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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한국인의 정체성

by 격암(강국진) 2019. 8. 20.

2019.8.20

몇일전에 KBS에서 방영한 헤로니모를 찾아서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했습니다. 한일합방직전에 멕시코 애니깽 농장으로 갔다가 국제미아가 된 조선인들의 후예중 하나인 임은조씨의 삶을 보여주는 이 다큐를 보면서 나는 무엇이 한국인을 한국으로 만드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왜 한국인은 자신의 나라를 지켜왔을까요? 왜 일제시대에 일본인으로 녹아 사라지지 않았고, 왜 지구반대편까지 가서 살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했을까요? 한국인답다라는 것은 뭘 말하는 것일까요?

 

한국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한국이 아닌 것 즉 외국에 대해서 안다는 말과 거의 같은 말입니다. 한국답지 않은 것을 모르면 한국인이라도 한국답다는 것이 뭔지 모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일찌기 루스 베네딕트는 1946년에 출간한 그녀의 책 국화와 칼에서 일본 문화의 핵심을 은혜를 갚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신의의 정신으로 들었습니다. 저는 일본에서 10년을 살았는데 그녀의 말은 역사적으로나 현시대적으로나 여전히 옳은 말이라고 느낍니다. 일본인은 은혜를 입은 것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뒤집어 말하면 은혜를 입고 폐를 끼치는 것 혹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을 지나칠 정도로 두려워합니다. 은혜갚음은 종종 불가능할정도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하관계에서 발생한 은혜는 실제로는 죽을 때까지 갚아야 하고 그 은혜 갚음은 어떤 가치보다 위에 있습니다. 일본의 47로닌 이야기는 모시던 주군이 모욕을 당하고 죽자.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자신의 가족도 희생시키고 목숨까지 바치는 사무라이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신의의 문화는 언뜻 들으면 좋은 것같고 당연한 것같지만 결국 보수적이고 탈법적인 문화입니다. 힘들었을 때 취직시켜주었다거나 젊어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를 했다면 이 은혜는 실질적으로 죽을 때까지 다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은혜갚음이란 죽을 때까지의 충성이고 그 과정에서 법을 어기는 일이 있어도 기꺼이 그렇게 하는 것이 신의의 정신이라고 말하기 쉬운 것이죠. 사실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으니 은혜를 갚고 싶어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은혜갚음이 공공의 의무와 충돌한다면 우리는 뭘 택해야 할까요? 여기서 은혜갚음의 미덕이 가지는 현실적인 그림자가 나타납니다. 

 

일제시대를 거치며 이런 정신은 한국에도 많이 파고들었습니다. 우리가 통상 친일세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이렇습니다. 나라를 팔아먹을 지라도 입었던 은혜를 저버려서는 안된다는 식이죠. 잘 나가는 사람들끼리 인연을 맺고 서로를 탈법적이고 비윤리적으로 돕고 사는 것도 정이고 의리이며 갚아야 할 은혜라며 포장하는 것이 이런 사고 방식입니다. 결국 보수적 기득권층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일본은 1867년의 메이지유신 이전만 해도 형식적으로 허수아비 천황이 있고 전국을 지배하는 쇼군이 있었을 뿐 사실상 전국이 번으로 구분되어 각자 산적두목처럼 지배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막부시절에는 번주가 상식에 어긋나는 짓을 해도 농민은 그걸 쇼군에게 고소할 수 없었습니다. 설사 번주가 잘못한게 맞다고 해도 그런 일을 윗사람에게 고발하는 것은 번주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기 때문에 따로 처벌받아야 한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니까 윗사람이 무슨 일을 하건 그 사람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는 것은 나쁜 일이라는 겁니다. 

 

메이지 유신이후라고 해도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일본을 하나로 묶은 것은 기독교나 유교같이 추상화된 가치체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천황을 살아있는 신으로 모시고 일본의 모든 주권은 천황에게 있다는 사상을 믿는, 천황중심의 통일이었죠. 이렇게 보면 일본은 정치적으로는 19세기 말이 되야 겨우 왕정에 제대로 도달했다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조선은 전혀 달랐습니다. 유교는 물론 봉건제 시절의 사상입니다만 기독교 같은 종교가 단순한 부족종교, 기복종교에서 보다 추상적인 보편종교로 발달해 가면서 민족의 경계를 넘어 큰 포용성을 가지게 되듯이 조선의 유교는 더이상 왕의 통치방식이랄 수 없는 사상이었습니다. 

 

조선에 대한 가장 큰 오해중의 하나가 바로 조선이 왕국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조선이 왕국이 아니라고 하면 그것도 나름 문제겠지만 저는 제대로 조선을 보기 위해서는 일단 조선이 왕국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나서 조선을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왕조실록의 존재입니다. 전세계 어디에도 없는 방대한 기록을 조선은 남겼습니다. 그런데 정보가 곧 권력이다라는 말을 아십니까? 사관제도의 존재는 단순하게 아 우리의 전통문화는 좀 특이하군이라고 할 문제가 아닙니다. 조선의 사관제도가 얼마나 특이한가 하면 현대국가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대통령의 말을 누군가가 따라다니면서 전부 기록하는 반면에 야당정치인은 자유롭게 비밀스러운 활동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있습니까? 사관이 있던 조선에서 그럼 누가 조선의 관료들을 따라다니면서 그들의 행동을 기록했습니까? 

 

조선을 보면 왕의 정보는 다 공개되고 조선의 신하들은 비밀을 가지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게 왕국입니까? 이게 왕이 모든 권리를 가지는 나라입니까?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권력은 정보에서 나옵니다. 신하가 왕을 따르는 것은 기본적으로 왕은 신하가 모르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왕이 몇명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지 몰라야 신하가 반란을 꿈꾸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조선을 보면 왕은 펼쳐놓은 책처럼 투명합니다. 어느 신하보다 더 투명합니다. 반면에 신하에게는 사관이 쫒아다니지 않습니다. 

 

정보의 중요성을 조선시대라고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지도같은 걸 제작하고 배포하는 것을 국가가 금지하지요. 알면서도 왕의 정보를 전부 기록하려고 합니다. 이런 나라는 왕국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나라의 역사를 보면서 모든 걸 왕을 중심으로 이해해서는 왕이 무능했다, 왕이 나약했다, 신하들이 갈라져 서로 싸우는 것을 보니 분열을 좋아하는 민족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조선을 왕국으로 보는 것이 만든 착시입니다. 강력하고 독재적인 왕권밑에 분열이 왜 있겠습니까? 현대에서도 북한에서는 독재속에 야당 여당 안싸우겠죠. 그럼 북한보다 남한 사람들이 분열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까? 징기스칸 같은 과거의 독재군주보다 현대의 대통령이 행동을 마구 못하는 것이 징기스칸이 호쾌한 사람인 반면 현대의 정치인들이 유약한 사람이라서 입니까? 메이지 유신이후 제국화된 일본이 식민지사관으로 조선을 보면서 이러니 저러니 하는것은 웃기는 겁니다. 

 

정리하자면 일본은 세계대전에 패망하고 평화헌법이 들어서기 전까지 보편적 윤리라는 측면에서 세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은혜입은 것을 갚지 못하면 인간된 도리를 다 하지 못한다는 신의와 충성의 문화만 있었죠. 메이지 유신으로 겨우 천황이라는 인간에게 충성하는 전국적 규모의 국민통합 문화에 도달한 겁니다. 

 

이에 비하면 조선은 극단적으로 달랐습니다. 조선은 처음부터 중앙이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는 나라였습니다. 조선은 왕도 유교적 이념을 거부할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이미 5백년전의 조선이 보편적 사상과 윤리의 나라였던 겁니다. 그래서 번주가 수청들라고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일본에서 죽어마땅한 일이지만 조선에서는 변사또에게 춘향이가 수청드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말하는 춘향전같은 이야기가 있었던 겁니다. 

 

한국은 민주주의가 뿌리 내릴 준비가 되어있던 나라였습니다. 사회가 인간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넘어선 보편윤리, 보편법칙의 지배를 받을 때 개인은 더이상 타인에게 종속되기를 멈춥니다. 왜냐면 인간은 누구나 계몽될 수 있고 배울 수 있으니까요.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니까요. 

 

조선에도 신분제가 있었고 억압이 있었지만 조선인들은 양반은 물론 나랏님도 얼마든지 욕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인간을 넘어서 있는 도리와 진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양반도 쌍놈이 공자님 말씀을 말하면 공자를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왕보다 공자나 유교적 진리가 더 높은 겁니다. 

 

한국인의 특징중의 하나가 바로 이 보편성, 사상성입니다. 한국인은 보편적 진리와 사상을 배우려고 합니다. 기록을 소중히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굴종하는 것을 매우 기분나빠합니다. 배움앞에서 인간은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조선인들에게 천황을 부처님이나 하나님처럼 여기고 굴종하라고 하면 납득이 안되는 겁니다. 조선의 문화는 백성이 관리나 왕에게 충성과 신의를 지키는 것이 전부라는 식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문화는 예수님과 부처님을 나란히 놓고 같이 기도하기도 하는 일본의 신도와는 달리 다른 관념적이고 추상적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조선인은 진리를 깨치기를 원합니다. 

 

일본이 조선을 삼켰지만 소화하지 못했던 것은 이런 문화적 특성때문이었을 겁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저는 만약 조선이 일본을 삼켰다면 일본인들은 훨씬 더 쉽게 조선화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증거도 어느 정도 있습니다. 임진왜란때 왜장을 놀라게 한 것이 의병이었다고 하죠. 일본사람들의 마음은 일단 적장이 무너지면 그쪽 백성들은 즉각 편을 바꿔서 새로운 지배자에게 충성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입니다.  일본과 한국은 다릅니다. 조선과 한국은 지도자 한명이 쓰러진다고 국민들이 쓰러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와 법칙에 대한 믿음에 충성하기 때문입니다. 조선과 대한민국에서는 외적이 쳐들어 오면 의병이 일어납니다. 민주적인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인이나 그들의 문화에 빠진 토착왜구들은 이런게 이해가 안되는 겁니다. 촛불시위가 일어나면 그저 누가 돈을 뿌려서 이렇다고만 생각하죠. 

 

하지만 보편성과 사상성을 하나의 특징이라고 지적하면 이것은 한국인의 특징의 절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특징이지요. 이것이 전부라면 유교적 국가였던 조선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 이르는 두 나라가 전혀 다른 나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래 불교가 강했던 한반도에 이렇게 많은 기독교도가 생겼으니 나라가 완전히 달라야 할 것입니다. 

 

보편윤리를 좋아하는 한국인에게는 그것을 능가하는 문화적 특징이 있습니다. 한국인은 부모의 정 특히 어머니의 정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한국인이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그리는 이상향은 바로 그 부모의 정속에서 화목하게 살아가는 가족이 있는 곳입니다. 한국인이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란 바로 이 가족이고 부모의 품입니다. 엄마의 품입니다. 

 

보편적 원칙을 강조하던 조선에서도 사람들이 사회적 규칙을 어기는 것에 대해 인정하는 한가지 이유는 바로 부모 자식간의 정이었습니다. 자식이나 부모를 위해서 사회적 규칙을 어기는 일은 비록 잘한 일로 여길 수는 없지만 윤리적으로는 이해될 수 있다는 겁니다. 현대 한국의 막장드라마에서도 연일 부모가 나와서 내가 자식을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다면서 자식핑게를 대고 저지른 온갖 비리에 대한 변명을 하곤 합니다. 가만히 보면 그게 아니라도 한국 드라마의 상당 부분이 가족관계안에서 벌어지는 마찰에 대한 것입니다.  

 

실제로도 한국 사회가 가진 비리의 근원은 따지고 보면 결국 가족과 세습문제입니다. 삼성이나 현대같은 거대한 일류 주식회사가 봉건적인 세습을 당연시 합니다. 애플이나 도요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자식이 혈통으로 내가 애플의 총수가 되겠다는 주장을 하면 미국 사람은 웃지도 않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자신이 쓸 수 있는 이상으로 돈이 있어도 자식에게 물려줘야 한다면서 더 많은 재산을 쌓아올리려고 합니다. 박근혜 탄핵때도 문제가 크게 불거졌던 부분이 바로 최순실이 그녀의 딸 정유라를 위한다고 행한 일들이었죠. 현실막장드라마였습니다. 

 

한국 사람은 누구나 아는 군사부일체란 말은 왕과 스승과 부모가 같다라는 말입니다. 유교적 격언같지만 이 말은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 아닙니다. 조선시대의 이율곡이 비슷한 말을 한 것을 어원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은 조선의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유교도 조선에 들어와서 조선화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부모관계를 강하게 여기는 문화의 연장에서 스승을 모시고 왕을 모시는 것을 설명했다는 겁니다. 부모 자식관계가 강한 나라에서 좋은 왕과 좋은 스승이란 좋은 부모와 같다고 하는 설명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겠죠. 

 

한국만큼 족보를 소중히 여겨서 몇십대조 선조까지 따지는 나라는 정말 없습니다. 가족을 강조하는 유태인보다 한국인이 훨씬 더 지독합니다. 아마 일본을 한국이 삼켜서 일본인들에게 창씨 개명하라고 하면 별로 거부감이 없었을 겁니다. 사실 외국사람들은 자신의 성을 아주 근래에 맘대로 만들었으니까요. 다나카라는 일본성은 밭의 한가운데라는 뜻이고 포스트만이라는 미국성은 뒷문에 살던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전체 국민중 절반이상은 왕가 후손인 한국과는 크게 다릅니다. 김씨, 이씨, 박씨가 모두 왕족아닙니까. 

 

현대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효의 문화가 좋은 점만 가진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결국 보편질서를 문란하게 만드는 사적인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편성의 함정에만 빠져서 이것의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일단 오늘날의 부유한 한국을 만든 것도 이 효의 문화였습니다. 한국전쟁 직후에 한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 나라치고 부모가 굶어도 자식은 꼭 학교에 보낸다는 나라가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어떻게 해서든 성공시키려고 하고 그 자식도 부모에 대해 강한 책임감을 느끼는 나라가 없습니다. 자식의 학비를 벌기 위해서라면 파출부일이건 식당식모일이건 기꺼이 한다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게 한국이 거의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20세기에 후진국에서 선진국까지 올라온 나라가 된 핵심적 이유입니다. 가족윤리가 우리를 구원한 겁니다. 

 

박정희, 이승만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지도자가 세계 어느 후진국에 가도 그 나라를 한국처럼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그건 사실과 아주 거리가 멉니다. 어떤 원조를 했어도 어떤 독재를 했어도 어떤 정책을 써도 안됐을 겁니다. 오직 한국만이 반세기동안에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새로이 선진국으로 비약했습니다. 효의 문화가 없었으면 한국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겁니다. 정신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도 효의 문화는 한국을 지켜왔습니다. 세월호 문제가 이토록 사회적 반향이 큰 것도 상당부분은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어린 자식들을 잃은 부모의 마음이 많은 한국인에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대고 침뱉는 사람이나 정부는 사람다운 사람일 수가 없다는 것이고 정부다운 정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이죠. 효를 이해하지 못하는 정부는 정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한국도 지역사회가 망가지고 효의 문화가 많이 변했습니다.  요즘 한국인은 아이를 잘 낳지 않습니다. 결혼도 늦게 하거나 해야 할 필요가 있냐는 말을 합니다. 결혼은 특히 여성들에게 인생 망치는 길처럼, 억압의 도구처럼 묘사되어지는 일이 많은데 사실 그건 요즘 남성들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 나라는 이미 많이 서구화되었는데 서양에서는 결혼을 안하려고 하는 쪽이 흔히 남성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모두 결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각자 자기가 손해라고 생각하니 결혼하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결혼과 육아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점점 더 강하게 부정당하는 것은 효의 문화의 근간이 무너지는 일이겠지요. 

 

요즘 세대는 옛날 사람들처럼 자식에게 투자도 안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자식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혼신을 다해 자식을 키우고 자식은 부모를 부양한다는 관점이 퇴조했습니다. 옛날에는 잘키운 자식이 노후대책이었는데 요즘은 노후자금을 마련한다고 다들 야단입니다. 그런 변화의 끝에서 부모도 돈 벌고 자식도 돈 벌고 자식과 손자들과 함께 사는 게 아니라 요양원같은 데서 살면 그게 다 경제지표에서는 경제발전으로 잡힐 겁니다. 딸이 집에 와서 청소해주고 못을 박아 주는 대신에 노인이 사람 사서 집청소하고 못을 박으면 그게 다 경제활동이고 직업창출이니까요. 

 

이런 변화가 일반론적으로 옳다거나 틀리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옛 방식이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걸 없애는 것이 그럼 행복을 주는가 하면 그것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적이지 않고 서구적인게 꼭 답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의 문화는 오랜 세월 우리를 지켜온 검증된 문화라는 겁니다. 

 

뭐든지 어떤 극단으로 가면 민폐를 끼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부담도 되고, 때로 사회적 법규와 상식을 망가뜨리는 강력한 힘의 원천이 되는 이 효의 문화도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통해 우리가 쉽사리 보편적이고 거대한 명분과 질서에만 빠지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논리는 보편적인 것이지만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효의 문화는 인간이 인간인 한 영원히 가치있는 인간의 지혜일 수 있습니다. 

 

국가복지가 가족의 정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사람이 결혼해서 가족을 이뤄야 제대로된 성인으로 완성된다고 주장하는 한국의 문화를 오늘날 우리는 무조건 긍정할 수는 없지만 또 무조건 부정하기 어려운 사회적 의미가 거기에 있습니다. 저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워 본 사람으로서 확실히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때로 그렇게 쓴 에너지와 시간을 직업에 쏟았으면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조차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노벨상을 받는게 좋을까요 아니면 아빠나 남편이 되는게 좋을까요. 여기에는 정답은 없습니다. 아빠나 남편이 되는게 노벨상받는 것보다 훌룡하다는 주장이 억지라고 느낀다면 그것도 옳습니다. 다만 반대로 당연히 노벨상이 좋지 아빠나 남편이 되는게 뭐 그리 대단한거냐고 너무 쉽게 생각이 든다면 우리는 그것도 우리가 너무 보편성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한 사람이 된다는게 꼭 사회전체에서 특별한 사람인 것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껍데기나 남이 준 이름들만 쫒다가는 언젠가 보면 자기 삶에서 진짜 자기는 하나도 없었다는 느낌을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경제수준이 올라가면 이민 문제나 외국인과의 소통문제가 더 심각한  일이 됩니다. 그때 중요한 것으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한국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한국인으로서의 의무는 뭐고 권리는 무엇인가, 한국적 삶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가하는 문제입니다. 만약 하나의 사회가 정체성을 가지지 않고 누구에게나 조건없이 열려있다면 그런 사회는 경계가 없어서 녹아 사라질 것입니다. 지켜야 할 가치나 공동체가 없으니까요. 

 

반대로 그 정체성이 너무 엄격하여 닫혀있다면 그런 나라의 국력성장은 외국에게는 위협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일본이 좋은 예죠. 일본은 조선을 삼켰지만 소화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이 조선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일본은 결국 조선이라는 타국을 포용할만한 능력을 가지지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일본은 로마같이 성장하는 제국은 될 수 없었죠. 이제 한국의 국력이 성장한다면 우리는 우리도 역시 일본같은 제국주의를 추구할 거냐는 질문을 받을 겁니다. 그들의 국경을 넘어 나타난 우리에게 한국인처럼 산다는 게 뭐냐고 질문 받을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멈출 수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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