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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역할의 분담

by 격암(강국진) 2020. 7. 3.

20.7.3

가족이 좋은 예라고 생각하지만 살다보면 우리는 여러가지 장소와 이유로 역할의 분담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청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동차를 수리하는 사람이 있고, 요리해서 밥을 주는 가정주부가 있는가 하면 회사 나가서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역할의 분담이라는 것은 종종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기는 하지만 아주 고약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임시의 것이며 꼭 필요하지 않으면 피해야 할 것이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의 교육이라는 것은 대개 역할의 분담을 권장하고 찬양하는 일이 많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예를 들어 캠핑을 간다고 해보자. 그러면 체계적으로 누가 밥을 하고 누가 텐트를 치는가를 나누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합리적이 되는 것은 그것이 필요악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한도내에서만 그렇다. 일이란 해보면 대개 생각과는 다르다. 개개인의 능력과 장점도 다르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불피우는 것이 자기 일이라고 정했다고 해서 불을 재빨리 피워놓고 내일은 다했으니 다른 사람이 힘이 들건 말건 누가 뭐라고 할 것이 아니라고 행동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별로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캠핑을 예로 든 것은 이런 경우는 역할의 분담이 가져오는 문제를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캠핑에서의 역할의 분담이란 일회성이다. 그것이 고착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실 역할의 분담이 가져오는 폐해는 이런 경우가 가장 작다. 실제로 가족의 일원으로, 사회의 일원으로 살다보면 뭐가 얼마나 힘든지를 서로 제대로 판단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쉽게 각자의 역할을 고정시켜 버리고는 자기가 제일 힘들다는 생각에 빠지는 것이다.  

 

엄마가 매일 같이 끼니마다 밥을 하고 집을 청소하고 빨래를 한다고 해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건 엄마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내 역할은 공부를 하는 것이고 엄마의 역할은 집안일을 하는 것이라는 식의 사고를 당연시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아이들은 자기 공부가 힘든 것은 알지만 집에서 엄마가 얼마나 힘든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사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집안일을 하는 엄마는 가정주부로서의 삶은 가장 끔찍한 것이며 그 일은 말할 수 없이 힘들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엄마도 공부를 해야 하고 학생으로서 성과를 보여야 하는 자녀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기는 힘들다.

 

우리는 고작 몇명으로 이뤄진 가족이라는 집단 내에서도 서로 각자의 역할을 정해놓고는 무관심해 지는 일이 많다. 입장을 바꿔본다는 일은 참 힘들다. 다들 결국 자기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역할의 분담이라는 것이 고착되기 시작하면 사회적인 규모에서 얼마나 우리가 무관심해지기 쉬울 것인가. 우리는 쉽사리 스스로는 비만으로 걱정하는 삶을 살아도 굶어 죽는 사람 앞을 태연히 지나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역할이 있고 나는 내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할 일로 바쁘고, 내가 할 일을 하는 한 나는 떳떳한 것이다. 사장은 사장의 일이 있고 비서는 비서의 일이 있다. 장관은 장관의 일이 있고 말단 공무원은 말단 공무원의 일이 있다. 

 

역할을 나눈다는 것이 이토록이나 끔직한 일인데도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들의 학교나 교육은 뭔가를 하기 전에는 일단 그 일을 체계적으로 분해할 것을 권장한다. 그리고 그 일이 여러사람이 동시에 하는 일이 되면 일의 체계적 분해란 결국 역할의 분담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 교육이란 대개 일을 잘게 잘게 나누면 나눌 수록 더 잘하고 있는 것이라고 권장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일을 나누고 규칙을 도입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설거지는 누가 하기로 하자, 밥은 누가 하기로 하자, 아이를 학교에서 데려오는 것은 누가 하기로 하자는 식으로 규칙을 도입하는 것이다. 우리는 역할의 분담이라는 것에 중독되어 대개 어떤 일이 잘 돌아가지 않는 이유를 역할이 제대로 분담되어 있지 않은 것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일도 많다. 모든 일을 법으로 해결하자는 식의 사고도 알고보면 이런 사고의 아류다. 

 

언뜻 들으면 이렇게 규칙을 정하는 쪽이 체계적이며 공평한 것같기 때문에 여러번 시도를 하다보면 규칙은 생겨나기 쉽다. 그리고 이런 저런 규칙을 도입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금새 엄밀한 역할의 분담에 빠지고 만다. 근거없는 역할 분담은 관행이 되고 나중이 되면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지 않게 된다. 세상 문제는 법이나 역할분담이 해결해 주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일이나 신경쓰면 된다.

 

우리는 반복해서 말한다. 

 

내 일도 많다. 나도 힘들다. 나는 내일을 다했으니 떳떳하다. 

 

물론 그렇다. 일이란 대개 아무리 적게해도 결국에는 거기에 적응되어 어려운 일이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는 말이 있다. 월급을 2백만원받는 사람이 5백을 받으면 아주 기쁘지만 거기에 적응되면 왜 나는 천만원을 받지 못하냐고 말하기 마련이다. 왜 나는 저 사람보다 백배나 되는 수익을 올려야 하는가. 그건 아마도 시장의 규칙이 적당한 중요도를 배분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공평한 역할의 분담이다. 우리는 쉽사리 이런 사고에 빠진다.

 

역할을 나눈다는 일은 얼마나 끔찍한가. 그것이야 말로 인간을 사회 시스템의 노예로 만들고 인간 이하로 만드는 습관이다. 우리는 어떤 역할을 하도록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냥 인간일 뿐인데 어느새 우리는 돈을 벌어오는 사람, 가정일을 하는 사람, 공부를 하는 사람, 이런 식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돈을 벌어오는 기계, 가정일을 하는 기계, 공부를 하는 기계가 되는데 역할의 분담이 고정되면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취급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설사 수십년을 어떤 사람이 하고 있더라도 그것이 그나 그녀 자체가 될 수는 없다. 그저 그 순간 거기에서 필요하니까 하는 것 뿐이다. 이것이 깨어있는 태도다. 하지만 우리는 자꾸 잠이 든다. 우리는 자꾸 게을러 지려고 한다. 이리저리 선을 긋고 뭔가를 떠넘겨 버리고 잊어버리고 싶어 한다. 모두가 그런 태도일 때 아무도 행복할 수 없다. 결국 좋은 세상은 좋은 규칙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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