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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쥐와 벌

쥐와 벌 3. 중요한 질문

by 격암(강국진) 2017. 10. 19.

3. 중요한 질문

 

하지만 물론 쥐의 이 모든 변화들이 한꺼번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시궁창의 쥐가 한순간에 괴물이 되지는 않는다. 쥐는 그저 나름대로 자명해 보이는 한걸음 한걸음을 걸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발걸음 속에서 쥐는 자기 자신을 조금씩 발견했다. 그 한걸음 한걸음은 다른 식으로 말하면 세상이 그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그는 그때마다 하나의 선택을 했고 그것은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해 쥐가 세상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주는 답이 되었다. 

 

노파와의 일이 있은 이후 쥐는 당당해 졌다. 그는 보다 단호한 태도로 세상을 살았다. 어떻게 세상을 사는가에 대해 확신을 하면 할 수록 사람은 더 단호한 태도를 취하기 마련이다. 그는 한 때 규칙을 지키는 올바른 사람이 되고자 했지만 이제 쥐는 세상을 시장의 관점에서 보고 있었다. 즉 뭔가를 줬다면 뭔가를 받아야 하고 그런 거래를 통해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야 말로 삶의 본질이라고 느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거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난해 진다. 어떤 사람들은 그 반대로 부자가 된다. 뒤쳐지는 사람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나쁜 것이다. 그것이 적자생존의 원리가 아닌가. 힘없는 노파는 깡패와 만나면 싸우지 말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게 세상의 이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한 노인이 접근했다. 쥐는 무심한 눈빛으로 노인에게 위협적인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노인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까칠하게 굴지 말게. 나는 자네에게 기회를 주러 온거니까 말야.”

 

쥐는 긴장했다. 이 노인에게도 돌이라도 던져야 할까?

 

“나하고 잠시 산책을 하세. 자네는 물론 원하면 나를 따라오지 않을 수도 있네. 그렇다면 자네와 나는 그걸로 그만인 것이지. 그러나 나를 따라오면 우리는 대화를 할 걸세. 그리고 마지막에 내가 한가지 질문을 하겠지. 자네는 그 질문에 답을 하면 되네.”

 

노인은 그 말을 마친 후 단호히 몸을 돌려서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쥐는 노인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 눈을 가졌던 것을 기억했다. 어쩌면 이게 기회일지 몰랐다. 

 

쥐는 노파의 일이후 자신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이 길은 한번 걷기 시작하면 계속 전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계속 전진해야할 뿐만 아니라 점점 더 빨리 뛸 필요가 있었다. 

 

악행이란 일종의 투자사기와 같다. 투자사기꾼이 계속 사기를 치기 위해서는 사기의 규모를 점점 늘려야 한다. 초기 투자자들에게 이익을 돌려줘야 더 큰 투자를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기를 더 큰 사기로 계속 돌려막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어느 순간 전진을 멈추면 이제까지 쥐가 저지른 악행과 허풍이 그를 따라 잡을 것이다. 사람들은 쥐의 모습에 익숙해 질터였다. 일단 그렇게 되면 쥐에게 겁을 먹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속았던 것에 분개하면서 쥐를 잡으려고 할 것이다. 협박을 당했던 사람들은 쥐를 협박하려고 들 것이다. 그 것은 쥐가 노파의 앞에서 오줌을 지리던 그 때보다도 더 못한 상황이었다. 쥐는 몇몇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이 과거에 대한 빚을 갚고 새롭게 출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사기를 사기로 돌려막는 것, 비리를 비리로 돌려막는 것이야 말로 쥐가 걸아야 할 길이었다. 적어도 벌써 멈추고 싶지는 않았고 언젠가 대박이 터지면 마음의 빚도 갚고 개운하게 세상을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노인의 말이 무엇이든 쥐로서는 그 말을 들어볼 가치가 있었다. 쥐는 기회가 필요했다. 쥐는 노인을 따라가서 나란히 걸었다. 이윽고 노인은 입을 열었다.

 

“자네는 재능이 있지. 자네는 몰랐겠지만 나는 자네가 한 일에 대해 한두가지를 알고 있네. 그래서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 다만 내가 알 수 없는 것은 자네에게 정말 충분한 이해와 각오가 있는가 하는 것이네.”

 

“뭘 이해하고 뭘 각오한다는 겁니까?” 쥐의 귀에는 쥐에게도 재능이 있다고 말하는 노인의 말이 유독 매력적으로 들렸다. 어쨌건 그는 쥐를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먼저 자네에게 묻고 싶네. 자네에게도 꿈이 있나? 자네는 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나?”

 

그것이 아직도 쥐의 꿈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쥐는 분명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있었다.

 

“저를 보세요.” 쥐는 자기를 가르켰다.

 

“뭐가 보이십니까?”

 

“쥐로군. 시궁창의 쥐.” 노인은 별로 시간을 쓰지 않고 대답했다.

 

“맞아요. 쥡니다. 그래서 제 꿈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겁니다. 쥐로 태어났지만 쥐로 죽지 않고 인간이 되어서 죽고 싶습니다. 그게 제 꿈입니다.”

 

“과연. 과연.” 노인은 묵묵히 길을 걸으며 잠시 침묵에 잠겼다. 이윽고 노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훌룡한 꿈일세. 그리고 많은 댓가를 치뤄야만 하는 꿈이기도 하지. 그러니 자네는 앞으로 많은 것들이 필요할 걸세. 그것들은 지금처럼 시궁창에만 뒹굴고 있다가는 영원히 얻을 수 없는 것들이지. 

 

그러니 자네는 많은 보수가 있는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걸세. 우리 거기서 한번 시작해 보도록 하지. 그런데 사람들은 왜 보수를 받을까? 왜 어떤 사람은 보수를 많이 받고 어떤 사람들은 보수를 적게 받을까?”

 

노인은 질문을 던지고 잠시 기다렸다. 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묵묵히 들었다. 노인도 굳이 대답을 원하는 것같지 않았다.

 

“결국 많은 보수란 대개 남이하기 싫은 일을 대신 해주는 것에 댓가일세. 사실 누구나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한다면 그런 일에 대해서 우리는 보수를 받기는 커녕 댓가를 지불해야 하지. 놀이동산에 가서 놀면서는 대개 입장료를 내지 않나?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도 보수를 많이 받지만 사실 그런 일은 매우 드문데다가 무한 경쟁이 허락된다면 훨씬 더 그렇지. 즉 경쟁자들을 원천배제하는 뭔가를 또 해야 한다는 걸세. 

 

그런데 왜 어떤 일은 다른 사람들은 하기 싫어할까? 그것은 대개 그 일들이 위험하고 비윤리적이기 때문이네. 또한 그것이 우리의 본성에 반하기 때문이지. 알고보면 다 비슷한 것일세. 이 세상에는 법이나 윤리로 금지된 일들이 있지. 하지만 이익이 남지 않는다면 법이나 윤리로 그것을 금지할 필요도 없네. 예를 들어 길에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는 것을 비윤리적이고 비합법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지.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법이나 윤리로 금지된 것을 하는 일, 우리의 본성에 반하는 일이 가장 이익이 많이 남는다는 것이네. 결국 돈을 제일 잘 버는 방법은 나쁜 일을 하는 것이라는 것이지.”

 

“하기가 어려운 일의 핵심은 결국 사람의 본성과 연결되어 있는 걸세. 몇몇 일들의 경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걸 하기가 어렵지. 예를 들어 어지간히 미친 놈이 아니고서는 어린 아이를 잔인하게 죽이는 일을 할 수는 없네. 그런 행동은 우리의 유전자속에서 금지되어져 있기 때문이지. 우리의 유전자는 우리로 하여금 어린 아이를 사랑하게 만들고 어린 아이를 공격해서 상처주는 행동을 금지하고 있네. 우리는 이웃이 울면 슬퍼지고 이웃이 고통스러워하면 같이 고통스러워하는 두뇌를 가지고 있네. 어떤 사람에게 정신적인 혹은 물리적인 고통을 줘서 그 사람이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어려운 일일세. 바깥으로 쫒아내면 겨울에 얼어죽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집에서 쫒아내는 일이나 땅에 엎드려 울면서 비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사람이라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지. 사실 칼로 다른 사람을 찌르거나 몽둥이로 사람을 힘껏 때리는 것도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일일세. 정상적인 정신상태라면 공격하는 사람도 고통을 느끼게 되거든.”

 

“그래서 사람들은 인간의 이런 약점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냈다네. 그것은 인간은 오직 어떤 행동을 스스로 한다고 생각할 때만 정신적인 충격을 받는다는 사실에 기반한 것일세. 다른 사람을 칼로 찌를 수 없는 사람도, 스위치를 누르는 일은 할 수 있지. 그 스위치를 누르면 어딘가 안보이는 곳에서 사람이 죽는다고 해도 그게 보이지 않으면 칼로 사람을 찌르는 것보다는 스위치를 누르는 것이 훨씬 쉽네. 보이지 않으니 우리는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네. 그 사람은 그냥 죽은 것이다. 내가 스위치를 누른 탓이 아니다하고 말이야. 원한다면 우리는 스위치를 조작해서 내가 스위치를 누를 때마다 반반의 확률로 사람이 죽게 만들 수도 있지. 그러면 사람이 죽어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죽은 건 그 사람의 운이 없었던 탓이다. 내 탓이 아니다.’ 우리가 새치기를 해서 누군가의 것을 빼앗았을 때도 그래서 누군가가 죽는다고 해도 우리는 같은 말을 하지. ‘죽은 건 그 사람의 운이 없었던 탓이다. 내 탓이 아니다.’ 그런데 사실 경쟁으로 가득한 이 세상은 이런 새치기가 엄청나게 많단말이야. 

 

더구나 스위치를 누른다는 결정을 내가 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이제 우리는 더더욱 그건 내 책임이 아니라고 말하기 쉽지. 나는 스위치를 누른다는 결정을 한게 아니라 그저 그런 명령을 듣고 그에 따랐을 뿐이라는 거야. 그렇게 스위치를 누른 결과 사람이 죽었다고 해도 그건 내 결정이 아니지. 규칙은 규칙인 거야. 이건 그저 직업일 뿐이라고. 죄없는 사람을 범죄자로 모함하거나 고문하는 사람들도 흔히 그렇게 말하지. 그러니까 내 잘못은 아니야. 규칙은 규칙일 뿐인거지. 어쩌겠나. 내 직업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고문하는 일인데 규칙을 따라야지. 비록 그 규칙이 강자의 앞에서는 한없이 쉽게 구부러지는 것이라도 말이지. 우리는 이렇게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윤리적 본성을 우회할 수가 있어. 그래서 인자한 엄마이자 친절한 이웃이면서도 동시에 잔혹한 기업가나 독재자가 될 수 있는 것이지. 

 

인간 사회의 악은 대부분 이것과 관련이 있네. 인간은 조직의 일원이 되면서, 시스템을 만들면서 유전적으로 금지된 것을 엄청난 빈도와 규모로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긴거야. 닭한마리는 죽이기 어려워 하는 사람이 인종청소를 태연히 감행할 수도 있는 것은 그 사람이 그저 명령을 따르고 있었을 뿐이며 복잡한 시스템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일세. 성실하지만 소심한 공무원이 때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인간이 될 수가 있지. 그런 사람이야 말로 개스실의 스위치를 눌러서 수백 수천명을 죽이는 일도 아무 생각없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말일세. 

 

만약 조직의 잔혹성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단순히 중간단계를 몇단계 더 늘리기만 하면 되네. 그러면 사람들은 조직의 더 작은 일원이 되어 그저 부지런히 스위치를 누르지. 명령은 항상 위에서 내려온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지. 

 

그러니까 자네는 자네가 되고 싶다는 인간이 된다는 것이 뭔지 그리고 출세를 하고 명예를 얻는다는 것이 뭔지에 대해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네. 그것이 어떤 것이든 고정된 생각, 고정된 시스템에 매몰되면 우리는 진정한 인간이 될 수가 없어. 우리는 시스템의 도구로 몰락하고 마는 거야. 그리고 일단 그렇게 되면 합리적인 인간,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되기는 틀린 거지. 우리는 나는 그저 시키는 일만 했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어떤 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겠지만 사실 우리는 그 시스템이 저지르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없다네. 제국주의 국가의 충실한 국민으로 살거나 빈민을 착취하는 귀족 계급의 충성스런 일원으로 살면서 혹은 독과점을 통해서 폭리를 취하는 회사의 사원으로 살면서 제국주의국가나 귀족계급 그리고 악덕기업이 저지르는 악행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것일세. 

 

이것은 직위와 명예를 원하는 원하는 사람은 모두 기억해야 하는 것이네. 오늘날에는 누구나 시스템의 일부로 살고 있어. 물론 어떤 사람들은 좀 더 다양한 시스템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최소한의 참여에 그치고 보다 자유롭게 사는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혼자 살아가는 인간이란 거의 찾을 수 없네. 적어도 명예나 출세를 원하는 사람은 사실 어떤 시스템의 충실한 일원으로 살고 있다고 봐야지. 

 

그 말이 무슨 뜻일까? 그 말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저 열심히 일한 댓가로 성공을 거둔 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이상으로 어떤 죄악의 댓가로 성공하고 있다는 거야. 단지 스위치를 누르는 사람들이 계속 해서 연달아 이어지면서 누가 뭘하는지 불분명하게 만들어 졌기 때문에 그게 잘 보이지 않을 뿐이지. 

 

예를 들어 여기 중간간부가 있다고 해보세. 이 사람은 말단사원들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이득을 이끌어내서 자기 부서의 실적을 높이려고 하고 있지. 그는 바로 자본의 맨꼭대기에 있는 사람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네. 자본의 맨꼭대기에 있는 사람은 사실 말단직원에게 와서 야근을 더하라던가 수당을 못주겠다고 한다던가 다음주부터는 회사에 나오지 말라는 따위의 말을 하고 싶어하지는 않네. 쓰레기같은 재료로 만든 음식을 누군가에게 먹이고 싶어하지도 않지.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자비롭고 선량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싶어해. 그래서 기본적으로 그들은 그들과 생활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하지 않아. 그들은 벽을 좋아하지. 만나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그냥 자기 대신에 그런 일을 할만한 사람을 관리자로 세우는 거야. 소심하고 단순한 인간으로. 그리고 그 사람을 약간 겁을 주는 거야. 그러면 모든 악행은 그 관리자가 대신해 주지. 가끔은 그게 정도가 지나쳐서 상황이 심각해 질 때도 있지만 그럴 때도 사람들은 그 관리자와 싸우지 그 관리자를 임명한 실질적인 권력자와 싸우지는 않네. 임명권자는 나중에 어쩔 수 없으면 등장해서 ‘아 그랬어요? 너무 심했네. 나는 그저 부서를 더 효율적으로 운영하라고 했지 이런 일을 하라고는 안했는데 말이야’라고 말하면 충분하지. 만약 그 관리자가 인간적으로 행동했다면 당장 해고 하고 다른 소심한 관리자로 대체했을거면서 말일세. 

 

악행이란 기본적으로 우리의 인식의 폭이 좁은데서 나오는 것이네. 사람들이 어떤 사상이나 조직에 충성하게 되는 것도 악행의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은 이때문이지. 이건 꼭 무슨 범죄집단같은 회사나 정당만을 의미하는게 아니야. 진보적인 노조건 언론사건 비영리사회단체건 모든 종류의 조직은 잠재적으로 악의 시작이 될 수 있지. 국가에 대한 사랑도 페미니즘도 심지어 인류애도 다 악의 시작이 될 가능성이 있어. 

 

이 사상을 통과하지 않고는 혹은 이 조직을 통하지 않고는 이 세상에 정의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은 또 하나의 엘리트주의고 결국 그것이 어두운 곳을 만들어 내는거야. 제 아무리 훌룡하고 균형잡힌 것같은 사상이나 조직도 결국은 고정된 것이라 우리가 직접 보고 듣는 능력을 제한하게 되거든. 거기에 빠져들고 탈출이 불가능하게 충성하게 되면 사람들은 결국 사상의 눈으로 조직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지. 그러면 사람들은 자기 눈에 안 보이는게 뭔지도 모르게 돼. 그러면 그게 악이 되는 거지. 예를 들어 누구나 알지. 공산주의자들 사실 멋지잖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수한 동기로 그걸 믿었겠어? 하지만 결국 그들도 쉽게 악으로 변질되었지. 사상이 나쁜 것때문이 아니야. 사상은 사상일 뿐일세. 사상은 어떤 것이든 모두 한계가 있어. 문제는 그들이 사상의 추종자가 되면서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는 것일세.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열렬히 악행을 하게 되는 거야. 가족도 같은 민족도 심지어 평생의 은인도 반동분자라면서 마구 죽이게 되는 것이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나쁜 것도 있네. 그건 사상이나 조직에 충성하는게 아니라 사람에게 충성하는 것일세. 사람은 대개 사상이나 조직보다 훨씬 더 폭이 좁기 때문이지. 사상이나 조직에 충성할 때는 대개 개인에게도 해석과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게 마련이지. 그러니까 우리는 공산주의건 자본주의건 어떤 사상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어느 정도까지는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인간으로 남을 수 있단 말이지. 

 

하지만 인간에게 충성할 때는 그런 해석의 여지가 훨씬 더 극단적으로 좁아지지. 우리는 물론 누구나 어떤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 어떤 사람에게 동의하고 그를 지지하곤 하지. 그건 문제가 없어. 하지만 그건 사람에 대한 충성이 아니야. 사람에게 충성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결정이라면 어떠한 결정이든 그것을 지지하고 따른다는 것을 의미하지. 회사의 사원인데 상사가 회사를 팔아먹겠다고 해도 상사에게 충성하는 것이고, 나라에서 월급을 받는 공무원인데 상사가 나라를 팔아먹어도 상사에게 충성하는 것이지. 이건 그야말로 장님이 되겠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장님이 되면 세상에 보이는 것이 없어지지. 보이지 않는 것이 생기면 결국 그 사람은 그것들을 밟아버리게 되는 거야. 결국 악행이지. 

 

그러니까 악한 조직일 수록 인간에 대한 충성으로 이어져서 층층이 이어지게 되어있네. 그리고 모든 조직의 사람은 그 조직의 직속상관이 뭐라고 하건 그냥 하는 거야. 나라를 지키라는 군인인데 국가의 주인인 국민을 향해 총을 쏘면 될까 안될까? 물론 안되지. 그런데 인간에 대한 충성에 길들여지면 시키면 뭐든지 한다구. 

 

검찰은 어떻고 회사는 어떤가. 깃수를 따져서 선배 후배 구분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하면 인간관계가 층층이 생겨나지. 그러면 부패와 악행이 생겨도 항의를 할 수도 없고 할데도 없어. 내부고발자는 관행을 무시하고 혼자서만 튈려고 하는 기회주의자쯤으로 여겨지지. 어디까지나 모든 것은 순서를 밟아서 처리하라는 거야. 

 

그런데 이 나라는 말일세 회사, 관공서, 경찰, 사법부에서 대학, 중고등학교까지 모두 층층이 인간에 대한 충성을 가르치네. 초등학생도 학년이 다르면 나이가 다르다고 같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야. 대학교 신입생에게 상급생이 폭행을 휘두르고 술을 먹이고 성추행을 하는 일이 해마다 벌어지지. 1년정도의 경력차이 가지고 마치 도라도 통했거나 신적인 권력이라도 위임받은 것처럼 우쭐댄단 말이야. 대학 신입생앞에서 하느님처럼 구는 대학졸업반 학생들도 결국 회사에 들어가면 바보 등신 취급이나 받을 막내가 되지. 결국 이런 환경에서는 어떤 사람에게 줄을 서야 편하게 살 수 있어. 사상이나 조직도 아니고 사람에게 충성해야 길이 열린단 말이지. 

 

인간이란 말이야. 이런게 아니야. 악은 이런 구도에서는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어. 모두가 자기 패거리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면서 남의 입장은 무시할 수 밖에 없으니까. 사실 하나 하나는 괜찮은 사람인지 몰라도 금방 조직논리라는게 등장하는 거지. 누구나 욕할 악덕 정치인이라도 그 사람이 동창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기 쉽네. 상상하기도 끔찍한 일이라도 충성하는 사람이 시키면 하고 그 어떤 일이 생겨도 자신의 두목은 선량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게 되지.  

 

자네가 정말 인간이 되고 싶다면 이런 것을 잘 생각하고 결정해야 하는거야. 인간은 모든 것을 알지 못해. 언제나 유한한 존재지. 하지만 인간은 자기 결정과 책임을 남에게 미루지 않아. 알겠나? 어딘가 안전한 곳에서 자기만 깨끗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야. 그것은 또하나의 노예지. 어떤 결정도 고통이 있고 댓가가 있지. 모든 건 불완전하니까. 세상과 자신의 불완전함을 알면서도 계속 바둥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 존재. 구경꾼이 아니면서 홀로 서기를 멈추지 않는 존재. 그런게 인간이란 말이야. 사람에게 충성하고 자기 밑으로 충성할 부하를 줄세우는 것은 완전히 그 반대지. 사실상 악행을 결심하는 거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악행을 말이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일세. 자네의 꿈인 인간을 말이지.”

 

노인은 긴 이야기를 끝냈다. 어느새 노인은 더이상 걷지 않고 있었다. 쥐는 노인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다만 왜 이 노인이 갑자기 나타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노인은 약간의 시간을 주고 생각에 잠든 쥐를 기다려 주었다. 이윽고 고개를 든 쥐의 얼굴을 살피더니 말했다. 

 

“얼굴을 보니 내가 한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한 모양이군. 이제 처음 말한대로 나는 자네에게 한가지 질문을 할 참이네. 잘 생각해보고 그 답을 말해주길 바라네. 이 대답을 하는 의미를 잘 생각해 보란 말이지.” 

 

“내 질문은 이걸세. 자네는 그래도 인간에게 충성할텐가?”

 

노인은 아마도 약간 놀랐을 것이다. 그는 쥐가 약간 망설이거나 자신없게 대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쥐는 그보다 훨씬 더 빨리 그리고 훨씬 더 자신있게 말했다. 

 

“네.”

 

노인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쥐에게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것은 아부하기 위한 답이 아니라 굳은 확신에 의한 답이었다. 쥐는 사실 인간같은 건 애초에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다만 모든 인간들을 쥐로 만들고 싶어했다. 어쩌면 이제는 그가 가장 미워하는 것이 바로 그 인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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