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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기생충과 서구 사회.

by 격암(강국진) 2020. 2. 16.

20.2.16

기생충은 역사를 만든 영화입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면서 분석하기 바쁩니다. 이것은 그저 일회성의 사건인가 아니면 세계적인 변화가 일어날 결정적인 계기인가 하고 말입니다. 봉준호감독은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은 후 자기도 지금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생충이 어떤 영화이며 왜 서구에서 인정받았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에 힌트를 주는 한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한 미국기자가 기생충을 만든 봉준호감독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기생충은 혁명을 촉구하는 영화인가? 이에 대해 봉준호감독은 오히려 기생충은 왜 혁명이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답합니다. 바로 이 대화입니다. 

 

봉준호 감독은 왜 기생충이 혁명이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말했을까요? 그것은 이 영화가 빈부격차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구의 영화와는 다른 각도에서 만들어 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번 아카데미에서 주목받았던 조커와 1917을 봅시다. 이 두 개의 영화는 주인공이 누구인지가 아주 분명합니다. 영화 조커의 주인공은 조커고 1917의 주인공은 한 영국병사 스코필드죠. 이 영화를 보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 주인공이 겪는 사건을 같이 겪으면서 그로 인해 생겨나는 결과가 마치 순서대로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일어나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누구보다도 주인공의 희노애락을 같이 겪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기생충은 단순히 억압받거나 곤란한 주인공이 여러가지 사건을 겪는 그런 영화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다보면 사장가족이나 지하실에 숨어사는 사람들의 입장에도 쉽게 동화되게 됩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선악을 갈라서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가해를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커를 보면 우리는 이 세상 문제의 원인은 불평등이 고착화된 세상이고 기득권층의 억압이라는 생각을 쉽게 하게 됩니다. 하지만 기생충에는 그런 쉬운 답이 없습니다. 굳이 찾자면 비극의 원인은 모든 인간들의 인식과 능력이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사장가족은 그들의 고용인들이 어떻게 사는지 자세히 모릅니다. 기택의 가족은 자신들이 밀어낸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모릅니다. 알려고도 안합니다. 자기 살기 바쁘기 때문이죠. 그들도 사장가족만큼이나 지하실에 대해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고용인들에게 좋은 대우만 해주고 있는 것같은 사장이 살해당할 이유는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영화 전체를 보면 이런 비극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이고 이 영화는 현실을 잘 요약해서 보여준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기생충은 이런 영화가 되었을까요? 다른 무엇보다 한국이 젊은 선진국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정치적 혁명을 완수중인 국가입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세상의 선악이 그렇게 쉽게 나눠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박정희나 이명박만 봐도 그런 것을 느끼죠. 아주 가난한 집 출신인 이명박은 고려대에서 시위를 하다가 투옥된 적도 있습니다. 이것만 보면 이명박은 마치 설국열차의 크리스 에반스처럼 보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빈민을 위하는 영웅일까요? 박정희는 어떻습니까? 많은 보수지지자들은 그가 민족의 영웅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에게 그는 권력에 미친 독재자일 뿐입니다. 

 

혁명의 과정을 통과한지 얼마되지 않은 한국인은 현실은 절대 완벽할 수 없으며 항상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서구는 다릅니다. 그들은 혁신과 혁명을 통과한지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데올로기나 이야기는 실은 현실적 경험에 기반했다기 보다는 혁신을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 그저 머릿속으로만 다듬은 것에 지나지 않은 겁니다. 

 

머릿속으로 산꼭대기까지 등산을 하거나 만킬로미터쯤을 자동차 운전을 하거나 하는 것은 간단한 일입니다. 머릿속으로 인권이나 여성의 권리를 말하는 것도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현실은 언제나 관념의 한계를 벗어나고 타협을 요구하고 우리가 상상한 것과는 다른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많은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커는 좋은 영화입니다만 조커를 본 어떤 사람의 평은 조커의 행동이 마치 부자집 도련님의 투정처럼 보인다고 말하더군요. 기생충을 보고 거기서 송강호가 연기한 기택이 사장을 죽였다고 해서 그가 계급투쟁의 영웅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적어도 쉽게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그는 흠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그는 명확한 이데올로기를 설파한 사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때 그때 감정에 따라 행동했을 뿐입니다. 

 

우리 역사에도 전태일같은 영웅이 있습니다. 전태일 평전을 통해 본 그는 천재적이고 명확한 의식을 가진 노동자이지만 그래도 만약 그가 우리 옆집에 사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면 책으로만 접한 것과는 크게 거리가 있었을 겁니다. 만약 역사가 조금만 달랐더라도 그는 우리가 전혀 듣도 보도 못한 그저 평범한 노동자로 살았을 지도 모릅니다. 

 

이데올로기와 현실의 차이는 이렇습니다. 한국은 그 현실을 돌파한지 얼마되지 않았거나 돌파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 현실을 기억합니다. 반면에 혁신과 혁명으로 부터 이미 거리가 멀어진 서구 사회는 아주 여러번 반복한 이데올로기만 남은 겁니다. 그 결과 이야기가 직선적이고 단순합니다. 누가 선이고 악인지가 분명합니다. 그런 이야기는 이해하기 쉽고 재미도 있습니다만 사실 동시에 절망적입니다. 왜냐면 너무나 여러번 들었던 그런 이야기는 사실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생충이 상을 받았을 때 기뻐했던 것은 단순히 아시아인이나 한국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백인들을 포함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뻐했지요.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그들 스스로의 이데올로기에 지쳐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1917년에 영웅적으로 메세지를 전달하는데 성공한 한 영국병사의 이야기가 오스카를 받았더라면 사람들은 그저 심드렁하게 박수를 쳤을 겁니다. 좋긴 좋았어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거 언제까지 이런 세상에 살아야 하지 하는 생각도 했겠죠. 

 

기생충을 외국인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1917도 조커도 하지 못한 일을 기생충은 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스스로를 기생충에 나오는 누구와 동일시하는가와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없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기생충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주변에도 우리가 모르는 지하실이 있고 그 안에서는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같은 느낌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미국인들이 한국인에 대해 뭘알까요? 많은 미국인들은 한국이 세계지도위에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그들로서는 보이지 않았던 지하실같은 곳에서 온 이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이토록 세련되고 철학적일 수 있다는 것이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즉 미국이 전세계가 아니며 스스로가 기생충에 나오는 사장가족같은 상태가 아닌가하고 느꼈을 것입니다. 봉준호가 아카데미는 로컬 영화제라고 말했을 때 뜨거운 반응이 나왔던 것은 그들은 기생충이라는 영화를 어느 정도 현실에서 경험하고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기생충은 누구에게나 의미가 있지만 오히려 매너리즘에 젖어 스스로에게 지겨워하고 있었던 서구 사람들에게 더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도 서구 사회가 전세계라는 착각속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쉽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생충의 끝에 사장이 죽게 되고 그 좋은 집에서 떠나게 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무시무시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겠지요. 예술의 목적이 우리를 일상적인 것에서 고개를 돌려 그 인식의 장을 넓히는 것에 있다면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아야 할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이 점에 있었을 것입니다. 

 

서구 사회는 이제 일본과 중국에 익숙합니다. 그들은 더이상 일본문화나 중국문화때문에 큰 자극을 받지 못합니다. 그들이 보편성을 가진 대안문화가 될 거라고 믿지 못합니다. 기생충의 이번 성공은 한국은 좀 다르고, 한국은 기회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번에 홍보여행을 하면서 봉준호가 세련된 감사인사를 할 때마다 서구인들이 너무 너무 좋아했다고 하더군요. 저도 그랬지만 스콜세지 감독에게 박수를 치게 하는 장면은 너무 감동적이었고 상징적이었습니다. 그건 한국은 미국에게 정복당하지도 않겠지만 그렇다고 미국을 정복하러 오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한국은 미국의 진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일본과 중국이 실패하고 있는 지점이 그것입니다. 그 두 나라는 굉장한 힘을 가졌지만 정치적 한계로 결국 제국주의에서 머뭅니다. 그래서 일본과 중국의 승리는 그들로 하여금 점령군이 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런 보편성의 부족은 그들이 지금 국제적으로 인기를 얻지 못하게 하는 한계가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이 미국에게 영국이나 프랑스같을 수는 없는 겁니다. 

 

기생충의 이번 성공이 많은 사람에게 큰 기쁨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세계가 지옥으로 변하는 일없이도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였기 때문일 겁니다. 서구인들이 한국을 발견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세계도 새삼 발견하게 될 거라는 희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의 역할이 앞으로 훨씬 더 큰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기생충이나 부산행같은 영화가, 도깨비나 아저씨같은 한국드라마가 왕좌의 게임이나 아바타보다 더 인기가 있어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보는 미래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국적 윤리관과 정서가 세계에 보편화되는 미래이기도 합니다. 물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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