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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구할 철학

by 격암(강국진) 2018. 1. 4.

오늘날에도 우리는 종종 옳은 , 합리적인 것을 찾을 어떤 절대적인 기준으로 그런 것을 찾는 것처럼 생각을 한다. 올바른 사회란 어떤 것인가, 합리적인 시민의 선택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할 우리는 어떤 자명해 보이는 관념들을 기반으로 그렇게 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민주공화정이라던가 인간의 생명은 존엄하다던가, 인간은 합리적이라던가 혹은 반대로 인간은 이기적이라던가 하는 전제들을 사고의 기초로 해서 생각을 전개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대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고의적으로 부분에 신경을 집중해야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있다. 예를 들어 사회적으로 인문학강좌 열풍이 분다던가 고전 읽기가 장려된다던가 하는 일을 생각해 보자. 먼저 말하지만 이것들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좋은 것을 해도 자기를 잃고 하면 효과가 거의 없다. 심지어 자기를 찾으라는 말을 자기를 잃어가면서 듣는 모순적인 일을 수도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자기란 단순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순간의 당신을 만들고 있는 역사적 물질적 정신적 현실이다. 당신은 그냥 인간인 것이 아니며 당신은 수천년전의 그리스인이나 중국인이나 인도인도 아니다. 따라서 당신이 시공을 초월하는 진리나 합리성에 집중할 당신은 당신 자신을 잃게 있으며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암환자가 폐렴환자에 대한 처방을 열심히 듣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심지어 자기찾기를 말하는 실존주의철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철학도 자기를 잃어가면서, 어떤 외국철학자의 체험과 감성과 표현을 절대시하면서 읽는 일이 생길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합리적인 것이 어떤 것인가를 찾을 어떤 절대적 기준으로 그런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사고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는 우리가 우리 사고의, 우리 정체성의 물적기초와 같은 특징들에 주목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점들에 주목하면서 우리의 생각을 점검해야 한다. 세계를 구할 철학이 어딘가에 시공을 초월해서 절대적으로 존재하며 그것을 우리는 발견할 있다는 식으로 사고해서는 안된다.


일찌기 마르크스가 지적했던 것처럼 경제적 환경은 인간을 만든다. 인간의 사고나 철학이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가 농경사회인가 상업이 발달한 사회인가, 산업사회인가에 의존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국사회의 합리성에 대해 생각하거나 어떤 개인의 합리성에 대해서 생각했을 한국 사회의 산업적 토대가 어떤 것인지, 개인의 자산과 직업이 어떤 것인지를 무시하고 막연히 합리적인 것을 생각하는 일은 옳지 않다. 그것이야 말로 바로 합리적인 혹은 진리를 어떤 절대적 기준으로 찾는 일이 된다. 한국의 최고부자는 누구이며 그는 어떻게 돈을 벌고 있는가라던가 개인의 하루 생활은 여러가지 일들에게 어떻게 배분되고 있는가같은 우리 삶의 구체적 현실을 외면하고 합리적 행동이나 정의를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여기서 나아가 바로 물적기초를 개선하고 바꾸는 일이야 말로 철학적 진보의 핵심이라고까지 생각할 있다. 참여하고 행동하고 생활을 개선하는 일이야 말로 어떤 귀중한 고전을 읽는 일보다 효율적으로 우리의 철학을 바꾼다는 것이다. 어쩌면 산책과 보건체조야 말로 가장 중요한 철학적 진보의 수단일 있다. 어쩌면 소비자운동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좋은 기업이 성공하게 만드는 일이나 지역사회의 마을 재건운동을 벌이는 일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철학적 탐색과정일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 지는 신체와 사회적 망이야 말로 바로 우리를 이루는 물적기초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우리가 새삼 발견하게 되는 또다른 사실이 있다. 세상을 구할 철학이란 어떤 천재가 개인적으로 책상앞에서 찾아낸 진리가 아니라 세상을 개혁하고 세상의 구조를 바꾸는 운동의 결과물이다. 다시 말해 철학이란 문화고 집단의 결과물이다. 대중이 받아주지 않은 철학이란 마치 위가 없는 아래같은 모순적인 개념일 있다. 철학에서 물적기초가 중요하다고 그것은 마치 고속도로나 철도망없이는 산업사회가 불가능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그것들의 건설이야 말로 철학의 건설이다. 


우리는 물론 산업혁명이나 과학혁명의 영웅들을 알고 있으며 민주화운동의 영웅들도 알고 있지만 그들은 세상의 구조를 바꿀 의사를 가진 수없이 많은 대중들의 힘이 존재하기에 의미를 가질 있었다. 또한 우리는 천재의 선견지명에 대해서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적으로 학문적으로 대단한 일을 천재도 자신의 일이 어느 정도의 의미가 있는지를 알고 하는 일은 절대 없다. 그냥 일이 그렇게 벌어지는 것이다. 세상이 받아주지 않았기에 자신이 일이나 메세지가 무의미했다고 느끼며 세상을 등진 천재들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무시했기에 그들이 얼마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서구역사를 바꿨다는 금속활자같은 발명이 한반도에서 먼저 있었는데도 같은 역사적 변혁은 일어나지 못했었다는 것과 같은 역사적 예를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의 발명이나 업적을 주변 대중이 받아들여주지 못했을 , 그것들이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지지 못했을 그것의 의미는 생겨나질 못한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집단이고 망이다. 


우리는 우리의 물적기초라는 것이 단순히 경제적 환경이라는 생각에서 멈춰서는 안된다. 이같은 점은 보다 현대사회로 올수록 점점 극명해 지고 있는데 오늘날의 인간생활은 단순히 많이 먹고 적게 먹는다던가 많이 벌고 적게 번다던가 하는 단순한 기준에서 말하기 곤란한 점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산업구조자체가 생필품을 생산하고 판매한다는 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워졌고 생필품이라는게 뭔지도 말하기 어려워졌다. 다시 말해서 생산과 소비 그리고 소유라는 개념만으로는 현대인의 삶을 말하기 어렵다. 영화는 생필품인가? 구글같은 회사가 제공하는 검색서비스는 생필품인가? 수많은 학원들은 생필품을 제공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단순히 21세기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어떤 부분은 아직도 기원전이고 어떤 부분은 봉건왕조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어떤 부분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울정도로 추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비트코인 열풍이라던가 4차산업혁명같은 말이 유행하는 것을 보라. 그러므로 노동자와 자본가의 구분같은 전통적인 관념들이 여전히 유효한 곳이 많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구분이 아주 낡아 보일 때도 많다. 


우리 사고와 정체성의 물적기초라는 개념은 이제 단순히 경제적 환경이라는 것을 훨씬 넘어서서 환경적 문화적 기초로 넓혀지고 심지어 그보다 깊이 들어가서 인간이성의 기초를 구성하는 언어를 따져야 상황이 되었다. 인터넷 상거래나 SNS 인기가 어떻게 인간생활을 나아가 인간의 사고를 바꾸는가를 생각하게 되면 이것들을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행위로 보는 관점은 지극히 편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경제를 이익의 추구와 배분이라고 생각할 가치라는 것의 의미가 점차로 추상화되는 현실에서 도대체 가지고 이익의 추구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는 점차로 없어질 것이다. 사실 아파트 투기같은 것도 이미 어느정도 그렇지만 인터넷 게임이나 가상화폐 열풍이 사회를 흔들 우리가 그것을 그저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는 힘들어 보인다. 경제시스템이 이런 특이한 사건들에 의해 자주 흔들리는 것이 현실이라면 균형과 평균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경제학자들의 관점은 무의미해 것이다. 이것이 나심 탈렙이 블랙스완에서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다. 이런 추상성의 홍수는 원하건 원하지 않건 다가올 세상에서는 점점 심해질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학자들은 여전히 사방으로 파고들어가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물적토대들을 탐색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일들이 한계가 크다고 생각한다. 객관적인 지식의 피라미드를 건설하려는 학문의 이상은 점차로 힘을 잃고 있다. 그것은 마치 끝없이 모양이 변하는 흐르는 물을 그리려는 노력같다. 


모든 것을 고려했을 우리가 기억해야 말은 어쩌면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했다는 말일지 모른다. 그는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제 미래는 어떤 사회주의적 이론에 따라서 전개되어 나가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상상하고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되었고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의 상상에 의한 것이 아닌 것일때 누군가 다른 사람의 상상에 의한 것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어떤 게임을 설계하고 함께 참여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게임이 불완전하다면 그것을 고치거나 아니면 아예 새롭게 만든 게임으로 옮겨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어떤 게임에서도 제한적인 책임만을 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하나의 게임에 무한책임을 지고 갇히지 않는다. 이것이 이제까지 인간들이 해온 국가라던가 시장경제같은 게임과는 다른 점이다. 


이런 일은 이제까지는 가능하지 않았지만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로 점차 가능해졌고 인공지능기술이 발달하면 더욱 보편화될 것이다. 가상화폐 열풍은 시작에 불과한 것일 있다. 화폐의 발행과 운영은 중요한 국가기능중의 하나라는 것을 생각할 이것은 인터넷 공화국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가끔 게임동호회 게시판이나 유머 게시판의 사용자들이 뭉쳐서 어떤 사회적 행동을 하는 일에 놀란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전쟁을 시작시키거나 종식시킬 정도의 힘을 가지는 인터넷 공화국, 심지어 미국이나 중국이상의 힘을 가지는 인터넷 공화국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국적 기업의 힘이 얼마나 강대한 가를 생각하면 이런 것들이 전적으로 상상이라고 수는 없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집단의 힘은 날로 강해지고 있다. 화폐는 없을지 몰라도 촛불민중이 박근혜를 퇴임시키고 한국의 정권을 바꾼 것도 내가 보기엔 인터넷 공화국의 전조로 보인다. 


세상을 바꿀 철학이란 내가 보기엔 종종 오해되고 있다. 그것은 어느 동굴속의 현인이나 유명대학의 교수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의 어느 순간에 출현할 아이디어도 아니다. 그것은 어느 책에 써져 있는 것과도 다르고 개인의 정신상태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어떤 의미로 그것은 이미 나와 있으며 유령처럼 세상을 떠돌고 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그것을 진정한 실체로 만들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가능한 게임의 수는 무한이다.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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