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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BTS의 빌보드 1위와 한국 문화의 강점

by 격암(강국진) 2020. 9. 3.

몇일전에는 BTS가 빌보드 핫100 순위에서 1등을 했다고 해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 대통령이 축하인사를 하고 방송마다 이 사건을 다뤘다. 코로나로 우울한 시간속에서 이 작은 소동은 기분 좋은 일이다. 이 사건은 단순히 몇명의 천재가 만든 일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업적이다. 그리고 왜 한국 문화 컨텐츠는 인기가 있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이해하고 미래로 가는 길을 찾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 일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 본다. 왜 한국 문화 컨텐츠는 인기가 있을까? 

 

 

한류가 인기있는 이유는 하나는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가 역동적이고 미래적이라는 사실도 매우 중요하다. 한국은 민주국가와 부유한 국가로의 결정적 개혁이 진행중이거나 끝난지 얼마되지 않은 나라다. 국가를 개혁시킨 세대가 아직도 멀쩡히 살아있다. 그래서 우리는 할 말이 참 많고 그 내용도 다른 나라와는 좀 다르다. 그런 개혁이 먼 과거에 일어나서 아직도 링컨이니 케네디를 이야기하고 아직도 메이지 유신때의 료마를 이야기하는 외국들과는 같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일본을 오늘날의 일본이게 한 결정적인 사건은 메이지유신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상당부분 메이지 유신 시대의 사고방식에 빠져 있다. 미국을 미국이게 한 것은 남북전쟁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여전히 그 시대의 사고방식에 빠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시작되면 그 패러다임이 내부적으로 극복되어 새 패러다임으로 전환되기 전에는 그 사회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유지하기 위한 철학과 윤리를 반복해서 교육한다. 그것이 책이되고 영화가 되고 연극이 되고 그림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아직 단순하고 느리게 움직이던 시절에 선진국으로 진입한 나라들은 그 시절의 정보를 문화적 유전자와 사회적 정체성안에 깊이 각인하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서서히 수정되어 전환되지 않는다. 반드시 불연속적으로 그리고 거대한 댓가를 지불하고서야 갱신된다. 나는 이 글에서 그들이 뛰어넘어야 하는 숙제가 뭔지를 분명히 하고 싶다. 

 

한국을 지금의 한국이게 한 사건은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운동이다. 한국 영화중 역사상 가장 흥행한 작품들의 목록에 택시운전사, 변호인 그리고 1987의 민주화 3부작이 포함되어 있는 것만 봐도 우리는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개혁은 아직 다 끝나지도 않았다. 그만큼 한국의 정체성은 새롭다. 그리고 그만큼 한국사회의 문화적 유전자는 최근 사회를 반영한다. 이 젊은 정체성이 어떤 다른 컨텐츠를 만들어 내는가를 나는 이 글에서 좀 더 잘 다뤄보려고 한다. 

 

한류를 매력적이게 하는 또 다른 요소는 한국은 미래적인 국가라는 사실이다. 첨단 가전제품과 IT 기술이 한국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많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이란 첨단 전자제품으로 채워지고, 치안이 안전하고 자동차가 넘치는 나라다. 미래란 이 세상에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다. 그러니 다른 많은 나라 사람들은, 특히 젊은이들은 그 미래속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한국의 드라마, 영화 그리고 노래들을 더 흥미롭게 느끼게 된다. 한국은, 과거 유럽이나 미국을 보면서 우리가 그렇게 생각했듯이, 점점 더 많은 나라의 사람들에게 언젠가 미래에는 그들이 도달하고 싶은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길거리의 거대한 디스플레이나 와이파이연결이 되는 지하철을 보면서 미래를 느끼는 것은 쉬운 일이다. 나는 그런 표면적인 것 말고도 왜 한국 문화가 미래적인 것인지를 이 글에서 다루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역동적이라던가 미래적이라는 말의 뒤에 있는 한국 문화의 특징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유한의 문화로 표현한다. 유한이란 한계가 있고 경계가 있다는 말이다. 나는 이것을 게임의 문화라고도 부르고 싶은데 게임이란 시공간적으로 유한한 경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유한이니 경계니 게임이니 하는 말들은 한국 문화가 지속적으로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며 특정한 규칙이나 법칙은 특정한 한계내에서만 지켜지는 것이고 우리는 다수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다수의 게임을 하는 존재라는 메세지를 보낸다는 것을 말한다. 

 

 

여러분이 만약 한류에 관심이 많아서 다수의 한류 관련 외신 기사를 읽었다면 여러분은 하나의 표현에 점점 익숙해 질 것이다. 그것은 한국 영화나 음악이 장르 파괴적이라는 것이다. 한국 영화로 가장 유명한 것은 단연 미국 아카데미를 휩쓴 기생충이다. 기생충도 그런 말을 들었다. 그리고 기생충이 아니더라도 한국 문화물이 몇개의 장르를 뒤섞는 것은 이제 아주 당연한 일이 되었다. 예를 들어 진지한 사회고발물이라고 해도 한국 영화라면 그 안에는 코미디적인 요소가 꼭 들어간다.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기생충도 그렇지만 최근에 상영했던 사라진 시간같은 영화도 장면 장면마다 영화의 장르가 바뀐 것같은 느낌을 준다.

 

이것은 영상에서만 그런게 아니다. k-pop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장르를 여러개 넘나드는 것이다. 언젠가 부터 노래에 랩부분이 없으면 이상할 정도로 랩부분이 꼭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소녀시대가 I-got-a boy를 내놓을 쯤이 되자 외국 사람들에게는 미친거 아니냐는 식의 반응이 나올정도로 여러 장르가 하나의 노래안에 동시에 나오게 되었다. 물론 BTS의 노래들도 그렇다. 한국 아이돌들의 뮤직비디오를 보다가 한 장르에 속박되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컬러 티브이를 보다가 정지된 그림을 보는 느낌일 정도다. K-pop은 그만큼 다면적이다. 장르전환의 순간들이 반드시 포함되어 핵심적인 매력을 발한다. 그 정도가 외국인들에게는 가끔은 지나쳐서 강박증이 있어 보인다고 할 정도다. 

 

이런 특징은 현대사회의 다층적 게임구조에서도 나타난다. 현대인은 대개 수십개의 역할극을 하는 것처럼 산다. 식당에 가는 것은 식당게임에서 손님역을 하는 것이고, 집에 귀가하면 부부 역할극을 하며, 회사에서는 직원 역할극을 한다. 밤에 인터넷 카페에 갈 때는 다른 아이디로 다른 인격을 보이고 주말에 어릴적 친구를 만나면 우리의 성격은 다시 한번 바뀐다. 우리는 어떤 게임에서는 초심자이고 졸병인데 다른 게임에 가면 군중을 이끄는 리더일 수 있다. 이번주말에 광화문에 모여서 플래시 몹을 한번 해보자고 주동을 한다면 그저 편의점 알바일지도 모르는 당신은 순식간에 리더로 변신할 것이다. 이는 모두 다른 경계들안에서 다른 규칙들이 적용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올림픽 육상선수라도 달리는 일이 오버워치 게임내부의 일이라면 경험이 무의미하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게 있다. 우리는 경계와 게임의 전환을 꼭 인식해야 한다. 부족사회에 사는 사람처럼 내가 이 지역의 유지이니 모든 일에 있어서 대장이고 지도층이라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건 게임의 규칙을 깨는 일이고 현대 사회의 섬세하고 복잡한 구조를 파괴하는 일이라 결국은 사회적으로 처벌받거나 아니면 사회를 파괴하고 비효율적으로 만든다. 뛰어난 물리학자는 요리사에게 요리를 지도하려고 해서는 안되고 회사의 회장이라고 해도 그 분야의 초심자라면 동호회에 가서 자기가 우두머리가 되려고 해서는 안된다. 대통령도 내가 다해봐서 안다고 잘난척 하는게 아니라 식당에서는 주인말을 들어야 한다. 경제학과 교수라도 주식투자에 대한 전문가행세를 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이게 현대사회다. 

 

이것은 단순히 다원사회라는 말로 표현될 수 없다. 절과 교회가 나란히 있을 때 같은 사람이 절에 가면 불교도로 행동하고 교회에 가면 기독교도로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다원사회로 부르지 않는다. 다원사회는 유한의 문화보다 더 배타적이다. 개인은 그저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다른 영역이 그저 공존할 뿐이다. 하지만 게임의 문화, 가상인격의 사회에서는 다수의 정체성들이 자연스럽다.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나는 없다. 우리는 게임들에 참여할 뿐이고 뭐뭐인 척 할 뿐이다. 물론 온라인 게임안에서 다른 배우자를 가지는 일이 윤리적인 논란을 일으킬 때도 있지만 말이다. 

 

게임의 전환과 경계를 인식하는 일은 훈련이 필요한 쉽지 않은 일이고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낯선 일이다. 이것이야 말로 현대사회의, 그리고 미래사회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과거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쉽게 일상에 빠져서는 근거없는 관행을 법칙으로 여긴다. 월급을 주고 직원를 고용한 사장이 회사 내부에서 지시를 하는 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군대에서 계급이 높은 상관이 계급이 낮은 병사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경계가 없이 그 사람의 윗사람이라는 생각에 빠져드는 일은 옳지 않다. 하지만 이 옳지 않은 일에 빠져드는 사람은 정말 많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을 하나의 가족이나 부족처럼 여긴다.

 

이런 사고를 우리는 부족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족주의에 빠지는 일중의 하나가 바로 하나의 장르에 몰입하는 것이다. 당신이 전쟁액션영화를 보고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자연히 몸이 재빠르고 강력한 펀치를 날리거나 총을 잘쏘는 사람이 영웅으로 보일 것이다. 전쟁액션영화속의 상황은 극단적이라 설득을 잘한다던가, 귀신에 대해 잘 안다던가, 다정한 미소를 잘짓고 옷을 잘입는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액션영화를 보면 당신은 단 한사람이 거의 모든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내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그 영화속의 세계가 액션영화라는 단일장르에 속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그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다. 그러니 타인의 말을 듣는 것은 시간낭비다. 그래서 이 단일장르의 세계는 자연히 독재가 옳은 것이라는 생각을 심는다. 영화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이고 하나의 장르에 빠진 당신은 어쩌면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현실의 정치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아놀드 슈월츠처럼 강력한 액션을 보이는 사람이다라고 믿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일찌기 이 세계를 철학자가 파악할 수 있는 이데아 시스템의 조잡한 복제품으로 파악했던 플라톤도 철학왕에의한 독재를 주장했다. 당대의 환경에서 그 의미가 어떻게 해석될수 있건 오늘날의 환경에서 말하자면 턱도 없는 이야기다. 

 

유한의 문화 속에서 스스로가 유한한 존재라고 느끼는 사람은 자연히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이 점은 유한의 문화, 게임의 문화가 만드는 가장 중요한 결과들 중의 하나다. 유한의 문화는 우리의 역할이 순간적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바뀌는 관계와 공존의 문화다. 타인은 소중하다. 우리의 행복은 타인과 함께 해야 가능한 것이다. 이런 관계의 문화는 지식과 권리와 물질의 독점적 소유를 강조해 온 서구 개인주의에 질린 사람들에게 치유의 문화가 되기도 한다. 여기 단 하나 객관적 세계속의 내가 존재할 뿐이라는 독단적, 독점적 문화에 질린 사람들에게 말이다. 

 

 

미국 영화의 전형적 영웅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캡틴 어메리카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찌질한 캐릭터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나도 힘들다고 우는 캐릭터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 영화의 영웅은 송강호다. 한국의 영화에서는 영웅은 거의 반드시 자신의 찌질함과 한계를 들어낸다. 그들은 장르가 중첩되는 문화컨텐츠안에서 스스로가 제한적인 존재라는 것도 반드시 표현한다. 한국식 영웅은 슈퍼맨같은 능력과 불굴의 의지로 괴물과 싸우는 존재가 아니다. 모두들 찌질하기 짝이 없지만 정때문에, 인간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에 찌질한 소시민이지만 어쩔 수 없이 행동에 나서는 사람들이다. 바로 영화 괴물에 나오는 주인공 가족들처럼 말이다. 

 

서구의 가수들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해도 대개 자기 정체성과 카리스마가 매우 강하다. 멋져지려고 하고, 강해보이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팬들에게 너도 영웅이 될 수 있다, 너도 멋지다고 말한다. 그들은 언제 어느 순간이나 살아숨쉬는 그리스신처럼 되려고 하는 것같다. 길에서도 컨서트장에서도 마이클 잭슨은 마이클 잭슨이다. BTS도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다. BTS는 계속해서 나도 인간이라고 말한다. 나도 아프다고 말한다. 그러니 네가 아픈 것이 당연하고 너도 너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미국 문화는 사람들에게 너는 영웅이라고 말하지만 한국문화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모두 인간이라고 인간 이하가 되지는 말자고 말한다. 

 

관계의 문화가 잘들어나는 것이 멜로물이다. 한국 연애드라마에서 추구하는 것은 주로 관계다. 하지만 서구 드라마는 사랑이란 곧 섹스인 것같아 보인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서양 여성들은 후기에서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말하곤 한다. 서구의 제국주의적, 소유주의적, 남성적 문화속에서 살아온 그녀들은 스스로 사랑은 곧 섹스라고 여겼는데 이제 보니 그게 옳지 않았다는 것이다. 노출신 하나 없는 도깨비같은 한국드라마를 보면서 저기에는 사랑이 없다고는 도저히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그런 관계에 대해 보고나니 많은 서양식 연애가 애초에 사랑도 아니었던 것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한국 멜로 드라마에서는 연인이 될 두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주로 서로를 믿게되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즉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주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해도 생기고 풀어야 할 난관도 많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 관계가 개인적으로 유일무이한 것이라는 점이다. 바람직한 남녀관계의 규칙이라는 제목의 책에 써있을 것같은 어떤 보편적 규칙들을 죽 늘어놓고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 공평하다라는 식으로 하는 것은 계약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하는 사랑은 고정된 계약이 아니다. 표준적 계약따위는 사랑과 연애의 본질이 아니다. 이것이 한국 멜로에서의 연인들의 입장이다. 보편논리는 우리의 사랑을 지배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모두 다르고 계속 변하니까. 

 

하지만 사랑이 곧 섹스라면 즉 성적인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 사랑에 대한 추구라면 연애 문제는 훨씬 간단하다. 상대방이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 성적인 자극을 최대화할 수있도록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다. 섹스테크닉에 대한 지식이 제 아무리 복잡하다고 해봐야 그것이 사람마음만큼 복잡할리가 없다. 그러니까 서양 드라마에서는 술먹다가 눈맞으면 그냥 연인이고 아니면 몇달을 동거하며 날마다 섹스를 하는데도 아직 둘은 서로가 연인인지 아닌지 확신이 없다.  섹스만이 사적인 것이다. 나머지 자질구레한 인간관계는 표준계약서에 따라 처리하면 된다. 잘 안되면 표준계약에 능통한 상담가에게 가서 상담을 좀 받으면 된다. 그러면 변호사가 법적인 조언을 하듯이 관계 전문가가 누가 불공정한 행위를 하는지 교통정리를 해 줄 것이다. 사적이고 특수해서 공개하지 않는 것은 오직 성적인 체험이고 나머지는 보편화되어 있는 관계랄까. 

 

요즘에는 컴퓨터를 쓸 때 마우스를 쓰는 것이 대중화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거의 어느 순간 이 미래적인 기술을 누가 만들어서 세상이 바뀌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은 마우스라는 기술은 계속 있었다. 1968년에 최초에 발명되었는데 너무 일찍 발명되어서 로열티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몇십년뒤에나 마우스가 대중화되었기 때문이다. 미래는 이미 발명되어 우리 옆에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사소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유한의 문화, 게임의 문화는 미래 문화다. 그것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규칙을 추구하는 문화를 뛰어넘는 새로운 추상적 문화이며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다원주의 문화를 뛰어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만큼의 더 큰 포용력을 가진다. 소유적이고 개인적인 서구 문화는 세계를 주도하면서 다수의 사람들을 억압하고 상처주고 있다. 

 

소유의 문화란 제국주의 문화이고 팽창을 전제로 한 문화다. 멀쩡히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미대륙을 발견했다고 주장하고 개척한다면서 점점 더 많은 땅을 빼앗아 가면서 더 부자가 될 때 그것을 발전으로 부르고 미래로 여기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연스런 문화다. 서구인들도 이런 문화에 대해 반성을 했지만 한계가 있다. 제국주의의 후예들은 설사 그들중 소수가 반성을 한다고 해도 자신들의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들을 잘난 선진국으로 만든 것은 개척과 침략의 역사였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지 못한 그들은 여전히 그들이 잘나갔던 과거를 그리워 하고 그 시대의 문화상품들을 재생산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진국들은 소유의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인터넷을 미국이 처음 발명해도 인터넷 대중화는 한국에서 먼저 일어나는 것처럼 문화적 변혁은 소수 지식인의 깨달음이나 지적만으로 되지 않는다. 

 

소유의 문화는 보편화 시킬 수 없다. 영원히 지속될 수도 없다. 이것은 전 세계인들에게 너희들도 모두 서구인들처럼 살 수 있다고 사기치는 것이다. 무한한 성장으로 지구의 모든 인간들이 무한한 소비를 하는 미래가 정말 가능한가? 가난한 빈민에게 나의 사치는 경쟁에 이긴 나의 권리이며 너도 나처럼 무한경쟁을 뚫고 꼭대기에 올라오면 잘먹고 잘살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정말 옳은 조언인가?

 

제국주의를 거친 적이 없는 한국은 관계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 물론 우리도 서양처럼 순도 100%일 수는 없다. 우리도 소유의 문화를 가졌고 우리도 서구 문화에 중독되어 있다. 지금도 한국은 개혁의 진통을 겪으며 미래로 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서구와 우리가 같지는 않다. 수천년간 거의 정복전쟁없이 살아온 한민족이 정복자들을 영웅으로 숭배하며 살아온 그들과 같을 수가 없고 그 차이는 문화속에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아이폰을 세계가 쓸 때 한국인들은 쓰지 못했지만 스마트폰 대중화는 한국이 더 빠르다. 우리가 설혹 서구의 어떤 사상가가 미래 문화를 말했다는 것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미래 문화는 여전히 한국의 것일 수 있다. 

 

BTS로 인해 세계인들이 치유받는 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한국 문화가 미래 문화이며 대안문화이고 인기가 있는 것은 이런 이유다. 어떤 사람들은 사소한 몇가지 정책이나 테크닉을 한국에서 배우면 다른 나라가 그것을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거나 이 문화적 영향력을 제한적으로만 평가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와 정반대일 수 있다. 문화흡수에 적당한 나라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건 내전수준의 격통을 겪어야 하는 일이다. 한국의 음악과 한국의 영화, 드라마가 외국에서 성공할 때 이 영향력은 제한적이지 않다. 이건 그들을 위해 만들어진 일회성의 컨텐츠가 아니다. 한국내부의 문제해결을 위한 고민에 외국이 반응한 것이다. 한국 문화의 영향력은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정도로 더 커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거꾸로 한국의 개혁을 완결시키고 한국이 미래에 안착하게 되는데 큰 힘을 보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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