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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미신에 대한 미신

by 격암(강국진) 2020. 1. 12.

20.1.12

미신이란 보편적이지 못하고 잘못된 믿음을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보면 우리는 신화와 미신에 대한 한가지 미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신화와 미신이 단순히 틀린 것이라는 미신이다. 나는 미신을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신화와 미신은 그저 틀린 것일 뿐이라는 생각은 틀린 것이며 심지어 위험하기 조차하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미신과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기억해 두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는 종종 어떤 생각이 명확한 근거가 없거나 부정확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에도 그것을 그냥 쓴다는 것이다. 경험적으로 그것이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독자의 머리에는 징크스같은 것들이 먼저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예들도 많다. 

 

예를 들어 지구는 둥글고 태양주변을 돌고 있다. 여전히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은 아주 소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그것을 크게 의식하며 살지않는다. 즉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지구는 움직이지 않고 땅은 평평한 것처럼 사고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지금부터 동쪽으로 1킬로미터를 가라는 말을 했을 때 우리는 그 말을 지구가 자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서 해석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우주선을 타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높은 고도로 올라가서 이제 지구표면중심으로 위치를 판단하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가 제자리에 있어도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땅위에서 생각했던 사고방식이 역시 틀린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태양계조차 벗어나는 우주여행을 할 수 있다면 이제 우리는 그 태양조차도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다만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 지구표면 위에서 산다. 그래서 이런 사고의 전환은 거의 불필요하다. 하지만 수채구멍에 흘러들어가는 물들이 왜 모두 같은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게 되는가를 설명해 주는 코리올리 힘같은 효과는 우리에게 우리의 사고방식이 여전히 임시방편의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많은 경우가 이런 식이다. 우리는 우리의 형이상학을 증명하지 않고 그냥 믿고 있거나 심지어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인식과 행동방식보다 더 보편적이고 정확한 원리를 알고 있는 경우에도 대개 그것보다 훨씬 단순하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인식하고 행동한다. 

 

고전역학의 체계는 우리가 야구공의 움직임에 대해서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설명을 제공한다. 물론 그것이 바로 인간이 고전역학을 개발한 이유다. 하지만 야구를 하면서 뉴튼 방정식을 풀고 있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거의 없다. 양자역학이 등장한 이래 고전역학적 물질의 개념은 대체될 수 밖에 없었지만 누구도 일상생활에서 양자역학적 시각으로 탁자나 접시를 바라보면서 살지 않는다. 심지어 물리학자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의 언어와 사고는 여전히 고전역학적 물질주의를 따른다. 

 

현실이 이런 이유는 우리가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슈퍼컴퓨터 이상의 계산능력이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야구를 할 때 야구공의 위치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예측하고 공을 때리거나 잡을지도 모르겠다. 미래에 등장할 로보트는 어쩌면 그런 식으로 야구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인간은 그런 유한한 인간의 능력을 문자의 발명이나 수학의 힘으로 컴퓨터의 발명으로 극복해 왔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맨 몸으로 태어나며 한 개인의 능력은 제약되어져 있다. 대개의 경우 백자리 숫자같은 것은 우리는 외울 수 없다. 

 

이런 인간의 유한성을 생각할 때 우리는 서구 중심으로 발전되어져 온 현대문명이 가지는 한가지 근본적 문제점을 느끼게 된다. 일찌기 헤르만 헷세가 그의 작품에서 유리알유희라고 부르기도 한 이 절대의 문제는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현대문명속의 인간소외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발전이라는 것은 대개 더욱 더 거대해져가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그 속에서 오히려 인간은 불행해진다. 인간은 그 거대하고 복잡한 시스템을 부정할 수 없고 오히려 그 시스템은 계속해서 당신의 개인적 감정과 생각들은 미신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우리는 결국 시스템의 노예가 되고 스스로를 미신에 빠져서 틀린 생각을 하는 죄많고 어리석은 존재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상태는 행복하지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시스템으로부터의 낭만주의적 탈주를 시도한다. 그러나 비합리적인 시스템의 부정은 성공하지 못한다. 잠시동안만 통쾌할 뿐이고 우리는 다시 문명의 힘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스템의 노예가 되는 것과 낭만적 탈주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는 한다. 도시에서 귀촌했다가 다시 도시로 돌아가는 식이다. 보다 짧게는 자주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물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미국의 실용주의철학자 존 듀이는 백년전 그러니까 1919년에 일본을 방문해서 연설을 하는데 이것을 정리해 책으로 만든 것이 철학의 재구성이라는 책이다. 듀이는 이 책에서 서구 철학의 특징이 시공을 초월하는 진리를 추구하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미신을 버리고 진리를 추구하자던가, 미신을 버리고 과학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바로 이런 특성의 결과다. 

 

그 시작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었다. 이른바 미신적인 세계는 국소적이고 인간적인 세계다. 사랑에는 사랑의 신이 있고 부엌에는 부엌신이 있다는 식이다. 그런데 이 세계를 절대적 진리의 시각으로 보게 되면 그런 신화는 무너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나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한 이유이다. 지금의 신화나 상식은 일관성이 없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절대 무너지지 않는 진리가 실체라며 그것을 찾자고 하는 것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다. 

 

그러나 듀이는 이것이 잘못되었으며 우리는 보다 인간적인 철학과 과학을 재구성해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보편성의 세계 이전에는 골짜기마다, 강마다 다른 신앙을 가진 부족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들을 미신의 시대라고 부르며 하나의 법, 하나의 신, 하나의 과학으로 그것을 통합하는 것을 발전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렇게 보편화를 곧 진보라고 믿는 태도는 적어도 언제나 인간의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현실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슈퍼컴퓨터가 아닌 인간에게 뉴튼방정식을 풀면서 야구를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비슷한 정신을 슈마허가 1973년에 쓴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이 책에서 슈마허는 더 큰 것, 더 보편적인 것, 가장 첨단인 것만을 추구하는 태도가 인류와 지구에게 위기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슈마허는 단순히 작은 것이나 낡은 것이 무조건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 기술을 쓰는 사람에게 적합한 기술이 좋은 기술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가난한 국가에게 원조를 해주면서 가장 비싸고 거대한 시스템을 소개해주었을 때 그것은 불필요한 기술이며 오히려 선진국에게 종속을 가져오는 결과를 만든다. 따라서 그 나라에게 적합한 기술을 개발하고 소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대문명을 모르는 어떤 원주민 마을에 가게 되었다고 하자. 우리는 그들의 신앙과 먹고 사는 방법을 시대에 뒤진 것으로 단언하기 쉽다. 이것이 바로 내가 처음에 말했던 신화와 미신이 단순히 틀린 것이라고 믿는 오류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과 기술은 그들이 지금 처해있는 상황에서는 소위 말하는 현대 기술보다 더 뛰어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들은 현대기술을 배울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은 많은 것을 포기하고 댓가를 치뤄야 한다. 따라서 설사 기술수준으로 봐서 천년이나 2천년전의 상태를 하고 있는 인간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에게 2천년을 앞선 기술을 가진 상태가 답이니 그 2천년을 뛰어넘으면서 생기는 희생은 어떤 것이라고 해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현대기술이나 과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뭐뭐란 무엇인가를 묻기 이전에 무엇이 우리의 목적인가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삶은 우리가 있던 장소나 도달한 장소가 아니라 바로 그 변화하는 과정자체다. 우리는 현재에 도달하기 위해서 과거를 통과해 온 게 아니라 과거의 모든 순간들을 살았던 결과 현재에 도달한 것뿐이다. 따라서 더 중요한 것은 목표 그 자체보다 방향이고 속력이다. 

 

나이 든 기성세대에게 청년이나 청소년들은 미개한 원주민처럼 보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미신같아 보이는 젊은이들의 감정을 무시하기 쉬우며 실제로 종종 그들은 중간을 건너 뛰고 노년이나 장년시대를 위해 살라는 조언을 던진다. 마치 인생이란 죽기전에 쓸 노후자금을 모으거나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을 모으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더 길게 보면 누구나 죽어서 흙이 된다. 그런 식이라면 뭐하러 돈을 모아야 할까?

 

요즘은 한세대 한세대의 삶이 전과는 크게 다르다. 어쩌면 우리는 인류역사에서 변곡점이 될 중요한 진화적 단계에 도달한 것일 수 있다. 수십만년전, 현대인의 기준에서 볼 때 인류는 침팬지와 그리 다를 것이 없는 짐승같은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인간은 하나의 기술을 개발함에 따라 거의 새롭게 창조되어졌다. 인간은 타고난 DNA로는 설명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생명체가 되었고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 기술은 바로 쓰기다. 문자는 인류문명 그 자체나 다름없다. 그리고 문자에 기반하여 복잡하게 발전한 인류문명은 추상적 개념들을 인류의 뇌에 주입한다. 우리는 그런 행위를 교육이라고 부른다. 이로 인해 우리는 안드로이드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문자는 인간의 기억력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인간사회가 조직되고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백년전에 누가 왕이었는지, 내가 유태인인지, 팔레스타인 사람인지 내가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를 구분하는 것도 다 따지고 보면 문자로 인해 길어진 기억의 산물이다. 현대의 인간이 가지는 정체성의 유래는 결국 문자다. 

 

그렇게 발전되어 온 인류문명은 그 크기가 커짐에 따라 과도한 권위로 인간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모순이 누적되자 사람들은 개인의 입장이라는 것을 살피기 시작했는데 이런 변화가 르네상스고 17세기의 과학혁명이다. 듀이는 베이컨 이래 누적된 과도한 시스템의 권위로부터 탈출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것은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관찰의 결과에 기반하여 진리를 검증하려고 하는 방식으로 전해져 내려온 낡은 시스템의 권위에 저항했지만 그 저항은 여전히 보편성을 가진 진리의 추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해서 찾아진 보편적 지식들의 체계에게 억압되게 된다.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은 지식의 누적을 더욱 빠르게 했고 시스템도 더욱 커졌다. 그래서 오늘날의 지식세계는 한 인간이 교육을 받는 것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이 크고 복잡해졌다. 인류는 19세기이래로 또다시 전문화를 추구하여 이런 현실에 저항했지만 폭발하는 지식의 양속에서 이제 인간은 세상의 한조각조차 다 알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전문화가 너무 진행되어 그것을 조합하는 것도 큰 문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향의 대책들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기술과 지식을 인간에게 맞추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을 다시 한번 개조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롭게 만들어 지고 있는 시스템과 기술에 걸맞는 존재로 진화시키는 것이다. 이 둘은 모두 새로운 기술들을 요구한다. 

 

기술과 지식을 다시 인간에게 맞추는 것은 마치 우리가 다시 보편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골짜기 마다 곰신을 믿고, 여우신을 믿던 시대처럼, 개인마다, 집단마다 특수화된 믿음을 가지고 다른 법칙을 정당화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것이 선사시대로 돌아간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더욱 뛰어난 기술이 필요하다. 

 

이를 보여 주는 한가지 예는 도시 농부다. 만약 농사가 단순히 농산물을 생산하는 행위라면 도시에서 텃밭을 가꾸거나 집에있는 화분에서 채소를 키우는 일은 비효율적이다. 큰 규모로 대단위로 하는 것이, 특히 전문화된 인력이 하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뭔가를 직접 키우고 소비한다는 것은 단순히 식량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요구다. 그럴 때 종자기술이나 재료과학이 동원되고 심지어 IT기술이 동원되어 도시사람도 도시농부가 되게 도울 수 있다. 뛰어난 기술은 종종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장작을 패고, 음식을 손으로 조리하는 것같아서 우리가 과거로 돌아간 것같지만 실은 현대에서 그런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뛰어나지만 보이지 않는 기술이다. 

 

인간의 새로운 진화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기계를 직접 몸에 이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거듭말하지만 문자는 거대한 인간개조여서 거의 인간의 창조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기계를 몸에 이식하지는 않았다. 교육을 받을 뿐이고 책이라고 불리는 문자로 된 문서를 쌓아 올렸을 뿐이다. 문자의 혜택이 문명의 혜택이고 문명의 혜택을 받은 자는 따라서 문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즉 문자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추상적 관념의 필터를 통해서만 세상을 보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먹을 수도 없는 돈이라고 불리는 종이조각을 받고 남에게 먹을 것을 내어주는 일은 절대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한번 그에 준하는 기술적 환경변화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그 환경은 문자의 힘 이상의 힘으로 세상에 대한 정보를 처리하고 인간과 소통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거대한 양의 정보를 쌓아올릴 것이다. 그 핵심은 우리가 빅데이터기술이라던가 인공지능으로 부르는 기술이다. 충분히 발전된 미래의 정보환경은 우리가 세상을 인공지능이라는 필터를 통해서만 보게 되는 세상이다. 충분한 데이터와 강력한 계산능력을 가진 인공지능은 인간을 증강된 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에게 들어오는 정보를 자기 기준으로 판단해서 통계적 결과를 도출하고 필요한 정보만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과소평가하고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이미 어느 정도 이런 환경속에서 살기 시작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예를 들어 주변의 맛집을 스마트폰으로 검색하고, 그에 대한 평을 읽고, 전화를 걸어서 식사를 예약하는 일은 요즘에는 흔히 있는 일이다. 당신은 이것이 인공지능과는 상관없는 일이며 인간의 진화라고까지 부를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의 스마트폰이 무선통신에 연결되는 방식이나 당신이 레스토랑을 검색할 때 그 결과를 도출하는 프로그램은 모두 어느 정도의 정보자동처리기술을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50년전이라면 누군가가 하루종일 시간을 써도 해내지 못했을 정보처리를 순식간에 해낸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지역에서, 이 지역의 유명레스토랑이 어디고 뭐를 주문해야 하는지를 단숨에 알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하는 순간 어떤 비지니스의 승패는 갈리고 있다. 

 

만약 어떤 프로그램이 지금의 박사급인력 백명정도가 일년내내 분석해도 결론이 나올까 말까한 엄청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그 결과를 알려주는 일을 순식간에 해낼 수 있다면 그런 프로그램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눈에 세상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 보일 것이다. 요즘 뉴스의 상당부분이 통계수치를 전달하는 것만봐도 알 수 있듯이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한 예측과 통계수치라는 필터를 통과해야 알아 볼 수 있는 곳이 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걸 잘 볼 수 있게 된 미래 사회는 지금과는 질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움직일 것이다. 노동이나 사물의 가치평가만 생각해도 지금과는 전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개의 길들은 완전히 반대되는 미래같이 보이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자동차가 개발되어 인간이 걸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 반드시 인간이 언제나 씽씽 달린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때로 고의적으로 걷는다. 아마도 그와 비슷한 것이 미래일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기술로 우리에게 인간적인 환경 그러니까 정신적 물질적으로 편안한 환경을 꾸며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정보환경은 우리를 지금과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게 할 것이다. 겉보기에는 매우 고전적으로 보이는 식당을 비트코인을 팔아서 예약하는 현대인을 생각해 보라. 과거와 비슷한 것은 겉보기뿐이다. 우리는 마치 과거의 귀족처럼 식사를 할지 모른다. 혹은 19세기의 일본 유흥가를 재현한 세계에서 식사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겉보기이고 환상일 뿐이다. 그 세계는 식당바깥과는 다른 그만의 규칙이 돌아가는 작은 공간이다. 그 뒤와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추상적 관념들은 과거와는 전혀 다르다. 

 

나는 이제 단 한가지만을 더 말하고 이 글을 마치고 싶다. 그것은 그런 세상에서 미신이란 뭐고, 우리는 어떤 정신세계를 가지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보편적 진리의 세계는 앞으로도 계속 소중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누구도 그 중요성을 부정하려고 나서지 않을 거라는 점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보편적 진리에 대한 지식을 퍼뜨리는 계몽의 시대는 끝난지 오래다. 이제 더 중요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체험이다. 

 

계몽의 세계에는 하나의 진리, 하나의 과학, 하나의 현실만이 있다. 그리고 그 현실은 대학같은 교육기관에서 정리되어 모든 사람에게 교육되어지고 나아가 강요되어진다. 이것은 가치있고 저것은 가치없는 것이라고 거대한 지식의 시스템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런 가치관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은 비윤리적인 인간이고 미신에 빠진 미친 인간이다. 인생의 의미를 알고 싶다고? 그런 질문을 던지는 자에게 세상은 이렇게 말한다. 자 그럼 3천년전의 철학에서 부터 시작해 봅시다. 너무 힘든 일이다. 그래서 요즘은 철학에 관심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현실과 현실처럼 느껴지는 것의 차이는 뭘까? 우리는 진리의 삶을 살아야 할까 아니면 꿈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할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주의적 질문의 답이 뭐건 간에 우리는 그저 하나의 게임을 만들 수 있다. 이 게임을 하는 동안 우리는 특정한 규칙을 따른다. 우리는 일종의 역할극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이 게임이 즐겁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럴 때 본질적으로 즐거운 것과 즐거운 것으로 느껴지는 것의 차이는 뭘까?

 

야구는 내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을 프로게임이 발전하기 이전의 사람들은 이해못할 것이다. 아니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중에도 리그오브레전드는 내 인생이라고 말하는 프로게이머를 만난다면 그 사람을 이해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건 현실이 아니라 그냥 전자오락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건 인생낭비가 아닌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럼 당신의 현실은 정말 현실인가? 그 현실이란게 혹시 어떤 자본주의 게임은 아닌가? 아파트 평수가 더 커지면 이기는 게임이라던가, 죽을 무렵에 은행잔고가 남들보다 더 커져있거나 자식에게 집한채를 줄 수 있으면 이기는 게임이라던가 하는 그런 게임말이다. 지금도 우리는 가끔  몇억씩 융자를 내서 아파트를 사고 그 빚을 부지런히 갚는 일을 시작하는 젊은이를 보면 이렇게 말하는 노인들을 본다. '거참. 제대로된 젊은이로군!' 몇억씩 빚을 내는 젊은이야말로 제대로된 젊은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정말 현실을 살고 있는가?

 

애플의 성공이래, 혹은 공유경제나 가상화폐같은 것이 선전되어진 이래 우리는 종종 생태계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것은 국가를 세우는 일처럼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마치 인터넷공화국을 세우는 것처럼 하나의 게임의 법칙이 실행되는 조직을 만드는 일이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체험적으로 그 조직이 유용하며 지속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지만 진리의 세계는 계속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많은 사람들에게 그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지구가 평평하다는 생각은 미신이다. 하지만 편하니까 우리는 어떤 제약된 상황속에서는 그 미신을 쓰면서 산다. 그게 미신이라는 것을 알아도 말이다. 

 

이제 우리는 진리를 찾고, 객관적으로 단 하나 존재한다는 그 현실이 뭔가를 찾아내는데만 골몰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다. 윈도우 OS같은 것을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위에서 돌아가는 게임을 만드는데 집중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이제 각자의 수준에서 각자의 현실들을 만들어 내는 세상을 살고 있다. 물론 그 현실들이란 제한적 시공간과 제한적 문맥하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는 마치 남의 집을 방문하거나 남의 유튜브 채널을 방문하는 것처럼 서로의 현실을 방문하고 때로는 같은 현실을 공유하며 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시대에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는 어떤 현실을 만들고 싶은가 하는 질문이다. 이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수동적으로 현실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지고 그 하나뿐인 현실을 찾아헤매거나 찾아낸 뭔가를 모두에게 강요하는 세상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하고 비현실적이다. 이것이야 말로 바로 듀이나 슈마허같은 과거의 지성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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