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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쥐와 벌

쥐와 벌 6. 아이들이 사라진 세상

by 격암(강국진) 2017. 10. 24.

6. 아이들이 사라진 세상

 

피리를 부는 사나이는 사라졌고 쥐의 마음은 다시 편안해 졌다. 언론은 쥐를 양산하는 메세지를 잘 보내고 있었고 세상은 어디나 모두 쥐들로 채워졌다. 그야말로 쥐의 제국은 번창했다. 오 위대한 쥐의 제국!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동영상이 하나 메일로 왔다. 그것은 쥐의 손녀가 유치원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 쥐는 흐뭇한 마음을 가지고 스크린위의 손녀를 쳐다보았다.  때마침 쥐의 사무실에 있던 영주쥐도 그 장면을 보게 되었다. 쥐의 부하중 많은 쥐들은 버림받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우둔한 영주쥐는 쥐를 따라와서 아직도 일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알고 있듯이 영주쥐는 결코 서울쥐나 이천쥐같은 재능이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영주쥐는 쥐에게 가장 충성스럽다는 것을 자신의 장점으로 삼았다. 그 결과 결국 모든 다른 쥐들이 사라진 지금에도 영주쥐는 여전히 쥐의 곁에 남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가장 똑똑한 척 했던 다른 쥐들은 그다지 똑똑하지 못했던 셈이다. 

 

쥐가 손녀의 동영상을 보는 모습을 보면서 영주쥐는 마침 최근에 그에게 들어온 부탁이 기억이 났다. 그것은 유아원을 직장에 설치해서 아이가 있는 직원들이 근무를 편하게 하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쥐가 아이문제로 기분이 좋은 지금은 그 주제를 말하기 적합한 때 같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유아원 이야기를 듣자 쥐의 표정은 즉각 굳어졌다. 

 

영주쥐는 충성심은 믿을 만한데 너무 멍청했다. 그래서 위험한 생각을 잘도 입에 올리고는 했다. 아이라니! 아이라니! 쥐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영주쥐도 이제 위치가 있으므로 알만한 것이 있다. 그런데도 뭘 도통 모른다. 

 

“이것 봐. 자네.”

 

“네. 시장님.” 마산쥐는 얼굴이 굳어졌다. 나이도 들만큼 든 녀석이 벌써 정강이를 걷어채이지나 않을지 걱정이나 한다. 그 겁먹은 표정을 보니 슬그머니 쥐의 분노가 줄어들었다. 한심하기는 하지만 바로 이런 점때문에 영주쥐를 쥐는 좋아했다. 이녀석은 진짜 쥐답다. 언젠가 슬쩍 언급을 주면 쥐를 위해 어떤 잔인하고 말도 안되는 칼춤도 춰 줄 녀석이다. 쥐를 위해서 감옥도 기꺼이 가줄 정도로 멍청하다. 설사 나라가 망하고 세상이 망하는 스위치라도 쥐가 누르라고 하면 누를 녀석이다. 이 바늘 끝처럼 좁은 시야라니! 이 맹목적인 충성심이라니! 충성이나 의리밖에는 모르는 이 영주쥐가 쥐로서는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자네도 직장에서 금기어가 있다는 것정도는 이제 눈치챌 때가 되지 않았나.”

 

“금기어요?”

 

“그래. 우리 세상에서 아이는 금기일세. 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마치 세상에는 아이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같은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네. 그런데 자네는 직원들에게 부성애나 모성애를 불러 일으킬 유아원을 직장으로 끌어들이자고 하는건가? 나는 직원들이 가급적이면 번식같은 거 하지 말고 다 혼자 살았으면 좋겠네.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까지는 말하지 않지. 적어도 아직은 말이야. 그래도 그들이 아이들을 직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네. 사무실에서는 아이들 사진을 붙이는 것도 안되고 그런 걸 보면서 키득되는 것도 허용해서는 안되네. 아이들 핑게를 대면서 일찍 퇴근하려고 하는 것도 안돼. 

 

오히려 가능하면 쓸데없는 야근도 시키고 출장도 보내서 직원들이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줄이도록 하게. 긴 휴가 따위는 되도록 주면 안되지. 그러면 그들은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고 온통 흐물거리는 사람이 되서 돌아올 거야. 회식을 자주 하고 접대도 자주 시켜. 근무시간을 무한정 늘리게. 가족과의 시간은 줄여야 하는거야. 연애할 시간도 없게해. 자네는 어린애와 헤헤거리는 특전사가 상상이 가나? 모든 건 교육의 문제지. 그런데 연애나 가족은 교육을 망쳐버리네. 직원들을 이상한 생각에 물들게 하거든. 쓸데없는 동정심을 가지게 되거나 이상한 정의감에 불타게 하지. 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도 가족이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되는거야.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거지. 제대로된 인간, 제대로 된 군대가 되질 못하는 거야.”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한편으로는 매우 인공적인 것이었다. 다시 말해 기록하고 글을 쓰고 추상적 관념을 만들어 내어 타고난 한계를 뛰어넘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다. 현대인인 우리가 인간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현대인과 같은 DNA를 가진 원시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축적된 문화를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가지는 존재다. 타고난 기억력과 감각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기를 갈망하는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달에도 가고 비행기도 타며 우주에서도 보일만한 건축물을 만든다. 인간은 헤아릴 수 없이 긴 역사를 조망하기도 하고 인류나 민족같은 거대한 공동체를 기반으로 생각을 전개하기도 한다. 아름다운 음악도 조각품도 사상도 만든다. 지구전체를 뒤덮은 인터넷 망도 만들어서 우주정거장이나 남극기지에 있는 사람과도 얼굴을 보면서 대화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발달시킨 문화와 기술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었다. 인간은 배움으로 완성된다. 인간은 인간다운 시야를 가질 때만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쥐는 인간이 이런식으로 풍부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많은 생각을 한다는 것은 제대로된 직장인이 되지 못하게 한다. 물론 돈을 버는데 필요한 기능을 다 가지기 위해서는 생각과 지식의 확장이 때로 필요하다. 그래서 쥐의 세상에서는 이중사고가 필요했다. 생각이 존재하지만 또한 그 생각을 생각을 없애는데 쓰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닌텐도 게임기를 만들 기술은 있어야 하지만 그런 게임기를 만들 문화적 배경이 될 감정은 지나치면 곤란했다. 할리우드처럼 돈을 버는 문화사업을 하는 것은 좋지만 그런 배경이 될 철학과 감정이 지나치는 것은 곤란하다. 물론 그건 마치 밀가루없이 팬케익을 만드는 것처럼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경쟁은 모든 난관을 극복해 왔으니 더 가혹한 경쟁은 그 난관도 돌파하게 해줄 것이 틀림없었다. 결국 부족한 것은 경쟁이었다. 쥐는 그렇게 믿었다. 더 가혹하게 경쟁시켜야 해.

 

인간이 되는 것에는 정반대의 방향도 있다. 별을 추구하며 별을 바라보되 발은 땅에 붙어 있어야 그것이 인간일 것이다. 어쩌면 미래에는 기술의 발달때문에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생각 해야 하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아직은 인간은 자연이 자신의 유전자에게 부여한 특징 혹은 선조가 우리에게 물려준 특징을 존중하고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행복하기 위해 아니 그 이전에 멸종하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하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다는 윤리조차 무시할 정도가 된다면 누군가가 핵폭탄으로 인류를 멸종시키거나 특정한 인종을 청소해야 겠다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퀴벌레나 모기들따위 싹 다 죽어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순수히 논리적으로만 말하자면 인간의 생명은 반드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화적이고 인공적인 측면이외에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중요한 측면들에는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요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인간은 짝을 찾아 아이를 낳고 그 아이와 사랑을 주고 받는다는 것이다. 어른은 아이를 사랑할 필요가 있고 아이는 부모의 사랑이 필요하다. 아니 인간은 부모의 사랑이 필요하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입으며 종종 그 복수를 사회나 그 자신에게 한다. 또한 인간의 아이들은 단순히 부모에 의해서만 키워지는 것이 아니라 생활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과 같이 키워져야만 한다. 아이를 키우는데에는 하나의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는 이유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특징이 그걸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몇몇 사람들이 종종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이득을 최대화하는 것만을 합리적인 것으로 여기는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상황이 바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다. 물론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에도 나름의 사회적 경제적 이유가 있을 때도 있으며 따라서 주어진 환경이 좋지 않을 때 어른들은 아이를 낳고 키우기를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단순히 이득을 추구하는 것 이상의 본능적 감성과 관련이 있다. 즉 아이를 낳고 싶고, 아이와 사랑하는 감정을 나누고 싶으며 아이를 중심으로 해서 생겨나는 사회적 공동체 안에서 살 때 자연스러운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라는 동물의 특징이고 본능이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손해가 나도 심지어 막대한 고통을 당해도 인간은 그것을 추구한다. 인간이라고 해도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으므로 하나 하나의 개인을 논할 때에는 우리는 아이를 낳지 않거나 결혼을 하지 않고 행복해 지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동물 종인 인간의 기본적 특징을 말하자면 결국 인간은 짝을 찾고 아이를 키우면서 살아갈 때 행복해지는 것이 가장 쉬운 존재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른은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며 노인이 되어 죽는 것이 인간이 가지는 삶의 기본적 순환이었다. 

 

이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둘러보면 어느 나라가 되었던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지역 공동체에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경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즉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이 어른들을 만나게 하고 뭉치게 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게 한다. 아이가 없는 마을은 활력이 떨어지고 공동체도 약해지기 쉽다. 경제활동도 활성화되기 훨씬 어렵다. 

 

어떤 사회에 깊숙히 관여하게 되어 진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아이를 매개로 해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다. 이 말은 뒤집으면 아이들이 사라질 때 어른들은 서로와 연결될 중요한 방법을 잃는다는 뜻이 된다. 아이들은 어른들만으로는 매우 넘기 힘든 장벽을 아주 쉽게 없애는 마력을 가진다. 어른들은 때로 누군가가 아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경계심을 없애버리기도 한다. 

 

아이는 또한 인간의 공동체 안에서 관계들이 평등해지도록 만든다. 만약 이 세상에 나이를 먹지 않는 어른들만 있다면 어쩌면 그 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한 줄로 계급을 가지는 종적인 구조를 가지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되면 우리는 금새 상당한 크기의 평등한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어떤 나라에 비록 귀족과 천민의 계급적 구분이 있다고 해도 적어도 하나의 계급내에서는 어느 정도는 평등한 사회가 필요하다. 어린 아이는 정상적으로 자라기 위해서 친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여왕개미가 모든 아이를 생산하는 동물이 아니다. 각각의 가정이 아이를 낳고 그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동물이다. 성장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인간 사회의 특징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가장 수직적인 구조를 가진 조직도 그 조직의 어른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매개로 소통하게 되면 수평적 관계가 쉽게 자라난다. 사장이건 말단이건 아이들 앞에서 어른들은 그저 부모일 뿐이기 때문이다. 설사 충성심이 깊은 부하라도 자기 자식도 상사자식의 부하여야만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 참지 못한다.

 

물론 쥐는 인간의 이런 측면도 인정하지 않았다. 경쟁하고 두려움에 떨면서 가진 걸 지키려고만 하는 쥐는 이런 인간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쥐는 결국 아이는 잊으라는 메세지를 세상에 보낼 수 밖에 없다. 아이라는 존재는 어렵게 교육시켜서 쥐다운 인간이 된 사람들을 순식간에 다시 쥐답지 않은 인간으로 만든다. 그것은 쥐에게는 끔찍한 것이다. 

 

쥐에게는 결혼을 꿈꾸지 않고 아이를 꿈꾸지 않으며 돈을 벌어 소비하고 출세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인간이야 말로 진정한 인간이었다. 결혼과 아이나 가족따위는 구질구질한 과거의 악습으로 잊혀질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언제나 구속이나 낭비, 폭력, 더러움, 힘듬, 과중한 책임같은 말들과 연관지어서 이야기될 필요가 있었다. 어른들은 되도록 야근이며 회식이며 출장등의 이유로 가족과 멀리 떨어져 바쁘게 지낼 필요가 있었다. 아이에게 돈을 줬다면 그것으로 부모는 모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모두가 평등하게 더 많은 소비에만 집중하는 사회.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인간의 사회였다. 적어도 쥐에게는 말이다. 따라서 쥐들의 제국은 아이들이 있는 세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영주쥐는 말이 없다. 꼴을 보니 시키는데로야 하겠지만 아직도 그 이유가 뭔지 확실히 납득을 못하는 모양이다. 영주쥐도 이제 지위가 있으니 좀 이해란 걸 할 필요가 있다.

 

“자네. 내가 손녀 동영상 보는 거 봤지.”

 

“네.”

 

“내 표정이 어떻던가?”

 

“웃으셨습니다.”

 

“맞아. 웃었지. 그래서 사실 난 이런 동영상 자주 안봐. 웃기 때문이고 그 웃음이 나를 약하게 하기 때문이지. 약해지면 죽는거야. 약해지면 비효율적이 되는 것이고 제대로 된 인간이 되기를 멈추는 것이지.”

 

쥐는 말을 이었다. 

 

“지금도 나를 죽이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아. 요즘은 좀 잠잠해 졌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참 시끄러웠지. 그 피리소리 시끄러울 때는 정말 난리도 아니었어. 사실 이런 동영상을 보는 것은 나를 낭만적인 생각에 빠지게 만들지. 아이를 사랑하게 만들고 인생 전체를 조망하게 만드는 거야. 어른이 아이를 보면 삶은 죽음과 태어남의 순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거든. 그리고 자신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나게 만들지. 자기 인생에 회의를 품고 반성을 하고 그리고 인생을 다시 한번 시작해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해. 코앞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나 당장의 자극같은 것이 아니라 보다 가치있는 인생의 목표를 생각해 내려고 하지.”

 

영주쥐의 표정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저. 그러면 안되는 겁니까?”

 

“안돼지. 절대 안돼지. 자네는 가끔 자네가 어렸을 적에는 어땠는지에 대해 생각하나? 어렸을 때 자네가 뭘 하고 싶었는지같은 걸 생각하나?”

 

영주쥐는 생각을 해봤다. 

 

“어.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전에는 가끔 초등학교 동창생들을 만날 때가 있었지만 요즘은 그것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글쎄. 솔직히 친구녀석들은 세상이 변한 걸 잘 모르더군요. 그래서 왠지 어릴 적 이야기를 하다보면 불편했습니다. 그리고 어릴 때 생각들이야 다 유치한 것들이니까요. 철없고 뭘 모르는 바보같은 생각들이었죠.”

 

쥐의 표정이 조금 더 밝아졌다. 역시 영주쥐는 훌룡한 쥐다. 그에게 가르침을 준다. 어른은 아이에게 배울 것이 없다. 아니 뭘 배워서는 안된다. 아이는 아직 제대로된 인간이 되지 못한 결함이 있는 인간이었다. 빨리 교육시켜서 인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쥐는 때로 영주쥐가 자기보다 더 쥐다운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한다. 물론 그럴리는 없지만 말이다. 

 

“누구나 그렇다고는 하지만 나도 어릴 적에는 참 어리석었지. 인간이라는게 뭔지도 모르면서 멋대로 그걸 상상하고는 그걸 이루는 꿈을 꾸고는 했지.”

 

말을 하다보니 쥐는 그 옛날의 연약하던 자기가 다시 생각이 났다. 시궁창에서 허우적거리면서 했던 그 어리석은 생각들이 다시 떠올랐다. 아이는 어리석다. 쥐는 아이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쥐의 제국은 아이의 세계와는 자꾸 충돌했다. 아이들따위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최근의 사례는 세월호 사건이었을 것이다. 제주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고등학생들을 주요 탑승자로 가지는 세월호는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침몰했다. 이 사고로 사망한 사람만해도 304명이나 된다. 물론 이것은 엄청난 규모의 재난이었지만 세월호 사건은 유독 온 국민의 주목을 크게 받았으며 넓게 보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이끌어 내는데 기여하기까지 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먼저 희생자들이 주로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죽음은 다 비참한 것이기는 하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아픔은 그걸 보는 사람들을 더욱 슬프게 했다. 설사 평소에는 타인의 슬픔에 공감능력이 떨어졌던 사람들이라고해도 자식들이 탄 배가 가라앉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는 부모들의 모습앞에서는 어느 정도 가슴 아파했다. 

 

문제를 훨씬 더 크게 만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사건에 관련된 공무원들, 언론사들, 무엇보다도 늦게 나타나 헛소리나 늘어놓은 박근혜 대통령이 인간다운 반응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구조작업을 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민간구조자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했던 당국은 진작에 구조를 포기하고 있었다. 결국 배가 가라앉는 것을 거짓말만 하면서 실제로는 그냥 보고만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컨트롤 타워가 아니다라는 책임회피성 발언이나 하면서 말이다. 

 

그들은 이상적인 쥐처럼 행동했다. 아니 진짜 쥐보다 더 했다. 설사 쥐라고 해도 자기 아이가 물에 빠졌다면 그렇게 쉽게 일을 포기하고 느긋할 부모가 있을까? 그런 엄중한 상황에서 진실을 은폐하거나 축소하기 위해서 미확인 사실이나 거짓을 방송하는 기자는  더이상 인간이기를 멈춘게 아닐까?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더이상 인간이 아닌 것이 아닐까?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사회는 인간의 사회가 아니다. 아이가 사라진 어른들의 사회는 인간의 사회가 아니다. 세월호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에 우리 사회를 지배하던 권력의 본질이, 아니 지금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의 본질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것이 쥐들의 제국의 본질이다. 쥐는 공동체라는 말을 싫어했다. 아이라는 말도 싫어했다. 그 말들은 좌파적이며 종북적인 단어들이었다. 그것은 반경쟁적인 단어였다. 그런 말은 결국 쥐의 본질을 허물고 사람들의 이중사고를 깨뜨리게 된다. 어른 세대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방식이 결국 어른들에 의한 자식세대 죽이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쥐들의 제국을 유지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쥐들의 세상에서 세월호 사건의 피해자 부모들은 금방 좌파이거나 종북주의자이거나 심지어 빨갱이, 간첩으로 불렸다. 그들은 아이를 말하고 있었고 아이는 공동체와 멀지 않았으며 그것은 쥐들이 싫어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쥐들은 세월호 사건의 이유를 파헤치거나 책임을 물을 사람을 찾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모두 불온한 것으로 여겨서 차단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사건이 벌어진 시간에 뭘 하고 있었냐고 묻는 것도 불온한 질문이었다. 급기야는 사건 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는 부모들 앞에서 피자를 시켜먹으며 폭식투쟁을 하는 쥐들도 나타났다. 그건 그야말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절대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사실 가라앉을 정도로 낡은 배가 아이들을 태우고 운항할 수 있게 허락해 준  것도 바로 쥐였다. 피리부는 사나이가 사라지고 쥐가 번성하는 세상에서 아이들의 소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아이들은 억압되고 고통받으면서 희망을 잃고 어느새 관심에서 멀어졌다. 언젠가는 아이들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를 좌파적이며 종북적인 행위로 여길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이다. 쥐에게 있어서 제대로 된 직원이란 아이를 말하지 않는 직원이었다. 제대로 된 쥐들의 제국이란 아이들따위는 없는 세상이었다. 적어도 아이들 다운 아이들이라면 말이다. 

 

쥐는 어릴 적 생각에 잠기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약해졌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건 허락할 수 없었다. 쥐는 단호하게 남자답게 살 필요가 있었다. 세상 사람을 다 죽이더라도 자기가 옳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는 호쾌함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공과 사를 구분하는 제대로된 인간이 될 필요가 있었다. 어린 시절의 자기 따위는 나타날 때마다 칼로 찌르고 망치로 쳐서 없애버려야 할 과거의 망령이었다. 

 

쥐는 단호한 자세로 동영상 창을 꺼버리고는 노트북 컴퓨터의 화면을 닫았다. 세상은 넓고 아직 콘크리트로 발라버려야 할 곳과 그가 벌어야 할 돈은 아주 많았다. 쥐는 그런 중요한 일에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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