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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집에 대한 생각

한국집을 아시나요?

by 격암(강국진) 2020. 7. 25.

최근에 박인석의 아파트 한국사회를 읽었습니다. 이 책은 많은 질문들을 던집니다. 왜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 되었는가에서 4베이 형 아파트가 대세가 된 이유, 담장이 정말 나쁜 것인지, 집값이 오르면 좋은 것인지, 한국의 아파트 평면도는 왜 이렇게 생겼고 왜 다 똑같은 것인지, 남향을 고집하는 것이 나쁜 것인지 등등 한국의 주거문화에 관련된 많은 질문들을 내놓고 이에 대해 저자의 답들을 풀어갑니다. 저는 매우 좋은 책이라고 느꼈고 많은 부분에서 공감했으며 대단한 공이 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노력을 기울인 저자에게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책을 읽어가면 갈수록 그리고 책이 마지막으로 가면 갈 수록 실망하고 아쉽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한국의 주거문화가 발전할 방법은 이런 보편적 접근보다는 한가지 질문에 공감가는 답을 주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국집이란 어떤 집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일입니다. 일본집이나 프랑스집이나 미국집이 아니라 한국집 말입니다. 문제는 출발점에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나의 관점에서 집을 보면서 외국의 집을 포용해야합니다. 그런데 조선이 망하고 일제를 겪으면서 이걸 할 수 없었죠. 해방이후에도 가난과 급작스럽게 들어온 서구문화때문에 이걸 할 수 없었습니다. 주거문화는 왕창 꼬였습니다.

 

하지만 돌아가는 것같아도 우리는 원천적 질문으로 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좋은 소리를 다 모아봐야 소용없으며 다른 사람의 것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자기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이해한게 아니라 자기는 비어있는 유령같은 존재인데 그저 남에게 끌려가는 것이니까요. 그런 사람은 또 다른 바람이 불면 다른 쪽으로 또 끌려갑니다. 그냥 유행을 쫒는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누가 항아리를 파는 곳에 왔는데 항아리가 뒤집어져 있었다죠. 그런데 그 사람이 그걸 보고 이 항아리는 위가 막혔네 하고 위에 구멍을 뚫습니다. 그러면 항아리가 깨진 항아리가 되겠죠. 그런데 구멍을 뚫고 보니 항아리가 바닥이 없는 겁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이 항아리는 못쓰겠네 바닥도 없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항아리를 깨는 사람이 뭘 잘못하고 있는지 즉각 알아차리고 그 사람을 비웃습니다. 하지만 집은 아주 여러가지 기능을 가진 복잡한 물건입니다. 게다가 집은 건물과 사람 그리고 자연적 사회적 환경이 복합되어 기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집을 보면서 어떤 집이 형편없다고 말하거나 너무 좋다고 자랑스럽게 말해도 사실 조금 관점을 달리해 보면 전혀 결론이 달라지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계단이 있는 집은 무조건 싫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은 전혀 신경쓰이지 않으며 위아래로 분리된 집이 좋게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그냥 취향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또 모두 한국인이죠. 즉 한국문화라는 공통의 것을 어느 정도 흡수하면서 한국인으로 삽니다. 원숭이와 비교하면 큰 코끼리 작은 코끼리 모두 코끼리입니다. 코끼리가 원숭이 옷을 입으면 편할리가 없죠. 이건 단순히 취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한국집이란 어떤 집인가가 대답할 이유가 있는 질문인 것입니다. 

 

역사적 이유로 단절되어 버린 한국의 주거문화가 만드는 문제는 오늘날에도 아주 심각합니다. 우리는 이도 저도 아닌 집에서 비싼 돈을 내고, 불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개인적 가족적 아픔도 겪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의 심각성이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인식되지 못하는 이유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우리가 한국집이 뭔지를 잊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평생 걸어다녀보지 못한 사람이 기어다니면서 원래 사는게 이런거 아니냐고 하는 거랄까요. 

 

이 책을 쓰신 분을 저는 존경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생각이 깊고 글을 잘쓰시죠. 제가 공감할 내용이 이 책에는 엄청나옵니다.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이 책에서는 흘러갑니다.

 

온돌은 라지에터같은 난방보다 시설비가 많이 드는 방식인데 한반도에서 널리 쓰인 특이한 난방방식이다. 조선이 중국이나 일본보다 특별히 더 부유했던 것도 아닐텐데 미스테리다. 

 

한국의 아파트는 그 평면구조때문에 프라이버시가 없다. 이는 한국인들이 서양인들보다 집단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이 분이 한국인이 남향집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실 때 보면 서구식 관점에 물들어 한국인을 비판하는 한국건축가들을 비판합니다. 유럽과 한국의 일조량과 우기분포를 설명하면서 한국의 기후에서 남향집을 고집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서구의 것이 선진적이고 옳다는 선입견에 한국인들의 남향선호를 이상한 후진성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죠. 참으로 공감되고 올바른 지적입니다. 하지만 이런 분이 쓰신 책도 집에 대한 시각이 서구 중심적이고 보편주의적입니다. 집을 그냥 집이라하면 솔직히 그 집은 상황상 서양집입니다. 출발이 서구 중심적인데  거기서 부터 시작해서 한국 생활 문화에 맞는 집과 마을까지 도착하려고 수정의 길을 걸으면 얼마나 먼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한국인이 프라이버시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집단주의적이라는 것은 제가 보기엔 전혀 반대입니다. 예절 좋아하고 체면좋아하는 한국사람들이 손님과 가족이 구분되지 않고 부모와 자식이,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다 섞여서 살아야 하는 집을 정말 좋아할까요? 집단주의적이라 프라이버시따위 신경쓰지 않고? 천만에요. 그 반대죠. 현대의 한국 아파트에서 알게 모르게 우리는 엄청나게 고문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문화는 그렇게 사는 걸 외국문화보다도 더 불편하게 합니다. 그 결과 한국 사람들은 집에 안들어 갑니다. 낮에도 밤에도 바깥에 있습니다. 친해도 집초대 보다는 카페에서 사람만나는 것이 보통입니다. 외국인들이 한국오면 신기해 하는 것중의 하나입니다. 한국은 카페가 너무 많고 근무시간이 길뿐만 아니라 밖에서 노는 시간도 길어서 결국 공부도 일도 집바깥에서 하고 집에 안들어 갑니다. 집에 가면 불편하니까요. 본래는 가난해서 그랬겠지만 이제는 엄청난 가격표를 가진 아파트에 사는데도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제가 위에서 말한 주거문화의 혼란이 심한 현실의 일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래도 아파트에 살까요? 왜 그래도 지금같은 집에 살까요? 앞에서 말한 책은 중요한 한가지 답을 말합니다. 그건 바로 아파트 단지개발때문이라는 겁니다. 즉 본래는 도시가 공공시설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아파트 단지를 개발해서 그 안에만 깨끗하고 시설좋게 개발하니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는 겁니다. 오랜 가난과 한국전쟁의 피해가 사회적 기반시설을 다 파괴한 상황에서 사적인 단지개발이라는 집단 개발이 더 좋은 주거환경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답이었다는 겁니다. 

 

저는 이게 옳다고 봅니다. 다만 이건 절반의 답입니다. 그래도 옳습니다. 그리고 불행한 현실이죠. 아파트의 문제를 다 나열할 공간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에 관광가는 사람은 없지만 요즘 서울의 북촌한옥마을이나 무슨 무슨 길에 놀러가는 사람은 많죠. 그것만 봐도 아파트 단지라는 공간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아파트단지는 시간이 지나 재건축이 불가능해 지는 순간 쓰레기장이 됩니다. 그리고 몇십년뒤면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다른 절반의 답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집을 잊었다.

 

오늘날 모두가 한옥에 살 수는 없습니다. 한옥으로 돌아가자는 게 아닙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한옥이 곧 한국집은 아닙니다. 새로운 재료도 나왔고 새로운 물건도 쓰는 우리시대에 조선시대와 같은 집이 한국집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뒤집어 말하면 지금의 아파트도 어떤 의미로 한옥입니다. 바닥난방을 하는 집이니까요. 그 단면도도 거실을 한옥의 마당으로 해석하면 ㄷ자 한옥집과 거의 같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물론 이것도 제대로된 한국집은 아니죠. 우리는 한국집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전통가옥인 한옥의 핵심중의 핵심은 온돌이며 온돌문화는 한반도에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바닥난방이 되는 서양식집에 삽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집은 그라탕에 된장을 넣은 것같은 엉망진창입니다. 싸고 행복하며 환경적 문제도 없는 그런 집과는 아주 거리가 멀죠. 비싸고 안에 사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며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비양심적인 집입니다.

 

미래세대가 50층 100층짜리 콘크리트로 촘촘히 채워놓은 땅을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재개발이 실패해서 사람이 안살게 되면 그건 그냥 거대한 쓰레기입니다. 결국 국가공동체가 해결해야 할, 혹은 미래세대가 한번에 해결해야할 쓰레기 입니다. 단독주택이나 저층연립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 수리하고 개선되어 시대의 변화를 따라 가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한국집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거대한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것같은 집에 우리는 만족하는 겁니다. 집이라고 하면 그저 양적으로 10억짜리 집이 5억짜리 집보다 좋고 50평짜리 집이 25평짜리 집보다 좋다는 식의 물질적이고 양적인 개념이 집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자기 맘에 드는 집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건축가들이 좋은 집을 설계하려고 하지요. 하지만 상식이 혼란된 한국에서 생각은 흩어지기만 합니다. 좋은 집이라는 게 유럽이나 일본의 집을 그대로 가져 온 듯한 집이거나 혹은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엉터리로 흉내낸 집이 되고 맙니다. 아니면 어떤 사람은 집이란 곧 아파트라고 단언해 버립니다. 단독주택이라고 하면 열변을 토하며 욕하는 사람 많습니다. 사실 바닥난방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한국의 아파트는 외국의 아파트와 전혀 다른 집이 됩니다.  온돌은 아주 뛰어난 난방방식이라 심지어 반지하에 살아도 바닥난방만 되면 그럭저럭 사람이 살만한 집이 됩니다. 외국인들은 반지하 집을 보면 처음에는 경악합니다. 바닥난방전통이 없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반지하에 산다는 건 토굴에 사는 것과 같은 것이라 너무나 비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전통주거는 그렇게 후진적이지 않습니다. 요즘 미니멀라이프라는게 인기더군요. 또 집에 있어서 즉흥적인 행위가 일어나는 목적이 불분명한 공간같은 것이 건축에서 강조되는 느낌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또 일본이니 유럽이니 하는 곳의 예를 듭니다. 그곳의 건축가나 철학자가 튀어나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냥 한옥을 떠올려 보세요. 그곳의 가구없는 작은 방하나를 보세요. 미니멀라이프는 이미 거기에 있습니다. 목적이 불분명한 공간? 한옥의 대청마루나 중정을 보세요. 한옥에 이미 다 있습니다. 미니멀라이프나 목적이 불분명한 공간에 대한 이야기는 뒤집어 생각하면 산업화로 인해서 물건을 소유하는 것을 추구하는 마음 그리고 분석적 사고를 강조하다 보니 모든 것에는 목적과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서구에서 퍼진 결과입니다. 즉 서구인이 자기의 정신세계에 대한 반성을 하다보니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비록 조선시대에 과학이 발달하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정신문화가 서구에 뒤진 것이 아닙니다. 가난했기 때문이 아니라 유교 불교 도교의 경전을 읽고 고민한 끝에 찾아낸 삶의 방식이 우리의 주거에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분석적 사고의 위험성같은 것은 불교나 도교에서 엄청 경고하는 것이죠. 그런 게 주거에 왜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무소유라는 책으로 유명하신 법정은 스님입니다. 우리는 천년이상의 불교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미니멀라이프가 단순히 우리 조상이 가난했기 때문에 우리 주거에 있겠습니까? 선비의 삶이란 이래야 한다는 말은 유교적인 것이니 다 헛소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뒤돌아 보면 그 안에 철학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전통주거문화도 그런 수천년 철학적 고민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한국인으로 삽니다. 집에 가서 슬리퍼 끌고 다니기 싫어하고 맨발로 살며 소파가 있어도 그 앞에 앉아서 티비보는 일이 많습니다. 여전히 김치를 포함하는 한국음식을 먹고 효를 가장 중요한 덕성으로 여기며 위아래를 따지고 향학열이 높습니다. 부모가 자식앞에서 키스를 스스럼없이 하고 이웃집 남편이나 아내와 서양춤을 맘대로 추고 인사로 얼굴을 부비는 사람들이 아니고 본래 유목민족이었던 사람들의 후예가 아닙니다. 

 

그런 우리에게 한국집이 뭐냐고 물으면 한옥이 아닌가 라고 생각해서 한국집이란 나무로짓고 기와지붕이 있고 나무 마루가 있는 그런 집이라는 말밖에 못하게 된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존재하는 집을 기준으로 하면 아파트가 한국집이죠. 이 불행한 이야기를 사실 저는 이미 여러번 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이게 한국집입니다라고 정답을 말해 드릴 능력은 없군요. 다만 한국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참고삼아 몇가지를 지적하면서 이 글을 끝내볼까 합니다

 

한국집이란 먼저 바닥난방이 있는 집입니다. 한국주거의 근본은 온돌입니다. 전에 한국집의 근본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고 거기서 지적했습니다만 많은 것이 여기서 나옵니다. 왜 집이 이렇게 생길 수 있고 왜 집이 이렇게 생겨야 하는지가 여기서 나옵니다. 그리고 한국식 삶에 익숙한 사람은 바닥난방이 없는 집을 집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온돌도 그렇습니다만 한국주거의 두번째 특징도 기후적 요소와 관련이 있습니다. 한국집은 바람이 잘통하고 좋은 햇볕이 드는 집이어야 합니다. 한국에서는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고 습하기 때문입니다. 바람잘 통하고 좋은 햇볕이 든다라는 것은 어디나 답일 것같지만 한국의 여름날씨는 유럽의 여름과는 다릅니다. 너무 덥습니다. 이게 되질 않으면 그냥 하루 종일 에어컨 틀며 에너지 낭비를 하고 냉방병에 시달리고 하거나 아니면 엄청난 괴로움을 참아야 합니다. 때로는 가족마다 의견이 달라 에어컨을 트는가 마는가로 싸움도 벌어지죠.  좋은 햇볕이란 여름에는 햇볕이 적게 들고 겨울에는 많이 드는 걸 말합니다. 이게 한국인이 남향을 선호하고 긴처마를 가진 집을 지었던 이유죠. 

 

한옥은 또한 이걸 성립시키기 위해서 담장을 치고 외벽이 없는 건물을 만듭니다. 아니면 내부로 꼬부려서 ㅁ자 형태가 되는 겁니다. 이걸 저는 한국집의 두번째 근본은 담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한국집의 담장은 서양집의 담장이 아닙니다. 그건 건물의 외벽입니다. 한옥은 너무나 개방적으로 지어져서 담장없이는 프라이버시가 너무 없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서양식 집을 상상한다음에 그 외벽을 떼어서 10미터쯤 바깥에 세워둔 형태가 한옥인 겁니다. 그러니 그 담장을 없애면 집을 허무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세번째로 한국집은 사생활을 위한 분리가 철저한 집이라는 겁니다. 사실 이건 지금 한국에 있는 집들과는 거리가 멉니다. 심지어 단독주택도 아파트와 내부 단면도가 같은 경우가 많죠. 그래서 이걸 의아하게 여기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게 한국문화입니다. 부자집의 경우입니다만 전통적으로는 아예 안채와 바깥채가 구분되고 손님이 들어올 수 있는 영역이 구분되어 있는게 한옥이었습니다. 사랑채은 제일 바깥쪽 건물이고 말입니다. 가난해서 한채의 건물밖에는 가지지 못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한옥과 서양건물을 비교해 보면 한옥 이야말로 남녀칠세부동석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돌은 칸칸이 작게 집을 구획하고 난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땔감이 얼마 없어도 어느 정도 여유가 되면 아버지와 딸이 같은 방에 자고 온가족이 모여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 예절의 근원은 온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수필가이며 방망이 깍는 노인이라는 수필로 유명한 윤오영은 1907년에 태어나 1976년에 사망한 분입니다. 이 분이 쓰신 농촌이라는 수필에 보면 윤오영은 길을 가다가 정자에서 비를 피합니다. 그걸 본 이웃사람이 아이에게 음식을 들려보내 대접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음식대접을 받고도 윤오영은 아빠가 집에 없다는 말을 듣고 직접 아이 엄마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아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달시킵니다. 모르는 사람이지만 때를 놓친 손님을 대접하는 것도 한국예절이고 남편이 없는데서 결혼한 여자와 외간남자가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도 한국예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한국문화입니다. 한국문화. 한국예절은 사실 접촉을 불편하게 만드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지난 몇십년간 그렇게 못살았던 것은 단순히 가난했고 집들이 파괴된 한국에서 한칸방 구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자가 된 지금도 그렇게 삽니다. 전통문화와 집의 부조화입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한국집의 마지막 특징은 절제입니다. 뭐든지 끝까지 다 쓰지 않고, 뭐든지 그 형태를 변할 수 없게 최종화 시키지 않는 겁니다. 이것 역시 서양문물로 인해 지금의 한국집들에서 사라진 면입니다만 한국 문화의 내부에는 존재해서 집과 문화가 부조화를 일으키게 하고 한국인들을 괴롭게 하는 한국집의 특징입니다.

 

한국 최대의 베스트셀러 중의 하나가 무소유입니다. 절제란 또한 단순히 참는게 아니라 삶의 지혜입니다. 인생은 앞일을 모르는 거니까요. 제가 좋아하는 티비 프로그램에 구해줘 홈즈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거기보면 가끔 참 조경이며 건물 인테리어며 기가 막히게 해둔 집이 나옵니다. 개인적으로 엄청난 공을 들인 것같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질문이 떠오릅니다. 저렇게 공들인 집을 왜 팔까? 아직 완전 새집인데. 집이 경매로 넘어가나? 

 

아이디어로 꽉찬 집은 한국집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집에 사는 것은 사실 재미가 없습니다. 미래가 없어서 더 할게 없습니다. 남이 정해준 대로 이제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런 집은 상황에 따라 변신할 수 없습니다. 내가 100평의 땅이 있다고해서 그 땅을 모두 꼼꼼히 나눠서 각각의 공간에게 기능과 이름을 주는 것은 우리의 철학이 아닙니다. 한옥의 마당에서는 꽃이며 잔디며, 나무며 조각상이 가득 차서 정원을 이루지 않습니다. 그냥 비어있죠. 더이상 인위적으로 손댈데 없이 자연경관을 바꾸는 것은 한국식이 아닙니다. 꼭 필요한 만큼만 바꾸고 나머지는 내버려두는 절제가 있는 것이 한국식입니다. 

 

좀 불편해도 욕심을 다 채우지 않고 제한된 가운데서 해결해 보려고 하는 것이 한국집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두가지가 생깁니다. 첫째로 절제하면 또 다 방법이 생깁니다.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아 고민하면 다 방법이 있는 것이로군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두번째로 생기는 것은 여유입니다. 우리는 가진 걸 다 써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백평땅이 있다면 주변에 담장을 치되 그 안에 진짜 작은 집을 짓고 나머지 대지는 그냥 정돈만 한 채 빈 땅으로 내버려 두는 것이 한국집이라고 생각합니다. 담장없애고 그 작은 집치우면 언제든지 빈땅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같은 집이 한국집입니다. 그러면 집이 작아서 불편합니다. 더 큰집에 대한 욕심도 날겁니다. 하지만 쓰지 않은 공간이 그 불편함을 상당 부분 없애줍니다. 그리고 그 집은 뭔가 아이디어가 있으면 더 해볼 여지가 남아있는 집으로 매력을 유지하게 됩니다. 완성되지 않은 집이 더 좋은 집인 겁니다. 절제는 물론 건축비를 줄여주기도 합니다. 

 

정리하자면 한국집이란 바닥난방이 되고, 통풍이 잘되고 좋은 햇볕이 들며, 사생활을 위한 분리가 확실하고 절제가 있는 집입니다. 이 모든 걸 만족하면서 대중적이 될 수 있게 싸게 지을 수 있는 집은 한국에 아직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게 한국집이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의 피속에는 이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구문화를 많이 배웠죠. 건축학과만 해도 조선에 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서양학문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서양인이 아닙니다. 지금 신발이 없다고 해도 코끼리에게는 코끼리 신발이 필요하지 원숭이 신발이 필요한게 아닙니다. 

 

사실 제가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이유도 한국집의 이미지를 저 나름대로 찾아보기 위해서 입니다만 저로서는 우수한 다른 한국인들이 진짜 한국집을 빨리 찾아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전에는 작게는 제가 살 곳을 찾기가 힘들고 크게는 다른 한국인들이 살기가 왜 괴로운지를 모르면서 괴로워하는 일이 계속될 것입니다. 왜겠습니까. 코끼리가 원숭이 신발을 신고 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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