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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쥐와 벌

쥐와 벌 2. 악은 어떻게 생존하는가

by 격암(강국진) 2017. 10. 18.

2. 악은 어떻게 생존하는가.

 

“우리가 남입니까 여러분!” 지역선거철 이었다. 한 정당의 후보는 길가는 사람들을 향해 강하게 외치고 있었다. 

 

“우리가 남입니까 여러분!”

 

그는 몇마디 다른 말을 하는 듯하더니 다시 같은 말을 반복한다. 이 말은 사실 매우 효과적이면서도 매우 기괴한 말이었다. 왜냐면 이 말을 뒤집으면 누군가는 남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후보자를 뽑지 않고 다른 후보자를 뽑으면 그 사람은 남이고 따라서 그것은 마치 외세에 정복당하는 식민지가 되는 꼴이라는 뜻인 것이다. 다른 후보라고 해서 외국인이거나 외계인인 것도 아니며 이 후보라고 해서 개인적으로 이 지역구 사람들과 다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 후보라고 해서 언제부터 ‘우리’였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런 말은 기괴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단 하나의 문장은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어떤 정책이나 후보가 주장하는 가치를 이렇게 분명하게 하나의 문장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 나라는 오랜동안 아수라장이었던 탓인지 낯선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 분명히 있었다. 세상에 믿을 것이 별로 없을 때 믿을 것은 결국 고향이나 혈연이라는 생각은 그럴 듯하게 들린다. 

 

‘흥. 사실 고향친구나 가족들이라고 해도 부담되고 피해를 많이 주는 경우도 많은데 말이지’

 

쥐는 이 얄팍한 계산에 코웃음을 쳤다. 하긴 이게 다 세상에 믿을 것이 별로 없어서 그랬다. 일단 순진함을 벗어던지자 쥐가 믿던 많은 것들은 사실 전혀 근거 없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일한 만큼 번다는 생각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아무도 자신의 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우직하게 일만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없었다. 

 

쥐는 이제 공식적인 규칙이나 윤리를 보지 않았고 사람을 봤다. 쥐는 강해보이는 상대에게는 한없이 고개를 숙였다. 비굴할 때는 확실하게 비굴할 필요가 있었다. 친한 척할 때는 한없이 친한 척해야 했다. 그래야 사람들이 안심을 하면서 그들의 약점을 들어 냈다.그러나 약점을 일단 잡게 되면 쥐는 단호하게 얼굴 표정을 바꿨고 사람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쥐는 어느새 주변 사람들에게 만만치 않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쥐는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은근히 만족했다. 이제는 전처럼 무한정 두려움에 떨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쥐는 드디어 세상사는 방법을, 달콤한 권력을 얻는 방법을 깨달았다. 굽히고 배신한다. 성공하는 삶이란 이 패턴의 반복이었다. 이길 수 없으면 굽히고 이길 수 있을 것같으면 타인을 배신하고 밟고 일어서야 했다. 물론 쥐처럼 살면 적이 생긴다. 그리고 삶의 패턴이 하나인 것처럼 사람들의 반응도 언제나 똑같았다. 그에게 배신당한 사람들은 언제나 분해서 쥐를 잡고야 말겠다고 발을 굴렀다. 그에게 배신당한 조직은 언제나 치명상을 입거나 아예 와해되었다. 그의 배신은 항상 인정사정없었다. 그런 그를 몰인정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항상 있었다. 

 

하지만 배신과 사기는 하려면 크게 해야 했다. 어설픈 배신은 강한 적을 만들 뿐이다. 배신당한 사람들은 미래의 적이니 그들의 피해는 결국 적의 피해였다. 게다가 배신의 열매는 그의 성공을 만들어 줄 자본이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적과 싸울 무기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배신은 사람들이 인간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믿을 수 없어 할 만큼 과감해야 했다. 쥐에게 당한 사람들은 모두 이 냉정하고 끈질긴 사기꾼에게 치를 떨었다. 그나마 살아 있는 경우에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굽히고 배신하는 것이 성공하는 길이라면 어떻게 그것은 계속 될 수 있는가? 사람의 신용이란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다른 것보다도 더 귀중한 자산이 아니었던가? 언뜻 생각하기에 이런 식으로는 쥐가 생존할 수 없을 것같다. 누구도 자신을 배신할 것같은 사람을 신뢰하거나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늘상 배신하는 사람의 동업자가 될 것인가? 쥐는 충분히 강해지기 전에 그의 악행에 대해서 비판받고 그 댓가를 치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쥐의 생존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도 어떻게 쥐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이 논리는 종종 거꾸로 이용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쥐의 계속된 생존이야말로 사실은 쥐도 그렇게 나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쥐는 종종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저에 대해서 험담하는 사람이 많은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다 거짓말입니다. 제가 정말 그런 사람이라면 제가 어떻게 지금 살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건 저의 재능과 성공을 질투하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입니다. 저는 정말 이제까지 배신과 거짓말하는 것을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일로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한번도 거짓말을 하거나 공적인 일을 통해서 제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쥐는 항상 자기의 행동과는 완전히 반대인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 언제나 그렇듯이 거짓말도 너무나 당당하게 말하면 순진한 사람들은 혼동을 일으킨다. 저렇게 까지 당당하게 말하는데 설마 그렇게까지 했을라고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쥐는 제 아무리 많은 증거가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황에서도 그런 현실에 굴복하지 않았다. 쥐는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이건 거짓말이다, 이건 모함이다라고 말하고 다녔다. 

 

쥐는 언제나 대중적 이미지와 평판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사람이 뭉쳐서 쥐를 악으로 인식하는 순간 쥐는 살아갈 길을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때를 막기 위해서 쥐는 노력과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새빨간 거짓말은 때로 진실을 압도하기도 한다. 적어도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의구심을 심는다. 쥐에게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쥐의 거짓말은 아직 쥐에게 배신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물론이고 이미 쥐에게 배신당한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있었다. 물론 배신당한 사람들은 쥐가 악당이며 거짓말쟁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쥐를 대단한 괴물이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권위를 인정했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쥐가 생존하는 것에 기여했다. 그들은 쥐의 많은 거짓말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실제로 사실이었다고 느끼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종종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쥐를 잡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 쥐가 보통 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쥐는 우선 매우 꼼꼼합니다. 그리고 쥐는 머리가 아주 비상합니다. 저도 우리가 집단으로 덤비면 쥐를 이길 수 있을거라고는 믿습니다. 하지만 쥐는 그저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쥐를 잡을 때 최대한 조심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쥐는 죽어도 그냥 혼자 죽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들중 누군가는 쥐와 죽어야 할 것입니다. 그 쥐는 괴물입니다. ”

 

그들은 여전히 스톡홀름 신드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쥐에게 가까웠던 사람들, 깊이 빠졌던 사람들, 쥐에게 더 강하게 동조했던 사람들이었을수록 쥐에게 배신당한 이후에도 여전히 쥐는 대단한 괴물이라고 증언했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쥐를 볼 때 그들만 영웅을 봤다고 말한 이유가 필요했다. 그것은 그들이 멍청했으며 탐욕스러웠고 때문에 자발적으로 악에 가담한 것때문이어서는 안됐다. 그것은 쥐가 괴물이였기 때문이어야만 했다. 그들은 배신당한 이후에도 여전히 쥐가 괴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인간들은 약하고 어리석다는 것을 남보다 더 강하게 믿고 싶어했다. 쥐에 대한 공포는 쥐를 잡겠다는 사람들을 주춤거리게 만들었고 반면에 쥐를 강하게 만들었다. 쥐를 보호하는 조직은 그 공포를 원동력으로 해서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배신당했던 사람들이 퍼뜨리는 공포야 말로 쥐를 보호해 주는 보호막이었다. 

 

이런 사실은 다른 사건에서도 분명해진다. 최순실-박근혜 사건이 터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 들어난 최순실이란 권력의 실체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몇몇 사람들에 의해 한국의 권력 서열 1위였다고까지말해지는 최순실은 그런 무시무시한 조직의 수장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다. 말도 조리있게 못하는 교양없는 주부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최순실의 이 초라함은 한국의 역사를 바꿨다. 그것은 정권이 바뀌는 것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그들을 누르던 권력의 실체를 보고 공포를 벗어던지고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자신들의 인생을 주무르던 손의 실체를 보는 순간 그들은 두려움을 느끼던 이제까지의 자기자신에게 분노하게 된 것이다. 남들은 입학하기 어려워 하는 이화여대가 저런 여자에게 휘둘렸고 최순실이 국가요직의 임명건이며 각종 거대한 국책사업에 대통령의 권력을 대신 휘둘러 간섭했다고 하니 사람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골목 친목계 총무도 제대로 못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최순실과 박근혜의 실체였다. 

 

이때도 같은 일들이 있었다. 몇몇 방송출연자들은 최순실이 저래 보여도 무서운 여자라고, 박근혜가 저래 보여도 대단한 여자라고 열심히 떠들었다. 그 조직에서 더 많은 것들을 누렸던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일 수록 최순실은 알고 보면 괴물이라는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그들은 종종 노무현 정권시절 반대로 노무현대통령이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별거 아닌 사람이라고 말했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결국 문제는 그 권위의 인정이다. 두려움은 상대에 대한 권위를 키우고 모욕주기는 그 권위를 깍아내린다. 박근혜에게 가장 치명적이었던 위협은 그녀에게 폭력적으로 분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거리에서 평화적으로 촛불을들고 박근혜를 해학적으로 묘사하는 문화축제를 열었던 사람들이었다. 두려움이 없을 때 쥐는 죽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쥐의 생존비결 그 자체는 아니었다. 뻔뻔한 태도와 거짓말만으로 쥐가 살아남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말도 안되는 거짓말들이 반복되고 악이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게 된 이유는 세상에는 언제나 선과 악의 구별을 지워버리는 균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균열들 때문에 쥐는 언제나 살아남을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이 균열들 때문에 악행과 악명은 오히려 권위와 신뢰로 바뀌어 질 수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균열을 인식하거나 그것을 크게 확대하는 것이야 말로 쥐의 생존비결이자 특기였다. 

 

쥐가 가장 먼저 냄새를 맡는 것은 사람들의 무너진 준법정신이었다. 법이나 절차에 대한 규칙은 대개 억압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억압은 사람들을 뭉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왜냐면 법은 그 법이 적용되는 사람들 사이의 평등을 주장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법을 갉아서 무너뜨릴 때 공동체는 갈라지고 균열이 생긴다. 

 

물론 법이 시대를 초월한 평등정신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법은 법 나름대로의 한계와 문화적 편견을 가지고 세상의 균열을 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법을 개정하려는 싸움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어떤 의미로 민주화투쟁의 역사란 것도 법을 개정하고 적용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로 정리되어 쓰여진 법이나 규칙들은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보통이며 대개 상당히 넓은 구성원들 사이의 평등을 전제로 정해지게 된다. 예를 들어 한국의 법은 평등한 한국인을 전제로 만들어 진다.

 

규칙과 평등에 대한 예를 들어 보자. 가장 간단한 규칙중의 하나는 뭔가를 할 때 줄을 서는 것이다. 밥을 먹을 때는 줄을 선다는 것처럼 말이다. 이 규칙은 단순하고 예외가 없다. 모든 사람은 밥을 먹을 때 줄을 서서 순서대로 먹어야 한다. 따라서 이 규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말하는 한가지 방식이기도 하다. 규칙을 잘 지킨다는 것은 이 평등을 존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줄의 중간에 끼어들거나 아예 줄을 전혀 서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런 사소한 규칙을 가지고 깐깐하게 굴지 말라고 말한다. 그들은 여러가지 규칙들을 대충대충 처리한다. 군대건 국정원이건 기업가건 경찰이건 판사건 검찰이건 청와대건 본래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할 때도 있다고 주장한다. 

 

“순진하기는. 원래 다 그런거야. 안 그런 사람이 없다고. 너만 순진한거야.”

 

그들은 모두를 이렇게 설득한다. 그렇게해서 규칙과 법치는 무너진다. 때로 그렇게 규칙들을 무너뜨리는것이야 말로 삶의 지혜고 여유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소한 규칙들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틈새 속에 쥐가 살 길이 있었다.  

 

법이나 규칙만으로 정의로운 사회가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은 실제로 옳다. 언제나 이 세상에는 법을 넘어서는 정의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독재정권과 싸우는 민주화투쟁을 하면서 모든 자잘한 법을 다 지키려고한다면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며 법을 지키는 일에만 지나치게 몰두한다면 법을 개정하는 일도 어려울 것이다. 결국 법의 개정이란 그 법을 따르는 것이 공평하거나 정의로운 일이 되지 않는 경우도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법은 세상의 복잡함에 비해 언제나 훨씬 더 단순하기 때문에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눈 먼 법은 정의나 윤리나 효율성 증대와는 완전히 반대의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악당들도 변호사를 고용하는 것이다. 좋은 교육도 좋은 정치도 기본적으로는 법이 하는게 아니라 인간이 하는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법에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같은 법을 가지고도 정치도 교육도 경제도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법때문에만 악이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대통령제 자체가 악을 행한 것이 아니다. 박근혜가 나쁜 대통령이었을 뿐이다. 

 

고민끝에 만들어 문자화된 법은 대개 한 개인의 관점과 경험치를 넘어서는 사상과 사례들에 기반하여 만들어 진다. 이것은 별 근거도 없는 관습이니 관례니 하는 것을 넘어선 것이다. 따라서 법을 무시할 때 우리는 대개 분열과 차별을 만들어 내게 된다. 악당을 추적하면서 교통신호를 한두번 무시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해서 교통신호따위 애초에 필요없었다는 말이 진실이 될 수는 없다. 그건 대참사를 불러올 뿐이다. 

 

착각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글을 쓰게 됨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한층 더 인간다워졌다. 글없이 막연한 기억이나 감정에 따라서 세상을 보는 인간은 수없이 많은 근거없는 신화들을 만들고 그것을 믿는다. 인간이 신이 되고 때로 짐승도 신이 된다. 글따위 모르는 자연인들이 보다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학 시대나 문명 시대 이전의 사람들 즉 단순하고 근거없는 미신을 믿으면서 분열되어 작은 부족으로 모여 살았던 사람들을 진정한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폭력배들이 어깨에 힘주고 날뛰는 무법사회를 낭만과 영웅의 시대이며 아름다운 인간의 사회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회의 조직적 억압에 저항하는 것을 낭만주의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때로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글을 쓰는 것이 사회나 국가를 이루며 살아가는 현재의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일관성과 더 넓어진 시야를 잊으면 우리는 인간이 작은 집단으로 분열되어 싸우고 살았던 원시시대로 돌아갈 뿐이다. 

 

법치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절차를 지키는 일을 비웃게 될 때 세상의 균열은 아주 쉽게 자란다. 일단 일이 이렇게 되고 나면 이미 관행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눈에는 뭐가 문제인 건지가 보이지 않게 되기 쉽다. 이들은 점보제트기의 엔진에 스패너를 던지는 원숭이나 마찬가지다. 죄책감이 없다. 얼마나 큰 사회적 비용이 발생할 것인지는 전혀 생각도 안한다. 불행하게도 사회가 거대하고 복잡하며 빠르게 움직이고 있을수록 절차와 규칙을 무시하는 행위는 거대한 비극적 참사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참사는 쥐가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쥐는 누구보다 많은 생존기술을 박정희에게서 배웠다. 한국의 5, 6, 7, 8, 9대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는 일제시대였던 1917년에 태어났다. 박정희는 일제시대에는 누구보다도 충성스런 일본사람으로 살았다. 그가 만주군에 지원하면서 혈서를 썼던 일은 유명하다. 혈서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에도 이례적이어서 신문에 기사가 날 정도였다. 그는 결국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토벌하는 만주군에 복무하게 되었다. 

 

하지만 1945년에 일본이 전쟁에 패망하자 박정희는 소속이 없어졌다. 그러자 박정희는 한국광복군에 편입하고 1946년에는 미군수송선을 타고 한국으로 귀국한다. 해방 이후에도 그는 한국의 군대에서 군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변신을 한 사람은 이 시대에는 흔했다. 그리고 조선인으로 태어났지만 완벽한 일본인으로 살고자 했던 박정희의 변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박정희는 모처럼 한국군에 복귀했지만 사실은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1948년 11월 여수 순천 사건 이후 군대 내부의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에서 남조선 노동당(남로당)의 간부로 체포당한다. 박정희는 강제 예편당하고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남로당을 배신하는 댓가로 살아남았다. 2심에서는 징역 10년으로 감형되고 집행을 정지한다는 조치를 받았다. 

 

이쯤이면 박정희도 역사에서 잊혀질 법했지만 한국전쟁은 박정희를 다시 군인으로서 부활시킨다. 그는 1950년 6월 소령으로 군대에 복귀하고 9월에는 중령으로 진급한다. 박정희의 출세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그는 다시 군대에서 출세하게 된다. 하지만 이 당시만 해도 박정희는 미군으로부터 좌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미군은 장면에게 어떻게 이런 사람을 요직에 앉혀 뒀냐고 항의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게 되었고 이후 1979년에 죽을 때까지 독재자로서 살았다. 미군에게 좌파라는 지적을 받았던 박정희는 일단 정권을 잡게 되자 반공주의의 상징같은 인물이 되었다.그는 지금도 복지나 사회적 분배를 이야기하거나 정부의 독선적 행위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나 종북 심지어 간첩으로 부르고 그들을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다.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거나 공산주의자였던 전력이 있고 심지어 매우 이례적으로 일본에 충성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박정희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매우 기묘한 정신적인 자기 최면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 그 심각한 자기 최면의 바탕은 종종 한민족은 가망없는 사람들이라는 식민지교육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선인은 모두 쥐새끼라는 것이다. 쥐들을 통치하는데에는 쥐다운 방법만이 가능하다. 

 

박정희가 쥐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박정희의 변신들은 다른 사람들을 넘어서는 것이었고 그가 남다른 성공을 하게 된 비결이었다. 박정희가 살아남았던 길이야 말로 쥐가 걸어야 할 길이었다. 결국 배신을 반복하는 자가 성공하기 마련인 것이다. 혼란스러운 시대는 선악의 개념이 흔들려서 무고한 희생자들을 만들기도 했지만 뒤집어 말하면 악이 살아남는 길도 바로 그 혼란의 가운데에 있었다. 비록 박정희는 권력의 정점에 도달하여 더 갈 곳을 잃자 총에 맞아 죽었지만 쥐는 자신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균열은 어디에나 있었다. 세상에는 부자와 가난뱅이의 싸움이 있었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싸움이 있었는가 하면 시골과 도시의 싸움이 있었고 기독교와 불교의 싸움이 있었다. 분열은 악의가 아니라 오히려 종종 선의에 기반한 차별에 의해서 크게 불타올랐다. 예를 들어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우리 같은 기독교인들도 서로 도와야 한다고 말할 뿐입니다!”

 

“나는 그저 우리 같은 고향 사람들이 서로 돕고 살자고 말할 뿐입니다! 우리가 남입니까? ”

 

특정한 사람들이 갑자기 죽고 못사는 가족처럼 단결하기 시작하면 차별이 존재하게 된다. 그러면 그 그룹에 들지 못한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끼고 불만을 토로하기 마련이다. 전라도 사람에게만 반값을 받는 식당은 경상도 사람에게는 자신들을 차별하고 바가지를 씌우는 식당으로 보이게 된다. 포항공대 동문끼리만 서로 돕는 단체는 비포항공대 사람들에게는 차별을 하는 이익 집단으로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 불만이 싸움을 만들고 결국에는 뚜렷한 세상의 균열이 생겨나는 것이다. 일단 일이 이쯤 되면 반대편에 대한 어떤 악담도 다 그럴듯하게 들리게 되고 반대편 사람들이 하는 말은 하나도 믿을 수가 없게 된다. 

 

쥐는 그 집단적 싸움의 한 쪽에 가담했다. 쥐가 싸움의 어느 한쪽에 가입하기 전에는 쥐는 그저 더러운 쥐일 뿐이었다. 그러나 쥐가 일단 어느 한 쪽에 가입하자. 쥐는 이름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언제나 세상은 전과는 전혀 달라졌다.  

 

사람들은 쥐가 자기 파벌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쥐에 대한 나쁜 소문이나 인상을 잊었다. 심지어 그가 쥐라는 사실조차도 잊어주는 것같았다. 즉 아무리 나쁜 악당이라도 그가 우리 편에서 싸우고 있는 동안에는 좋은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그가 나쁜 짓을 잘한다는 것은 심지어 능력의 증거로까지 여겨졌던 것이다. 우리측의 악당이란 종종 우리의 적을 분노하게 만드는 능력있는 친구로 여겨지게 된다. 특히 쥐처럼 숙일 때는 숙일 줄 아는 악당은 그랬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쥐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고 다녔던것이다.

 

“저에 대해서 험담하는 사람이 많은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다 거짓말입니다. 제가 정말 그런 사람이라면 제가 어떻게 지금 살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건 저의 재능과 성공을 질투하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입니다. 저는 정말 이제까지 배신과 거짓말하는 것을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일로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한번도 거짓말을 하거나 공적인 일을 통해서 제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거면 충분했다. 사람들은 그거면 쥐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들을 무시했다. 그들도 쥐가 결백하지 않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백퍼센트 결백하다는 말인가. 그들 스스로도 백퍼센트 결백하지는 않았다. 어느 새 그의 악행과 악명은 그의 능력에 대한 신뢰로 변했다.

 

그들은 사실 오히려 쥐의 더러운 면이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올 것으로 믿었다. 어두운 세계에서의 유명세는 뒤집으면 우리를 위해 더 많은 돈을 벌어 올 수 있다는 능력의 증거였다. 사기꾼도 유명하면 사람들은 그 사기꾼이 능력있다고 믿는다. 쥐는 그 작은 손으로 그들의 적으로부터 먹이를 훔쳐서 가져 올 것이다. 그가 시장이 되면 다른 지자체와 경쟁해서 더 많은 돈을 가져올 것이고 그가 대통령이 되면 다른 나라와 경쟁해서 다른 나라의 돈을 가져올 것이 분명했다. 그 먹이는 좀 더럽겠지만 우리의 배를 불려줄 것이다. 사람들은 쥐가 어리석으며 소심해서 그들에게 영원히 충성할 것으로 여겼다. 사람들은 쥐가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냐면서 쥐의 부패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쥐의 탐욕을 과소평가하고 쥐의 상식을 과대평가한 것이다. 사람들은 쥐처럼 살지 않는 사람들을 아마추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쥐를 한패로 끌어들인 그들 스스로를 지혜로운 실용주의자로 여겼다. 

 

쥐에게 배신당하기 전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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