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들/쥐와 벌

쥐와 벌 5. 피리를 부는 사나이

by 격암(강국진) 2017. 10. 21.

5. 피리를 부는 사나이.

 

쥐는 한 사람을 잊을 수 없다. 사람들은 그를 피리를 부는 사나이라고 불렀다. 그 별명은 매우 적절했는데 그는 자기처럼 쥐로 만들어진 사람들에게 다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피리소리에 모여든 사람들은 어느새 쥐의 저주들 혹은 쥐의 죄악들에서 풀려나고 있었다. 그들은 용기를 가졌고 더이상 두려움에 지지 않았다. 그들은 자잘한 분열때문에 선악을 잊고 싸우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동체를 잊지 않았다. 그들은 더이상 인간에게 충성하지 않았고 어떤 사상도 맹신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인간으로 남아있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과 남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거짓말만 하고 듣는 생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체념하지 않았다. 

 

피리를 부는 사나이가 부는 피리소리는 그다지 복잡한 메세지를 전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한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의 이익이나 내가 겪는 공포를 생각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보면 상식이 보인다는 것이다. 복잡한 상식이 아니다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하고, 누구나 세금을 내야하고 누구나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한다. 사람이 사람을 모욕하거나 폭행하거나 죽이거나 하는 일을 해서는 안되고 죄없는 사람을 죄있다고 말해서 감옥에 집어넣으면 안된다. 누군가의 자식은 밤새워 공부하고 알바도 하면서 공부를 해도 무시당하고 불합격당하고 심지어 죽기도 하는데 누군가의 자식은 수업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아도 어디든지 쉽게 합격되고 엄청난 재산을 쉽게 벌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니들도 부모 잘 만나지 그랬냐고 비아냥거리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한마디로 이 세상은 상식이 통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특이할 것이 없는 메세지에 사람들은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여든  서로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피리소리를 외면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고마웠고 그 누구보다 그 피리소리를 무시하지 않은 자기 자신이 고마웠다. 사람들은 돈을 기부하고 길거리에서 못추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못쓰는 글을 쓰고 인터넷 홈페이지를 열었다. 글을 쓸 수 없는 사람들은 그걸 퍼나르는 일이라도 했다. 사람들은 스스로 피리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피리소리가 더 크고 넓게 퍼질 수록 사람들은 자신들이 더이상 쥐가 아니라 사람으로 살게 되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쥐도 가만히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모두를 완벽한 쥐로 만들기 위해서 쥐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따지지마. 생각하지마. 그냥 시키는대로 해. 그나마 가진 거라도 지키고 살려면 그렇게 해. 더 많이 가지고 싶겠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것도 알고보면 상당하지. 그건 지켜야 하지 않겠어? 그걸 얻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가 기억해? 어차피 세상은 이런 거야. 경쟁사회라는게 그런거 아냐? 오랜동안 경쟁을 반복하면서 배운게 있잖아? 경쟁상대의 입장을 생각하면 어떻게 경쟁에 이기지? 누구나 사연은 있잖아. 생각을 하면 골치만 아프다고. 생각이 없어야 경쟁에 이기는 거지. 그리고 애초에 생각은 니들이 하는 게 아니야. 생각은 언제나 윗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 니들은 생각하라고 월급을 받는게 아니야 그 반대지. 월급은 주로 생각하지 말라고 주는 거라고. 여태까지도 그렇게 쭉 살아왔잖아. 안그래?”

 

사람들은 적어도 어렴풋이는 이런 저런 문제들을 느끼면서도 서서히 그런 목소리에 젖어들었다. 그러면서 그걸 현실이라고 부르고 조금씩 조금씩 둔해져 갔다. 어떤 사람들은 애초에 피리소리를 듣지 못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주저했다. 그래서 그들은 서서히 쥐로 변해갔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피리를 부는 사나이의 피리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은 조금씩 상식이라는 말을 수근댔다. 그 수근거림이 커질 수록 쥐들의 절규는 더 커져만 갔다. 그들은 다른 누구보다 피리부는 사나이를 더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를 보는 쥐들의 눈에는 살기가 차올랐다. 

 

피리소리는 말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어려운 진리도 있겠지만 알고보면 우리는 뻔한 진리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왜 사람인가? 사람은 어려운 사람을 보면 측은하게 여깁니다. 사람은 의롭게 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사람은 남에게 양보할 줄 압니다. 사람은 뭐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게 새로운 진리가 아닙니다. 심각한 고민이 있어야 깨달을 수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이걸 맹자님이 말했건 예수님이 말했건 부처님이 말했건 그런게 중요한게 아닙니다. 이건 그냥 당연한거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당연한 말을 들으면 고개를 숙이거나 딴 곳을 봅니다. 부끄러워하고 딴청을 피우거나 화를 냅니다. 성인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성인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물론 완벽할 수 없고 실수도 하고 오해도 하고 유혹에도 넘어갑니다. 다만 그래도 이런게 사람이다라는 말까지 외면하지는 말자는 겁니다. 언제나 옳게만 살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뭐가 옳은지는 잊지 않는 것 그게 사람사는 세상 아니겠습니까?”

 

피리를 부는 사나이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조금 더 타협하면서 살 것을 조언했다. 그는 좋은 사람이지만 너무 타협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자기를 도와줄 사람들에게는 고맙다고 설렁탕도 돌리고 그러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조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다.

 

“세상에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쥐로 사는 사람도 많지만 저는 사실 오랜동안 쥐였습니다. 본래 보잘 것없고 배운 것도 별로 없는 타고난 쥐였죠. 그래서 저는 구박도 많이 당하고 무시도 많이 당해봤습니다. 밥도 굶어보고 도둑질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생활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되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구질구질하게 살면서도 악착같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 노력이 성공해서 살기가 좀 편해졌을 때 저는 정말 기뻤습니다. 살기가 편해진 것도 있지만 저는 이제 제가 사람이 된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제가 사람이 된게 아니더군요. 저는 그저 조금 더 살찐 쥐가 된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저를 쥐라고 무시하던 그 인간들도 사실은 다 쥐였다는 것을. 알고 보니 허탈하더군요. 정말 별것도 아닌 것들이 별 것도 아닌 것을 쥐고서 얼마나 나를 구박하고 차별했던지. 대단히 고상하고 귀한 척하던 사람들이 알고 보면 다 누군가가 던져주는 먹이를 먹고 찍찍 대는 쥐들이었던 겁니다. 

 

물론 제가 좀 성공하고 나니 이제 저에게 친구를 하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들과 어울려서 둥글둥글 살 수도 있었습니다. 서로 서로 뒤도 봐주고 말입니다. 저도 가진 것 아깝게 여기고 인간에게 충성하고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럴 핑게도 세상에 많았습니다. 저도 내가 계속해서 쥐로 사는 것은 세상이 더럽기 때문이라면서 세상탓하고 욕하면서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랬더라면 제 가족도 훨씬 더 편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몇가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쥐로 무시당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서럽고 힘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때 저를 힘들게 하는 그 인간들을 보면서 저는 제가 인간이 되면 저렇게는 안하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제가 인간이 되면 설사 쥐를 보더라도 저렇게는 안하겠다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성공을 했다고 해서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은 싫은 일이었죠. 적어도 꺼림직한 일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계속 저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 자존심이 계속 저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저는 그 것때문에 그냥 충성하고 눈감으라는 말에 예하고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쥐가 싫었고 쥐인 것이 부끄러웠으니까요. 

 

돌아보면 저는 소위 제도권의 엘리트코스를 겪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제가 가진 문제들중의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제가 성공하는데에서도 문제였지만 쥐로 남아있지 못하게 만드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엘리트 코스야 말로 강력한 최면을 거는 과정이며 사람을 쥐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착하고 똑똑한 사람들도 그 코스를 거치면서 변합니다. 계속 이건 어쩔 수 없다, 이건 이런 법칙의 결과다 너희는 재능이 있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같은 기성시스템에 대한 옹호론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좋은 책도 많이 읽지만 그러면서 오히려 세상의 삶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세상을 체험해도 먼저 이런 저런 생각을 가득 가지고 세상을 체험하지요. 그들은 인맥 학맥의 달콤함을 느낍니다. 엘리트코스 안에서 서로 서로 뭉쳐서 하나되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생끝에 나이를 먹었으니 젊은 세대들에게 마찬가지의 것을 받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누구나 졸병때는 병장이 밉지만 병장이 되면 졸병이 건방지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그런 코스를 아예 들어가 보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성공하기 전에는 그냥 계속 바닥이었죠. 고상하고 좋은 말씀들도 좀 더 세상을 겪고 나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무슨 운동을 하면서 무슨 주의를 배우고 그러면서 동지를 만들고 세상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저를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세상이 저를 친구로 잘 끼워주지도 않았지만 저도 뭔가에 완벽히 충성하기 어려웠습니다. 어떤 조직에도, 어떤 사상에도, 어떤 사람에도 말입니다. 저는 들판에서 굴러다니며 외롭게 큰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순간 제가 제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산맥에 이어지지 않은 외로운 산같았습니다. 아주 외롭게 커서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보니 그것도 장점이 있었습니다. 저는 세상에 크게 빚진 것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갚을 수 없을 정도의 빚은 아닌 것같았습니다. 약간만 빚을 갚으면 그냥 나 좋은대로 살 수도 있을 것같았습니다.  

 

저는 개인주의자입니다. 저는 이기주의자가 되려고는 하지 않지만 분명 저는 개인주의자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외로워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남에게 빚을 지는 것에 대해 괴로워합니다. 빚을 지면 저는 제가 하기 싫어하는 것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기 싫은 일이란게 뭘까요? 그거 별거 아닙니다. 어린애들이 죄없이 맞아서 피멍이 들고, 죽기도 하는데 그것에 눈감고 등돌리는 거 그겁니다. 물론 제가 뭘 하든 이 세상의 모든 악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그런 일들을 볼 때 눈돌리고 피하는 행동을 하는 것 자체, 그 쥐같이 행동하는 것 자체가 제일 싫습니다. 부끄러우니까요. 아직도 쥐인 것이 부끄러운 겁니다. 그렇게 열심히 해서 인간이 되겠다고 했는데 아직도 쥐인 것이 부끄러워서, 먹이를 좀 더 먹겠다고 쥐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그게 너무 싫은 겁니다. 살찐 쥐들에게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말도 못하게 되는 것이 너무 싫은 겁니다. 

 

그 부끄러움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좀 더 둥글둥글 살면 몸은 편해질지 모르지만 제 마음은 더 괴로웠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외롭지 않게 살면 겉으로 보기에는 친구가 넘쳐나고 좋아 보이겠지만 제 마음은 더 외로웠을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맘에 없는 미소, 맘에 없는 말들이 저를 더 외롭게 했을 겁니다. 

 

사실 저에게도 힘든 때는 여러번 있었습니다. 제가 빚을 지는 일이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 살면서 빚을 전혀 안지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사람들에게 빚을 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빚이 돈이었다면 돈으로 갚으면 되겠지만 저를 알아봐주고 인정해 준 빚은 그런 식으로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 빚은 완전히 갚을 수도 없을 뿐더러 그런 사람에게 등을 돌리면 세상을 사는게 매우 힘들어집니다. 배신자가 되는 겁니다. 길거리로 나가서 정말 힘들게 살아야 합니다. 미친 놈소리를 듣게 됩니다. 주류에 들지 못하고 소수파가 되죠. 미친 놈이며 소수파인 사람에겐 당연히 친구가 귀하게 되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 때 자기를 도와준 은혜를 외면하지 못해서 쥐로 삽니다. 

 

그런데 저는 저를 알아준 사람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고 해도 제 생각과 다르게 정치적인 야합을 한 사람에게 충성하면서 살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는 없었겠지요. 저는 전혀 다르게 살고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훨씬 덜 외롭게 살고 있었을 겁니다. 진작에 출세도 빨리 했을 겁니다. 

 

그래도 저는 가끔 정말 아무 댓가도 없이 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를 만납니다. 갚을 수 없는 빚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그냥 주는 것을 보면 돌려 받을 생각이 없는 겁니다. 그들이 있기에 저는 보이는 것만큼은 외롭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그렇게 외롭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저는 그런 빚도 너무 무섭습니다. 알고보면 댓가 없이 주는 빚만큼 무거운 것도 없습니다. 저는 그냥 적당히 제 빚이나 갚고 제 나름대로 살려고 하는데 그런 빚은 저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스스로 도와주는 사람들에게도 뭘 달라고 애걸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세상을 위해서라면 주고 저를 위해서라면 주지 말라고 합니다. 직접적인 댓가로는 줄게 없으니까요. 저는 뻔뻔합니다. 이러니 저는 남들보기에 외로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피리를 부는 사나이에게는 한가지 재능이 있었다. 그것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그에게 빚을 진 것처럼 느끼게 하는 능력이었다. 그가 세상으로 부터 차별당하고 폭행당하면 사람들은 그걸 자기가 한 것처럼 부채를 느꼈다. 자신들도 그런 세상의 일부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세상을 탓하지 않았다. 그는 원망하지 말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는 자신을 탓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의 부채의식은 점점 더 커졌다. 

 

결국 쥐는 칼을 빼들었다. 이제 그를 출세의 길로 이끈 노인도 가고 없었다. 그 역시 쥐는 배신한다는 것을 잊었던 어리석은 사람들중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배신이란 쥐에게도 위기이기 때문에 때로는 쥐도 이쯤에서 더이상의 배신을 그만두고 멈추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쥐는 배신을 멈출 수 없었다. 

 

쥐가 맡은 사업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엄청난 부실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것에 대해 쥐는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쥐가 계속 반복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쥐는 거짓말 이외에는 뭔가를 생산하지 않는다. 이렇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있을 수없는 실적을 쌓으면서 출세를 하다보면 결국 그 부채가 산처럼 커져서 쥐를 덮쳐올 때가 있다. 결국 이건 사기다. 비리를 비리로 사기를 사기로 돌려막으면 피라미드는 어느 순간 붕괴하려고 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쥐는 매번 배신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의 뒤에는 상처입은 사람들의 비명과 죽음이 가득했지만 다행히도 이제까지는 그의 배신들은 성공해서 그는 항상 더 큰 무대로 뛰어들 수 있었다. 그는 노인을 뒤로 하고 사업에서 정치의 세계로 뛰어든 것이다. 정치판에서 그는 회사를 망하게 한 사람이 아니라 성공한 사업가로 통했다. 이미지 관리를 잘한 덕분에 사람들은 그를 신화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여겼다. 사람들은 종종 가장 큰 악인과 가장 큰 영웅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그는 배신으로 인한 사람들의 상처에는 더 이상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결국 쥐가 배신하지 않았으면 그들이 쥐를 배신했을 것이다. 쥐는 경쟁에 이겼을 뿐이다. 노인은 다만 쥐가 그와 경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어리석고 부당하게 말이다. 잘난 척하던 그 노인이 죽었을 때도 세상에 남은 것은 별로 없었다. 그 엄청난 재산은 이미 다 뒤로 빼돌려진 뒤였다. 그 노인은 종종 자신이 사회사업가이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으나 결국 남들처럼 자기 가족들의 배만 말도 안되게 채웠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쥐도 피리를 부는 사나이에게는 각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쥐는 그가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피리를 부는 사나이는 위선자였고 최악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은 쥐다. 그러므로 가장 인간적인 존재란 바로 쥐인 것이다. 이런 당연한 사실을 부인하고 헛소리를 떠들어서 쥐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저 피리쟁이야 말로 위선자이고 최악의 인간이었다. 부끄러운 줄 알라니. 쥐가 뭐가 부끄럽다는 것인가! 쥐는 떳떳했다. 쥐가 쥐답게 행동했을 뿐이다. 

 

쥐는 자신이 시궁창 출신인 것을 잊지 않았고 그것을 모든 악행을 변명하는 기본으로 삼았다. 결국 그리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 쥐는 열심히 살았던 것이다. 쥐는 자신이 시궁창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밟고 올라 서서 그들을 시궁창으로 밀어넣었다. 피리를 부는 사나이는 자신도 쥐와 같은 존재였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치 거울 이미지처럼 피리부는 사나이는 쥐와 모든 면에서 반대되고 있었다. 그를 보는 것은 쥐의 삶을 부정하는 방송을 보고 있는 것같았다. 쥐들은 모이면 시궁창에서 태어나면 영원히 쥐 이상으로 살 수는 없다고 말하곤 했다. 사실 인간은 모두 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지 않다고 부끄러워서 그렇게는 못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쥐는 그가 싫었다. 일단 그렇게 생각하게 되자 늘상 듣던 세상사람들의 욕도 다 그가 시켜서 그렇게 하는 것같았다. 모든 위기도 다 저 피리를 부는 사내때문에 생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쥐는 칼을 빼들었다. 쥐는 그의 부하쥐들에게도 칼을 빼들어 피리를 부는 사나이를 찌르라고 명령했다. 피리를 부는 사나이는 헤아릴 수 없는 칼날의 공격을 받았다. 날카로운 쥐의 발톱과 이빨 그리고 칼날 속에서 피리를 부는 사나이는 피를 흘렸다. 그리고 결국 피리소리는 멈췄다. 사나이는 쓰러져 버린 것이다. 쥐의 세상은 그런 쥐에게 갈채를 보냈다. 꼴보기 싫은 사나이가 드디어 사라진 것이다.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쥐는 비로소 자신이 보다 완벽한 쥐가 되었음을 느꼈다. 쥐는 또 한단계를 올라서서 새로운 경지에 이르른 것이다. 쥐는 기꺼이 피리부는 사내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가장 멋진 옷을 입고 미소를 머금은 채 그 자리에 섰다. 피리를 부는 사나이는 유죄였다. 쥐가 되지 못한 죄, 진정한 인간이 되지 못한 죄를 그는 범했다. 

 

하지만 쥐는 피리를 부는 사나이의 재능을 전부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피리를 부는 사나이가 쓰러지고 나자 사람들이 그에게 느끼는 부채의식은 말도 안되게 증가했다. 그를 직접 찌르지 않았던 수 없이 많은 사람들도 한가지 질문에는 대답이 궁했다.

 

“나는 그가 죽을 때 뭘 했나?”

 

피리를 부는 사나이는 빚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빚을 갚았고 결국에는 그의 생명까지 빚 갚는데 쓰고 말았다. 얼마 안되서 갚을 수 있을 것같았던 빚도 결국 그리 적지는 않았던 것이다. 혹은 그가 필요이상으로 너무 많은 빚을 갚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가슴에는 빚이 남았다. 아주 아주 악성채무가 남았다. 이 빚은 아무리 갚아도 절대 줄어들지 않으며 그렇기는 커녕 점점 늘어만 나는 이상한 빚이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