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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청춘드라마가 없어진 한국

by 격암(강국진) 2020. 10. 15.

내가 그다지 추천하는 드라마는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보는 청춘기록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박보검이 나오는 드라마라서 시청률은 높은 것같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다 보니 이 청춘 드라마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청춘드라마이거나 청춘드라마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드라마가 꼭 청춘드라마일 필요는 없다. 그러고 보면 요즘은 청춘드라마가 거의 없다. 

 

청춘드라마의 본질은 무엇인가? 각자 정의하기나름이겠지만 강조를 하기 위해 본질이라고 까지 말하려고 하는 이것을 나는 정체성찾기라고 생각한다. 즉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찾는 것이고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견뎌내기 힘들어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전공을 선택하지도 대학에 합격하지도 않은 고등학생이거나 학생조차 되지 못하고 재수학원을 다니는 재수생, 취업자리를 알아보는 취준생 같은 사람이 청춘이다. 구체적으로 뭔가를 하는 사람이 되지도 못한 사람이다. 축구를 못하는 축구선수나 사진을 잘 못찍는 사진작가는 그래도 이미 축구선수이기는 하고 사진작가이기는 하다. 그런데 청춘의 문제는 아직 뭘 못하는 사람조차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냥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껴진다. 

 

이 정체성 찾기의 문제는 반드시 청춘의 문제만은 아니며 젊다고 모두 이런 문제를 겪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며 고시원에서 살아도 그 길에 대해 한치의 의심도 없다면 이 사람은 정체성 문제를 겪는게 아니다. 문제는 시험에 통과하는 것이 문제다. 하지만 이미 회사를 다니고 있다고 해도 이 길이 정말 내 길이 맞는지 내가 이걸 계속할 수는 있을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다면 그것은 정체성 문제라고 할 수 있으며 물론 퇴직한 중장년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청춘드라마의 본질적 문제인 것은 이것이 그만큼 젊은이들에게 흔하고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라서 뭐가 될 것인가, 뭘 하면서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며 어떤 꿈을 쫒아야 할 것인가. 어른들은 자기의 과거를 잊고 쉽게 젊은이들에게 너는 꿈이 뭐냐고 묻고 때로는 너는 꿈도 없냐고 비판하지만 사실 어릴 때부터 나는 이게 꿈이라고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인생의 큰 문제 하나를 해결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질문에 잘 답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자기도 하지 못한 일을 가지고 젊은이들을 질책하고 있는 셈이다. 

 

3-40년전의 소설이나 영화에는 이 정체성 문제를 다룬 것들이 넘쳐났다. 기본적으로 다 이런 작품들이랄까. 그런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대개 이리저리 방황하고 미친 짓을 한다. 가야할 방향을 찾지 못해 오늘은 철학자고 내일은 광대며 모레는 연애에 목매고 술에 취하는 그런 인물들이다. 티비 드라마도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한 청춘드라마가 많았다. 

 

사회적으로 봐서 이는 한국 사회가 지금보다 더 혼란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베이비붐 세대가 고등학생 대학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는 대학생도 청춘이었다. 신분은 대학생인데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대학생들이 여전히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 몰랐고 전공하는 책보다 문학서적이나 사회과학서적 혹은 철학책을 보는 일에 시간을 많이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말하자면 대학생이 여전히 일반론에 몰두하면서 나는 뭘해야 할까를 찾는 시대라고나 할까.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따라 다르기는 하다. 그때도 초등학교때부터 장래희망이 뭔지 분명했으며 대학에 들어가서 열심히 전공공부만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정체성 문제로 방황하는 청춘은 세상에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봐서 당시에 비하면 요즘은 훨씬 더 젊은이들이 일찍부터 한길로 달린다. 초등학생이 막연히 과학자를 꿈꾼다는 식이 아니라 요즘은 초등학생도 성형외과 의사를 하면 수입이 좋고 공무원이 되면 직업안정성이 좋아요라고 말할 것같은 시대다. 옛날의 대학생들은 동아리활동을 하면 주로 먹고 노는 것이었고 그러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주였지만 요즘은 그런 소비적 모임은 하지 않는 것같다. 요즘의 한국 대학생들은 장래 취업이나 창업에 도움이 될 활동을 하느라 바쁘다. 

 

정체성 문제만이 인생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까 청춘드라마가 줄어든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청춘드라마가 아닌 드라마의 대표적인 예가 형사드라마나 의학드라마처럼 어떤 특정한 직업의 세계를 그리는 드라마다. 예전에는 형사드라마나 의학드라마도 결국은 연애물이 되곤 하는게 한국이었는데 이것도 그때가 청춘드라마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내 사랑을 찾는 문제도 일종의 정체성 문제다. 하지만 지금은 훨씬 전문적인 직업 내부의 세계를 그리는 일이 많고 연애가 아예 안나오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그런 드라마들도 유익하고 재미있다. 

 

문제는 뭔가가 잊혀지고 당연시 되어지는 것이다. 지금도 방황하는 청춘은 넘쳐날 것이다. 방황하고 싶은 청춘은 많을 것이다. 청춘드라마가 넘쳐나던 과거에는 방황하는 것이 멋져 보였고 그래서 방황하는 것이 허용된 것처럼 보였다. 일찍 내 삶은 이거다라고 고정하기 전에 이런 저런 세상을 구경하고 방황해 볼 수 있을 것같았다. 그리고 그런 방황이 숨쉴 틈을주고 자신의 내적인 문제를 정돈할 기회를 주기도 했을 것이다. 

 

요즘 세상은 젊은이들을 너무 일찍 어른으로 만들기도 하고 동시에 너무 오랜동안 어린이로 남겨두기도 한다. 요즘 세상은 어린이에게 셀러리맨의 정장을 입혀서 어른 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같다. 그래서 행동도 규칙도 어른처럼 하려고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래서 요즘은 더욱 더 오랜간 사람들이 어린이로 남는다. 방황이란 자율이다. 방황이란 내가 방향을 잡아야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방황이란 시간 낭비만은 아니고 바로 정체성 문제라는 필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니까 방황이 없는 세대는 오히려 내적으로 어린애같아진다. 30이 넘어도 부모가 초등학생관리하듯 관리받는 경우도 있다. 부하직원의 부모가 자식의 직장상사에게 우리애가 무슨 문제냐고 전화를 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청춘드라마가 없는 시대란 이런 의미에서 청춘의 내부가 썩어들어가도록 만드는 시대일 수 있다. 정체성의 문제가 심해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당신의 앞에는 엄청난 계약서같은 갈림길이 있다. 여기에 사인하면 당신은 종신제 노예가 될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이 계약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걸 계약하면 뭘 얻게 되는지 그게 자기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른다. 겁이 날 수 밖에 없다. 이걸로 내인생 끝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부모나 세상이 정해주는 대로 미친 듯이 뛴 사람은 자기 인생의 의미를 잘 모른다. 왜냐면 그길로 뛰느라 다른 인생을 둘러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사기 당하기 딱 좋은 사람이다. 초등학생때 방황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른으로 사는 어린이는 삶이 공포물이다. 책임질 수 없는 일들에 어른인척 하면서 사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나는 이 세상에는 총론은 많은데 각론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는 일반론은 넘쳐나는데 코앞의 문제를 해결할 내 주변을 보는데는 실패하고 있다는 말이다. 거대 담론과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코앞의 삶에 집중하라는 메세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는 흔했다. 

 

하지만 청춘드라마가 없는 시대에는 각론만 너무 많다.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은 인기가 없다. 방황해도 괜찮다고 말해주질 않는다. 남들은 이미 방향잡아 미친듯이 뛰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의 확고한 결혼관을 가진 초등학생을 몇명인가 만난 적이 있다. 한편으로 꽤 똘똘하다 싶지만 걱정이 된다. 청춘드라마나 방황은 자기 틀을 깨기 위한 것이다. 이 세상이 이젠 꽤 안정되었고 그래서 이미 있는 틀도 멋진 것일 수는 있지만 그래서는 스스로를 새장속에 가두는 꼴이 되기 쉬울 것이다. 자살하는 사람이 전보다 많아진 것은 이런 영향도 있다고 나는 믿는다. 문제가 심각해 지면 그렇게 된다. 엄청나게 뛰었는데 제자리걸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혹은 사실은 가능성이 많지만 아무 가능성도 보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깊게 좌절한다. 이제까지의 노력이란게 자기 틀을 깨지 못하는 노력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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