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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미국과 중국의 충돌 그리고 시대적 과제

by 격암(강국진) 2019. 6. 18.

2019.6.18

요즘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에 대해 뉴스들이 많습니다. 미국과 중국은 서로가 불공평하게 군다고 말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 문제가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경제나 공평의 기준이라는 차원에서 이것을 바라보기 보다는 미국과 중국의 문화적 설득력이라는 차원에서 그리고 한국이나 세계가 이 시점에서 가지는 과제라는 입장에서 이걸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합니다. 결국 중국도 미국도 세계인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며 지금은 문화와 비전이 곧 경제적 경쟁력이기도 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미국의 설득력도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중국의 설득력보다 큽니다. 지금 이 순간 미국 주도의 질서에 불만이 있다고 해서 그걸 중국 주도의 세계로 바꾸겠다고 하는 사람은 중국인들을 제외하면 세계적으로 소수에 그칠 것입니다. 그 핵심적 이유는 서로간의 믿음이고 문화적 설득력과 친숙성입니다. 

 

미국은 자기 자신을 법을 지키는 한도내에서는 평등과 자유를 약속하는 나라로 말합니다. 원칙적으로 미국의 시스템은 정치를 윤리와 분리합니다. 미국은 기독교인들이 세운 나라지만 종교의 자유를 천명합니다. 법은 윤리와 같지 않고 기껏해야 윤리의 최소한의 부분입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에게 비윤리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도 공화국의 법시스템 안에서 법을 어기지 않은 시민으로 떳떳히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법을 어기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국가는 윤리적 판단을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가지는 이러한 개방성은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종교와 문화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같은 사회안에서 공존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지배적 문화를 가지는 부유층과 이국적 문화를 가지는 이민자들이 큰 마찰 없이 같은 나라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부유층들이 기독교신자들이라도 그들은 유교문화를 가진 중국인들이나 힌두교를 믿는 인도 출신 사람들과 같은 나라에서 공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윤리차원의 문제를 넘어 경제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민의 나라라는 미국이 강대국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이 포용력이 크게 작동했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이란 이민자도 박해받지 않고 성공할 수 있다는 약속이었죠.

 

자연히 미국 사람에게 있어서 준법정신만큼 강조되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미국 사람은 한국 사람의 눈으로는 지나치리만큼 모든 것을 법정에서 다투려고 하며 일단 결정이 내려지면 법의 결정에 승복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유와 평등을 지키는 사법시스템에 대한 믿음은 미국 이라는 사회를 지키는 가장 큰 기둥입니다. 

 

이러한 미국 사회의 특징은 이제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서 대개 올바른 국가를 만드는 당연한 지향점내지 이상향으로 여겨집니다. 즉 미국의 실제 현실이 그와 같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향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일본 중국을 포함하는 현대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국민의 대표가 법에 따라서 통치하는 공화국을 천명하며 이런 평등과 자유의 시스템을 공식적으로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하면 여기에는 중요한 가정내지는 믿음들이 있습니다. 일단 법치 국가에서는 법이 전부같아 보이는 착시가 존재하기 쉽습니다. 법만 중요하고 법이 모든 것을 이뤄나가는 것같습니다. 그래서 법부터 바꿔야 할 것같습니다. 하지만 법시스템이란 결국 윤리와 상식 혹은 문화라는 틀안의 작은 게임일 뿐입니다. 법을 바꾸는 것은 물론 여론을 누가 움직이는지, 선거를 누가 이길 것인지를, 심지어 경제적 승자조차도 윤리와 상식과 문화가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누구를 믿을 것인가를 문화적 영향력이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법과 윤리를 분리하는 공화국 시스템에서는 윤리와 상식과 문화의 힘과 가치가 망각되기 쉽습니다. 그냥 각자의 자유라고 말해지니까요. 하지만 독일이나 미국의 법시스템을 그대로 복사해서 말레이지아나 중국에서 실시하면 그 나라가 독일이나 미국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 차이는 분명 상식이고 문화며 윤리입니다. 

 

사람들은 법만 보다가 윤리나 가치의 문제에 대해 둔감해 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 더 높은 빌딩이 들어서고 더 부자들이 많이 살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대신 한국에 지금 사는 사람들이 전부 다른 나라로 이주하고 대신에 외국인들이 한국에 살게 된다면 그것을 발전이라고 부를 한국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건 매국이나 망국이죠. 하지만 재개발사업에서 원주민들을 이주시키고 거기에 더 높은 빌딩을 세우는 것을 발전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들은 종종 그런 개발에 반대하는 원주민들을 답답한 사람, 사회의 발전에 방해가 되는 사람으로 여기기 조차 합니다. 이 모든 일이 합법적이니까 자신들은 잘못하는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다른 누군가에게는 깊은 의미를 가진 것의 가치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남이 자신에게 가치있는 것을 파괴하는 것에 대해서는 분노합니다. 

 

이렇게 소중한 가치와 윤리의 문제에 대해 혹은 정의의 문제에 대해 공화국이 가지는 공식적인 태도는 이렇습니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공화국속에서 전체 공동체의 문화나 상식은 그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도록 저절로 유지되고 발전되어 갈거라는 것입니다. 바로 자유의 힘에 의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믿음이지 과학이나 증명된 사실이 아닙니다. 게다가 이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는 사실일 수 있어도 사회 내부의 충돌이 심각해 지는 상황에서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여러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지나친 자유가 방종이 되어 그 사회의 근원적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따라서 공화국에 관련된 이런 기본적 믿음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어쩌면 공화국 시스템이란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과 문화적 힘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게임의 법칙에 불과한 것일 수 있습니다. 여기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이 사람이 걸핏하면 남자답게 주먹으로 승부를 내자고 제안하는 이유는 남자는 힘으로 승부를 내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믿을 뿐만 아니라 싸움을 하면 자신이 이길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이 맞으니까 네 생각을 고치라고 말하는 대신에 너는 네 생각이 있고 나는 내 생각이 있다. 그건 그대로 두고 우리 남자답게 주먹으로 승부를 내서 이기는 사람의 뜻대로 하기로 하자는 것은 주먹이 센 사람이 택할 수 있는 더 교묘한 방법입니다. 싸움이 약한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것같고 공평해 보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왜 미적분 문제풀기나 뜨개질이나 노래가 아니라 싸움으로 결판을 내야 할까요? 정치를 윤리와 분리함으로해서 공화국 시스템은 윤리의 문제를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대결의 문제로 만들었습니다. 얼핏보면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도 평등하게 살수 있는 사회같지만 그 사회의 기득권층이 기독교신자들이라면 결국 권력에 쉽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은 기독교신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선거와 여론전에서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시스템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말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강한 사람이 이기는게 아니라 이기는 게임을 하는 사람이 강한 것입니다. 

 

공화국 시스템의 두번째 문제는 윤리와 정치를 분리함으로 해서 당대에는 어떨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바뀜에 따라 전체적으로 가치관이 하향평준화될 수 있고 사회적 통합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회적 통합의 힘을 발휘해 왔던 주류문화가 쇠락하고 시대에 뒤진 것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당신의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 세대가 가지는 시대적 과제는 무엇입니까? 

 

자유롭고 부유한 국가에서는 이런 질문에 답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가난한 시기에는 가난의 극복이 정의이고 인권향상입니다. 사람들이 굶어죽는 상황에서는 모두가 쌀밥에 고깃국 먹을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정의이고 가치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이상으로 가난을 극복하게 되면 가치관을 그저 개인의 자유에 맡겨 두는 사회에서 이기심과 탐욕이 무제한으로 불타오르지 않을까요? 그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소비하며 더 많은 권력을 누리는 것이야 말로 삶의 의미이며 이제 우리 세대가 가지는 시대적 과제따위는 아무도 말할 수 없는 거 아닐까요?

 

제가 처음 외국에 나갔던 1990년에 저는 영국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감탄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의 대학가 에서는 국가나 민족같은 단어가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대학생들은 자기의 행복 이전에 국가와 민족의 행복을 위해 뭘 할 수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 많았다는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 대학생들의 사치는 비판받았습니다. 그런데 영국에 가니까 그런 것은 없고 모두가 자신의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행복과 소비에 대한 고민만 하더군요. 젊었던 저는, 그리고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단어에 짓눌렸던 저는 그게 참 부담감없어서 부러웠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생각이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은 좋지만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 실존적 위기에 빠져 있는 것같습니다. 부유해진 한국에서 사람들은 삶의 목표를 잃었고 이제 인생의 목표가 아파트 한채나 고급차 모는 것이 됩니다. 그게 쉬운 것도 아니지만 허무하니까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물질적으로는 더 풍요로워졌지만 심리적으로는 오히려 더 여유가 없어졌습니다. 다원주의는 본래 지역적인 나에 갖혀 있지 말자고 하는 해방일 수 있었지만 어떤 의미로 모든 것을 상대주의로 만들어서 결국 극단적으로 작은 나, 그저 소유하고 소비하는 나안에 갇혀있게 만들기도 합니다. 쾌락이외에 현실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그것은 사회의 윤리를 타락하게 만들고 창의성을 죽이고 급기야는 사회의 구심력을 약화시킬 것입니다. 어쩌면 미국이 끝없이 적을 찾는 이유도 이때문일지 모릅니다. 적이 없이 사회가 유지되기에는 미국 사회가 너무 윤리적으로 제약이 없고 이미 너무 부유해졌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최고 부자인 제프 베조스나 엘론 머스크같은 사람들이 우주개발이나 화성이주같은 엄청난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도 미국 사회가 비전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같은 부자들이 전재산 기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이들이 미국 시스템의 위기를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국도 더이상 개방적이지 않습니다. 트럼프의 공약은 멕시코국경에 벽을 세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국과의 분쟁속에서 이민자나 유학생들의 불안은 증가하고 있습니다. 사실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미국가는 비행기는 가장 타기 불편한 비행기가 되버렸습니다. 

 

돌아보면 자유와 평등을 약속했던 미국의 진실된 힘은 문화적 자신감이었고 그 문화적 자신감에 적어도 크게 기여한 것은 세계 대전 이후에 유럽의 지식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한 것이었습니다. 문화적 주도권을 뺏기지 않을 수 있는 문화적 힘이 있었기에 미국은 개방적일 수 있었습니다. 싸움을 잘하는 남자가 뭐든지 남자답게 주먹으로 해결하자고 말하는 것처럼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공화국 시스템의 진실은 그것은 주류세력의 문화적 경쟁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만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즉 경제던 국방이든 그것을 키우는 진정한 힘은 정신적인 힘인 문화적 설득력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걸 넘어서서 발전하려고 하면 사회가 내적인 분열을 해서 위기에 빠져드니까요. 

 

하지만 과연 미국의 문화적 우월성이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21세기에 들어서자 미국의 대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교수는 백인 교수인데 대학원생은 아시아인이나 인도인 같은 유색인종인 경우였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영어보다 스페인어를 더 많이 쓰게 됩니다. 중국의 부상으로 미국에 중국 유학생들이 많아진 것은 물론 전세계의 학문 공동체가 중국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는 창의성을 잃어버렸고 미국의 의료보험제도는 크게 비판받았습니다. 오늘날 트럼프의 등장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자유로운 경쟁속에서는 문화적 주도권을 지킬 수 없어진 미국 서구 문화 세력이 이제 더이상은 미국이 개방적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시스템이 가지는 포용력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겁니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이 더 나쁩니다. 공식적으로 어떤 말을 하건 중국은 실질적으로 시진핑을 황제로 하는 봉건국가나 다름없습니다. 법위에 시진핑이 있고 중국은 미국은 물론 한국의 문화컨텐츠에 대해서도 제약을 가합니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은 물론 네이버나 다음도 중국인들에게는 접근 불가입니다. 중국은 사상통치의 나라입니다. 그들은 많은 유학생을 미국으로 보내면서도 미국의 문화가 중국에 들어올 수 없도록 인터넷을 봉쇄합니다. 한자를 쓰는 중국은 서장같은 지역에서는 여전히 문맹률이 37%에 달할 정도라고 합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비현대적인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대해서 주변국가들은 불안합니다. 그들은 사드 보복같은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공기오염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가볍게 부인하면서도 자신들이 세계로부터는 공평하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니까요.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게 중국은 미국보다도 훨씬 낯선 나라입니다.  

 

이 모든 것을 돌아보면 우리는 다시 한번 21세기가 문화가 곧 국력인 시대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미국과 중국이 보호주의로 충돌하고 있지만 자유와 평등이라는 원칙에서 뒤로 물러나기에는 오늘날의 세상이 치뤄야 할 댓가가 너무 큽니다. 세계는 미국 편을 들어서 중국을 극단적으로 압박하지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편을 들어서 미국을 공격하고 나아가 세계가 중국주도의 세계가 되도록 허락하지도 않을 겁니다. 바로 자유와 평등을 위해섭니다. 

 

모든 것을 자유와 평등이라는 원칙에서 보면 남는 것은 문화적 사상적 경쟁뿐입니다. 물리적 전면전은 핵개발이후 불가능해졌습니다. 중국처럼 폐쇄로 자국을 보호하면서 세계 경제 안에서 활동하겠다는 태도를 유지하면서 세계의 패권국가가 되려고 한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됩니다. 그러니까 미국은 스스로가 아시아 국가처럼 변하고 남미국가처럼 변해도 그걸 허용해야 하고, 중국은 자유와 평등 사상의 유입으로 사회가 불안해지고 심지어 분리독립운동이 일어나도 그걸 허용해야 합니다. 그것에 대해 저항하는 노력은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런 노력은 어느 정도 효과를 보겠지만 결국은 크게 보면 자유와 평등의 원칙속에서 문화적 경쟁이 승자를 만든다는 원칙에서 물러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는 전진할 것입니다. 

 

다행히 한국은 동서의 문명이 만나서 성공을 이뤄낸 드문 경우입니다. 한국은 불안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을 정착시켰고 동시에 경제적 성공도 이뤄냈습니다. 한국은 특히 오늘날 문화적 영향력을 크게 자랑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인구나 경제규모를 생각하면 대단한 성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가수나 영화, 드라마의 성공에 대해서 우리보다 훨씬 큰 경제규모나 인구를 가진 중국과 일본 사람들이 놀라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도 미국과 비슷한 위기의 징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새 인생의 의미같은 거 안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베니 워마드니 하는 극단적인 사이트가 대중적 영향력을 넓히는 근본적 이유는 사람들이 이기주의나 쾌락을 제외하고는 인생의 의미를 찾기 힘들어 진 것에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법과 시스템을 가지고 싸우는데 몰두하면서 그걸 점점 더 복잡하게 만들고 더 세세하게 사람들을 제약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게 자유와 평등이라는 원칙을 파괴해서 공화국 시스템이 가지는 기본적 경쟁력을 파괴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외국인들이 들어와서 한국 사회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문화적 알력으로 나아가 분쟁을 만들어 내면 치뤄야 할 비용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날로 복잡해지기만 하는 시스템 문제의 해결이야 말로 우리 시대가 이뤄내야 할 시대적 과제일지 모릅니다. 법이 복잡해지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공화국 시스템이 실패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않다고 느끼게 되니까요. 예를 들자면 많은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PC) 사는 것에 대해서 피곤해하고 스스로를 위선자로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세상은 더 연결되고 더 투명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순은 증대되고 있으며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는 것같은 보호주의의 충돌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반복될 가능성이 큽니다. 사회적 구심력의 파괴를 방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폐쇄주의로 가서 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봉건시대를 공화국의 시대가 이어받아 문제를 해결했듯이 다시 한번 근본부터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할지 모릅니다. 그 목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평화롭고 자유롭게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세계 국가라고 할만한 지극히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세계로 이제까지 말했던 공화국의 시스템을 능가하는 시스템입니다. 

 

그게 뭔지를 제가 여기서 단언할 수는 당연히 없습니다. 다만 저는 저의 오래된 생각에 대해 한가지 이야기만 더 하고 이 글을 마칠까 합니다. 경제가 복잡해짐에 따라 세상에는 법인이라는 것이 출현했습니다. 법인의 기본적 역할은 그 회사에 관여된 사람이 무한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삼성이 나쁜 짓을 해도 삼성이 처벌을 받을 지언정 주주가 구속되지 않고 삼성이 파산해도 그 빚을 주주들이 갚지 않습니다. 다만 주식을 통해 발휘할 수 있는 권리만 사라질 뿐입니다. 이 문제를 가만히 보면 결국 복잡해진 경제환경속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예측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유한한 것으로 만들어 경제활동을 촉진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시대적 과제를 달성해 내는 새로운 사회란 어쩌면 개인이나 국민이라는 개념의 수정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공화국에서 개인은 평등하고 자유롭지만 그 개인은 무한책임을 지는 존재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공화국의 법과 경제시스템이란 윤리와 문화라는 배경위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게임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게 게임이라면 그 게임은 쉽게 빠져 나올 수도 없고 그 게임에 실패하면 완전히 인생에 실패하게 되는 게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책임이 무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작은 단위에서 그와는 다른 게임들을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축구경기에 진다고 사회적 패배자가 되는 것은 아니죠. 축구경기라는 게임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다시 그냥 나로 돌아옵니다. 온라인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저는 콘서트장에 가거나 해수욕장에 가는 것도 일종의 게임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식당에서 왕처럼 대접받는 사람도 일종의 게임에 참가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깥 세상과는 다른 규칙이 적용되는 세상입니다. 바깥에서 왕이 아닌 사람도 안에서는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게임안에서 그 규칙에 따라 살고 만약 그 규칙을 지키지 못하면 그 게임에서 강제로 퇴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게임을 만들고 참여할 것인가는 기본적으로는 내 자유입니다. 극단적으로 비윤리적인 게임이 아니라면 게임은 자유입니다. 새디스트-매조키스트 게임조차 남이보기에 역겨울수는 있어도 어느 한도내에서는 본인들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이런 자유를 누리고 안심을 하는 이유는 각각의 게임들은 분명한 경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중목욕탕안에서는 남들앞에서 누드로 다녀도 됩니다. 하지만 거리에서는 안되죠. 콘서트장이나 클럽에서는 미친 것처럼 소리질러도 수업시간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식당에서 종업원에게 왕처럼 대접받는 사람이 식당 바깥에서도 종업원보다 왕처럼 높은 신분인 것은 아닙니다. 때로 그 관계는 역전됩니다. 그 손님은 이발사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식당종업원이 이발소에 손님으로 가면 이제 종업원이 왕이되고 이발사가 하인의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그 차이를 알고 있습니다. 멀티잡이 흔해진 사회에서 이제 우리의 정체성과 관계는 수시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는 바로 이 게임의 유저개념으로 공화국의 개인의 개념을 대체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바로 유한한 권리와 유한한 책임만을 지는 존재로 말입니다. 이 시스템에서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개의 유저 정체성을 가질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이 하나의 유저 정체성을 동시 운영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사이버 인격이 하나 분의 권리와 의무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아직 너무 이른 생각일지라도 시대적 과제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첫번째 시대적 과제는 시대적 과제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삶을 무의미한 소비와 쾌락으로 소급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한 사이버 공화국을 만드는 것이 시대적 과제일 수도 있고, 분열과 충돌을 피해서 화성이나 달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도 시대적 과제일 수 있겠지요. 혹은 에너지 난이나 환경문제로 우리가 다시 지극히 가난해 질 것이니 그 가난을 극복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인간이란 태어나서 취직걱정하다가 노후준비걱정하다가 적당히 먹고 운동하고 늙어죽는 것이 전부라는 식의 이야기가 진짜로 전부여서는 안될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건 우리를 너무나 불쌍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도살되기 위한 닭이나 돼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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