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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쥐와 벌

쥐와 벌 7. 나는 반성하지 않는다. (끝)

by 격암(강국진) 2017.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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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나는 반성하지 않는다.

 

오늘밤 거리의 풍경은 유달리 지독했다. 거리는 온통 촛불로 채워져 있고 사람들은 쥐를 잡자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텔레비젼이 중계해 주는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온 세상이 쥐만 본다는 느낌이 든다. 신경 쓸 다른 일들이 없는 것같다. 

 

쥐는 이 모든 것들이 약간 희극적으로 보였다. 지금은 온 세상이 자신만 본다는 느낌이라서 쥐는 억울하고 귀찮았지만 한 때 쥐는 정확히 그 반대를 원했다. 쥐는 한 때 세상이 자신을 전혀 봐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고 싶었다. 세상이 나를 봐주지 않는다면 내가 그 세상의 발가락을 물어서라도 나를 보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쥐에게는 있었다. 쥐는 그런 면에서는 지나치게 성공했다. 이젠 관심이 지나치다. 왜 이렇게들 시끄럽게 구는지. 각자 바쁜 자기 일이 있을 텐데 거지근성들이란. 

 

테이블 위를 보니 한 진보지 신문에 내가 쥐를 싫어하는 이유라는 칼럼이 실린 것이 보였다. 내가 쥐를 싫어하는 이유라니! 제목이 너무 노골적이고 선동적이다. 이런 제목으로 글짓기 대회라도 열 것같은 기세였다. 

 

/내가 쥐를 싫어하는 이유

 

나는 쥐시장이 싫다. 그런데 왜 싫을까? 물론 그가 부당하게 권력을 사용해서 돈을 버는 일들을 한다거나 하는 것은 그를 싫어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그는 사실 지금 이 순간 마치 악의 상징 혹은 타도되야할 낡은 구시대의 상징처럼 보인다. 

 

쥐를 아직도 옹호하는 사람들은 쥐의 불행했던 과거를 지적하면서 쥐가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쥐가 만들어 낸 악행을 말도 안되게 축소한 후에 그 나마 남은 것도 불행했던 과거 때문이니 욕하지 말자고 한다. 그러나 쥐가 한때 힘든 삶을 살았던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건 너무나 옛날 일이다. 

 

그는 이미 아주 오랜동안 유명인으로서 또한 매우 많은 재산을 가진 부자로서 살았다. 게다가 만약 쥐가 자신이 가진 것을 그저 개인적인 즐거움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살았다면 나는 쥐를 이렇게 까지 싫어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금지된 욕망이 있을 때가 있고 그것에 이따금 지기도 한다. 하지만 왜 쥐는 공직같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자리를 원해야만 했는가? 그것이 내가 쥐 시장을 각별하게 싫어하게 된 첫번째 이유다. 

 

쥐가 고위공직자가 되었기 때문에 쥐의 삶은 이제 단순히 어떤 한 개인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서울 시장이나 대통령같은 고위 공직자는 기능적인 역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윤리의 모범으로서의 역할도 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삶의 교과서같은 자리랄까. 따라서 공직이란 최소한 자기 삶에 대한 깊은 반성이 필요한 자리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어떤 도둑이 세상에게 도둑질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것이라고 설교하는 꼴이 된다. 나는 그게 싫다. 세상에는 물론 뻔뻔한 일들이 있다. 삼풍붕괴사고 같은 비참한 사고의 책임자였거나 독재시절 고문기술자였거나 죄없는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던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해 강의를 하며 사는 일도 있다.  하지만 고위 공직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나는 보고 싶지 않다.  

 

내가 쥐시장을 싫어하는 두번째 이유는 그의 언행에서 그가 매우 시야가 좁은 인간이라는 점이 들어나기 때문이다. 공직이란 여러 사람의 입장을 두루 이해하는 면을 요구한다. 그런데 쥐시장에게서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다. 쥐 시장의 말버릇이 바로 내가 해봐서 안다는 것이다. 나는 뭔가를 내가 해봐서 안다고 쉽게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쥐 시장은 지나치게 자기 확신에 차있고 그래서 자기가 이미 답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남의 의견을 들을 리가 없다. 결국 자기 의견에 어울리는 의견만 들을 뿐이고 설사 전문가 의견이라도 그렇다. 그러니 결국은 학문적 양심이 없거나 기본적 학자의 소양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전문가인 척하는 세상을 만들어 낸다. 마음에 안드는 소리들은 억눌러 버린다. 이것은 사회의 기본을 흔드는 중대한 범죄다. 언론과 학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때 우리 사회는 큰 불안에 빠질 것이며 그에 대한 댓가를 치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쥐시장밑에서 우리 사회는 소통이 없는 사회, 학문적 신뢰가 무너지는 사회가 되었다. 

 

무엇보다 내가 뭘 안다는 확신은 어떤 의미로 사랑의 결핍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다 아는 대상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나는 너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어라는 태도는 잔혹한 것이다. 우리가 뭔가에 대해 다 안다는 것은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버리거나 파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행동에 있어서 겸허함이 없어진다. 역사와 인간과 자연앞에서 겸허함이 없고 사랑이 없을 때 그런 사람이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펼치는 정책은 대 참사가 된다. 이래서 나는 쥐가 싫다. 

 

여기 나무 조각 몇개로 만든 단순한 의자하나가 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은 이 의자에 대해서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케아같은 가구점에 가보니 그런 의자가 쭉 늘어서 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이 의자는 이케아 가구점의 몇번째 상품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이상 더 알아야 할 것이 없다. 그렇기에 같은 상품들 사이에는 차이가 없으며 한 의자는 언제나 다른 의자로 교환될 수 있다. 우리가 휴지박스속의 한 장 한장의 휴지에 대해 각각 관심을 두지 않는 것과 같이 이 단계에서 이 의자는 전혀 애정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하나의 의자는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진 것이 될 수 있다. 그 의자를 만든 노동자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안다면 그 사실이 의미를 더할 것이며 그 의자를 만들 때 쓴 나무와 염료가 어디서 나온 것인가를 알 때 우리는 심지어 먼 이국땅의 역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머나먼 나라의 어느 숲에서 자라던 특정한 편백나무가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서 지구 반대편의 내 손에 들어온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 것을 기적같은 인연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 의자가 어딘가에 놓여져 사람들에게 사용되어졌다면 이제 그 의자는 그 마을과 도시에 관련되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중소도시의 어느 구석에 놓여진 의자에 앉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수없이 많은 사람과 뭔가를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단순해 보이는 그 의자는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많은 사연들을 가진 것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의자를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것으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쌓이면 역사와 문화가 되고 우리 사회의 정체성이 되며 자산이 된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환경을 파괴하고 때로 그것을 바꾸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어느 정도 우리 주변의 것들에 대해 두려움과 존경을 가지고 보존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작은 의자도 끝없는 무지를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며 단순해 보이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헤아릴 수 없이 긴 역사와 넓은 면적을 가진 개천과 강변을 보면서 내가 여기를 다 알아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가? 그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결국은 가구점의 카탈로그와 같다. 이 강과 저 강은 다를 게 없다. 언제나 교환가능한 무의미한 것이다. 그것들은 다 파괴해도 상관없는데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다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을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애정이 없는 것이다. 수천년 역사를 가진 우리 땅을 콘크리트로 쓱쓱 문질러 어제 태어난 나라처럼 만들고 아 멋지다라고 말하는 것은 비참하다. 

 

그 도시에 아무런 애정이 없는데 그런 사람이 시장으로 그 도시를 개발한다면 도대체 그 도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애정이 없는 사람이 시장이 되어 실시하는 정책이란 건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일까? 혹시 그 시장에게 그 도시란 그저 거대한 자원같은 것으로 생각되어지는거 아닐까? 그것은 아끼고 다듬어 대대손손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삶의 터전이라기 보다는 그저 소모적으로 다 써버리고 그렇게 하다가 더 쓸 곳이 없어지면 버리고 떠나면 되는 그런 장소로 여겨지는 것이 아닐까? 

 

그 이력을 보면 쥐시장은 돈과 출세를 제외하고는 어떤 것에도 애정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 삶에 돈말고는 어떤 가치가 보이지않는다. 만약 우리나라가 해방직후처럼 사람들이 가난했다면 우리도 쌀밥에 고깃국 한번 먹어보자면서 그런 가치를 추구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은 그런 단순한 배불림 이상의 가치를 요구한다. 그런데 그에게는 가치도 없고 애정도 없다. 그저 있는 것은 출세와 돈에 대한 욕심뿐이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엄청난 부자면서도 응당 내야하는 작은 돈들도 내기 아까워하는 그런 모습뿐인 것이다. 쥐시장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돈도 많이 벌었고 높은 자리에도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볼 수 없는 것은 성공의 이유다. 그는 뭘 위해서 성공하려고 하는가? 나는 성공의 이유도 고민하는 일없이 성공하는 것에 중독된 사람이 싫고 무섭다. 

 

우리는 왜 성공하려고 하는가? 이 질문이 한국 사회에서 자주 망각되거나 엉터리로 답해진다는 점은 한국 사회의 큰 비극이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에 배가 고파서 성공하고 싶었던 아이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뒤돌아 보는 일 없이 그저 성공에 중독되면 이미 배가 불러 터질 정도가 되었는데도 그저 먹을 것만 모으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종종 왜 성공해야 하는지, 왜 경쟁에 이겨야 하는지, 성공하면 뭘 할 것인지도 다시 생각해 보지 않고 그저 이기고 성공하려고 든다. 성공이 뭔지 고민도 없이 성공하는데 인생과 생명을 건다. 

 

현실의 비참은 이정도에서 멈추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에는 성공에 대한 기괴한 견해가 흔한 것처럼 보인다. 세상에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하고 싶을 때마다 새치기를 해도 되는 사람, 돈을 횡령해도 문제가 안생기는 사람, 갑질과 성추행을 해도 문제가 안생기는 사람이 되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며 왜 현실이 이런가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성공에 대한 자기 성찰이 없다면 새치기를 당하고 항의도 하지 못하던 시절에 분했기 때문에 나도 성공해서 새치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남에게 무시당하고 추행당하는 것이 분한 것에 멈춘 사람은 성공하면 자신도 남을 무시하고 추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성공해서 나도 꼭 저렇게 살겠다고 생각한다. 

 

나라가 망하던 조선말엽과 일제를 거치면서 우리는 오랜동안 존경할만한 성공한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들은 적어도 대개 주류가 아니었다. 보이는 것은 온통 추잡한 짓만 하는 성공한 사람들 뿐이었다. 전쟁이 나자 국민을 버리고 도망가고 독재를 이어가기 위해 불법선거를 하던 대통령이 이승만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이승만을 존경한다고 말한다. 안보를 말하면서 자기 자식부터 군대를 빼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사회지도층 운운하는 일도 많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세상의 주류를 이루며 성공한 사람의 예인 세상을 봐온 것이다. 전쟁이 나면 맨 앞에서서 누구보다 먼저 죽을 것같은 성공한 사람을 우리는 오랜동안 보지 못했다. 

 

그러니 무의식속에 우리는 성공이란 저런거구나 하는 개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쯤 되면 법을 어기고 남에게 모욕을 주고 자기 권력을 남용하기 위해서 성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면 그렇게 하지 못하면 자신의 성공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극이지만 법을 어기고도 경찰에게 내가 누구인지 아냐고 호통을 쳐서 오히려 경찰이 쩔쩔 매게 만드는 것이야 말로, 청탁으로 취직도 시켜주고 공금을 마구 써서 사치를 부려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야 말로 우리 사회에 흔한 성공의 이미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쥐가 싫다. 그는 이런 현실의 상징같은 존재다. 사회적으로 큰 비극을 불러일으키면서 까지 누군가가 성공을 계속하는데 정작 그 본인은 그걸 통해서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비극이 아니겠는가. 본인은 쓰지도 못할 돈을 벌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굶어죽게 한다면 그건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쥐들에게 세상은 그저 정복의 대상이다. 그들이 유명하고 멋진 식당에 간다면 그것은 마치 정복자가 깃발을 꽂으러 가는 것과 비슷하다. 그들이 유명한 가수의 콘서트에 가거나 아름다운 집을 산다면 그것 역시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비싸고 유명한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먹지도 않거나 맛도 알지 못하는 음식을 빼앗고 자신은 좋아하지도 않는 콘서트 음악을 그저 경쟁에 이기자고 남에게서 빼앗는다. 그저 1등이 하고 싶어서다. 본인이 쓰고 남는 것이 넘치도록 있어도 나누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세상을 저열한 가치로 한줄로 세우려고 한다. 

 

쥐시장은 반성하지 않는다. 쥐시장은 왜 자신이 성공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저 개인적 한풀이를 위해서 세상을 뒤흔들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살날이 얼마 안남았어도 남은 것은 오직 돈에 대한 욕심뿐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세상 사람들이 이런 걸 삶의 모범으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공직에 올라선 쥐가 싫다. /

 

창밖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더 커진 것같다. 아마 거리에 모여든 촛불군중의 규모가 더 늘었나 보다. 저 군중은 쥐가 아무리 무서운 표정을 지어도 쥐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같다. 그 말은 쥐가 법정에 서서 죄를 추궁받는 때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쥐의 귀에는 다가오는 경찰의 발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반성하지 않고 왜 성공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라. 쥐는 피리를 부는 사나이가 생각났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가 그토록 신경쓰인 이유는, 그리고 그토록 악착같이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쩌면 그와 쥐는 출발점에서는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피리부는 사나이도 시궁창의 쥐같은 신세였다. 그리고 쥐처럼 세상이 자기를 봐주지 않은 것에, 세상에 자기를 무시하고 모욕하는 것에 대해 그 사람도 분노했을 것이다. 그도 한 때는 쥐였다. 

 

그런데도 쥐와 피리부는 사나이는 매우 다르게 살았다. 그리고 그 차이는 매우 간단한 것 때문이었다. 쥐는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이 분해서 그때의 자기와는 다른 어떤 존재가 되고 싶었다. 성공한 존재, 대접받는 존재. 그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고 그걸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 인간이란 결국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세상이 나를 얼마나 알아주는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었다. 

 

반면에 피리를 부는 사나이는 어느 순간 자신은 뭔가가 되려고 할 필요가 없으며 자신은 이미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성공하자고, 지금과 다른 뭔가가 되자고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이기를 멈추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인간인데 인간으로서 이렇게 사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닌가, 쪽팔리는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피리를 부는 사나이가 말하는 인간은 세상이 나를 알아주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상관없는 것이다.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하는가 그렇지 못했는가에 따라서 인간인가 아닌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생을 마친 사람들도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으면서 생을 끝낼 수 있다. 

 

쥐들은 그런 사람들은 경쟁에 진 것에 대해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단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면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사는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는 주장에는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쥐는 물론 스스로 멈출 수 없다. 쥐는 너무 먼 길을 왔고 앞으로 가는 것을 멈추는 순간 과거에 대한 댓가를 치루게 된다. 쥐는 어쩌면 감옥에 들어가는 순간 안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쥐는 물론 반성은 하지않는다. 쥐는 그런 때가 온다고 해도 자신은 정치적 음모의 희생자라고 주장할 셈이다. 설사 사형을 당한다고 해도 자신은 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용기가 있었다면 애초에 쥐는 쥐처럼 살지 않았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멈췄을 것이다. 살던대로 사는 것을 멈출 용기가 없었기에 굴러가는대로 살았고 나중에는 자신도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졌다. 

 

어쩌면 진짜 교활한 것들은 따로 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영주쥐야 말로 진짜 교활한 자가 아닐까? 쥐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뒤에서 이득을 채우는 자가 영주쥐가 아닌가. 쥐로서는 언젠가 이 모든 일은 영주쥐때문이라고 할 셈이고 영주쥐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할 셈이지만 사실은 영주쥐야 말로 뒤에서 쥐를 떠밀면서 자기 이득을 제대로 챙긴 자가 아니었을까? 그 어리석고 천박한 웃음뒤에 교활한 얼굴이 있는 것이 아닐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영주쥐는 쥐를 비웃으면서 아직도 자기가 주인인줄 안다고 할지도 모른다.

 

쥐는 반성하지 않는다. 자기 죄를 인정한다면 그 동안 흘려왔던 그 수없이 많은 피들이 내 탓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럴 수는 없다. 쥐는 그냥 경쟁에서 이긴 것뿐이다. 절대 쥐의 탓이 아니다. 그걸 자신의 탓이라고 인정하기에는 지난 세월에 있었던 피의 양이 너무 많았다. 그걸 인정하면 쥐는 잠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걸 내가 인정해? 나는 인정못해!’

 

그래도 정말 많은 피가 흘러왔기에 쥐는 누군가가 자신을 멈추게 한다면 안심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쥐는 스스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피는 많이 흐를 것이다. 나라를 팔아먹고 인류를 멸망시키는 한이 있어도 쥐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쥐는 겁쟁이이기 때문이다. 

 

거리에 촛불이 가득하다. 이제 끝이 멀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게 다 피리를 부는 사나이에게 속고 돈을 받는 사람들이 선동을 해서 이런 거라고 여겼는데 지금보니 그런 것도 아니다. 

 

그때였다.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쥐는 핸드폰을 받았다.

 

“시장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세훈이?” 쥐는 이 세훈이라는 이름이 유독 좋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행운의 이름이랄까? 이 이름을 듣자 쥐는 갑자기 기분이 명랑해지기 시작했다.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최근에 안좋은 소식이 많이 들리던 데요. 괜찮으세요?”

 

“나야 뭐. 괜찮지.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이야 늘상 있었는데.”

 

“그거 아세요? 무상급식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거?”

 

쥐는 이제 웃음이 터져나올 지경이다. 방금전의 우울하던 기분이 모두 사라졌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도 가끔 있었지만 이렇게 세상은 그에게 계속 전화를 건다. 그리고 끝없이 그를 위로 밀어올린다. 세상은 아직도 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쥐는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역시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물론이지. 이번에는 자네가 나라를 지켜보는게 어떤가?”

 

쥐는 세훈과 약간의 논의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제 쥐의 마음속에는 아까같은 반성의 마음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가 뒤를 봐줄 것이고 쥐는 더 도약할 것이다. 아직 이 나라에는 그가 더 올라갈 곳이 있었다. 쥐는 반성하지 않는다. 온 나라가 쥐를 틀렸다고 해도 쥐는 반성하지 않을 것이다. 온 세상이 그것때문에 망한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이자 쥐의 길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만약 그가 감옥에 가게 된다고 해도 그것은 분명 정치적 음해이며 인권탄압이었다. 그는 인간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 죽지 않지. 안 죽기 위해 쌓아놓은 돈이 얼만데. 그 돈이 다 없어지기 전에는 나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에도 누구처럼 통장에 29만원밖에 없다고 하면서 호화호식하면서 살지 뭐.”

 

쥐의 눈에는 다시 힘이 돌아왔다. 전화를 다시 들었다. 그는 차벽을 쌓아 촛불이 보이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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