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
얼마전에 어머니가 집에 인테리어공사를 하셨다. 벽지와 바닥을 새로 하고 싱크대를 갈았으며 문을 수리하거나 교체했고 현관앞의 신발장도 바꿨으니 큰 공사를 하신 셈이다. 그런데 돈을 많이 들이고 고생도 많이 한 그 공사가 잡음도 많더니 결과도 영 신통찮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병원같달까. 게다가 벽지는 1년도 안되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주거문화가 너무 억압되어 있다. 즉 발전할 여지가 있는데 그걸 경제적 문화적 이유들이 억압해 왔다. 그걸 보여준 사건중의 하나가 이케아 진출이다. 우리나라에 이케아가 들어온 것은 2014년의 일이다. 들어올 때는 말도 참 많았지만 5년후 현재를 보면 가구 업계 전체가 크게 발전했다. 전체 시장규모가 2008년과 2017년을 비교하면 각각 7조원과 13조원으로 거의 두배가 성장한 것이다. 한국 이케아의 사장은 한국 이케아가 전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한 경우라고 말한다. 이걸 다시 말하면 한국 사람들이 원하는 가구 서비스가 있는데 그걸 한국 기업들이 제공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집이나 인테리어를 생각한다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조화다. 그걸 무시한다는 것은 마치 요리를 하는데 재료를 구하면 되었지 그걸 어떻게 합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실 10년전만 생각해 봐도 한국에는 이케아처럼 인테리어를 종합적으로 전시해 주는 곳이 별로 없었다. 다시 말해 진짜 집처럼 공부방이나 거실을 각종 가구로 꾸며놓고 이런게 어떠냐는 식으로 전시하는 곳이 없고 가구점에 가보면 그냥 침대가 죽 늘어놓아져 있거나 책상이 죽 늘어놓아져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래서는 인테리어가 종합적인 행위라는 것이 무시되고 만다. 즉 조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어떻게 작은 소품이 큰 돈을 아끼는 아이디어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작은 공간을 귀중하게 활용할 수 있을까같은 질문들이 무시되고 그냥 비싼 식탁, 비싼 침대, 비싼 책상이 좋은 것이라는 식이었던 것이다. 조화는 소비자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었다. 이게 요리문화라면 얼마나 천박한 요리문화인가. 요리의 완성품에 대한 레시피는 없고 그저 가마솥에 비싼 재료 집어넣고 끓이면 그게 좋은 요리라는 식이다.
상황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한국에서 업계 1위인 한샘은 이케아가 들어 온 이후에 오히려 성장했다. 요즘은 사방에 한샘매장이 있는데 그런 곳에 가보면 예를 들어 부엌은 이렇게 꾸미는 것이 어떻냐고 하면서 부엌을 실제 집처럼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집이 가지는 종합적 성격을 느끼게 되는데 사실 그 정도가 되어야 문화다운 문화가 아닐까? 그냥 책생은 책상대로 베란다는 베란다대로 벽지와 바닥은 각각이어서야 문화다운 문화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나는 우리 어머니가 집을 고쳐 놓은 것을 보면서 그 점을 새삼 강하게 느꼈다. 시공도 엉망이었지만 전체적인 조화가 무엇보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시공하는 사람도 집주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는 결과물이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주거문화가 억압되어져 온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집은 사람이 살기 위한 곳이라는 개념보다 집은 투자의 수단이라는 개념이 강했던 탓이 크다. 더 콕 집어 이야기하자면 아파트와 선분양제가 만악의 근원이다. 완성된 집을 소비자가 보고 사는 것도 아니고 아파트는 수천가구가 기본적으로 같은 내부를 가지고 있는 식으로 지어지니까 종합이니 뭐니 할 것도 없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아파트 설계도에 따라서 수만 수십만 아니 수백만 가구가 똑같이 지어진다. 나는 한국의 아파트 평면도를 보면서 놀란 적이 있다. 어쩌면 전국의 아파트들이 그렇게도 똑같은지 모른다. 물론 요즘은 이전과는 좀 다르게 지어진다. 베란다 확장이 거의 필수가 된 덕분에 소위 4베이 아파트가 대세다. 하지만 이전과 지금이 좀 다를 뿐 회사가 달라도 아파트 내부가 대부분 똑같은 것은 마찬가지다. 온 국민이 똑같은 옷을 입고 사는 나라와 우리나라는 비슷하다.
이렇게 다들 똑같이 지어진 집에 들어가도 개개인이 자기 집을 수리할 수 있다면 그래도 좀 좋을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기 개성이 들어날 것이고 서로 그것을 보면서 새로운 스타일을 모색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모색의 끝이 주거문화의 발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집은 돈벌이의 수단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개인적 리모델링이 적어도 이제까지는 그리 선호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고쳐진 집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으며 표준화된 집을 수정하는 것을 종종 수표에 낙서하는 것처럼 여겼다. 수천만원 들여서 리모델링한 집이라도 팔려고 내놓으면 그 가치를 시장은 알아주지 않았다. 어떤 때는 인기가 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리모델링도 전문가가 했어야 할 텐데 한국에서 그런 전문가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히려 불안한 것이다. 결국 시장가치로 보면 리모델링같은 걸 하는 사람이 바보였다.
이 모든 걸 다 합치면 집은 건설사가 다 똑같이 짓고 그걸 수리하고 바꾸는 것도 시장이 막았던 셈이다. 그러다 보니 관련 산업이 성장하지도 않아서 그런 시류에 저항하려고 하는 사람은 비싼 댓가를 치뤄야 한다. 그 좋은 예가 가구시장이었다.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정말 별 것도 아닌 저질의 가구들이 형편없이 진열되어 있고 그것들이 아주 높은 가격표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좀 괜찮은가 싶으면 70만원 백만원하는 식탁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마치 대를 물려가며 쓸 골동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에는 장롱이란 것을 사는 것도 보통이었는데 이건 집의 수납공간을 부실하게 만들어서 다시 말해서 집들이 저질이라서 그걸 가구를 사서 해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장롱은 요즘 퇴출되고 있다.
한국인은 요즘 서양집에 산다. 그리고 한국인에게 서양집은 아직도 낯설다. 우리는 본래 한옥에 살았고 서양집으로 옮겨 온 이후에 주거문화를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은 아직도 이 서양집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어떤 때는 너무 가난해서 그랬지만 돈이 좀 생긴후에도 전국을 아파트로 채우고 장식도 안하니 문화가 발전할 틈이 없었다.
그 결과가 우리 어머니다. 이것은 우리의 주거문화를 우리의 요리문화와 비교하면 그 점은 더 분명히 들어난다. 우리 어머니는 전문요리사도 아니고 요리학교에 다닌 적도 없지만 우리 어머니에게 등갈비 김치찌개를 만드는 법을 물어보면 요리사가 따로 없다. 말하자면 그런 건 상식인 것이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선조로부터 내려온 요리문화가 어머니에게 있다. 그런데 그런 우리 어머니에게 집의 가구며 리모델링에 대해 물어보면 솔직히 부실하기 짝이 없다. 이 땅에서 오래 사신 어머니에게 이 땅의 집이 낯설다. 집을 어떻게 지어야 하고 그걸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즉 집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배운 바가 별로 없다. 집은 그냥 전문가의 일이 되었다.
요리를 사람이 먹을 음식으로 생각하는게 아니라 화폐로 생각하여 그 맛에는 무관심하다면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을까? 요리문화없는 한국은 얼마나 비참할 것인가. 자랑스런 요리문화에 비하면 우리에게는 주거문화의 빈곤이 있다. 우리는 이때문에 불편하고 불행하며 돈은 많이 쓴다. 게다가 주거문화가 발전했다면 있을 수도 있었던 많은 일자리들도 가지지 못하고 산다. 경제난도 겪고 있는 셈이다. 만약 한국사람들이 전부 급식소 음식만 먹는다면 수많은 식당주인과 종업원과 요리사들은 모두 실직상태일 것이다. 주거문화의 빈곤속에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이 이것이다. 이래서 우리 어머니의 리모델링이 힘든 것이다. 주거문화를 발전시킨다는 말은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들, 이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댓가를 지불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싸고 좋은 주거에 살게 될 것이다. 우리 어머니처럼 돈만 들이고 결과는 마음에 들지 않는 집에 살게 되는게 아니라 말이다.
게다가 주거문화는 음식보다도 더욱 수입하기가 어렵다. 서양인과 우리는 생활문화가 다르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난방시스템인 온돌문화를 조상에게 물려받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주거문화를 황폐화시키고 우리의 것을 서양의 눈으로 본다. 내가 기억하는 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누군가가 항아리가 뒤집어져 있는 것을 보고 이 항아리는 위가 막혀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아리를 뒤집으니 이제 그 사람은 "어랍쇼. 이 항아리는 바닥도 없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우리의 전통을 서양의 눈으로 보면 이런 일이 생기기 쉽다.
한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다. 한옥의 방은 대개 작다. 그리고 가구가 단순하다. 뭐든지 자신의 물건은 전부 내 방안에 가지는 것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점에서 보면 한옥의 방은 가난한 방이다. 실제로도 물건을 소유하는 것에 있어서 과거와 지금의 우리는 물론 차이가 클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부 그 부유함때문만은 아니다. 한옥의 방은 정말 작은 것일까?
관점을 바꾸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티비방송을 보다보면 한국인을 기겁하게 만드는 장면이 있다. 그건 서양사람이 신발을 벗지 않고 집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침대위로 몸을 던지면서까지 신발을 신고 있는 장면이 나올 때다. 온돌문화가 없는 서양인에게 바닥이란 집안이건 바깥이건 우리가 몸을 접촉시킬 부분이 아니다. 그러니까 서양인에게 있어서 집의 원형이란 거대한 텐트같은 것이다. 그 텐트는 내 물건을 전부 가지고 있으며 여기저기에 침대자리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방바닥도 어떤 의미로는 바깥의 풀밭이나 마찬가지다. 소위 스튜디오 아파트라는 것이 서양주거의 본질이 아닐까?
그럼 한옥은 어떤가. 한옥에 있어서 방이란 곧 온돌이다. 그 바닥은 우리가 신발신고 들어서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살을 부비는 곳이다. 그래서 한옥의 원형은 온돌기능을 가진 침대옆에 창고가 따로 붙어있는 미니주택으로 봐야 한다. 데운 바닥위를 가구로 덮는 것은 서양식으로는 침대위에 옷장을 올려놓는 것같은 기괴한 낭비다. 이렇게 보면 여러개의 방을 가진 한옥이란 결국 작은 온돌기능 미니 주택을 대청마루나 쪽마루로 연결시킨 집인 것이다. 겨울에는 그 방들은 정말 미니주택이 되고 여름이면 문들이 열려서 그 방들이 하나의 공간으로 변신하기도 하는 것이 한옥이다.
이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렇다고 할 때 우리가 그 크기를 서로 비교해야 하는 것은 한옥의 방과 서양침대일까 아니면 서양의 방크기일까. 현대의 온돌집은 그러니까 대청마루는 물론 중앙의 중정바닥까지 온돌을 깐 한옥같은 것이 아닐까? 이래놓고 난방비가 많이 나온다고?
우리는 서양기준으로 생각없이 침대와 옷장과 책상을 넣을 크기로 공간을 잘라 방을 만든다. 물론 바닥난방을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만들어 진 방이 편리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서양식으로 번역하면 킹사이즈 침대 다섯개정도 되는 침대를 마련한 후에 그 위에 너저분하게 온갖 물건을 늘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단순히 난방비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공간을 그렇게 자르기 때문에 사생활이 없고 단순하여 쓸모가 없는 집이 되는거 아닐까? 우리는 왜 집에 안있고 독서실이나 카페에 가서 공부를 하는가? 우리나라의 거실에는 흔히 한쪽에 티비가 있고 반대쪽 끝에 소파가 있다. 거실이 엄청 넓어도 그렇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티비 앞 바닥에 앉아서 티비를 본다. 이게 당연한 공간의 활용일까?
나는 한옥으로 돌아가자는 말도 아니고 지금의 한국 집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공간의 분할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고민한 끝에 지금처럼 살고 있냐고 묻는 것뿐이다. 그런 고민이 없고 그저 아파트 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강남의 아파트는 평당 얼마인지만 묻는 것에 집중하는 나라. 그 값이 얼마가 되었든 이런 나라는 빈곤한 나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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