공간의 이해도 관찰과  정보의 누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종종 세상을 많이 둘러보다보면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 알게 된다고 생각한다. 다시말해 사실에서 세계관이 나온다. 그러면 문제가 없다. 사실의 수집에서 세계관이 나오고 세계관은 사실의 가치를 제공해주면서 역사는 저절로 나오게 된다. 크게 보면 다시 역사는 사실의 집합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절반만의 진실이다. 관찰된 사실들이 우리의 세계관을 수정하고 만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반대로 사실들을 측정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떤 세계관이 필요하다. 동서남북을 따져서 거리를 측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구 표면을 평지로 인식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렇지 않다면 여기서 동쪽으로 얼마간 떨어진 곳이라는 말은 지표면을 떠나서 우주공간에 떠있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역사는 추상적인 분야고 거기서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추상적인 대상이다. 그보다 덜 추상적인 과학에 있어서도 추상적 개념에 대해서는 주의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온도라던가 압력같은 개념에 익숙하며 뜨거운 프라이팬을 만져본 사람이라던가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어 본 사람이라면 온도나 압력같은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온도나 압력을 관찰도 한다. 그러나 색이나 소리같은 것이 우리의 뇌가 만들어 낸 환상이듯이 온도나 압력도 오직 제한된 문맥속에서만 존재하는 추상적 개념이다. 그것은 통계적인 개념으로 우리가 수소 원자 하나의 온도라던가 수소 원자 하나의 압력같은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은 설사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해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하물며 역사는 훨씬 추상적인 분야다. 조선이라던가 세계 2차대전이라는 개념은 질량도 부피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뭔가의 시작과 끝을 자명한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여기까지를 이런 저런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시간에 그런 것이 있을리 없다. 누군가가 백설공주 이야기를 하면서 백설공주가 사과를 먹고 쓰러지는 곳에서 이야기를 끝마친다면 전체적인 이야기의 의미는 전혀 달라 보였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는 역사적으로 뭔가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조금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는 한민족이 반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한민족이라는 개념이 돌멩이나 태양처럼 반만년의 시간속에서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일까? 중국인들은 징기스칸이 중국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징키스칸이 살아서 훗날 중국 내륙의 사람들이 자신들과 징기스칸을 같은 나라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매우 어리둥절해 했을 것이다. 


사실의 기록이란 단순한 일인 것같지만 사실이란 어떤 것의 존재를 전제한다. 다시 말해 강국진의 역사적 사실이란 강국진이 존재해서 그걸 우리가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는것이다. 강국진이 없는 시간에 강국진의 역사는 없다. 물론 나는 비교적 안정되고 연속적인 존재를 유지하지만 심지어 그것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나는 생명체이므로 내 몸안의 물질은 계속 교환된다. 하물며 삼성이나 애플같은 기업의 역사를 이야기하자면 이야기가 더 복잡해진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삼성인가. 애초에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해서 시작한 장사가 거대한 주식회사로 변했을 때도 그 장사는 같은 장사일까? 봉사단체로 시작한 곳이 수익단체로 변해도 그 단체의 이름만 남아 있다면 그 단체는 계속 존재하는 것일까?  당신은 당신 친구의 뇌가 빠지고 다른 사람의 뇌가 그몸에 이식수술되어도 그 몸을 당신의 친구로 인식할 것인가? 


우리가 역사를 이야기하면 우리는 종종 몇백년 심지어 몇천년전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사실의 기록이란게 도대체 뭘까? 그것은 점점 더 많은 가정과 선입견을 요구하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강씨 가문이 천년을 이어져 내려왔다는 주장은 모계쪽의 영향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사돈의 팔촌까지 따져서 이쪽은 친척이고 저쪽은 남남이라고 하는게 어떤 절대적 의미가 있을까? 한자는 중국인이 만들었다는 주장은 말이 되는가? 이 말은 멕시코인이 옛날에는 아즈텍 문명을 건설했었다는 말과 얼마나 다를까?


관측하는 행위와 세계를 인식한 결과는 서로 되먹임관계로 이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세계란 객관적이며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바뀔 가능성을 가진다. 그것은 애초에 허공에 떠있는 것이다. 수학도 과학도 혁명적 변화를 겪는다. 하지만 설사 오랜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과학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놓치고 있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과학은 정밀학문이기 때문이다. 알고보니 생명의 신비는 우리가 몰랐던 신비의 물질때문이더라는 식의 발견이 있을 가능성은 정말 작은 것이다. 지금은 중력의 법칙이 존재하지만 5백년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실에 의거하여 과학을 구성한다고 할 때 우리는 역사같은 학문에 비해 훨씬 더 자신감을 가진다. 반면에 역사는 그럴 수가 없다. 역사는 기초재료가 되는 사실의 측정도 엄밀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개념들도 훨씬 더 불명확하다. 다시 말해 왕조나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수소원자나 에너지라는 개념보다 불명확하다. 역사는 과학이 아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내가 했던 이 모든 말들에도 불구하고 역사란 불가능하며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역사는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물론 사실들의 발굴도 아주 소중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는 애초에 독서도 하지 않고 글쓰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글쓰기도 과학이 아니지만 나는 열심히 쓰고 있다.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역사란 무엇인가하고 질문하면 대답이 구구절절이 나올 것이며 나의 답과는 다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역사란 결국 지금의 우리는 누구인가를 답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걸 질문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선택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한 시간과 공간 속을 살고 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므로 아무 구조와 형식없이 그것을 살 수 없다. 우리가 세상을 보기 위해 동원하는 구조와 형식이란게 바로 학문이다. 과학도 그렇고 수학도 그렇고 역사도 그렇다. 그것들은 우리가 쉽사리 볼 수 없는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우리의 삶이 가지는 관계와 형식을 밝혀준다. 


우리는 때로 일상 속에서 그것을 잊어버리지만 그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상실한다는 말이다. 대개 우리가 짐승의 삶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격하되는 것이다. 예술을 하고 과학을 하는 것은 혹은 글쓰기를 하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감상하는 것은 다른 의미도 많이 있지만 우리를 인간으로 의미있게 살게 해준다. 역사도 우리를 인간으로 살게 해주는 것중의 하나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매순간 새롭게 출발할 수는 없다. 우리는 시간적 연속체로 살아간다. 다시 말해 변화를 모색하지만 동시에 이제까지 살아온 것과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산다. 모든 것에 대해 손들어 버린다면 우리는 살 수가 없다. 따라서 전통은 소중한 것이며, 지금까지 존재해 온 공동체는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존재하는 것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다만 우리는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의 상식을 점검하면서 항상 새로워질 준비를 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다양성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다양성의 유지는 무엇보다 권력과 돈에 눌리는 관점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불행하게도 너무 사람들이 서로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살라고 압력을 행사하는 일이 많다. 마치 절대적 진리는 하나이며 그러니 내가 옳으면 타인은 무조건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이렇게 되면 결국 권력있는 사람의 관점이 모두의 관점이 되고 만다. 타인의 관점이 안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되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결정하기 위한 역사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권력이 사용하는 대중억압과 대중세뇌의 도구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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