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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아픔을 줄이는 공부, 아픔을 늘리는 공부

by 격암(강국진) 2020. 8. 13.

20.8.13

공부와 아픔은 어떻게 보면 관련이 없는 것같다. 아픔을 줄이려고만 하는 것이 공부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세뇌되고 둔해져서 자기 만족에 빠져사는 것이 공부한 사람이냐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변태가 아니라면 아픔을 그 자체로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결국 행복한 상태란 아픔이 없는 상태와 거의 같은 말이다. 세상에는 우리에게 아픔을 주는 것들이 넘치게 많고 그래서 그 아픔과 실패를 하나라도 피해보고자 우리는 조금 더 지혜로워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아픔이라는 측면에서 여러 주장이나 공부들을 보면 나름 생각할 거리가 있는 것같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바로 정체성 이데올로기라고 부를 수 있는 공부들이다. 페미니즘과 노동자 이론이 대표적이겠지만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로 자신을 이러저러한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 파악한다. 그 주요 논조는 억압이다. 내가 자식이기만 한 것은 아닐텐데 자식이라는 정체성을 의식하는 경우는 주로 부모로부터의 억압을 의식할 때이다. 내가 학생이기만 한 것은 아니고 내가 농민이기만 한 것은 아니며 내가 여자나 노조원이기만 한 것은 아닌데 우리는 주로 이런 정체성을 강하게 의식할 때 그와 관련해서 존재하는 사회적 억압을 의식하는 공부를 한다. 

 

이런 걸 꼭 일률적으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많은 경우 훌룡한 공부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런 공부들은 반편짜리들이다. 옳고 그름의 차원에서 흑백으로 믿기 시작하면 우리의 아픔을 줄이는게 아니라 우리의 아픔을 오히려 늘린다. 그런 일이 생기는 이유가 하나는 아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을 단일한 정체성으로만 파악하는 게 지나치기 쉽기 때문이다. 내가 흑인이라서 백인들에게 차별당하고 나쁜 환경에서 큰 것은 사실일지 모른다. 내가 여자라서 그런 것도 사실일지 모른다. 내가 가난한 동네출신이라서 그런 것도 사실일지 모른다. 우리는 그런 정체성의 의미를 기억하고 자각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에 빠지면 우리는 오히려 더 약해지고 아픔만 증가시킬 수 있다.

 

인종차별없는 세상이란 흑인이라서 우대받는 세상이 아니라 피부색깔에 대해 아무도 특별한 걸 못느끼는 세상일텐데 정작 흑인이란 사실을 가장 못잊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면 그런 세상은 오지 않는다. 이런 것때문에 나는 남자가 가난한 건 괜찮지만 가난하다고 자신감 없는 남자는 싫다고 하는 여자의 논리가 나오는 것이다. 외모로 인한 차별을 이겨 낸 사람은 외모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납작해지도록 강하게 항의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외모에 대한 생각을 잊은 사람, 심지어 뭐 이정도면 충분한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다.  

 

요즘 세상의 이데올로기는 서구적인 것이 많아서 정체성 공부가 모두 서양의 공부같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여러가지 틀로 자기 자신을 정의하고 바라본다. 그게 꼭 틀린 것도 아니다. 어제까지의 나는 스케이트를 타면 금새 넘어지는 나였는데 그런 경험들로 인한 나 자신의 평가를 모두 잊고 오늘부터 나는 김연아처럼 되는 길을 걷겠다고 하면 효율이 매우 떨어질 것이다. 힘든 꿈은 진작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평가에 근거해서 나 자신에 대한 테두리를 가지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위해 용기를 내서 그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도 훌룡한 것이고, 그렇게 자신이 가진 스스로에 대한 테두리가 때로는 매우 엉터리같은 것일 때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 테두리를 다 믿지는 말아야 한다. 하지만 이 말이 '한계는 없다, 어제는 어제일뿐' 같은 말을 문자 그대로 믿는 거라면, 그건 광신이다. 그러니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과 믿음이 존재하는 것은 필요한 것이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걸 깨보자는 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정체성 공부다. 너는 여자라서 뭐가 어쨌다는 것인가, 여자라서 이러저러한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너는 물론 김씨 집안의 가족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니 나는 누군가와 가족이라는 생각에 매몰되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중용이 필요하고 진리는 그 반대도 참인 경우가 많다. 소금많이 넣으면 몸에 해롭다고 했더니 소금을 절대 안먹겠다고 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이런 예는 당연해 보이지만 우리가 뭔가를 배울 때는 훨씬 어렵다. 우리는 쉽사리, 내가 뭐뭐뭐 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는 말에 빠져든다. 사실 이런 말은 때로 거의 의미없는 것이며 과학논리를 흉내낸 엉터리인데 말이다. 

 

과학은 흔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을 모아서 만들어 진다고 믿어진다. 그러니까 팩트들을 모아서 과학이론을 개발하고 그것이 이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준다는 식이다. 이 말은 과학에 대해서도 제한적으로만 옳다. 과학의 원형이랄까 모범생은 이제까지 물리학이었는데 물리이론은 아주 간결한 수학공식으로 정리된다. 그러니까 사실들을 수집하면 이런 이론과 저런 이론중 어느 것이 옳은지가 분명히 판별난다. 이런 특성은 물리적 법칙을 표현한 수학공식이 아주 정밀하며, 작은 수의 미지수들을 가진다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게 아니다. 나는 언론사 기자들이 팩트 운운하는 것을 보면 종종 기가 찬다. 역사는 단순히 사실의 집합일 수 없다는 말은 세상의 상식이 된지 오래다. 세상에는 사실이 무한히 있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는 현재의 입장에서 사실을 선별해서 역사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런게 상식이 된지 오래인데 언론사 기자라는 사람들이 세상에 대한 기사는 팩트에만 기반하면 된다는 저능아의 말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팩트는 무한하다. 선택이 없었다면 어떤 기사도 써질 수가 없고 선택이 있었다면 그것자체가 자신의 믿음과 편견이 강하게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다. 이렇게 분명한 오류인데도 이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과학자도 아니면서 자신이 과학을 하고 있는 줄 착각하는 사람이 세상에 정말 많기 때문이다. 과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이런 사람들을 보면 볼 때마다 기가 찬다. 과학을 하는 사람은 과학의 한계를 느끼는데 과학도 아닌 걸 하는 사람이 과학자 코스프레를 하며 니가 과학이 뭔지 아냐고 하는 것같다. 

 

심지어 과학도 물리학의 경계를 넘어서면 이런 접근법은 통하지 않는다. 뇌과학에 대해서는 뉴튼역학같은 정교한 수학적 원리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게 있을지 조차 의심스럽다. 그러니까 정교해 보이는 이론도 사실은 우리의 일상관념에 의존해서 만들어지는 면이 있다. 따. 라. 서. 뇌과학도 데이터로 이런 게 옳은지 저런게 옳은지 확실하게 판가름이 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뇌과학커뮤니티는 잘 인정하지 않겠지만 뇌과학같은 분야는 그래서 어느 정도 유행을 타게 된다. 

 

하물며 인생을 논하고, 사회를 논하는데 팩트가 뭐 어쨌다고? 그게 딱 나는 흑인이다같은 말에 매몰된 인간의 모습이다. 팩트는 무한하다. 그 무한한 팩트 사이에서 단 하나의 팩트가 가지는 의미는 반드시 크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걸 잊으면서 우리가 사실들을 공부하고 이해할 때 우리의 아픔은 줄어드는게 아니라 늘어날 수 있다. 

 

조작일 수도 있지만 인터넷에 떠도는 사연을 하나 읽은 적이 있다. 그 사연에 따르면 대학에 가서 페미니스트와 어울린 필자는 그때부터 일찍 아내를 잃고 딸을 혼자 키운 아빠와도 멀어졌다고 한다. 아빠도 남자, 그것도 한국 남자다라는 주장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제정신이 든다. 자기와 가장 가깝고 자기가 가장 고마워 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그제서야 자각한 것이다. 그녀는 아빠의 장례식에 페미니즘이 어쩌고 하는 동료가 단하나도 나타나지않았던 반면 그리친하지도 않다고 생각했던 주변사람들이 장례식에 나타나자 페미니스트 동아리 사람들과는 멀어졌다고 한다. 

 

이 사연의 진실성이 중요한게 아니다. 나는 페미니즘을 비판하려는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나는 여자다'라는 사실에 매몰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이런 상황이 충분히 개연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여자이기만 한게 아닌데 '나는 여자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는 말이 뭐 어쨌다는 것인가. 나는 군인이니까, 나는 월급쟁이니까 같은 말을 하면서 인간으로서는 해서는 안되는 짓을 하는 사람들도 세상에 있다. 다 같은 병증이다. '나는 군인이다,'라던가 '나는 월급쟁이다'라는 사실이 뭐 어쨌다는 것인가. 그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실이라는 생각이 병증이다. 자신이 감옥에 빠진 줄도 모르는 걸 병증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말도 일반론적으로 할 수는 없지만 아픔을 줄이고 행복을 주는 철학이나 공부는 종종 구성적이라기 보다는 치유적이고 해체적이다. 즉 '너는 뭐뭐뭐다'라는 말을 해주기 보다 '너는 단지 뭐뭐뭐는 아니다'라는 말로 우리를 가두고 있는 벽을 제거해 준다. 이런 공부는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으면 무섭다. 우리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어도 될까? 뭔가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절도있게 생각을 하기 위해 처음에는 이런 저런 걸 배워야 할 것이다. 초등학생이 무위자연 운운할 수는 아무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뭔가를 배우는 과정의 끝은 바로 그걸 부정하는 것이다. 다 배웠으면 잊어버려야 한다. 그 말을 다 알고, 그 말을 넘어서고 나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모르니까 규칙을 외우고 그걸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우리는 공부때문에 아플 수 있다. 공부때문에 미칠 수 있다. 왜 부질없는 고통을 스스로에게 가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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