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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문제의 사회적 해결

by 격암(강국진) 2018. 1. 28.

이번 세종 병원 화재 보도를 보면서 나는 새삼 노인문제가 아주 심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요양병원을 가득 채운 노인들이 돌아가셨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화재속에서 돌아가신 그분들 중 다수가 침상에 묶여 있었다는 말이 그런 생각을 더 하게 만듭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양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밥은 소화시키기는 좋지만 턱의 발달을 막는다는 부작용이 있지요. 우리는 노인 문제를 생각하면서도 이 문제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즉 우리는 사회적 도움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모든 문제를 거시적인 차원에서만 보지 말고 여러 규모의 자구적 해결을 돕는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노인 복지를 위한다는 명복으로 요양병원에 대해 지원을 늘린다는 것이 실질적으로는 노인들을 병원에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을 만들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선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노인의 삶의 문제는 청년의 삶의 문제 이상으로 중요하며 그 둘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 입니다. 예를 들어 청년 일자리의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노인의 삶이 망가진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 중의 하나는 소비가 줄고 결국 일자리도 줄어든다는 뜻이 됩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모든 노인들이 그야말로 침대에 묶여서 밥이나 먹으며 생명만 유지하는 삶을 살 때 그분들은 최대한 소비를 줄일 것입니다. 설사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외롭게 집에만 머물면서 물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 때 그분들의 삶은 소비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지지요. 그렇다면 그런 사회가 어떻게 활력을 가질 것이며 경제적 활력이 없는 사회에서 무슨 청년 일자리가 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노인들이 일자리를 가지는 것을 포함해서 소비를 하고 취미를 가지고 인간관계를 가지는 것 모두는 청년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일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청년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도시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서 도시로 갑니다. 경쟁이 없는 시골로 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많으면 일자리가 더 많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노인이 살아는 있지만 경제활동이 거의 정지수준일 때 그것은 한국이라는 사회를 활력을 잃은 인구적은 시골처럼 만듭니다. 그러면 청년들도 일자리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죠. 


게다가 노인이 된 부모나 형제의 삶이 망가질 때 그것은 당사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주변 사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 안전망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의료보험제도가 없을 때 가족 중 한 사람이 중병에 걸리면 파산하는 일이 생기기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의료 이상의 곳으로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의 삶이 의료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추락하고 피폐해 질 때 그것은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 주변사람에게도 큰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예가 노인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입니다. 의료적인 문제는 물론 의료보험으로 해결해야겠지만 사람은 단순히 의료문제만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사회전체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 고민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론 청년들도 언젠가는 노인이 된다는 것을 지적하지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회에서는 60이 될 때까지도 10억을 가지지 못하면 무조건 죽어야 한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 그 돈을 모으려고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노인의 문제가 아니라 노인이 되기 전의 청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사회는 지옥같은 상상의 사회입니다만 사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생각해 보면 이게 한국의 현실과 그렇게 멀지도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노후를 걱정하고 그걸위해서 대비를 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낍니다. 5억모으기니 10억모으기니 하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그것 때문이지요. 그렇지 못할 때 자신의 노후가 살아도 사는게 아닐거라는 공포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을 이렇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는 공동체의 붕괴입니다. 예를 들어 집성촌에서 나고 자라서 늙어 죽는 사람의 삶을 생각해 봅시다. 그 사람은 평생을 그 공동체에서 살았으므로 노인이 되어서도 갑자기 지인들이 없어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죽는다고 해도 자신의 자식들도 어떻게든 그 공동체에서 살아갈 것을 믿습니다. 예를 들어 공부를 못하거나 신체가 불편하거나 성격상의 문제가 있어서 세상을 살아가기 어려울 것같은 자식이 있어도 어느 정도는 안심이 되는데 왜냐면 자기 자식처럼 돌보지는 않는다고 해도 친인척이며 마을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돌보아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공동체가 모두 깨어진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장애인 자식을 둔 부모들은 너나할 것없이 울면서 말합니다. 내 자식보다 하루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부모인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 도저히 혼자서 자식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디도 기댈곳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을 천국처럼 말할 생각은 없지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적 복지가 오히려 전보다 망가졌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족 공동체와 지역공동체가 붕괴된 상황에서 국가적 지원만 확대하면 결국 사람들은 그냥 노인을 어디 시설로 보내버려야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기 쉽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겁니다. 확실히 모든 사람이 그렇게 믿는다면 그리고 그런 상황을 개선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많은 노인들은 그냥 시설에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국가적으로도 낭비고 개인적으로 행복한 삶이 아닙니다. 


어떻게 선전을 하고 정당화를 하던 어떤 시설로 보내서 잊어버리는 행정은 결국 비극을 만듭니다. 왜냐면 우리는 모두 다 바쁘니까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돈은 더 많이 필요해지기 마련이고 아무리 시간이 많아도 언제나 시간은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지 않는 시설로 보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잊혀지기 쉽습니다. 잊혀진 사람들에게 언제까지 좋은 대접이 계속되겠습니까? 결국은 세금을 내거나 부양비를 내는 사람에게는 점점 더 비용이 많이 나가는 일이 되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노인들의 삶은 점점 더 열악해지기 쉽습니다. 


제가 일본에 살 때 우리 동네에는 묘지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런 곳은 혐오시설이라고 난리를 피우며 없애지 못해 안달이지만 나는 동네에 묘지가 있다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죽음을 잊지 않게 해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에 대비하게 해줍니다. 우리가 노인을 포함해서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모두에게 우리도 노인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현대생활은 이 당연한 것을 잊기 참 쉽게 만드는 쪽을 지향하는 것같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격리하고 멀리해서는 자신도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사는 일이 많은 것같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이렇게 살지 못한다는 것을 잊는 일이 많아 보입니다. 이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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