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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쥐와 벌

쥐와 벌 4. 이중사고

by 격암(강국진) 2017.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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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중사고

 

노인은 그를 한 작업장의 책임자로 만들어 주었다. 쥐는 노인의 가르침을 금방 숙달했고 그가 이해한 것을 설교하기를 좋아했다. 쥐는 노인이 그렇게 했듯이 자신도 자기의 부하를 만들었고 그들에게 충성을 요구했으며 그 부하들에게는 그들의 부하를 만들 것을 권했다. 

 

이 충성의 계단을 끝없이 늘릴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 이 사업의 기본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피라미드 사업이었기 때문에 피라미드는 계속 성장해야 했다. 성장이 멈춘 조직은 현상유지도 어려워진다. 사람들로하여금 열렬하게 충성의 피라미드에 뛰어들게 만들려면 쥐는 끊임없이 부하들을 고르고 그들을 교육해야 했다. 부하들을 충실한 쥐로 만드는 것은 이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건 보기와는 달리 일종의 교육사업이었고 종교사업이었다.

 

학습은 반복되어져야 했다. 마치 기독교인이라면 하느님이 우리들을 사랑하며 예수님이 인간들을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을 알지만 계속해서 그것을 다시 배워야 하는 것처럼 부하들도 같은 내용을 다시 배울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확신은 흔들릴 것이 때문이다. 이것이 어느 곳에서나 회식과 교육 그리고 회의가 넘쳐나는 이유였다. 그들은 스스로도 모르게 어떤 종교적 부흥회에 참석하고 있었던 셈이다. 

 

쥐는 오늘도 부하들에게 경쟁에 대해서 다시 설교했다. 

 

“기억하세요. 핵심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경쟁입니다. 모든 것의 가치는 경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일하는 사람들을 서로 경쟁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들이 경쟁을 하면 할 수록 그들의 가치는 떨어집니다. 경쟁에 이겨야만 그들의 노동은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사업장의 이익은 올라가는 것이고 지휘자인 여러분의 가치 역시 경쟁덕분에 올라가게 됩니다.”

 

“저 질문을 좀 해도 될까요?” 영주쥐가 손을 조심스레 들었다. 

 

“뭡니까?” 쥐는 영주쥐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질문을 하다니. 가르쳐 주는 것 이외에 뭘 더 알려고 하는 쥐는 위험했다.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경쟁이 심해지면 경쟁하는 사람들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알겠습니다. 경쟁에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보면 사람들은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하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우리들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은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말씀인가요? 그 원리를 잘 모르겠습니다만…”

 

쥐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쥐들이 둘러 앉은 한 쪽 끝자리에서 서울쥐가 보였다. 서울쥐는 뭔가 말하고 싶어서 안달이 것이 분명했다. 쥐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발을 구르고 있었다. 이럴 때는 잘난 체를 좀 하게 해주는 것도 좋다. 그래야 서울쥐는 자신이 특별히 총애를 받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서울쥐가 대답을 할 수 있는 것같은데 대답을 해보겠어요? 왜 경쟁이 심해지면 지휘자의 가치가 올라갈까요?”

 

“네. 그건 승자를 지휘자가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서울쥐는 얼른 대답했다. 기대보다도 더 훌룡한 답이었다. 똑똑한 녀석이로군. 서울쥐에 대한 평가는 약간 수정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잘 말했습니다. 그게 핵심이죠. 역시 서울쥐군요!” 쥐는 서울쥐를 칭찬했다. 영주쥐의 표정은 굳어졌다. 반면에 서울쥐는 조금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강한자가 살아남는 게 경쟁이 아닙니다. 경쟁에서 이긴 자를 우리가 강한 자라고 부르는 것이죠. 누가 경쟁에서 이기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정하는 것입니다. 일단 경쟁이 시작되면 이 점을 잊기가 아주 쉽지만 여러분이 이것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돈은 훌룡한 도박사가 버는게 아닙니다. 카지노가 버는 것이죠. 

 

경쟁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지휘자가 만드는 경쟁의 규칙입니다. 일단 어떤 규칙이 경쟁의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게 된다면 그 것이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해도 그 규칙은 곧 권위를 가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왜 우리가 이런 게임을 해야 하는가를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들은 오직 게임의 승자는 누구인가하는 것에만 집중하죠. 특히 게임에 걸린 것이 크면 클 수록 그렇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상과는 너무나 먼 거리를 가진 텔레비전 속의 드라마나 게임에 빠져드는 것도 다 이것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엄청난 경쟁을 이긴 승자라도 결국 승자의 권위란 게임의 규칙보다는 가치가 없기 마련입니다. 그 사람이 승자가 된 건 게임의 규칙이 가지는 권위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강력한 권투선수도 결국 상대방이 총을 쏜다거나 수학문제를 푸는 게임을 한다면 경쟁자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어떤 게임의 법칙하에서 이기는 사람들이 배출되게 되면 그들은 그 규칙의 권위를 더 강력한 것으로 만들게 됩니다. 축구선수가 부자가 되는 나라에서는 마치 축구를 잘하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목적이며 축구를 못하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흠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결국 여러분들이 만든 규칙에 따라 여러분들의 작업장에서 엘리트가 된 사람들은 여러분들의 규칙을 칭송하고 자명한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수능에서 만점을 받아서 영광을 차지한 사람은 수능시험의 권위를의심하지 않습니다. 명문대를 졸업한 사람들은 명문대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고 대기업에 입사한 사람들은 대기업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고시를 통과한 사람들은 그 고시야 말로 진정한 인재를 뽑아내는 시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다 그런 건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어떤 자격증을 가지고 특별한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자신의 권리를 믿는 그들은 그걸 가지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그들에 비해 차별당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그게 어느 아파트에 사는가라던가 어떤 차를 모는가 같은 시시한 거라도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딸이라는 것만으로 자신은 남들과는 똑같이 경쟁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사람도 나오게 되는 겁니다. 

 

결국 이런 저런 이름표붙이기를 경쟁항목으로 집어넣으면 사람들은 알아서 차별을 만들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남들과 똑같은 일을 해도 그 일의 가치는 별로 없다고 믿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급여를 많이 줄 필요가 없는 것이죠. 급여는 어디까지나 일한 것에 대한 댓가가 아니라 경쟁에 승리한 것에 대한 보상인 겁니다. 따라서 똑같은 일을 해도 승자는 댓가를 받지만 패배자는 댓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죠. 여러분들의 엘리트는, 다시 말해서 경쟁의 승자들은 이러한 현실에 도전하는 사람을 알아서 비난해 줄 겁니다. 정규직은 비정규직과 싸우고 비정규직은 파견직과 싸우는 겁니다. 재벌3세는 어떤 이유로건 경쟁에 이긴 승자이므로 특혜를 받는 것이 당연해 지는 것이죠. 이게 세상의 자연스런 흐름인 겁니다. 우린 그걸 인정해야죠. 

 

얼마전에 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한 카페에서 어떤 명문대학의 학생이 그 카페의 한 좌석에 앉아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학생증을 보여주면서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다는 겁니다. 마치 명문대학의 학생에게 비명문대학을 다니는 학생은 쓰고 있는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 명문대 학생은 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이 자신의 학생증을 보여서 그들도 명문대생이라는 것을 알려주자 납득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이건 경쟁에 의해서 생기는 특권의식이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런 사람들은 누가 세금을 내라고 해도 학생증을 보여주면서 나 명문대생인데 남들처럼 세금내야 하냐고 말할 것같지 않습니까? 경찰이 심문을 하면 먼저 나 명문대 학생이야라고 외칠 것같지 않습니까? 사실 경찰한테 잡히면 내가 누군줄 아냐고 하는 어른들은 우리 사회에 차고 넘칩니다. 놀라운 일도 아니죠. 우리 사회에서는 법이란게 애초에 평등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충만합니다. 

 

이건 오랜 교육의 결과입니다. 유치원때부터 너 이 시험떨어지면 인생끝이다라는 협박에 시달리면서 10년 20년을 살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모든 시험을 제대로 통과한 엘리트는 그 시험들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인생 망한거라고 생각하게 되죠. 그들은 살기가 부끄러운 존재가 되는 겁니다.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그 오랜 기간동안 그렇게 한결같이 말해 왔으니까요. 스스로도 자기 자신에게 그 오랜 기간동안 그렇게 말해 왔으니까요.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 경쟁에 패배한 사람들은 쥐도 못되는 벌레인 겁니다. 

 

언제나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경쟁에 몇번 이긴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것을 힘겹게 노력으로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경쟁은 가혹했으며 많은 경우 사람들은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합니다. 그래서 체재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은 그런 사람들을 도둑이나새치기를 하는 사람으로 여깁니다. 내가 졸병에서 병장될 때까지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제와 계급따위 안중요하다고 해? 저런 빨갱이 새끼들! 도저히 용서가 안되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뭘가지고 경쟁하는가는 두번째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경쟁을 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더 중요합니다. 경쟁으로 사람들을 줄세우세요. 무조건 한줄로 쭉 세우는 겁니다. 유치원생에서 머리 허연 노인들까지! 필요하다면 침을 멀리 뱉기라던가 이쑤시게를 높이 쌓아올리는 것으로 경쟁해서 승자를 가려도 좋습니다. 누굴 뽑아도 상관없는 상황에서도 되도록 많은 경쟁을 하게 하세요. 안되면 춤이라도 추게 하세요. 안되면 외모나 아부하는 능력으로 줄을 세우세요. 경쟁은 가혹한 것이 좋습니다.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패자가 더 극단적으로 비참해 지면 질 수록 더 좋습니다. 그러면 성추행이든 폭행이든 다 게의치 않는 분위기가 만들어 집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다는 분위기가 만들어 집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조직의 막내는 사람을 죽이라고 해도, 부모를 배신하라고 해도 명령이니 어쩔 수 없지 않냐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초라한 것이라고 해도 그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 극단적인 경쟁을 거쳐서 거기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것을 희생해서 회사에 겨우 입사한 신입사원은 회사에서 해고되지 않기 위해 뭐든지 하지 않겠습니까? 충성스런 조직, 바람직한 조직은 이렇게 만들어 지는 겁니다.”

 

방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질문을 한 번 했다가 서울쥐가 잘난 척할 기회를 준 영주쥐는 의자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하지만 이천쥐는 여전히 질문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런 거라면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면 경쟁을 안하지 않을까요? 현실적으로 우리의 사업장에서 어떻게 경쟁하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는가 또 그런 분위기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일텐데요.” 이천쥐는 신중하다. 바보같은 표정을 짓지도 않지만 똑똑한 척하지도 않는다. 분명히 서울쥐와 영주쥐보다 더 똑똑한 녀석은 이 이천쥐일 것이다. 이 말은 가까운 시일내에 이천쥐가 자신의 충성심을 충분히 증명해 보이지 않는다면 이천쥐는 견제당해 마땅하다는 뜻이었다. 

 

쥐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서울쥐는 대답을 한 번 하는 것정도로는 만족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번에도 시켜만 주시면 멋진 답을 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 충성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쥐는 서울 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해보라는 뜻이다. 서울쥐는 목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그런 건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되지요. 성과를 내는 사람에게 좀 더 보상을 하겠다부터 시작하면서 사람들을 중독을 시키면 됩니다.”

 

“맞아요. 서울쥐는 우등생이군요. 이거 다음부터는 서울쥐가 나 대신 교육을 맡아도 될지 모르겠네요.” 

 

쥐가 이렇게 말하자 서울쥐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고 영주쥐는 더욱 낙담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고 보면 영주쥐는 평소에도 서울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영주쥐는 서울쥐에게 이기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것이다. 쥐는 말을 이어갔다. 

 

“경쟁하는 결과는 이렇게 심각하지만 경쟁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복권에 중독되는 것처럼 승부에 중독됩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먹을 것이 충분한 상황에서도 한 사람이 다 먹을 수도 없는 음식을 독차지 하고 나머지는 굶는다는 어이없는 경쟁을 하는 것에도 동의할 겁니다. 사람은 원래 경쟁적입니다. 사람은 객관적으로 뭘 가져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옆 사람보다 한가지를 더 가지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겁니다. 오직 옆집 남편보다, 친구 남편보다 내 남편이 조금 더 돈을 버는 가 그렇지 못한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객관적 수치가 중요한 게 아니예요. 

 

게다가 여러분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승부를 조작할 자신이 있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경쟁은 신성한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자기는 이길 수 있다고 믿으니까 경쟁을 더 심각한 것으로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본래 사기꾼들이 ‘내기할래?’라는 말을 남발하는 법이죠. 무슨 이유로건 이길 자신이 있는 사람은 경쟁하는 구도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법입니다. 

 

물론 이따금 누군가는 ‘여러분 경쟁이 없이도 모두가 다 먹을 수 있습니다! 경쟁은 바보같은 일입니다’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 또한 필연적이죠. 하지만 그러면 여러분들의 엘리트들은 저런 사람이 우리를 망하게 한다고 외칠 겁니다. 저들은 공산주의자라고. 종북세력이라고 외칠겁니다. 그들은 이미 모든 가치는 경쟁에서 나온다는 생각에 깊숙히 중독이 되어 있기 때문에 경쟁이 필요없는 상황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인간은 결국 경쟁이라는 채찍이 있어야 제대로 움직인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경쟁을 독려하려는 여러분들을 성공으로 나아갈 기회를 주는 고마운 사람이라면서 칭찬할 것입니다. 쓸데없는 경쟁따위 하지 말자고 하는 사람은 사기꾼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사람들은 알아서 그들을 조롱할 것이고 그들을 무시할 것입니다. 왜냐면 쓸데없는 경쟁은 하지 말자고하는 사람들은 대개 어떤 경쟁에서 승리한 엘리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승부에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경쟁하지 말자고 말하는 찌질한 패배자들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학벌따위 필요없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래서 당신 학벌은 뭐냐고 묻습니다. 아닐 것같지만 현실에서 사람들은 된장찌게를 만드는데 있어서는 축구실력이 아무 상관없다는 점을 종종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마치 축구에서 경쟁에 이긴 사람은 요리도 잘하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결국 뭐든지 경쟁에 이긴 사람만 말할 자격이 있다는 겁니다. 모든 가치는 경쟁에서 나온다고 믿는 사람에게 경쟁에서 이기지 못한 사람, 경쟁의 구도의 바깥에 있는 사람은 전혀 무가치한 인간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왜 무가치한 인간에게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경쟁이 별로 안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경쟁에서 이긴다음에 그런 말을 하라고 세상은 말합니다. 그러니 그런 말이 통할리가 없지요. 경쟁을 찬양하세요. 그러면 일은 저절로 굴러갈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경쟁적입니다. 

 

이제까지의 말을 이해했으면 자명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경쟁과정은 충성스런 부하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이것은 불만세력을 제거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경쟁이 과열되면 될 수록 경쟁한다는 행위 그 자체에 회의를 품는 사람이 겪는 피해는 커지기 때문입니다. ”

 

이 말을 끝으로 교육은 끝이 났다. 방안을 돌아보니 다들 또 이 이야기로군하는 얼굴이다. 벌써 몇번이나 들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쥐들은 납득을 하는 분위기였다. 자신들이 이 원칙에 따라 행한 일들은 때로 그들의 양심을 건드렸다. 하지만 쥐들은 이렇게 다시 설교를 듣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믿음은 이따금 다시 강화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교육이 반복되는 이유였다. 다만 이천쥐만 약간 더 안색이 안좋았다. 좋지 않다. 이천쥐는 이중사고를 하기에는 지나치게 똑똑했다. 어쩌면 이천쥐는 오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일찌기 조지 오웰은 소설 1984년에서 이 이중사고를 설명한 적이 있다. 그것은 두개의 서로 모순되는 사실을 동시에 믿는 것을 말한다. 과거를 조작하는데 참여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계속 조작하기 위해서 과거가 조작되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는 동시에 과거는 전혀 조작된 적이 없으며 조직이 말하는 것은 진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조직에 대한 충성이기 때문이다. 조직은 틀릴 수 없는 것이다. 이 두가지를 한꺼번에 믿는 것이 바로 이중사고였다. 

 

쥐가 하는 교육의 핵심도 바로 이 이중사고와 관련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조직의 맨 위에 있지는 않지만 조직의 맨 아래에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늘 쥐에게 교육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들은 그들의 부하를 교육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부하직원이자 관리자였고 따라서 두개의 모순된 지식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물론 부하들에게 경쟁이 중요하다고 교육해야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은 조직에게 충성스러워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하고 있는 경쟁은 공평한 것이라고 믿어야 했다. 하지만 경쟁교육의 핵심은 바로 그 경쟁이 공평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공평하고 자동화된 경쟁에서는 관리자가 아무런 권력을 가지지 못한다. 언제나 경쟁에는 ‘어쩔 수 없는’ 불확실성이 존재해야 했고 ‘어쩔 수 없는’규칙의 변화가 있어야 했다. 

 

예를 들어 정치가들은 대통령제라는 게임의 법칙 속에서 마음껏 부패를 즐긴다음에 사람들이 그 부패를 추궁하면 이것은 모두 제왕적 대통령제때문이라고 말하면서 게임의 규칙을 내각제로 바꿔버릴 수 있다. 이것이 성공할 수 있다면 결국 머리가 있는 사람은 누가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분명히 느끼게 된다. 그것은 대통령제도 내각제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게임의 법칙을 지배하는 관리자들이다. 게임의 법칙을 관철시키는 능력이야 말로 권력의 본질인 것이다. 1997년 6월의 시위가 혁명으로 말해진다면 그것은 시민들이 게임의 법칙을 관철시킴으로써 그 권력을 시민에게 가져왔기 때문이다. 게임의 법칙이 뭔가도 중요하지만 누가 그것을 관철시켰는가가 때로는 더 중요하다. 게임의 법칙이 같아도 세상은 진정한 권력자에게는 다른 태도를 취한다. 그들이 불편해지면 세상이 뒤집어질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감옥에 간 박근혜가 여전히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적어도 세상의 일부분은 그녀의 권력이 다 사라지지 않았다고 본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한 가지 분야 이상에서는 관리자나 리더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일에서 뭐가 옳은 일이고 뭐가 공평한 일인지 알고 있다. 천재나 대단한 철학자가 있어야 상식적인 답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그들이 이용하고 때로 착취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들도 사회적 악을 유지하는 것에 자신들이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누군가에게 경쟁을 강요하고 그것이 공평한 경쟁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들도 자신이 말하는 것과 자신이 듣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도 그런 시스템에 그들은 충성하고 있다.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원래 세상은 그렇다고 하면서 말이다. 위선이 전혀 없는 삶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위선도 모두 용서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위선에 대해서 흑백논리를 적용하는 것은 결국 위선을 용서하고 위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현실을 모르는 극단주의자로 여기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답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고의로 생각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을 뿐이다. 이중사고를 써서 말이다. 

 

쥐는 모두를 둘러보면서 제안했다. 

 

“자 언제나 처럼. 오늘도 구호로 모임을 마치도록 합시다.”

 

모두가 일어섰다. 쥐가 선창했다.

 

“나는 회사에 충성합니다!”

 

“나는 회사에 충성합니다!”

 

“경쟁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경쟁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쥐는 모두와 함께 구호를 세번씩 반복했다. 언제나 처음에는 약간 망설임도 있지만 사람들은 곧 구호를 아주 크게 외쳤다. 결국 그 목소리의 크기가 충성심의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아닐 것도 같지만 사람들은 구호를 외치면서 실제로도 점점 확신에 차게 된다. 구호를 외치는 것은 별거 아닌 것같지만 교육의 핵심적 부분중 하나였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따라서 살게 된다. 구호를 외치면서 그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납득하게 되는 것이다. 구호는 반복될 수록 힘이 들어갔다. 구호를 마칠 무렵이면 사람들의 얼굴은 마치 감동한 것처럼 흥분한 표정을 가지게 된다. 그들의 양심은 이제 말끔해 졌다. 

 

쥐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것으로 오늘의 교육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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