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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남자노인은 왜 공공의 적일까?

by 격암(강국진) 2019. 11. 4.

오늘은 전북독립영화제의 세번째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몇편의 독립영화들을 봤는데요. 티비에서 보지 못했던 영화들을 본다는 참신함이 저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영화들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모습이 너무 전형적인 경우가 많아서 때로는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성폭력피해자를 다루는 혜미라는 영화는 너무나 극명하게 남자와 여자를 갈라 놓습니다. 그러니까 성폭력가해자만 남자가 아니라 그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남자는 다 성폭력 가해자편에 서는 겁니다. 그래서 그에 대해 항의하는 집단에는 단 한명의 남성도 없습니다. 사실 그 영화를 만든 두 사람의 연출자중의 하나는 남자였는데도 말입니다. 영화는 남자는 이렇고 여자는 이렇고 하는 식의 이분법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같았으며 이런 점이 아쉽게도 영화가 주는 메세지의 섬세함을 깍아먹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세상을 대충대충본다는 느낌이랄까요.  이 대충대충본다는 말의 의미는 아래에 설명하겠습니다. 


또다른 영화인 욕창이라는 영화는 아내가 말도 못하고 몸도 가누지 못하는 노인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노인이 참 대책이 없습니다. 아내를 돌봐주는 간병인을 좋아해서 아내에게는 관심도 없고 간병인을 미행도 하며 그러다가 질투로 폭력도 휘두릅니다. 게다가 나중에는 아픈 아내와 이혼하고 그 간병인과 결혼을 하겠다고 나서질 않나 자식들에게도 무정한 말이나 잔뜩 하는 대책없는 노인입니다. 





욕창에는 그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 노인이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그 노인은 영화의 중심에 있습니다. 가장 출연분량이 많지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 내적인 감정을 제대로 가지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 이 노인입니다. 아내도 딸도 아들도 간병인도 다 나름의 희노애락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노인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대책이며 내면이 없습니다. 있는 것은 그저 짐승같은 욕망뿐입니다. 


전형적인 인물이나 내면이 없는 인물이란 반드시 그가 악당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살인범이 있다고 해봅시다. 이 살인범은 이유없이 사람을 마구 죽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마치 영혼이 없는 기계나 배고픈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무 동기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이 살인범의 어린 시절이 나오는데 그가 어떻게 상처를 입었고 어떤 자극에 민감해 졌는가가 설명된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비록 여전히 살인자이지만 나름의 내면의 문제를 가지고 자신도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행동한 측면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살인자도 희노애락과 내적 갈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내가 말하는 내면입니다. 


영화에서 내면이 없이 그려지는 인물들은 희생자들입니다. 누구도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는데 다른 사람의 사연은 다 소개해 주면서 이 사람에 이르러서는 이 사람은 그냥 이유없이 그렇다, 타고 나길 미쳐서 태어났다는 식이면 그건 사실 억울한거죠. 사실 일전의 글에 소개한 탑차라는 영화에서도 이런 할아버지가 나옵니다. 


저는 영화 욕창을 보면서 어쩌다 한국 남자노인들은 이렇게 심한 대접을 받게 되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영화는 한국 남자 노인들을 이유를 생각할 필요도 없는 악당들로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어떨까요? 한국의 노인자살률은 OECD 1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살률이 높은 더 구체적인 이유는 바로 한국의 남자 노인들이 전세계적으로 유례없이 높은 비율로 자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워낙 남자 노인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하니 자살을 해도 '성질이 더러워서 죽는다'는 식으로 해석할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나 생명은 소중하니까요. 


다시 말해서 한국의 남자노인들 중에는 갑질하면서 권세부리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외롭고 무기력한 사람이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내면도 없이 한국의 남자 노인을 그리는 또 하나의 영화를 보면서 저는 이런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진부하고 뻔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폭력이다.


그간 충분히 해왔으니 한국의 남자노인들을 공격하고 비난하지만 말고 그들의 문제가 뭔지, 그들의 내면이 어떤지를 들여다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야 말로 예술인아닐까요?


예를 들어 가부장적 질서에 대해서 모든 비난을 남자노인들에게 퍼붓는 것은 정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장이나 리더가 될 능력이 있건 없건 그런 자리에 앉게 되고 온 집안의 식구들이 문제해결을 하라고, 책임을 지라고 손을 벌리는 위치에 선다는 것은 그렇게 행복한 일은 아닙니다. 요즘이야 민주화되고 문민화된 사회지만 지금의 할아버지들이 젊은 시절에 나가서 일을 한다는 것은 상명하복의 군대식 문화에 시달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정안에서 맨 위에 있는 것같은 아버지의 폭력만 보면 아버지만 가해자같을 수 있지만 그 아버지도 사실은 사회에서는 폭력의 피해자였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예를 들어 돌아가신 저의 아버지 이야기를 좀 해보죠. 7남매의 장남으로 아버지는 동생들을 전부 교육시키는 아버지 역할까지 했습니다. 본인은 일찍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었고 나중에는 서울에서 택시운전사를 하셨습니다. 당연히 근무시간은 길었고 처자식뿐 아니라 동생들까지 언제나 돈을 달라고 손을 벌렸습니다. 요즘에야 갑질이 어쩌니 하지만 살인적인 근로조건때문에 분신자살을 한 전태일이 우리 아버지보다 열살도 더 어립니다. 그런 세상에서 택시운전사하면서 더러운 꼴이 없었을까요?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매우 온화하셨습니다. 아이들에게 매질을 해도 어머니가 하셨죠. 아버지는 폭력을 전혀 쓰지 않으셨습니다. 폭언도 없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은퇴하시고 나자 아버지는 요리도 청소도 제대로 못하셨고 사람들과 재치있는 대화도 잘 못하시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배우려고는 했지만 사실 평생을 안해 본 일을 노인이 되어서 배운다는 것이 생각보다는 훨씬 어려운 일이지요. 아버지는 기계를 조작하는 일에 서툴러서 아이패드를 금방 배우신 어머니와는 달리 케이블티비 조작도 서투르셨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 같다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아버지가 완벽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아들 딸이며 여자들이 내적으로 분노가 쌓인게 있었다면 그 시대를 산 아버지의 가슴에는 왜 그런게 없었겠냐는 겁니다. 더구나 세상이 바뀌고 나이가 들어 은퇴하니 누구보다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버린 것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의 마음에 왜 분노와 갈등이 없겠습니까. 가장이었던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식구들이 모두 가해자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다만 자신들의 가해사실은 쉽게 잊어버릴 뿐이죠. 아버지의 입장을 잘 몰랐던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상처를 줬는지도 모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상처는 잘 기억하지만 말입니다. 


세상은 한국의 남자노인에게는 가장 먼저 등을 돌리는 것같습니다. 할머니는 애라도 봐주니까 젊은 사람들이 좀 알아주는 것같습니다. 할아버지는 그저 짐이죠. 조금이라도 짐이 덜되려고 겨우 겨우 사시는 남자 노인들이 세상에 많습니다. 아내에게도 구박받고 바보취급당하면서 말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높은 자살률이죠. 말하자면 우리 사회에서 압도적으로 가장 높은 비율로 자살하는 사람들을 미디어는 계속 악당으로 그리고 있는 겁니다. 내면 따위는 있지도 않은 괴물로 말입니다. 


성적 소수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여성들의 폭력피해에 가슴아파하고, 청소년 교육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다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역시 모두는 아니지만 많은 독립영화들을 보면서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진부하고 뻔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폭력이라는 거죠. 왜냐면 그들의 사고와 관심이 멈춘 그 너머에도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혜미라는 영화에 대해 말하자면 여자만 내면이 있는게 아니라 남자도 내면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걸 무시하고 계속 같은 메세지를 반복해 봐야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슬프고 힘든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영화에서조차 무관심과 둔감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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