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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일본의 어른, 한국의 어른

by 격암(강국진) 2021. 2. 18.

12.2.18

살다보면 그리고 책을 읽다보면 어떤 말이 자꾸 떠오를 때가 있다. 오늘은 아내를 기다리며 차에서 가나이 마키라는 일본작가가 쓴 술집 학교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시시하다와 어른스럽다라는 말이 자꾸 내 머리에 떠올랐다. 이 책이 시시하다거나 어른스럽다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이 책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일본작가의 책을 읽을 때와 한국작가의 책을 읽을 때 어른스럽다라는 단어가 좀 결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일본책에서 어른스럽다라던가 철이 들었다라는 것은 어느 정도 체념을 포함하고 있는 것같다. 그러니까 인생을 생각하면 장미빛을 상상하지말고 인생이란 좋은 일도 있지만 본래 나쁜 일 투성이라 실망하게 되어 있는 것이니 그런 점을 깨달아야 제대로된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어른스럽다란 이런 걸 안다는 뜻이다. 

 

술집 학교는 30대의 여성이 나이든 노인들이 자주 찾는 오래된 술집에서 만난 사람들을 하나하나 묘사하면서 전개되는 소설이다. 물론 손님중에는 4-50대의 사람도 있지만 오래된 가게이고 본래의 주인이 70대이다보니 아무래도 다들 은퇴직전이거나 70대의 노인이거나 하는 식으로 나이가 많다. 그리고 나이가 많으니 삶의 행복도 실패도 다 겪어본 그런 노장들이 오는 술집이다. 나는 어른스럽다를 일본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꼭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옳은 말이기 때문에 이런 일본작가의 책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거기에 젖어들어서 맞아 맞아 어른스럽게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지하고 빠져들 때가 많다. 사실 이런 책은 어느 정도 이런 공감을 통해 치유를 받을 목적으로 읽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그렇게 그 분위기에 빠져들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뭔가 이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예를 들어 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한국 드라마가 하나 있다. 바로 이선균 아이유가 주연한 나의 아저씨다. 이 드라마에서도 삶은 만만하지가 않다. 만만하기는 커녕 너무 처참해서 사람들을 눈물바다에 빠지게 하는 드라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말하는 어른스럽다는 것이 뭘까를 생각해 보면 앞에서 말한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른스럽다는 것은 분명 장미빛 환상에 젖지 않는 것이지만 동시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리고 책임을 진다는 말은 생활비를 번다는 뜻도 있지만 우울함과 상처에 지지말고 그걸 극복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가지는 것에도 있다.

 

일본의 어른스러움은 노인스럽다. 보수적인 어른스러움이다. 그러니까 꿈꾸는 것은 이미 어리다는 증거라는 식의 느낌이 들게 된다. 그런게 있더라도 그 꿈은 어찌보면 유럽여행같은 개인적이고 소시민적인 꿈이다. 나이 든 노인은 이미 해볼 것도 상당히 해봤고 이젠 도전없이 그저 조용히 살면서 생을 정리해 보고 싶을 뿐이다. 예를 들어 불타는 사랑에 빠져든다는 것은 왠지 일본식으로 말하자면 아직 어리다는 증거일 뿐이라는 느낌이 든다. 사랑이란 결국 욕정일 뿐이고 인간이란 완벽할 수 없다는 걸 모른다면 그건 당신이 아직 어리다는 증거야하고 잘난체 하면서 말해야 할 것같은 그런 느낌이다. 

 

그런데 한국의 어른스러움이란 어떤 의미로 현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현실이 너무 어려워서 나는 이제 꿈같은 것을 꾸지 않겠다거나 이상적인 사랑따위는 생각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호통을 치는 것같은 어른스러움이다. 그 어른스러움이란 그럼 세상일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았냐는 호통이며 그 호통은 결론적으로 그러니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호통이다. 현실은 진흙탕이라 좋은 세상은 절대 올 리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세상이 진흙탕이라고 한탄하고 변명하는 것도 어린애같은 짓이라는 것이다. 세상은 원래 힘들다. 그러니 일어나 행복을 위해, 꿈을 위해 싸우라는 것이다. 그게 인생을 책임지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적인 어른스러움이다. 

 

얼핏보면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분명히 서로 다른 이 어른스러움들은 모두 다 일정부분 옳은 이야기이고 그래서 어느 한쪽의 분위기에 빠져있으면 그게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그러다가 분위기를 바꿔서 생각하면 또 전혀 다른 것을 어른스러운 것으로 여기면서 살게 된다. 한국적인 어른스러움은 일본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신파고 감정적으로 사는 것이다. 세상을 단순하게 보는 사람은 어떤 흑백론에 빠져서 무모한 짓을 벌이고 결국 실패하게 된다. 우리는 보다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고 그렇게 감정적이 될게 아니라고 말하게 된다. 

 

반면에 일본의 어른스러움은 한국적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말할 때 현실도피에 가깝다. 일찌감치 이것저것 다 포기해 버리고 상처입지 않고 고생하지 않고 살려고 하는 것이다. 열정적인 사랑따위 믿지 않으면 실연의 아픔도 없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일찌감치 연애니 결혼이니 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잘난 척하면서 시니컬하게 말하는 것이 어른스러운 지혜일까? 그래서는 인생의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할 뿐이다. 그거야 말로 어린애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 

 

일찌기 화이트 헤드는 외국어 공부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외국어를 배워야 철학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서로 다른 언어를 통해 같은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보는 것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글도 어떤 드라마도 결국은 현실의 한쪽 편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감동적인 드라마도 다른 방향에서 보면 유치한 이야기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유치할 수 있고 완벽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물을 보는 다른 문맥들을 두루 기억하는 것이다. 일본의 어른스러움이나 한국의 어른스러움중의 어느 쪽을 좋아하고 어느 쪽을 비판하는게 아니라 어느 한 쪽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소설도 드라마도 그리고 사람도 어떻게 보면 다 시시하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다 기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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