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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한국의 문화컨텐츠는 뭐가 다른가?

by 격암(강국진) 2020. 1. 28.

2020.1.28

 

한국은 드디어 BTS와 봉준호에 이르렀다. 요즘 뉴스를 보다보면 저절로 이런 말이 나온다. 과거 삼성이 일본의 소니를 능가하고 현대자동차가 외국에도 팔리는 일이 있었을 때 나이든 한국 사람들은 그것들도 믿기 어려워했다. 공이야 둥그니 우연히 월드컵에서 한번 축구게임을 잘할 수도 있고, 김연아같은 천재가 나와서 한국의 피겨스케이트실력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지만 한국기업이 일본의 대기업을 이기고 한국자동차를 외국 사람들이 산다고? 뭐든지 일제가 최고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세대는 그것만 해도 믿기 어려웠다. 

 

 

 

 

 

그 이후에도 한국은 점점 발전하더니 드디어 한국의 문화컨텐츠가 중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를 넘어 서구 사회에 까지 도달했다. 마이클 잭슨이나 비틀즈같은 이름들과 같이 거론되는 가수가 한국 가수라는 것은 사실 아직도 믿기 힘들다. 수상을 할 수 없다고 해도 많은 미국인들이 아카데미의 오스카상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평을 주는 기생충같은 한국영화가 미국에서 흥행하는 현실은 참으로 초현실적이다. 그냥 하는 소리 아닐까? 정말 한국의 그것들이 그 전설같은 미국의 영화들이나 뮤지션들처럼 역사에 영향력을 남길까? 아무리 여러번 확인해도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기 조심스럽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도 한국인들만큼 어리둥절해 하는 것같다. 그들도 연일 한국은 뭐가 다른가하고 묻고 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히트쳤을 때만 해도 그것은 그저 일회성의 사건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BTS나 봉준호의 성공은 분명 그런 것이 아니다. 이건 한국문화의 힘이다. 게다가 한국음식의 인기가 증가하고, 한국드라마를 보는 외국인들도 늘고 있다. 극동아시아를 넘어 중동으로 유럽으로 미국과 남미까지 전세계 어디나 그렇다. 한국어를 배운 외국인들도 늘고 있다. 

 

한국 문화의 경쟁력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가지 분석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외국에는 구체적으로 스타를 키우는 기획사 시스템이라던가, 국가정책의 힘을 거론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같다. 물론 어떤 분석을 하건 한류의 근원적 힘은 한국의 오랜 문화 그 자체에서 나올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국의 문화컨텐츠가 성공하는 꼭 하나의 이유를 꼽는다면 이것을 말하고 싶다. 한류의 근원적 힘은 바로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최근의 역사적 경험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가운데 만들어진 바람직한 시민상 혹은 영웅상이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로 다른 나라가 간단히 복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진국을 어떻게 평가하고, 민주화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한국은 20세기이래 경제적으로 후진국상태에 있었고 문화적으로 봉건주의적이었던 나라가 민주화되고 경제 선진국이 된 유일한 경우다. 한국은 싱가폴처럼 작은 도시국가가 아니고 세계 10대강국에 꼽힐정도의 나라다. 지금도 인구가 5천만이 넘고 국민소득이 3만불이 넘는 나라는 지구상에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뿐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20세기가 시작할 무렵에도 강대국이었고 대개는 세계 패권을 두고 싸움을 벌인 역사가 있다. 

 

민주화의 경험이 언제 있었는가 하는 것은 한 사회의 정체성이 어떤 환경에서 만들어졌는가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지금 세계 문화의 중심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은 독립운동을 했던 때와 남북전쟁을 했던 때 그 사회적 정체성이 성립되었다. 사회적 혼란은 언제나 있지만 그 두 가지 사건들만큼 강력하게 파장을 일으킨 것은 없다. 그리고 그 싸움속들에서 미국인들은 미국이란 어떤 나라인가를 결정하고 그것을 대대로 교육시켰다. 워싱턴의 이야기를 하고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외우면서 말이다. 

 

서구문화 자체가 일반적으로 객관적이고 한계없이 시공을 초월한 진리를 추구하는 성질을 가졌지만 아마도 흑백이 분명한 영웅론이 미국 문화속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은 이렇게 미국사회의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세계가 단순하던 과거에 완성되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크린트 이스트우드가 출연하던 서부영화에서, 다이하드같은 현대 액션물을 거쳐 어벤져스같은 마블코믹스 영화에 이르기까지 미국 영화는 그 안에 독립적이고 능력있는 영웅을 빼지 않고 그린다. 그들은 하나의 정의의 화신같으며 이런 의미에서 일종의 신적인 존재다. 정의나 진리라는 관념의 육화랄까. 미국 영화를 보고 있으면 역사는 그런 영웅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이 세상은 그런 영웅들이 지켜간다는 것이 자명해 보인다. 결국 미국 사회가 이런 신화를 통해서 반복학습시키고 있는 것은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야하는 시민의 모습이라는 메세지다. 바로 모든 사람들이 정의의 시민이라는 이 이데아를 구현하는 아름다운 세계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미국의 강점이자 세상이 훨씬 간단했던 시절, 아직도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정의를 믿던 시절에 사회적 정체성을 만들어 낸 미국 문화가 가지는 약점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미국은 봉건주의 시절의 군주나 기사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위대한 발상과 추진력을 가진 영웅이 세상을 만들어 간다는 발상은 21세기의 복잡한 세상에서는 옳지 않다. 누구도 그렇게 옳고 완벽할 수 없다. 이 세상은 그렇게 예외없는 법칙을 허용할만큼 단순하지 않다. 세상은 일개인이 바꾸는 것이 아니다. 

 

사실 미국도 스스로 이런 고민을 했다. 그리고 그 고민의 결과로 등장한 것이 망설이는 영웅들이었는데 예를 들어 다이하드나 러셀웨펀의 영웅은 확실히 도덕적으로 완벽하고, 흠이 없는 영웅과는 좀 다르다. 좀 더 최근의 예를 들자면 배트맨과 X맨도 그렇다. 과거의 초기버전에서 슈퍼히어로는 그저 악을 무찌를 뿐이라면 최근에 다시 만들어진 슈퍼히어로는 인간적인 고민을 하는 슈퍼히어로다. 요즘의 슈퍼히어로는 자기의 역할이나 의미가 뭔지, 도대체 자신이 누구인지를 고민하는 히어로다. 슈퍼맨도, 울버린도, 배트맨도 그렇다. 

 

하지만 그래봤자다. 미국판 영웅은 역시 미국판 영웅이다. 결국은 혼자서 세계를 구한다. 결국 그가 옳고 잘났다. 그래서 미국의 영웅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미국이 세계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같다. "나도 내가 슈퍼영웅이지만 완벽할 수 없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나 아니면 세계를 누가 지키겠어."하고 말이다. 말하자면 영화속에서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슈퍼히어로의 모습은 세계가 비판하는 미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또다시 세계를 구해내고야 마는 영화속 슈퍼히어로의 모습은 결국은 미국이 아니면 안되고 미국이 옳다는 미국중심적 주장이 되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민주화를 이뤄낸 한국에서 영웅이나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의 이미지는 이와는 다르다. 미국의 영웅은 초인간적이고 흠이 없는 스파이더맨이나 존웨인이지만 우리의 영웅은 송강호다. 송강호가 종종 연기하는 한국적 영웅은 결코 내가 답을 아니까 나를 따르라고 하는 영웅이 아니다. 한국적 영웅은 진리의 화신이 아니고 훨씬 더 겸손하며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다. 훨씬 더 인간적이라 종종 겸손하다 못해 찌질할 정도다. 봉준호가 만든 영화 괴물에서 괴물과 싸우는 가족은 결코 영웅이 아니다. 다만 정이 많아서 눈이 뒤집어진 가족일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무식하고, 염치없고, 서로 싸우기까지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적 영웅을 요약하는 한마디는 "쪽팔려서"나 "챙피해서"다. 그 말은 완벽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영화 초록물고기에서 처음 표현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나의 찌질함을 철저히 알고 있는 사람의 정의었다. 나는 어쩌다 영웅이 되었는가. 나도 편하게 살고 싶고, 나도 세상일에 당혹스러우며 눈을 돌릴 수 있다면 그러고 싶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이제까지종종 비겁했지만 그래도 이따금 피할 수 없어서 나서게 된 다. 왜? 쪽팔리니까 혹은 그 놈의 정때문에 그렇다. 이러면 안되는거 아닌가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 이러한 한국적 시민상내지 영웅상을 가장 잘 실체화한 인물은 노무현이다. 그를 그린 영화 변호인에 나오는 송강호를 보면 빽없는 고졸 변호사가 그냥 잘먹고 잘살 수도 있었는데 그는 결국 인권변호사가 되고 만다. 그는 애초부터 성공이나 돈에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부족한 학력이 주는 상처에 쓰라려 하는 보통사람이었다. 그래도 그는 인권변호사가 되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이유는 결국 "쪽팔려서" 그렇다. 그냥 눈감고 넘어가서 돈벌고 살기에는 부림사건의 피해자들이 너무 억울했던 것이다. 어른이라면서, 잘난 사람이라면서 이렇게는 못살겠다는 것이다.

 

한국을 바꾼 촛불혁명도 결코 지식인들의 개혁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쪽팔린 사람들의 행동이었다. 사람들이 이게 나라냐며 쪽팔려서 못살겠다고 나선것이다. 때로 목숨을 던져서 지하철에서 사람을 구하는 의인의 행동이 한국에서  보도가 될 때가 있다. 그것을 한국인이 이해하는 방식은 그들이 애초에 훌룡한 사람이라 정의를 행한다는 발상이 아니라. 그런 걸 눈감고 살기에는 너무 쪽팔려서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우리 정의를 행합시다라는 말은 충분한 울림이 없다.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여러번 비겁해 봤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거 쪽팔린다는 말은 울림이 있다. 이거 너무 한거 아니냐는 말은 울림이 있다. 이것은 우리는 이미 바닥까지 내려왔고 그러기에 더 챙피한 짓을 하기에는 도망갈 곳이 없다는 주장이다. 중요한 것은 경계고 임계점이다. 한국의 영웅은 훨씬 더 소박하고 불완전하여 인간적이고 그래서 미국적 영웅보다 대중에게 가까이 있다.  

 

민주화의 시기가 다르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겠지만 이렇게 역사는 서로 다른 영웅상, 시민상을 만든다. 한국의 민주화는 훨씬 더 세계가 넓고 다면화된 20세기 말에 이뤄졌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문화에 반영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드라마나 영화는 물론 이거니와 한국에서는 슈퍼스타인 가수도 겸손하다. 성공하고 인기좋은 가수들이 모두 겸손하고 인간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의 슈퍼스타에 비하면 그들은 신인 반면 한국의 슈퍼스타는 여전히 인간이라는 느낌이다. 

 

BTS가 미국에서 성공을 거두자 한 방송인이 BTS에게 여자친구들은 데리고 안 왔냐고 질문을 했던 적이 있다. 그에 대해 BTS가 여자친구가 없다고 하자 그 방송인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수없이 많은 여성팬들이 있는 BTS니 매일같이 다른 여자를 여자친구로 삼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학부형들이 안심하고 BTS를 자녀에게 권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한가지 장면이며 왜 서구문화가 실패하는 아랍에서 한류가 통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성공한 인간들은 앞에서 소개한 한국적 영웅상의 관점에서 보면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들은 너무나 빛나는 영웅으로 보여서 오히려 그늘을 만들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들을 섬기는 광신도가 되든지 아니면 우울증에 걸리라고 하는 것같다. 그들은 트럼프와는 다른 사람일지 몰라도 자신감이 넘친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오히려 그렇게 자신감을 보이지 못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미국적 시민상의 결과다. 

 

반면에 BTS는 그냥 부족하고 모자란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나도 부족하다고 말한다. 한국의 영웅이나 시민은 신념도 있고 정의도 있지만 자신의 한계를 결코 잊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으로 남는다. 그래서 자신들의 정의나 어떤 추상적 관념이 시공을 초월해서 옳은 유일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세상이 조금 더러운 것을 일일이 트집잡겠다는 것도 아니다. 나도 때로 더럽다고 말한다. 우리의 영웅은 훨씬 더 인간적이다. 다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는 것이다. 이거 넘지 말아야할 선은 있지 않냐는 것이다. 

 

이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영웅은 역사는 한명의 영웅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힘이 합쳐지는 곳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불완전한 나 하나는 결국 대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한계를 언제나 잊지않으면서도 기본적 정의감과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 시민상을 제시하는 한국문화, 이것이 미국적 민주주의를 한국적 민주주의가 능가하고 있는 지점이다. 혹은 절대적 법칙이나 진리를 찾는 서구 문명을 관념의 유한함을 아는 전통을 가진 아시아 문명이 넘어서고 있는 지점일 수도 있다.

 

모든 한류물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이돌 음악이나 위에서 말한 기생충같은 영화가 장르의 복합을 이룬다는 것도 이런 문맥에서는 의미있는 특징이다. 한국 아이돌음악은 흔히 몇가지 장르의 음악을 섞어서 만든다. 빅뱅, 소녀시대, BTS 모두 많은 노래에서 이런 특징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노래는 끊임없이 장르가 변하는 소녀시대의 I got a boy이다. 외국인들이 특히 어리둥절해 하는 이 노래를 들어보면 BTS가 어느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기생충 또한 스릴러, 호러, 코메디등 여러가지 장르가 복합적으로 등장한다고 평가된다. 

 

이런 장르의 복합과 전환이 만들어 내는 한가지 분명한 효과가 있다. 그것은 우리를 자꾸 다른 경계로 데려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가지 세계에 빠져드는듯하다가 장르가 전환되는 순간 그 세계는 유한하며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그런 자각의 느낌은 유한한 인간으로 남는 한국적 영웅이 이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시각과 잘 어울린다. 이 세계는 작은 조각들의 집합이며 중첩이다. 결국 우리는 촛불집회안의 하나의 촛불일 뿐인 것이다. 우리가 전체를 보려면 경계를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세계의 일부만을 보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의 문화컨텐츠는 인간적이고, 그 자체가 하나의 군중을 느끼게 하는 복합성을 가진다. 한국드라마를 처음 본 일본 사람들은 주인공 남자배우가 운다는 것에 충격받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미국에도 보면 한국 드라마에서처럼 주인공 배우가 철저히 무너지는 것을 보여주는 경우를 기억하기 어렵다. 인간적 시민상 혹은 영웅상 이것이 한국문화의 특징이다. 

 

그래서 한류는 앞으로도 계속될까? 이런게 한류의 강점이라면 그걸 외국에서도 하면 될 것 아닌가. 이러한 것들은 글로 정리해 보면 이것들을 배우는 것이 매우 간단해 보인다. 하지만 그에 어울리는 역사적 경험이 없이는 그것들이 문화적 힘으로 구체화되는 것은 아주 어렵다. 문화는 자신이 발견한 사회적 정체성을 반복교육시키며 자신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말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도 똑똑한 사람이 많은 미국도 미국적 메세지를 숨막혀 죽을 때까지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오랜 역사를 통해 미국적 시민상을 교육해온 미국은 역설적으로 바로 그들의 과거의 노력때문에 그 패러다임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하지만 모순은 누적된다. 미국인들도 미국적인 것이 지겨워진다. 

 

나는 기생충이 오스카상을 받을지 안받을지 모르지만 미국인들이 기생충에 뜨겁게 반응하는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고 본다. 그들은 의식적이건 무의적이건 그 안에서 미국적이지 않은 새로운 것을 본 것이다. 미국인들도 미국적인 것에 대해 매우 지겨워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17이나 조커에는 안티히어로든 그냥 히어로든 영웅이 나온다. 이것은 멋지지만 동시에 백번도 넘게 본 것같은 이야기다. 한국 사람도 지겨운데가 있으니 미국 사람입장에서는 말할 것이 없다. 종종 사치와 마약과 난잡한 성추문으로 얼룩지는 미국의 대중문화 스타는 미국사람에게도 지겨운 존재다.  미국 문화는 음악이든 영상매체든 새로움을 잊은지 오래되었다.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맥에서 말하자면 나는 기생충이 오스카상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미국이 그만큼 희망이 없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다시 한번 지겨운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국 문화 산업의 몰락은 그만큼 피하기 어렵다.

 

이제까지 말한 것을 뒤돌아보면서 생각해 보면 한류의 성공은 그렇게 재생산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한류라는 것이 단순히 돈을 투자하고, 시나리오를 개발하고, 아이돌을 훈련시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언제든지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많은 다른 나라에서도 할 수가 있다. 그런 일은 미국도 일본도 이미 했거니와 중국같은 나라는 이미 그렇게 할 능력이 넘친다. 하지만 그 핵심에 바람직한 시민상이나 영웅상을 만들어 낸 역사적 체험이 있다면 그 말은 다른 나라도 한국이 해낸 것을 해내야 한다는 뜻이다. 홍콩이 민주화될 수 있을까?  일본이 민주화될 수 있을까? 중국이 민주화될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들은 그 과정에서 생기는 에너지로 한류이상의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불가능해보이는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미국조차도 다시 한번 자기 모자람을 깨닫고 새로워진다는 일이 쉽지 않다. 역사는 그냥 전진하지 않는다. 지금 왠만큼 따뜻하면 그냥 살던대로 살려고 한다. 변화는 모순이 너무 심해져서 나라가 망할 정도가 되어 남북전쟁을 각오할 정도가 되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 한국은 짧게봐도 1980년이래 40년간 끝나지 않는 전쟁을 치뤄왔다.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도 역동적인 국가였다. 한국사람들처럼 피곤하게 산 사람들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어느 나라가 순식간에 한국을 추월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미국헌법을 베껴서 헌법을 만드는 것으로는 그 나라가 미국수준의 민주국가가 되지 않는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그 사회적 체험이 한국을 추월하지 않는다면 설사 한국적 메세지를 충분히 배워서 그걸로 문화컨텐츠를 만들어도 그것은 결국 그저 흉내내기가 될 뿐이다. 말하자면 가난했던 시절의 한국이 만든 슈퍼맨이 되는 것이다. 똑같은 시나리오를 가지고 만들어도 한국이 만든 슈퍼맨은 우뢰매가 된다. 설득력이 없다. 

 

사실 한국도 새로운 시대를 완전히 굳히지는 못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명박 박근혜 8년정도만에 한국은 나라가 망할 지경으로 엉망이 된 적이 있다. 역사가 거꾸로 간 것이다. 지금도 이 나라에는 한국이 얼마나 대단한 것을 해내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우리가 아직도 미국이나 유럽에게 배워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득하다. 또 우리는 여전히 박정희가 반인반신이다 운운하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는 사회에 살고 있고, 엉터리목사가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역사는 또 언제 거꾸로 흐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더 역사를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만들 때, 촛불혁명의 승리가 진짜 승리로 굳어질 때 그 승리는 단순히 어떤 정당이 집권하고,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가를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전혀 다른 시대를 만들 것이다. 미국적 민주주의를 세계가 배웠듯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세계가 배우고 적어도 한동안 통합되는 세계질서의 중심에 한국이 자리잡는 그런 시대를 만들 것이다. 문화적 슈퍼파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꿈같이 들리고, 분명 실제로도 이뤄지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닌 꿈이다. 하지만 BTS나 봉준호의 영광도 한 때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꿈이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이 글을 찬찬히 읽은 사람이라면 이것이 단순한 망상은 아니라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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