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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한국문화

미국보다 민주적인 한국

by 격암(강국진) 2021. 6. 24.

연애를 할 때는 뭐든지 좋아보였던 남녀가 결혼하고 한 집에 살게 되자 사소해 보이는 차이때문에 싸운다는 이야기는 세상에 흔하다. 일단 두 사람의 생활이 크게 겹치게 되면 사소한 차이가 주는 스트레스가 심해지게 되고 사소해서 쉽게 고칠 수 있는 것같은 차이가 실은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어서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심히 고쳐야 바꿀 수 있는 것인 경우는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약속시간을 잘 지키는가 아닌가 같은 것이 그런 예다. 

 

국가간에도 비슷한 일은 일어난다. BTS나 블랙핑크 그리고 봉준호의 예가 잘 보여주듯이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한국 컨텐츠가 늘어가고 있다. 이는 좋은 일이지만 앞으로 한국과 미국 문화의 충돌도 생겨날 것이다. 언뜻보기에 미묘해 보이는 차이가 만드는 불편함이 점점 더 커지게 되고 그걸 어떻게 소화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를 것이다. 그 사소해 보이는 차이때문에 한류가 죽을 수도 있고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미국사람들이 한국에 더 많이 와서 한국을 지금보다 더 미국적으로 바꾸려고 할 수도 있다. 

 

한가지 단어나 측면으로 파악되는 문화적 차이는 제한적이지만 나는 작아보일 수 있는 차이들의 뒤에 있는 중요한 차이는 바로 미국과 한국의 민주주의 문화에 의해서 만들어 질거라고 생각한다.  다르게 말하면 한류의 근원적 힘은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새로운 패러다임이고 미국의 그것은 멀리는 미국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기원으로 하는 낡은 패러다임이라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냥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반드시 기존의 패러다임과 충돌한 끝에 나타나며 일단 자리를 잡으면 그것은 변화에 저항한다. 그렇지 않으면 패러다임이라는 개념 자체가 필요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민주화가 결정적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는 남북전쟁이나 87년 6월항쟁이나 촛불시위같은 거대한 사회적 충돌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충돌이 언제 있었는가가 중요하다. 똑같이 민주주의라고는 하지만 미국의 민주주의가 아주 옛날에 그 기본틀이 잡혀졌다면 그것은 어떤 모순이 내부적으로 누적되고 있다는 뜻일 수 있으며 그 모순이 무엇인가가 한국의 민주주의에 의해 폭로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낡아졌다는 미국 문화, 미국 민주주의는 뭘 말하는가? 미국인들은 독립과 자신감을 강조한다. 어떤 의미에서 미국 문화는 반사회적이다. 우리가 사는데 있어서 세상이 필수불가결한게 아니며 일단은 나라는 존재가 훨씬 더 강조된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한국의 민주주의보다 반세기에서 한세기 먼저 만들어 진 것이다. 인터넷도 없었고 티비도 모두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의 것이며 여성의 참정권도 제대로 없던 시절,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농사를 짓던 시절에 만들어 진 것이며 20세기 후반의 한국처럼 문맹률이 실질적으로 0이고 많은 사람들이 직장인이거나 도시의 자영업자이며 인구밀도도 높고 교육수준도 높았던 시절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그런 미국의 민주주의와 한국의 민주주의는 결이 상당히 다르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독립적이고 자유인 것을 강조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공동체를 더 강조한다. 이런 미국 문화가 내게 들려주는 메세지는 내게는 이렇게 들린다.

 

'너는 완벽해. 너는 고칠 것이 아무 것도 없어.'

 

여전히 이 메세지는 훌룡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적 상황을 생각하면 이 메세지는 이렇게도 들린다. 

 

'너는 한 인간으로 완벽해. 귀족출신이 아니라도 상관없어. 너의 사유재산은 지켜질꺼야.'

 

즉 한 인간으로 독립적이고 당당하게 서면 네가 귀족 출신이 아니라서 억양이 다르다거나 테이블 매너를 잘 모른다거나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산업발전이 점차로 깊어지면서 생기는 사회적 변화를 잘 반영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19세기의 미국에서 사회를 이끌었던 것은 이러니 저러니해도 결국 소수의 지식인들이었고 영웅이었다. 그들이 타고난 귀족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평범한 대중속의 한 사람일 수는 없었다. 미국의 민주주의란 이런 시대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마땅히 경의를 표해야 할 만한 것이지만 나름의 그늘이 있다. 그 문화는 근거없는 자신감에 넘치면서 겸손이 뭔지 모르는 트럼프같은 바보들을 양산한다. 나는 완벽하니까 바꿀 것이없고 자신감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언제나 악이니까 그렇다. 그리고 그들은 오히려 겸손하고 협동적인 사람들을 바보취급하곤한다. 이것은 뒤에 말하겠지만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망의 시대에는 매우 적합하지 않은 인간형이며 전체 집단을 위기로 끌고가는 광기를 만들어 내는 인간형이다. 

 

한국 문화가 들려주는 민주주의의 메세지는 비슷하면서도 결이 좀 다르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우린 잘 살 수 있을 거야.'

 

한국의 민주주의는 정보의 전파를 담당하는 미디어의 발전을 포함한 기술의 발전이 훨씬 더 많이 이룩된 시대에 자리를 잡은 것이며 양반 노비같은 사회적 구분은 이미 예전에 사라지고 없었던 시절에 자리잡은 것이다. 덕분에 사회는 훨씬 더 보통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시대였다.

 

한국과 미국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예는 총기소지다. 한국은 남자가 모두 병역의 의무를 지기에 성인남성의 대부분이 총기를 다뤄본 경험이 있는 나라다. 즉 총에 경험이 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자기 집에 총기소지를 하지 못하기에 정부가 나의 자위권을 빼앗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소수다. 치안은 경찰같은 공권력이 주로 담당하는 거라고 한국인은 믿는다. 그런데 미국은 엄청나게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반시민의 총기소유를 자위권의 문제로 생각해서 옹호한다. 내 집은 내 총으로 내가 지키겠다는 것이다. 이게 자유롭고 독립적인 미국이다. 그리고 21세기 현재 치안에 있어서 한국이 미국보다 안전하다는 것은, 즉 보통시민들이 더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기준에서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현실이다. 이게 미국의 민주주의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민주주의라고 쉽게 말하지만 그게 뭔지는 정확히 아무도 모른다. 그건 문화적 관습속에서 이해해야 하며 당연한 민주주의의 특징은 없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를 단순히 다수결 투표에 승복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다수파가 소수파의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투표로 이겼으니 모두가 승복해야 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마찬가지로 독립적이고 자신감있는 개인의 이미지는 사실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든다. 그건 마치 복잡한 계약서를 이해할 능력이 없는 나이든 노인이나 어린애에게 계약서에 사인할 것을 강요하고 그게 뭐든 너의 선택이니까 너보고 책임지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삶은 시스템과 게임속에서 펼쳐진다. 주먹싸움으로 승부를 겨뤄서 이기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미적분 시험을 봐서 이기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시공을 초월해서 절대적으로 옳은 판단기준은 없다. 민주주의는 그래서 문화적 배경속에서 시대적 환경속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많이 연결된 현대 사회의 문화적 현실이란 어떤 것인가? 우리는 그 차이를 보다 극적으로 느끼기 위해 한국의 민주화가 이뤄진 20세기 후반을 지나 아예 21세기 초반인 지금의 세상을 볼 수 있다. 세상은 19세기보다 훨씬 더 보통 사람들의 것이 되었다. 이걸 잘 보여주는 것이 유튜브다. 어린 아이나, 아무런 학벌과 자격증도 없는 사람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어떻게 말하면 결함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도 세상에 채널을 개설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중에는 성공한 사람들도 꽤 나오고 있다. 유튜버만 그런게 아니다. 컨텐츠도 그렇다. 수없이 많은 채널이 생기다보니까 우리는 수없이 많은 세상의 모습을 그 안에 담게 된다. 유튜버의 수는 당연히 방송국의 수보다 훨씬 많고, 유튜버의 컨텐츠는 보관되고 검색되어 무료로 제공된다. 이것은 과거와 크게 다르다. 예를 들어 어떤 케이블 채널에서 과거에 전주에 대한 어떤 내용을 녹화한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검색만 하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미디어의 발달이 정보적 민주화를 꾸준히 이뤄낸 결과가 이것이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기록하고 더 넓게 기록하며 그것을 누구나 보게 한다. 그것이 우리의 세계 인식을 다르게한다. 

 

우리는 기술적으로 인터넷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발명한 것은 미국이지만 그것을 가장 먼저 대중화시킨 것이 한국일뿐만 아니라 그것이 정치적 의미까지 가지게 된 것이 한국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류역사상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은 노무현이다. 김대중 정부가 인터넷 인프라를 보급하지 않았더라면 노풍과 노사모라는 현상이 일어날 수가 없었고 결국 인터넷의 힘에 의해 최초로 당선된 것은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인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페이스북이나 유튜브, 트위터보다도 더 이전의 시대였다. 이런 점에서 이미 한국의 민주주의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선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태생부터 낡은 언론들과 경쟁관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근혜 탄핵사건도 이미 일어난 일이기에 우리에게는 그저 역사의 일부로 보일 수 있지만 외국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세계가 주목하고 시끄러웠던 월가를 점령하라 사건같은 것을 보면 그저 몇천, 몇만명정도의 사람이 거리로 나온 사건이었다고 한다. 촛불혁명은 망이 지배하는 사회의 민주주의가 어떤 일을 해낼수 있는가를 보여준 인류역사상 초유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건 무혈혁명이었고 정치가들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들고 일어나 총성없이 정권을 바꾼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런데 초연결의 시대, 망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중요한 한가지 덕목이 있다. 그것은 과장하지 않고 솔직한 것이다. 내일 비가 올까 안 올까? 이걸 두 사람이 합심해서 결정을 내린다고 하자. 두 사람중의 하나가 나는 100% 비가 온다고 믿는다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의 의견이 100% 비가 오지 않는다가 아닌한 다른 사람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다. 비가 온다는 것을 100%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두 사람의 정보를 모아서 더 뛰어난 결론을 내기 위해서는 각자의 의견을 내는 것 이상으로 자신이 그걸 얼마나 확신하는가에 대해 솔직히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약 자신감에 넘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교육에 세뇌된 인간들만 설치면 망은 엉망이 된다. 우리나라에도 이명박 대통령이 뭐든지 내가 해봐서 안다면서 시스템을 무시하고 밀어부쳐서 나라가 엉망이 된 사례가 있다. 미국에서도 트럼프가 어떤 것이 망의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리더쉽인가를 잘 보여줬다. 촛불혁명속에서 과격파를 대중이 억압했듯이 집단지성이 발휘되려면 극단적으로 확신하는 메세지를 보내는 사람들을 망에서 고립시킬 필요가 있다. 그런데 바로 이들은 종종 미국식으로는 훌룡한 인간처럼 보이는 사람들이다. 

 

과거에 인기있었던 미국의 액션영화 다이하드를 보면 브루스 윌리스가 거의 혼자힘으로 세상을 구한다. 우리는 그런 영웅이 필요한게 아니다. 한국의 영웅은 택시운전사나 괴물에 나오는 송강호같은 보통 사람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겸손하라고 말하고, 자신이 한계가 있는 것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연대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말하는 것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우린 잘 살 수 있을 거야.'

 

크게 미국과 부딪히고 있는 것같지 않은 이 메세지는 만약 한류가 더 대단해 지면 미국 문화와 충돌할 것이다. BTS의 아미들이 더 대단해지면 미국의 주류 문화계에 변화를 촉구하게 될 것처럼 말이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나는 두 가지를 믿는다. 첫째로 한류의 힘은 민주주의에서 나온다. 둘째로 한국의 새로운 민주주의가 미래를 선두하는 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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